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구원의 확실성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III.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성경적 견해

 

  그렇다면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무엇인가? 이 구원의 확실성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원의 확실성을 우리는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성적인 방법으로 과학을 연구하듯이 증명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라든지, 영혼의 불멸이라든지 또는 예수님의 대속이나 부활 같은 것들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것들을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기독교를 비판하는 자들에 대항하는 무기를 제공하기는 합니다. 그리고 이미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적, 학문적인 증명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확증하는 데는 불충분합니다. 그런 것들은 사실의 바깥 부분만 건드리고 본질과 핵심은 손대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그럴 듯함’, ‘그럴 수도 있음’으로 인도하나 참된, 확고부동한 확신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정 또는 체험에 의한 방법도 충분치 못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감정에 의한 방법은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대부분의 내용들은 체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창조를 체험하지 못했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도 체험할 수 없으며, 또한 예수님의 성육신도 체험할 수 없으며, 십자가의 고난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여기(nunc et hic)’ 있는 것들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체험(ervaring)’이란 것을 이런 감각기관을 통한 ‘인지(認知, waarneming)’가 아니라 신앙생활 가운데 가지게 되는 ‘반응(bevinding)’이란 뜻으로 이해한다 할지라도(예를 들어서 죄의식이나 죄로 인한 갈등이라든가 양심의 고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구원에의 갈구,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의 평안,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영혼의 기쁨 등), 이런 것들은 먼저 믿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믿음 후에 따르는 것이지 결코 믿음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가 구주임을 믿지 않는 사람이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없으며,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이 주 안에서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자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히 11:6).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얻는 올바른 방법은 ‘믿음’에 의한 방법입니다. 믿음이란 나의 바깥에서 오는 진리들을 어린아이처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곧 그대로 수용(受容)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믿음은 항상 ‘앎’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앎’은 직접적으로 아는 것도 아니요, 자신의 연구에 의해 아는 것도 아니요, 추리나 증명을 통해 아는 것도 아니요, 감각이나 경험을 통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앎이란 신뢰할 수 있는 증거들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해 준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증거해 주신 것, 그리고 사도들이 증거해 준, 이런 신뢰할 수 있는 증거들을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들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증거들이 있어도,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도무지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펴서 읽으면 잠부터 온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성경의 증거를 읽고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읽기는 읽어도 성령의 감동감화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의 증거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 곧 성령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도록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십자가의 도를 깨달을 수도 없고 그것이 도리어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미련한 것으로 배척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십자가의 도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될 때에, 그것은 곧 신뢰를 불러일으키고 또 여러 가지 체험들과 반응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들과 반응들은 믿음 후에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그 후에 거기에 대한 감정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주의자들은 이 순서를 도치(倒置)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 순서를 바꾸어서 감정을 먼저 내세웠습니다. 그들은 감정을 통해서 믿음에 이르려 하였는데, 이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객관적이고 확고한 기초인데, 비유하자면 바위와 같습니다. 이런 바위와 같은 확고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유동적이고 변하고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올바른 믿음은 그 성격상 항상 확실성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믿음은 그 자체로서 이 ‘확실성,’ ‘확신’을 수반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확신이라는 것은 믿음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것이고 믿음의 본질적인 속성이 곧 확실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의심에 빠집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믿음이 좋은 사람인데도 종종 의심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의심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의심은 따지자면 옛 사람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옛 사람에게서 이 의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에는 온갖 의심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우리 마음에 확신이 찾아 들게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구리 놋뱀을 쳐다보았을 때에 그들이 나음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 곧 복음을 그대로 믿을 때에 우리의 마음에 평안과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모든 의심을 초월하는 그런 확신이 우리 마음 가운데 찾아 들게 됩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 하나님의 약속에다 선행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경건주의에서는 이 하나님의 약속에다가 감정이나 체험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하나님의 약속에 아무런 다른 조건도 붙이지 않습니다. 오직 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 살아있는 믿음은 항상 선행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선행의 열매가 맺혀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곧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열매들을 보고서 믿음의 진실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들에서 참된 믿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만약 믿음이 선행(先行)되지 않는다면 참된 선행(善行)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선행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참된 선행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심에서 행하고, 불안해하면서 행하고, 두려움에서 행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이러한 두려움에서 그들은 선을 행합니다. 이런 두려움에서 나오는 선행은 참된 선행,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행이라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더라도 종으로서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기쁨으로 섬기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한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을지 몰라 두려워서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확신을 가지고 기쁨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 16절에 있는 대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자유한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종은 두려움으로 주인을 섬기고 또 보수를 바라고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감사함으로 아버지를 섬기게 되는데, 바로 이러할 때에 진정한 자유가 있게 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믿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기 위하여 믿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얻기 위해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서부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실성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확실성에 감사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확실성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믿음으로 받아들일 대에 얻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이제 담대히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곧 우리 것이다”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좇아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의미를 느끼고 일할 보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무장되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하러 나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단지 전도하고 기도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골방은 집의 한 부분이지 집 전체는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집은 기도하는 골방보다는 훨씬 더 넓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수시로 힘을 얻게 해 주는 골방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구원의 길만이 아니라 또한 세상을 이긴 이김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의 성전에서 제사장이며 또한 온 땅의 왕으로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길에서 자라는 꽃들을 사랑하며 하늘의 별들을 보며 감탄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술을 멸시하지 아니하고 학문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바라고 일하지 아니하며, 보수를 바라고 노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손이 행할 것을 발견하는 것을 행하며, 우리의 미래는 알지 못하나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선행을 행하되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기도 전에 행하고, 열매를 맺되 우리가 그 사실을 알기 전에 맺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의식중에 아름다운 향기를 양 사방으로 퍼뜨리는 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모든 선을 위해서 무장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처럼 큰 구원을 은혜로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행하며, 우리가 받은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이런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날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세상 사람들에겐 비밀이며, 우리가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구원,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기쁨으로 이루어 갑니다. 우리의 일 가운데 노래가 있고, 우리의 생활 속에 찬송이 끊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서 담대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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