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환의 죽음과 지관 스님의 삶

안재환의 죽음과 지관 스님의 삶

젊은 이들에게 있어 죽음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 축에도 안 넣어준다.  죽음이라는 기반을 고려하면서 자기 장래를 구상하지 않는다. 그런데 젊은 나이 36세에 죽었다. 주위에 있던 모든 또래의 젊은이들이 애도한다. 마치 자기 죽음처럼 애도한다. 안 죽어야 될 나이에 죽었다는 것이다. 국민 평균 수명의 반도 못채우고 죽었다는 것이다. 억울해서 미치겠다는 것이다. 죽은 이를 대신해서 자신이 대신 그 누구에게든지 하소연하겠다는 식으로 애도한다. 같은 또래의 친구가 원없이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었기에 본인들이 억울해 마칠 지경이다. 


그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것이다. '젊은이는 죽음에서 열외인데 왜 죽이느냐는 것'이다. '젊은이는 죽음과 상관없는 자들인데 왜 죽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누구는 사채가 그를 죽었다고 한다. 


젊은이들의 복음 이해에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죽음과 결부됨이 없는 복음(기쁜 소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외면한다. 젊은이들의 복음 접수 태도는, "제발 죽음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저희는 앞길이 창창합니다"라는 식이다.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황이 빠진 복음이라면 그 때는 즐거이 수용할 용의가 있다고 한다. 즉  "이 젊은 나이에 죽음이 와도 저는 기꺼이 감사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조기에 안 죽이고 오래 살게 하시는 복음이라면 감사와 찬양을 드리겠나이다"라는 식으로 나온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신의 죄와 자신의 죽음이 결부되어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을 거부하고 싶기 때문이다. 죄와 죽음을 접수해버리면 그들의 찬란하고 화려한 인생 계획이 초치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을 무서워한다. 그들을 건성으로 고백한다. "우리는 죄인입니다"하지만 이 고백은 고백이 아니라 흥정이다. 즉 "스스로 죄인이라고 낮추어들어갔으니 하나님도 눈치 채리시고 우리를 너무 심하게 다루지 말아주세요"는 일종의 절충안에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외친다. "성경적이고 복음적이고 진리적인 것도 좋지만 사람이 숨 돌릴 숨통은 허락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몰아치시면 우리는 결국 죽음을 뺀 복음으로 돌아설 수 밖에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을 앞장 세워 몰아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임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죄가 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죄란 자기 관리 미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미워지지 않고 예수가 미워하는 것을 뜻한다. 즉 죄란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 성경적 죄관이다. 그러나 악마는 예수님의 복음에서 '죽음'이라는 요소를 중심점으로 철거시키므로서 예수님이 죽게 되심과 결부되지 않는 사적인 죄관으로 전환하는데 진력을 다한다. 


즉 "우리는 정신만 차리면 죄 안 지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의인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의인으로서 사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안 도와준다든지 젊은 나이에 일찍 죽인다면 이는 순전히 신의 잘못입니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악마의 신학이며 악마가 전하는 복음이다. 


과연 이들이 계속 나이를 먹어가면 어떻게 될까? 불교계의 지도자 지관 스님처럼 된다. 그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고려하지 않고 기독교와 불교를 견주어 이해하고 있다. 즉 현실의 폭을 눈에 보이는 이 세상으로 국한 시켜, 그 범주 안에서만 삶과 죽음을 규정지어 버린다. 숨끊어지면 죽음이요 아직 숨이 붙어있으면 산 사람으로 간주한다. 기독교나 불교나 다 산 사람이니 산 사람이 골고루 존중받고 사람으로 대우받는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봐서 '빈 무덤'의 영(정신)이 없으면 이미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요  '빈 무덤'의 영(정신)이 임하면 죽어도 산 사람이다. 따라서 이미 죽은 지관 스님이 이해하고 있는 '삶'과 '죽음'이란 예수님이 보여준 '죽음'의 의미를 빼먹고 현실을 파악한 결론이다. 


만약에 젊은 이들이 '죽음'을 뺀 복음을 복음으로 이해한다면 나중에 지관 스님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젊은이는 죽음과 멀지 않다. 도리어 벌써 죽음의 지배 안에 있기에 '죽음을 뺀' 복음을 원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와 '빈 무덤'의 영을 받지 아니하면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복음이란 모든 자, 젊은 이나 늙은 이나, 여자나 남자가 구분하지 않고,  죄와 예수님의 죽음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하는  능력이 주어진다. 정말 성령을 받아 복음을 아는 젊은 이라면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한다. 


"지금 당장 죽어도 억울할 게 없을 정도로 말씀을 통해서 저의 죄를 더욱 깊이 알게 하옵소서"라고 말이다. 이런 젊은 이는 비록 오래 살지 않더라도 이미 주님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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