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의 배경사
성산지기제 1 부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교 제 1 장 헬라주의 시대에 있어서 유대교의 정치사 1. 페르샤 지배하의 팔레스틴유대교의 역사는 바벨론 유배시대 부터 시작된다. 페르샤는 대대적인 이주를 강요하거나 어디에서나 단 하나의 국가 종교만을 신봉하도록 요구 하지 않았다. 페르샤정부는 직무상의 거래를 위하여 그들 자신의 거래가 아니라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널리 사용되고 있던 아람어를 사용 하였다. 5세기에 바벨론에 살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유대인 공동체를 건설 하자는 강한 충동이 일어 났다.느헤미아와 에스라에 의하여 다른 민족 들과의 어떠한 결합도 용납 되지 않도록되었던 예루살렘 공동체는 그들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 하였으며 그들과는 어떠한교역이나 거래도 하지 않았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사마리아인들이 알렉산더대왕의 치하에서 비로서 가라짐에 성전을 건설하도록 재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아마도 그들의 성소 건축은 그 이전에 이루어진 같다.예수의 시대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교제 하지 않았다. 원시 공동체는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생겨난 분열을 극복 하였으며 복음을 사마리아에 전파하였다.2. 알렉산더 대왕과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는 팔레스틴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샤의 왕 다리우스 3세를 격파 하였으며 이 승리로 인하여 시리아와 팔레스틴을 거쳐 이집트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유대인 공동체가 누리던 권리의 상황에 대한 지배권의 변화에 따라서 외적인 변화는 전혀 일어 나지 않았지만온 나라 안에 희랍인들이 들어 오게 됨에 따라 그들 내부의 생활은 깊은 영향을 받았다.언어와 더불어 헬라주의 문명이 또한 이 땅에 들어 왔다. 산헤드린에서는 예루살렘의 영향력 있는 가문의 우두머리들인 사제들과 장로들이 대제사장을 지지하엿다.대제사장의 사회로 유대 민중들이 처한 모든 세상적인 용무와 종교적인 용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회합한 이 유대인 최고 관청 을 의미 하는 것이다.3. 시리아 지배하에 잇는 팔레스틴과 막카베어 독립전쟁 대제사장은 유대 사회의 지도자로서 시리아 왕의 법률과 명령이 철저히 시행 하도록 노력 하였다. 대제사장의 직위는 매매 할 수 있는 정치의 대상이 되어 버렷다. 기원전 169년 안티오쿠스가 전쟁으로 바닥난 국고를 충당하기 위하여 예루삿렘성전을 강탈 하였을때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앙공동체가 아무런저항없이 선조들의 신앙을 버릴 수는 없어싸. 다니엘서는 이러한 곤궁에 빠진 공동체에 대하여 위로 하는 말로 쓰여 졌다. 여기에는 박해와 고난이 하나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곧 종말이 와야 하는 마지막 대의 표징으로 이해 되었다.막카베어는 망치와 같은자를 뜻하는 듯 하다. 기원전 164년 12월 25일에 제단이새롭게 봉헌되고 일주일 동안에 축제로서 율법에 합당하게 예배가 다시 드려 졌다.막카베어의 성과에 많은 유대인들이 만족해 했다. 그의 동생 요나단이 후계자가 되어 사령관과 우두머리 일뿐 아니라 대제사장이기도 했다. 이제 예루살렘은 이방 지배로 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시몬은 쨡으로도 독립을 얻을 수 가 있었다. 기원전 140년에 국민들에 의하여 하스모네어 왕조가 세워 졌다.4. 하스모네어 왕국 아버지가 죽고 난후 아들인 아리스토불이 권력을 장악 하였다. 죽고 새로운 지배자 얀네우스는 800명의 폭도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 한 후 십자가에 메달아 죽엿다고 한다. 이는 임종 하면서 그의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리아 에게 바리새인과 다시 화해 하도록 충고 햇다고 한다. 기원전 67년 그녀가 죽고 합법적인 아들히르칸 2세가 법에 따라서 왕위를 이어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블2세 가 왕위를 놓고 그와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아랍 제국의 운명과 팔레스탄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로마의 월등한 세력이 뛰어 들었다.5. 로마 지배하의 팔레스틴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에 들어 갔으며 또한 지성소를 실제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지성소에서 아무것도 탈취하지 않았으며 곧 다시 예배를 드릴수 있게 명하였다. 방해 받지않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유가 성전 공동체 뿐 만아니라 제국내에 있는 회당 공동체에도 보장 되어 있었다. 헤로데스는 로마의 지지아래 권력을 다시 잡은 것처럼 로마의 도움으로 지위를 확고하게 하는데 성공 琴다. 그는 교활하고 잔인 하였으나 과감한 결단을 하고 단호이 행동하는 대담하고재치있는 사람 이었다. 디아스포라에게도 헤로데스는 유대교의 보호자로 등장 했으며 회당 공동체의 독립적인 생활을 장려 하였다. 소위 통곡의 벽이라는 건물이 헤로데스 시대의 성전 건물로 남아 있고 안토니아 성의 기초가 아직도 남아 있다.예수 시대에는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총독으로 있었다 (기원26-36). 알렉 산드리아의 필로는 그의 직무 수행은 뇌물,폭력,약탈,불법,무레,제판없는 사형집행,지속적인 잔학,으로 이루어 졌다고 보도 하고 있다. 헤로대스는 그의 이복동생의 아내헤로다아스로 부터 살로메가 태어났다.세례요한은 영주의 불의를 적나라 하게 밝혔기 때문에 체포 되었으며 헤로디아스의 포악한 적대감으로 박대를 계속 받다가 결국 처형 되었다. 헤로데스 안티파스는 예수가 살았던 지역의 영주였다.그러나 예수는 그를 여우라고 불렀으며 예루살렘으로 갔다.필립푸스는 로마황제의 초상화를 새긴 화폐를 주조 하게 하였던 첫번째 유대인 군주였다.아그랍파는 로마에 체제하면서 칼라굴라 는 기원37년 그에게 필립프스가 다스리던 지역을 주었다.헤로데스 아그립바는 바리새인들을 위하여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를 박해하고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 하였으며 베드로를 체포 하였다. 기원 52년 부터 펠릭스가 총독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으로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호의를얻어 이러한 높은 지위에 올랐다.6.유대 전쟁과 바르 코흐바의 폭동 안토니아성이 점령되어 이제 온 도시가 유대인들의 손에 들어 왔다. 네로 황제는그의 가장 뛰어난 용장 베스파시안 을 유대인들과의 전쟁을 지휘 하도록 파견 하였다. 요세푸스는 그의 주민들과 함께 요타파타에서 항쟁을 하였으나 고수 할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도성을 둘러싼 세 성벽 주변을 모두 돌파 하여 방어자들의 격노한 항거를 곧장 밀어 버렸다. 성전은 최후의 전투에서 불타 버렸다. 티투스는 지성소가 파괴 되기 이전에 지성소에 침입 할 수 있었다. 성전과 도성이 파괴 됨으로서유대교는 가시적인 중심점을 상실 하였다. 기원 73년 아마도 74년 초일 수도 있다.마사다가 함락 됨으로 쵤후의 항거는 분쇄 되었다.기원 2세기에 팔레스틴의 유대교는 한번 더 로마의 멍에 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하엿다. 하드리안 황제대에 통치하에서 유대인들은 갑작스런 봉기가 일어 났다. 또한 예루살렘의 성전터에 쥬피터 성전을 세우도록 명령 하였다. 바르코흐바가 메시아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체포 되엇으며냱 많은 사람들이 처형 되었다.그러나 요새는 로마인들에 의하여 점령되고 바르코흐바는 전투에서 사망 하엿다.아로써 그가 메시아라는 전설은 사라 퉢다. 기원 4세기에 와서야 그들에게 슬픔의날에는 도성에 들어가서 헤로데스의 성전 가운데 남아있는 벽에서 통곡의 기도를할 수 있도록 허용 되었다.제2장 신약성서 시대에 유대교 안에 있었던 종교 운동과 정신적 조류 1.묵시문학1) 묵시 문학의 기본구조 수많은 흥망성쇠, 전쟁, 재난들로 점철되어 있는 역사의 과정 속에서 유대교도들은 언제 하나님이 그의 약속들을 실현 시킬 것인가 하는 질문을 점점 더 긴박한물음으로 생각 하게 되었다. 기원전 2세기 초에는 기원후 2세기 초까지의 시대에생겨난 묵시 문학에는 이러한 대망이 중심적인 주제가 되어 있다.묵시문학은 역사의 흐름이 좋게 변화 되는 것을 기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무서운 경악 속에서 종말이 오는 것으로 생각 하고 있다. 왜 이세상이 멸망으로 타락 했는가 하는 문제가 묵시 문학가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 버렸다. 고난으로 가득찬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이 형벌 하시는 행위를 우리는 알고 있다. 개별적인 문헌안에 있는 표상들과 진술들의 다양성에도 불고 하고 도처에서 알게 되는 묵시 문학의 기본 구조는 이원론을 통해서 결정 된다. 즉 이세상이 지나가고 저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묵시문학은 구약성서 전통을 충분히 담고 있으며 종말을 향한 희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 되었다. 특히 유배 이후에 생긴 예언 문헌에는 심판과 구원, 새 하늘과새 땅을 자주 중요한 문제로 되어 있다. 묵시 뭄학가들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유산으로서 이해되는 이러한 사상에 관계를 맺는다.2) 묵시 문학의 저작물 묵시 문학에서는 근본적인 해석을 알아야 하는 형상과 비유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주고 있다. 묵시 문학서들의 서술에 의하면 그러한 환각의 가치가 인정되는구약성서의 경건한 사람들은 그들의 문헌들을 덥어 봉인을 했다. 가장 오래된 묵시적 문학은 다니엘의 이름으로 전해 퉢다. 에녹의 이름으로 두구꼌의 이름이 전해지는데 한권은 이디오피아 말로 ,다른 한권은 슬라브 말로 전해진다. 이 책은 창조에서부터 멀지 않은 심판의 위험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성실과 뢧까지 버티는 인내를 호소함으로 뢧난다.에스라의 이름으로도 묵시 문학적 문헌이 기록 되어 있다. 그것은 왜 예루살렘이포기 되어되었고 멸망 되었느냐고 하는 고통 스러운 물음에 대답을 하고 싶어 한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초까지 시대에 생긴 많은 유대교 문헌들 안에는 묵시적 문학자료 들이 사용 된 짧고 긴 단편들이 발견 된다.12족장의 유언장에는 교훈적이고 권면 하는 부분들이 묵시 문학적 내용 으로 된 단편 들과 함께 결합되어 있다.마지막으로 쿰란 공동체의 신앙과 사유가 지나 칠 정도로 묵시 문학적인 표상 에서형성 되었다. 이들은 올바른 율법의 이해를 묻고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 려고 노력하면서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에 유대교 안에서 형성 되었다.2.팔레스틴 유대교 안에 있던 집단들과 유대교들1)사두개파 사람들 사두개파 사람들의 표시는 분명히 사독이라는 관련 지을 수 있는데 그는 예전에솔로몬 왕 밑에서 대제사장으로 임명 되었다. 시리아왕 안티오 쿠스 4세가 지배하는 혼란 속에서 옛날 제사장의 사독 왕조는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았었다.사두개파 사람들은 안식일이 아주 신중하게 준수 되어야 하고 사람들이 안식일 계명을 악화 시키거나 거스리기 위해서 머리를 짜내어 생각 해낸 결의법을 통하여 이런 혹은저런 길을 찾으려고 노력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엄격하게 생각 하였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이미 하스모네어 집안 밑에서 분명히 하였던 정치적인 신중성과 재치잇는 행동은 헤레데스와 로마 총독들 밑에서 예루살렘에서 명망잇는 관직에 취임할 수 잇게 해 주었다.2)바리새파 사람들 바리새파 사람이란 이름은 히브리어 페르쉼 내지는 아람어 페리솨이아, 즉 구별된 사람이라는 말에서 퀮놞래 되었다. 바리새파 운동의 시작은 유대인의 신앙을 헬라주의적 외세의 현저한 증대에 대항하여 지키려고 琴던 막카베어 시대로 거슬러올라 간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혹고한 공동체로 연합 하였으며 율법의 계명을 정확하게 준수 할 수 잇엇다. 바리새적인잸 공동체에는 개개의 사제들, 특히 평신도들,수공업자들,농인들,상인들에 속해 있었는데 그들은 도시 에서 뿐만아니라 시골에서유대와 갈릴리에서 살앗다. 그들은 공동식사에 모였다. 율법을 알지도 못쏛하고 따르지도 않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구별 하엿으며 그들과의 교제를 피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생활과 행동은 참된 이스라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일에 집중 되었다.바리새파 사람들의 그들의 생활에 다가오는 메시아 시대를 戟하게 하고 율법이 요구 하는 의를 성취 하도록 노력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않았다고 생각 했다.3) 혁명당원들 혁명당원들은 로마 황제의 지배에 복종하고 그를 주라고 부르기를 거부 하였다.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 처럼 미래의 전환기를 참고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잇지 않았다. 로마인들에게는 혁명당원들이 도둑과 노상 강도 들이 었다. 왜냐하면 그들은율법에 대하여 정열을 가지고 나타냈기 때문이었다.4)엣세네파 사람들 엣세네파 사람들은 사두개파나 바리새파보다 더 물러난 생활을 했붹 독자적인유대인의 운동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아람어 하사야, 즉 "경건한 사람들"에서 기원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바리새파와 같은 생활권에서 생겨났다. 그들은 공동체생활을 하였고 회원들은 독신생활을 하였으나 종족보존의 목적으로 결혼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절대적 계명은 전체 공동체와 그 회원들의 의식적인 정결을 지키는것이었다. 장로 폴리니우스에 의하면 엣세네파 사람들은 사해 바닷가에 공동체중심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의 핍박 가운데도 율법을 끝까지 성실하게 지켰다. 그들은 인간의 불멸하는 영혼은 하늘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으나 인간 몸은 영혼의 육신적인 감옥이라고 믿고 있었다. 전쟁의 고통과 공포 속에 엣세네파 공동체도 몰락하고 말았다.5)테라페우테스 교단 테라페우스 교단은 마레오트 호숫가에 기도원같은 거주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명상적인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들은 매일 성서를 연구하고 안식일에만 공동예배를드렸다. 이집트의 디아스포라에서 독립적으로 발전된 엣세네파 운동의 지엽으로 볼수 있6)쿰란 공동체 (1)쿰란 텍스트에 관한 개관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유대 사본의 발견사는 1947년에 유대 사막에서살고 있던 아라비아 사람들이 많은 질그릇 항아리들 안에 두루마리가 담겨져 있는동굴을 발견했을 때로부터 시작된다. 사해 해변가에 히르벨 쿰란이란 장소가 있는데 이 곳에서 유대인의 공동체 거주지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두루마리를 보관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항아리에 넣어두었으나 전쟁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고고학적인 판단을 통하여 이 때 발견된 사본들이 완성된 시대를 정확하게구분할 수 있게 되었는 데 기원전 23세기 중엽에서 기원후 68년까지 그 공동체는쿰란안에 살았다. 쿰란 동굴안에서 발견된 사본들과 단편 가운데 많은 성서 본문과유대적인 텍스트들이 있다. (2) 쿰란공동체의 신앙과 교리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규정들이 매일매일의 생활 조건들에 조화를 이루도록율법을 해석하려고 노력한 반면에 쿰란 공동체에 있어서는 율법에 대한 어떠한 타협과 완화도 있을 수 없었다. 다만 모든 율법을 준수하고 토라의 모든 요구를 실행하는 것만이 가할 뿐이었다. 이 공동체는 사제들에 의해 지도되었고 사제적 정결을위해 언제나 쇄신을 하였다. 재산은 공동의 소유였으며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부정을 막기 위하여 결혼을 포기하였다. (3) 쿰란 텍스트와 신약 성서 신약성서에는 쿰란공동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비록 이들이 격리된 생활을 하긴 하지만 경건함과 교리의 모범은 유대교안으로 넓게 유포, 수용되었다. 그러므로 쿰란 공동체의 신앙과 교리가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활과 유사성이있음은 별로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쿰란 공동체의 사상을 수용하기도하고 거부하기도 하였다. 신약성서안의 많은 부분들이 쿰란공동체의 사상을내포하고 있다.7)율법학자들 율법학자들의 기원은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재사장의 임무였다. 포로시대 이후의 유대교를 율법위에 확고하게 세워 놓은 에스라는 제사장이며 서기관이었다. 율법학자들의 지위가 발전된 것은 헬라주의와의 만남과 대결에서 온 결과였다. 헬라 정신의 강력한 영향에 대하여 독자적인 교훈을 율법 속에서 찾으려는 정신적인 도구와 방법을 사용해야만 했기때문에 문답식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희랍인들에게 배웠다. 학자들은 전승을 보호하고 성서를 해석하여 적용하는데 정통하였기 때문에 현자, 율법교사, 대가 등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3. 디아스포라의 유대교1)헬라주의적 세계 안에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기원전2-1세기에 팔레스틴에서 치열하였던 전쟁이 빈궁과 고통을 가져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심한 고통 때문에 떠나야만 했다. 후대에 와서 그들이 해방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대로 외국에 남아 있었다. 헬라주의 세계에 살았던 유대사회는 그들의 다른 환경에 적응하여야 했다. 그러나 율법에 따라 살려는 주장도있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틴의 유대인들보다 신앙과 생활도 변화되었다.팔레스틴에서는 죽은자의 부활에 대한 종말적인 희망이 일어난 반면 디아스포라에서는 영혼 불멸이라는 익숙해진 헬라사상에 접합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적인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헬라 정신에 대하여 개방하려고 했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규례에 신실해야 한다는 점을 결코 잊을 수도 없었고 잊어서도 안되었다.2)70인역 성경(LXX) 헬라주의 세계에 있던 유디인 공동체가 율법위에 확고하게 설수 있기 위해서는히브리어로 되어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희랍어로 번역해야 하였다. 잃어버렸기 때문이다.필라델푸스 왕 톨레베우스 2세는 그의 궁중 도서관에 유대인의 율법의 희랍어 번역본이 없다는 사서 테메트리우스의 이야기르 듣고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6명씩 보내어 율법을 희랍어로 번역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모인 72명의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섬에서 작업을 시작하여 72일 만에 번역을 마쳤다. 이번역본은 유대인 공동체안에서 아름답고, 경건하고, 매우 정확하다고 인정되었다.이래서 72라는 숫자에서 우수리를 떼어내고 70이라는 정수로 채우면서 희랍어 번역본의 이름이 붙여졌다.3)알렉산드리아의 필로 헬라주의적 회당과 마찬가지로 필로 역시 그의 사고와 행위 안에서 철학적 숙고의도움을 얻어 유대교에 대한 합리적인 논증을 하려고 조력하였다. 필로는 이스라엘의 율법을 침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의로 보았으며 동시에 헬라 철학의 유산에가장 깊이 빚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헬라철학의 유산과 모세의 율법을 일치시키려고 하였다.율법서들은 필로에 의하여 비유적 해석의도움을 얻 훌륭한 도덕 철학으로서 설명되었다. 필로는 또한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을철학자들의 학설 속에서 발견해 냈다. 필로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초기 기독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인들은 기독론을 형성하기 위하여 그의 로고스 사상을 받아들였다. 필로는 기독교 신학의 선구자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성서적인 신앙을 지혜와 미덕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의 실현으로서 이해하기위하여 어떻게 성서적인 신앙을 철학적으로 기초하여야 할 것인지를 필로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4)요세푸스 팔레스틴의유대교 출신이나 후에는 디아스포라에서 생활하였던 요세푸스는 그의책을 통하여 헬라주의 독자들에게 유대교를 변호하고 이스라엘의신앙을 변증하려고하였다.요세푸스는 기원후 37년에 예루살렘에서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바리새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