[2]주기도문에 대한 개괄적 이해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홀로코스트의 현장,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유태인들이 학살되어 죽어갈 때 그들이 울부짖은 질문은 이것이었다."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당신은 왜 이런 죄악에도 침묵하고 계십니까?."그러나 연합군이 이 수용소를 탈환하였을 때 이 수용소의 벽에는 다음과 같은 찬송가 가사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고통과 절망과 두려움과 살육의 현장에 '하나님의 사랑'이라니? 저주받은 지옥 아우슈비츠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있었는가?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또 다른 벽 한쪽에 이런 글귀가 선명하게 씌여져 있었다는 것이다."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here)."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곳을 하늘이라 할 때, 이 하늘은 땅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공간적 하늘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공간적 하늘에만 계시다면 하나님은 땅에 사는 우리의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초월적 절대 타자'로서 존엄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오직 거기에만' 존재할 뿐이다. '하늘'이라는 이 표현 때문에 종종 이런 오해가 초래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초월적 존재로만 인식하게 되고 초월은 거룩한 것이며 내재는 이에 대비되는 악이라는 이원론적 구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하늘에 대한 교회의 이런 타계주의적 생각은 몰트만이 간파한 바를 따라, 상호 순환하고 침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근거하여 볼 때,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자연과 우주와 인간에게 오시고 또한 유기적 관계를 맺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원론적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 지극히 이교적인 이해이다.그렇다면 '하늘'에 대한 바른 이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마디로 우리가 하나님을 일컬어 '하늘'에 계시다고 말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편재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다.주기도의 본문에서 {하늘에}라는 단어는 두 번 사용되었는데 한번은 단수로, 또 한번은 복수로 사용되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에서는 단수(ouvranw/| 우라노)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의 하늘은 일정한 지시적 장소에 가깝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이란 본 절의 표현은 복수(toi/j ouvranoi/j 토이스 우라노이스)로 쓰여졌는데 이는 편재를 의미한다.하나님은 우주와 자연과 세상에 그리고 공간적 의미에서의 땅과 하늘에 더 나아가 사람의 전인격에 계셔서 삶과 역사를 주관하시며, 경외의 대상이 된다. 인간은 누구도 하늘에 있지 못하다. 이 말은 인간은 공간을 초월해 편재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는 말이다.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에 이것은 '하늘'이라는 초자연성과 '아버지'라는 친밀성 즉, 초월과 내재, 두려움과 사랑의 지평융합을 고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시다고 말할 때 이 말은 하나님의 실존과 주권이 만물 가운데 있으며 만물에게 미침을 고백하는 것이다."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행 7:49)"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27)"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우리 아버지『미국의 어느 한적한 시골에 있는 농가에 취학통지서가 날아왔다.이 마을에서 학교를 가려면 들짐승들의 위협이 현저한 산길을 지나 한참을 걸어야 했다. 아버지는 두려움에 학교 가기를 주저하는 아들에게 안전한 보호를 약속하고 등교를 하게 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들은 용기를 내어 학교를 선택했다. 아들이 믿은 것은 오직 아버지의 약속뿐이었다.그렇게 산길을 걸어 등교하던 어느 날, 산길 굽이굽이 한참을 지나가던 중 그만 한마리의 큰 곰과 마주치게 되었다. 어마어마한 몸집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며 덤비는 집채만한 곰의 포효에 소년은 그만 발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소년은 이제 곧 죽게 될 것이 분명했다. 자기를 보호해 주시겠다던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윽고 곰의 커다란 앞발이 소년을 덮치려 높이 들렸다. 소년은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그때, 어디선가 '탕!'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총소리에 놀라 눈을 뜬 소년의 눈은 더욱 휘둥그레졌다. 자기를 해치려 달려오던 그 곰이 그만 자기 앞에 엎어져 죽어있었기 때문이었다.먼발치 숲 속에서 급히 뛰어 오는 사람의 기척이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가 사냥용 총을 들고 숨가쁘게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한번도 아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단지 남자답게 커 가는 아들의 모습을 위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독립심을 아들에게 길러주려 아들이 모르도록 숨어서 지켜왔던 것이다.』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막 14:36을 보면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하나님을 "압바 아버지(Abba oJ pathvr)"라고 부르셨다. 여기서 사용된 '압바'(Abba)라는 단어는 아람어에서 기원한 호격(呼格)으로서 어린아이와 가정의 언어이다. 이는 또한 성인들도 그들의 아버지나 노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표할 때 사용하는 애칭이기도 하다. 이처럼 익숙하고 평범한 표현을 하나님에 대해 사용한다는 것은 예수 이전에는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압바"라는 표현이 "친밀함"의 표현이라 할 때, 이 친밀함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의식하게 한다. 지금 여기에 있으며 또한 다가오고 있는 이 나라는 결단에 의해 완성된다. 이 결단은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압바"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백하는 자의 아버지이다.기도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① 철학자는 "나는 내 양심에 대해 기도한다"(소크라테스)고 말한다.② 퀘이커교도는 광명에 기도한다.③ 범신론자들에겐 '인간이 곧 하나님이며, 자연이 곧 하나님'이다.④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에 기울어진 이들의 숭배와 기도대상은 정령(精靈)이며 그들의 사제인 무당은 그 귀신에게 기도한다.⑤ 아덴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절한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17:23)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한다.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Pa,ter 파테르)라고 부를 때 이 말은 우리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다. 창1:27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렇게 창조된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기에 사람은 '생령'이 되었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 곧 그 아들의 영(靈 : pneu'ma 프뉴마)이 그 속에 있는 사람은 그 속에 있는 생명의 근원 곧 아버지 숨결 곧 성령에 힘입어 하나님을 '압바 바로 그 아버지'(Abba oJ pathvr)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이 외에도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우리의 자녀 됨을 확인할 수 있는데 몇 곳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요1:12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롬8:15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7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갈4:4-5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바울 사도는 롬 8:15-16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하였으며, 갈 4:6에서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였다.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하나님의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도는 성령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어린아이가 되어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 분의 뜨락에서 그 분과의 사귐을 누리는 것이다.그런데 우리가 주기도의 이 절에서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라는 표현이다.사63:16은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공동체 즉, 이스라엘의 아버지임을 고백하고 있다.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는 말이다.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얻는다. 한국교회는 지금껏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라는 동전의 두 면을 각기 하나씩만 붙잡고 서로를 인정치 않으며 한편으로 치우쳐 왔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우리'라는 표현을 통하여 공동체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다.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이뤄진 사랑의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 공동체 안에서의 삶이 공동체의 고백으로 드려질 때 진정한 사랑의 가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형제를 돌보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 말은 나와 너, 혹은 개인과 전체가 사랑이란 묘약으로 유기적 관계를 맺음으로 하나님 사랑의 절정에 이른다는 뜻이다.엔드류 머레이는 '주위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효과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주기도문에서 '우리'라는 단어를 여섯 번씩이나 언급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주기도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얻어 부르심을 입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 즉 교회론의 기초 위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교회의 기도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겠다.  

생각을 여는 질문

1. 지금까지 지나 온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느낀 적이 있다면 언제, 왜 그렇게 느꼈습니까? 

2. 당신은 지금 당신의 삶의 어느 영역에서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이 필요합니까?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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