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예수님과 멜기세덱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VI. 멜기세덱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

 

여기서 우리가 멜기세덱에 관한 예수님의 자의식을 다시 한 번 더 세밀히 검토하고자 하는 이유가 있다. Geerhardus Vos가 그의 저서 「예수와 자기계시」의 제 1장에서도 주장하듯이 예수님의 자의식이 기독교의 진리가 왜곡되어 현대 자유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을 막아준다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전략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메세지가 왜곡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더욱 풍성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 동안 과연 히브리서 저자의 주장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의 직임을 의식하셨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히브리서 저자의 논리는 왜곡된 억지 논리임이 판명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 예수와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와의 깊고 깊은 심연을 초래하여 결국 기독교의 메세지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의 케리그마가 역사적 예수의 자의식에 포함되어 있다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사실 성경 상에서는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을 직접 인용하신 부분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멜기세덱을 전혀 모르셨다 거나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마가복음 12:35--37에서 예수님께서 시편 110 편을 인용하신 것은 분명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을 염두에 계셨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마가복음 14:62에서 대제사장의 심문 시 대답하신 것에도 나타난다. 막 12:37에서의 예수님의 질문이 막 14:62에 가서 대답된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는냐?”(Mk.12:37)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Mk.14:62)

 

막 14:62의 예수님의 대답은 시편 110 편의 메시야 개념과 다니엘 7 장의 인자로서의 메시야 개념을 조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은 분명히 시편 110 편을 근거로 하고 있다.

 

시편 110 편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 원수들 보다 뛰어나게 승귀되어 하나님의 오른 편의 자리에 앉아 영원한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담당할 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제사장-왕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을 것이다. 반면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단 7:13ff.에서의 인자는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즉,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중재하는 대리자로서의 인자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의 이러한 의도적인 결합은 다윗의 아들로서의 메시야 개념을 제사장-왕으로 승귀 된 ‘그 인자’로서의 메시야 개념으로 교정시켜주시는 의도가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메시야 개념의 변환 내지 교정 작업은 예수님의 전 생애에 걸친 가르침에 있어서 핵심적이며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을 결정한다. 즉, 오실 메시야는 다윗의 아들뿐만 아니라 다윗의 주이다. 다윗이 부른 그 주는 하나님 나라에서 심판과 통치를 수행할 제사장-왕으로서의 인자이시다. 그 인자는 신적인 존재이며 영원한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을 하나님 우편에서 수행할 것이다.

 

시 110 편에서 주로서 우편에 앉는 것은 제사장-왕의 즉위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편’에 앉는 것은 왕적 권위만이 아니라 왕적 권위로서 영원한 제사장의 기능을 하나님 앞에서 수행함을 뜻한다. 결국 예수님께서 시 110 편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셨는가를 알 수 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왕으로 이해하셨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바랐던(요.12:34) 그 메시야가 진정한 대제사장직의 직임을 성취해야 한다는 관념을 자신의 전 사역에 걸쳐서 깊이 소유하고 계셨다.

 

예수님이 생각한 그 제사장 직임은 멜기세덱적인 직무, 즉, 당시 레위계열의 제사장 직임과 같이 온전함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반복적인 제사와 같은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으로 온전함에 이르고 다시 반복할 수 없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선택하셨다.

 

이러한 희생적 사역은 이사야 53장의 종의 노래에서 두드러진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자신을 제사장-왕으로 이해하신 것은 마가복음 14장에서 대제사장 앞에서 취하신 예수님의 태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것은 자신의 메시야권이 지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예수님의 성전 청결과 강화에서도 또한 분명해진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행동하시고 말씀하신 것은 거의 지상 성전과 지상 제사장직을 정면으로 공격하신 것과 다름없다.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지상 제사장직보다 훨씬 뛰어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적 메시야로 이해하셨다는 것에 의해서만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이상적인 제사장-왕의 개념을 적용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는 아론의 반차보다 더 나은 새로운 반차로서 새 성전을 건축하고(삼하. 7:12ff.참조) 아론의 반차에서 시행되는 제사보다 더 온전한 제사를 드리려고 이 땅에 오셨다. 그러기에 이제 지나간 옛 언약 하에서의 온전케 하지 못하는 제사장직과 건물로서의 성전은 더 이상 그에게 합당치 못하다.

 

따라서 옛 언약의 모든 것--성전, 율법, 제사장직 등--은 개혁되어져야 했다(히 .9:10).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종말의 대제사장왕은 새 언약--새 성전, 새 율법, 새 제사장직--을 자기 안에 성취하였다. (렘 .31:31--34 참조.) 새 언약의 도래는 필연적으로 옛 언약에 속한 모든 것이 변역될 것을 요구한다. 옛 제도들은 새 언약 하에서는 그 기능상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제의에 관련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들은 이러한 이해 위에서만 설명되어질 수 있다.

 

요컨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에 있어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왕으로서의 이해가 항상 그 저변에 놓여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의 멜기세덱에 관한 모형론적 논증은 전혀 저자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의 자기 이해와 그 계시에 근거한 사역을 강화체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원리는 바울 서신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VII. 멜기세덱 반차의 구속사적 의미

 

그러면 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되신 예수님의 사역은 어떠한 것이며 아론의 반차와 어떻게 다른 결과를 낳았는가? 한 마디로 더 좋은 언약 보증이 되신 것이다. 여기서 더 나은 언약이란 새 언약을 의미한다. 새 언약이란 옛 언약의 모든 요소들을 갱신한 것이다. 새 언약과 옛 언약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포함한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이 본질적으로 요구하는 그러나 옛 언약이 도달하지 못한 모든 목표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성취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예수님은 새 언약의 보증이 되신 것이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의 연속성 속에 세 가지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새 성전, 새 율법, 새 직분.

 

A. 새 성전

 

새 언약이 도래하였으므로 옛 성전 역시 변역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고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기 위한 언약적 희생으로 보셨다. 그것은 성전의 의미와 목적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그것은 새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이해와 밀접하게 연관되는데 삼하 7:!2ff.의 나단의 예언에 근거하고 있다.

 

삼하 7:12절에서는 다윗 집에서 하나님의 아들0이라 일컬어지는 자가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을 것이라 예언되어 있다. 예수님은 바로 자신의 대속의 죽음으로 ‘그 집’을 일으키셨다. 그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곧 하나님 나라이다. 그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그 백성들에게 중재하고 계신다.

 

B. 새 율법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이 변역되어야 함을 말한다.(히.7:12ff.) 왜냐하면 율법은 제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새롭고 더 나은 제사를 드렸으면 엤 언약 하의 율법도 무효한 것이다.(히 7:18) 그리스도의 더 나은 제사로 말미암아 옛 언약 하의 율법과 같지 않은 즉, 돌비에 새긴 법이 아니라 새 언약 하에서의 법이 이제는 마음에 새겨지게 되었다.(렘 31:31--34) 구약의 율법이 그 효과 면에서 연약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러나 율법의 목적은 그 자체가 폐하여진 것이 아니다. 율법이 주어진 그 본래의 선한 의도가 온전히 성취되는 것으로서 새 율법을 말한다. 엄밀히 말해서 율법은 하나뿐이다.(연속성) 그러나 율법의 수행을 가능케 하는 그릇은 다른 것이다.(불연속성)

 

C. 새 직분

 

그리스도께서 아론의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셨다면 아론의 반차는 폐지된 것을 의미한다. 즉, 아론 계열의 제사장직으로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 새 언약의 도래 앞에 이제 무능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 것이 이르게 되자 옛 것은 이제 뒤로 물러가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이 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 아론의 반차를 통하여서는 가능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으신 반차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먼저 앞서가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벧전 2:5--9)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VIII. 끝맺는 말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아론의 반차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반차에 속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논증을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예레미야 31장에 예언된 새 언약의 성취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새 언약은 새로운 반차의 도래로 말미암아 보증된 것이다. 옛 언약과 옛 질서는 그 도래를 끊임없이 기다려 왔다. 그러한 구속사적 개혁을 다윗이 먼저 노래하였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논증한다.

 

또한 저자는 그 개혁자의 모습을 고대 한 제사장-왕이었던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멜기세덱이라는 모델이 지향하는 참 개혁자 의식을 예수님께서 먼저 깊이 인식하고 계셨다. 우리는 그분이 가져오신 새로운 언약 질서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히브리서 7장의 멜기세덱 논증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구약에서부터 멜기세덱이 지향하는 인물을 기다려왔던 것이 예수님 안에 구체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대속적인 사역으로 실제화된 것을 히브리서 저자가 당시 독자들의 상황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의 믿음은 초대 공동체의 독창적인 산물이 결코 아니며 하나님의 구속 경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선포와 사역에 있어 기본적인 맥락을 형성하는 것이다.

 

▲김광락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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