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사도바울이 가는 곳마다 성령이 함께해서 성령의 지시에 따라 복음을 전해진다면서 서서히 강의에 톤을 올리기 시작 합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주님의 자리가 바로 성령을 보내주는 자리로서 하나님의 오른편이라는 것은 인간에서 나올 수 없는 하늘나라의 새로운 구조라는 겁니다.
주의 자리가 하나님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오른편의 자리라는 거시지요.
주님의 오른편의 자리라는 것은 감춰진 자리인데 인간들은 분명히 신을 이야기할 때 신과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이득을 생각하면서 흥정에 나서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오른편에 계신 주님이 치고 들어와서 신과 합의해서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른편의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오른편의 자리에 있을 때만 유일하게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 오른편 자리에서 뭐가 보이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보이는데 즉 숨어있는 악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오산을 안 하려면 주님께서 주의 오른편 자리에 위치해서 언약을 완성한다는 이 구조를 파악해줘야 되는데 이 구조를 파악하게 되면 나의 자리 인간의 자리에서 구원을 시도하려는 인간의 의지나 그 모든 것이 여기선 전부다 탈락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오른편 자리에 계신 주님의 소관으로 이관이 되는 거죠.
구원이란 창세전에 결정한 대로만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에 한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의 오른편의 자리에서 성령이 오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를 척결할 합당한 분은 오직 서른세 살 먹은 청년 나사렛 예수밖에 없음을 고백 하게 되는 겁니다.
구원이란 구원이 나간 본부가 있으며 반드시 그 본부로 되돌아오게 된다는 겁니다.
선교의 본부도 움직이는 사도 바울이 선 곳이 선교 본거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성령을 통해 계시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니까요.
사도 바울이 죽고 난 뒤에 남아 있는 결과물은 말씀밖에 없는 것이고요.
말씀이 전파되는 그 모든 현장이 선교지의 본부가 되고 그것이 예루살렘이 되고 동시에 땅 끝이 되고 복음이 선포되는 그곳에 교회가 발생되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곳이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애를 되풀이하게 되는데 사도 바울의 모든 여행지에서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왜 율법을 무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이 된다는 자신들의 사고가 사도 바울의 복음에 의해 이단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정체성 자체가 이단으로 드러날 판이란 말이죠.
사도 바울의 선교가 유대인의 회당 즉 남의 업소에 들어가서 그들의 장사를 방해하는 것이랍니다.
결국 선교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그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성령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의 싸움이 결국 주님과 마귀와의 영적 전쟁이니 말입니다.
주님의 오른편의 자리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원수와 병행해서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 원수를 신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해서 반발하는 그런 영적 존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고요.
그래서 복음이 뭐며 기독교가 뭐냐 하면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은 주시다’라고 딱 잘라 명쾌히 단정 내리십니다.
인간은 별 볼일 없고 그냥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동원된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도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고요.
십자가는 숨어있는 하늘나라 편에서 바라보면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유일한 의가 될 수 있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하나님 법 또는 계시의 완성이며 사랑입니다.
인간 쪽에서 보면 그냥 한 개인이 죽은 것으로 밖에 안 보이는 것이고요.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면 여기서 두 가지 해석이 나오는데 인간들은 이 땅에 사는 버릇으로 십자가 이용해서 교회하겠다는 것으로 되돌아가요.
그것이 하늘에 계신 주님 보시기엔 죽어 마땅한 짓이라고 보는 겁니다.
십자가 자체가 죽음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최종적인 언약이 뭐냐 하면 너의 모든 한 짓은 바로 예수님으로 하여금 피를 흘리고 살이 찢겨져야 할 일로 최종 규정이 나버렸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인간들은 보여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으로 하여금 창자국과 못자 국에 피를 흘리게 한 내가 스스로 구원에 접근하고자 해서 주를 죽게 만드는 죄에 해당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도마를 등장시켜서 보고 믿겠다는 모든 인간들의 생각들조차도 예수님을 십자가 피로 죽게 만드는 허접스러운 신앙도 아니면서 신앙이라고 우기는 하나님의 원수가 제공한 그러한 신앙의 종류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고요.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한 후 오히려 내가 그 복음에 의해서 계시에 의해서 잘릴까 염려됨이라하는 것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계시가 만들어지지만 사도 바울의 일상은 결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본인이 죄인 중의 괴수임에도 불구하고 내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이 구원받았으니까 나는 적어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의롭고 착한 사람이라는 오해와 착각을 스스로 하는 것이고요.
어떤 의미에서는 사도 바울의 선교는 날마다 회개해야 될 자기의 여정일 수가 있으며 아~ 이런 것도 죄구나 이것도 하나님의 원수구나를 말입니다.
결국은 여기서 하나님 원수의 자리란 하늘의 안목에서 볼 때 십자가 안에 갇혀있는 모든 사람들의 바탕의 자리는 하나님의 원수 악마가 만들어낸 주체성을 형성시키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알고 살아가는 것이랍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스스로 위대한 이단으로 결국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세 번째 시간을 마감했습니다.
제4강
역사라는 것은 죽이는 것이고 묵시만 살린다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하나님께서 묵시와 역사가 만나는 유일한 지점으로 보고요.
허약하게 사람 손에 의해서 재판받아 죽어버린 하나님은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십자가에 담긴 비밀이고요.
역사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죽이는 재료가 되고 원료가 된다는 겁니다.
모든 배치와 배열들이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원되게 되어 있고요.
십자가에서 보여준 하나님은 사는 하나님이 아니고 죽은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죽은 하나님만이 살려낸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 배우고 인식 해온 개념과는 반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사셨던 그것이 생명나무고 생명이라면 우리는 졸지에 평소에 살려고 한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의 형태임을 수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영 예수님의 성령이 임해야 비로소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고요.
예수님이 율법의 잘못된 해석에 대해서 공격하듯이 사도바울도 율법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을 공격 할 수밖에 없고 오늘날 우리들도 말씀 율법에 대해 잘못된 해석을 공격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좋게 지낼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서로가 살려고 묵인해버리면 서로가 다 죽는다는 겁니다.
서로가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죽여줘야 그것이 서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서로 못났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다 십자가만 바라봅시다하고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서로가 살며 그것으로 끝나버려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하나님 쪽에서 주어진 율법과 그 율법을 행했다는 인간 사이에서 뭐가 생기느냐하면 이것이 바로 경건치 않은 것이고 죄인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식으로 율법은 까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틈 사이에 뭐가 주어지느냐하면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다는 것이 되고 말입니다.
죄 된 행함이라는 것이 없고 행함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겁니다.
모든 행함이 죄로 등장시키도록 율법이 말씀으로 바뀌어서 말씀이 그 일을 계속 하는 것이고 그래서 모든 성경말씀은 그 배치가 십자가를 향하여 다 질주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원수 된 자로 등장하는데 등장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행함의 틈 사이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한 십자가 피를 또 바라보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의 경건치 않음을 위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이 십자가를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되고 그러면 그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냐 하면 살리는 십자가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십자가로 죽이고 십자가로 살리는 이러한 양상이 죽을 때까지 계속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죽었던 그분의 세계로 결국 이끌려 가는 것이고요.
이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이 산다는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만나를 준겁니다.
만나를 준 것은 ‘네가 이렇게 원망했었다.’ 하는 겁니다.
만나를 뜯어보면 ‘원망1, 원망2, 원망3……’ 전부 다 들어 있어요.
우리의 원망 불평 하나님에 대한 대듦 이런 것들이 포함된 말씀이기에 말씀해석은 반드시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합니까 라는 원망이 그 안에 담겨 있는 채로 말씀이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 목사님들이 설교하실 때 여러분이 교회오시는 목적이 여러분이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또 죽이는 일입니다 라는 식으로 설교를 해야 된다는 말이죠.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교회 왔지만 여러분은 살기 이전에 이미 왜 죽는가의 그 이유를 알고서 교회 왔었어야 된다고 하시는 그 말을 연사는 강조하고 또 강조 합니다.
십자가복음 전하는 것도 인간의 힘이 아닌 것처럼 그것을 알아먹는 것도 인간의 힘이 아니며 이것은 성령의 힘이 아니고서는 못 알아먹도록 되어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벌리고 있는 모든 행함과 행함의 원리를 이 애굽 같은 행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을 분명하게 굳히기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직 십자가 피로서만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고요.
주님께서는 자기가 용서하는 그 자체를 만끽하고 싶은 것이라 합니다.
말씀이라 하는 것은 여러분의 구원욕구를 들어주는 것이 말씀이 아니고 그 말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구원받을 자격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진 거랍니다.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앞장세우게 되면 내가 앞으로 전도를 하든지 헌금을 하든지 어떤 행동을 하든지 이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뭘 해도 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지요.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는 이 죄 많은 저를 받아주시옵소서.
주 안에서 죽으니까 너무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고요.
구원될지 안 될지는 성령이 찾아가야 되는 것이지 자신의 행함의 의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대로 하는 그 설교가 죄냐 아니냐하면 그게 죄라는 거지요.
왜냐하면 성경 모든 말씀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고 십자가는 드러난 역사적 해석과 숨어 있는 묵시적 해석의 양쪽을 다 보여준 사건이 십자가사건이고 그 십자가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되풀이하는 그것이 부활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말씀 합니다.
오늘날 성령이 임한 사람은 하나의 사도가 되고 부활과 십자가 증인으로서 활동케 되는데 왜냐하면 이 지상이 바로 마지막 죽음의 땅이니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설교라는 것은 성경문자를 그냥 읽어줄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용에 대한 의미를 설명 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미 십자가지신 예수님께서 이 본문을 해석할 때는 어떤 요소를 가미하면서 이 본문이 해석되는가를 다 해석 해주어야 된다는 겁니다.
성경구절을 외우고 뭘 안다는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성경구절가지고 어떤 식으로 이용하는지를 고발하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살아 있는 말씀으로 묵시적 말씀으로 다가와야 된다고 합니다.
성경말씀 외워서 선교에 써먹겠다는 그 발상자체 이것도 모든 죄악 된 행함에 포함되는 이유를 내가 외우는 성경말씀 속에서 찾아낼 수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래야 자기부인이 돼는 것이고요.
설교하는 것도 죄가 되고 전도하는 것도 죄가 되고 이 모든 것도 죄가 되고 집안에 그냥 있어도 죄가 되고 전부 다 죄가 되는데 그냥 죄라고 하지 말고 죄 된 이유를 아는 그 바늘귀에 무슨 실이 있느냐하면 바로 우리를 구원해내는 실 묵시적 생명의 실이 그 뒤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늘나라에서 달린 끈이 있어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그 끈은 이 땅에서 무슨 짓(선한짓)을 해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수밖에 없는 피를 흘리게 할 수 밖에 없는 강도와 같은 유의 죄에 불과 하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자신을 구원할 모든 종교 활동은 십자가 앞에서 막혀 버렸답니다.
무슨 짓을 하든 테레사 수녀 아니라 별별 짓이 되어도 이미 그 자체로 죄라는 거예요.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받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오직 주님 행하신 십자가만 바라보고 짝지어주신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는 여운을 남기면서 4강을 마치고 모두들 꿈속의 환상의 나라로 찾아갑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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