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를 공부하다가 어떤 질문을 받았습니다.

교회사를 공부하다가 어떤 질문을 받았습니다.
 

교회사 공부를 하다가 어떤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거스틴, 안셀무스, 토마스아퀴나스 등의 견해를 복음으로 비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도 그들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판은커녕 ‘다 맞는 소리네!’라는 휩쓸림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사에 등장하는 신학의 네피림들에게 발견되는 몇 가지 공통점을 알게 된 후 왜, 이들을, 물론 나까지 포함하여, 동일한 이름, 아담으로 묶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신학의 네피림들의 첫 번째 공통점은 기존의 하나님관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상상한 신을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다고 하던지, 그럴 수 없다고 하던지 그러한 접근 방법도 문제이지만, 선하시고 은혜가 넘치는 사랑의 하나님, 전지전능한 하나님, 우주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을 소망하는 소박한 죄인의 신관(神觀)에서는 단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기존의 하나님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도구요, 수단일 뿐입니다. ‘봐라, 사랑의 하나님 맞잖아!’하는 식입니다.


 


신학의 네피림들의 두 번째 공통점은 이미 인간에게 구원이 도착해 있다는 전제에서 십자가를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을 위한 ‘구원 자동판매기’로서의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한 신학이라는 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간은 구원받은 것이 맞잖아!’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놀랍게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바로 그 사고방식 입니다. 인간들에게 십자가 사건은 여전히 가려져 있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신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죄인이 지닌 하나님관을 설명하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소비되는 비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 때문에 기존의 하나님관은 돌 위에 돌 하나 남김없이 무너져 내려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일 꺼야!’라고 침을 흘리며 꿈을 꾸고 있는 혹은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고 있는 자들의 머리를 후려 치는 것이 바로 십자가 입니다. 인간에 의해서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생명의 근원자로서의 하나님,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여전히 십자가를 해석할 때 ‘나를 사랑하는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관’을 포기할 수 없도록 조작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은 정말 누구세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 동안 제가 알았던 하나님은 전부 가짜일 수 밖에 없군요!”라는 절규와 비명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늘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내려가던 사울같이 말입니다.


 


십자가지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반듯이 이렇게 설명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용한 결과는 반드시 인간 구원이라는 감추어진 목적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조작했던 인간 아닙니까?


 


자유의지의 양적, 질적 차이를 설명하면서 책임을 인간에게 꾸준히 돌리려는 발상과 하나님과 죄의 상관없음을 증명하는 발상은 모두 십자가 지신 예수를 주인이 아닌 종으로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인성과 신성으로 분해되며 필요에 따라 부위별로 팔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의지를 어떻게 활용하였는가와 전혀 무관하게 인간은 죄인이며, 예수는  여기에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인간 전체를 죽음이 왕 노릇하는 아담 안으로 몰아넣는 언약의 유일한 실체이신 것입니다.


 


완전히 불순종에 갇혀 있어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자력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상태, ‘예수 십자가로 나 구원 받았잖아!’를 소유하려는 자를 성령이 탄식으로 이끌어 주셔서 그 귀한 선물 주신 분이 누구이신지 궁금하게 하시고, 조금씩 배워가면서 ‘아하, 또 틀렸구나, 아하, 아직도 난 날 구원하신 분도 잘 모르고 있네’라는 인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져 나오는 감사의 독백이 계속 더 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성도입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의 보혈을 구입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구원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님께서 그 험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내 구원용 십자가란 아예 처음부터 없습니다. 다만, 예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 그 언약대로 성취되었을 뿐입니다. 성도는 언약 성취의 반사효과를 입은 것에 불과합니다.


 


시간관념에 빠져있는 인간의 눈에는 구약부터 차례대로 흘러서 예수 사건이 필연적으로 도출되고 이 필연이 인간의 구원을 위한 준비물로 전락하는 것으로 오해 됩니다. 그러나 오히려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약 시대는 거슬러 올라가면서 해석되어지고, 신약 시대는 밀려서 해석되어는 것입니다. 이로써 성경 전체가 십자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수많은 신학자들에게 동일한 비판이 가능합니다. 이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였다고요? 천만예요. 저는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단지 누가 더 그럴듯한 기교를 부렸는가 하는 차이 뿐입니다. 그 기교의 논리 때문에 속고 속이는 죄인의 어리석음만 하나님의 십자가 지혜와 비교한다면 같은 비판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예수에게서 나오고 예수로 말미암고 예수에게로 돌아가고 영광이 십자가 지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세토록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로마서 11장 36절)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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