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
2009-06-27 18:08:52 이름 : 이근호
의존교회 김명현 목사님의 ‘죽다’라는 아주 짧은 글 (“어제까지 살아있었으니 오늘쯤에는 정말 죽고 싶은데 왜 글 쓰는 지금까지 살려져 있는가?”) 속에서 설교자로서 겪는 아픔이 한이 되어 두꺼운 녹처럼 마음 벽에 들어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하는 자에게 그런 마음의 고통을 안겨주시는 걸까요? 그것은 오직, ‘복음 전달’에 있어 그 어떤 세상적 대가를 기대하지 말하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달 자체가 하나님께서 받은 상(償)이라고 했습니다. 즉 아무나 이런 상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천사도 부러워할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교회에 약간이라도 봉사하다보면 어느새 교인들의 세상살이를 닮아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가진 것이 부럽다가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생활 태도까지 급기야 부러워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은 복음 전달자 자신부터 하나님이 주신 ‘복음전하는 상’을 무시하게 되는 선을 넘고야 마는 겁니다.
교인들의 세상 생활태도가 어떠합니까? 예수는 받아들인다고 장담하면서도 예수님의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방식에 대해서는 질겁하고 혼비백산 하면서 멀리 도망쳐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소식이 그들이 접한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십자가에서는 전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 받지 못한 경험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이란 이 십자가 안에만 들어있고 담겨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교인들은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아픔을 두려워해서 미리 머리를 굴립니다. 어떻게요? 아예 하나님께 도움 받을 생각조차 안하는 겁니다. 그 대신 자신이 따로 열심히 버는 그 노동의 대가에 희망을 거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즉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믿었다가 실망당하기 보다는 애초부터 생존에 관한 문제에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교인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는 아주 단순해져 버렸습니다. 자기 힘으로 안 되는 내세의 운명에 관한 것, 즉 ‘죽어서 천당 가기’ 사항에만 신의 도움을 청하고 나머지 모든 문제는 절대로 하나님에 도움조차 구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니 교인들이 교회에 헌금을 할 리가 없습니다. 적어도 옛날 식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하나님께 십일조만 내면 두 세배로 하나님이 불러서 풍성히 채워준다는 내용을 자진해서 믿고 싶어 환장해서 실험삼아 십일조를 내었지만, 이제는 생존문제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재테크 기술 문제로 이양된 이상, 구태여 교회 헌금 바쳐서 아슬아슬한 돈 더 벌기 게임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마음 정리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돌아가니 은근히 복음 전한 대가로 가족의 생계비를 충당해보겠다는 목사의 생존 계획에 차질이 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단에서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그 손실은 교인들의 영적 피해로 돌아간다”(고전 9:9-11)를 언급하면서 직, 간접적으로 헌금을 강요해보지만, 여기에 대해서 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속으로 반발하기 일 수입니다.
“목사님, 저희들도 사회에 나가서 내 노동의 양만큼 다 얻지 못하고 착취당하며 삽니다. 누가 저를 힘들게 합니까? 그것은 목사님이 소개하는 바로 복음적인 하나님께서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워낙 인간성이 좋아서 세상에서 갖은 고생을 다해서 하나님만은 어떻게든 섬겨야 된다는 일념에서 교회 나와 주고 있습니다. 신앙 없는 사람들은 벌써 포기했음에도 보세요. 저는 포기하지 않지 않습니다. 더 이상 저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더해 드리겠습니까? 그나마도 내가 신앙이 출충 하기에 이 정도라도 버팁니다. 만약에 목사님이 소개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험한 세상에서 저를 더 힘들게 하신다면 저도 장담 못합니다. 목사님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믿지 마시고 직접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내려와 봐야 합니다. 산다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 현실인 것을…”
이렇게 되면 교회 모임은 그 자체가 불신자들의 시위 장소가 됩니다. 하나님께 일주일간 쌓인 불만을 조목조목 따지고 대드는 현장이 됩니다. 거기에는 천사라는 하늘나라 경찰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교인들의 인심 좋은 후한 헌금을 기대하다고 또다시 실망해버리고 자신의 업무에 날이 갈수록 회의를 느끼는 목사의 은닉된 본심과 난감한 생활고로 인해 목사한테 노골적으로 화풀이하는 사모님의 잔소리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생활고로 인한 스트레스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인간적인 힘으로 극복해보고자 복음 전하는 목사들은 버릇처럼 “죽자, 죽자. 그만 살고 죽자”를 연발하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곁에 있는 사모님으로 “이 무책임한 인간아. 식구는 나 몰라라 하고 네만 죽어 천당 가면 다야!”라는 질책을 곱빼기로 받게 됩니다.
아, 하나님에게마저 버림받는 느낌, 이 느낌 없이는 어떻게 생생하게 복음만이 전달되겠습니까! 천사도 부러워한다는 성도의 신분, 그러나 어디까지 관념처럼 여겨지고 그 대신, 돈이 있어야 산다는 이 현실이 더욱 더 생생한 현실로 다가 올 때에, 설교자는 자신이 전하는 그 복음이 자신이 도리어 저주해버리고 짓밟아 버리고 싶은 충동에 직면하게 됩니다. 악마의 일군 되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고후 11:13-15)
지옥갈 수도 있다는 위험부담을 떠안으면서까지 복음 증거를 중단하고 싶은 그 심정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가룟 유다의 심정이요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심정입니다. 이 지경에서 예수님이 피 흘리심이 감격으로 다가오고, 이런 지경이 구원의 사랑으로 이해된다면 진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점찍은 성도요, 그렇지 않고, 세상이 부러워 십자가 복음이 결코 들려오지 않는 영역으로 피신해 들어간다면 애초부터 지옥 가도록 점지해 놓은 악마의 일군입니다.
애초부터 복음 전달에 대가를 기대한 것 자체가 비복음적이고 악마가 격려하는 심보입니다. 성령에 휘감기지 아니하면 할 수 없는 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4-16)
과연 “누가 이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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