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돌아가셨는지요? 피곤에 절여진 탓에 귀가의 여정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내 한 몸 편하면 그게 지혜고 기적인 줄 알았는데 “죄가 사라지는 그것만이 기적”이라지요? 기적의 바늘땀으로 수놓아진 태피스트리, 그 막장의 커튼이 시간의 한계를 그으며 내려오고 이만만하면 살만하겠다고 엿가락처럼 늘여온 미생의 시간들이 장롱 밑바닥에 슬그머니 숨겨두고 몰래 꺼내보던 삼류잡지처럼 부끄럽습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면서 꿈꾼 마법의 성채, 시련은 있지만 실패는 없다고 쉴 새 없이 지껄이며 이만하면 살만하겠다, 이만하면 살만하다고 살아낸 세월들이 변비처럼 불편하고 헐어버린 똥구멍처럼 참아내기 힘듭니다. 내 것 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1의 세계에 부재라는 형식 외에는 달리 자기 얼굴을 내놓을 수 없었던 창조주가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창세전 약속의 사정을 자욱하게 피워 올려 나도 1이고 너도 1이기에 결국 신도 1일 수밖에 없는 요지부동의 1의 세계에 짙은 얼룩을 매겨놓으니 비로소 세계는 1이 아니라 없는데서 1을 만들어놓고 그 1을 다시 사라지게 하면서 그 자리에 자기둥지를 트는 주님의 세계였다지요?
정실부인과 종, 라헬과 레아 이야기는 남편 사랑 차지하려는 아녀자들의 질투놀음 아니었나요? 그건 그냥 자기 가정 하나 제대로 건사 못하는 야곱의 가정사잖아요.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그렇고 그런 게 다 그 사람들 살았던 때의 종교적이거나 문화적인 풍속도 같은 것 아니었나요? 그 때나 지금이나 지지고 볶으면서 사람 사는 거 거기서 거기, 배부르고 등 따시면 우쭐대고 힘든 일 생기면 신당 찾아서 위로받고 의지할 신을 찾아나서는 심성이야 별스런 이야기도 아니라고 보잖아요.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상상이거나 상징의 꺼풀로 두꺼워진 우리네 시선으로는 잡히지 않는 현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구원한다는, 부재의 법칙만이 참된 현실”임을 담아내는 숨어계신 유일자의 계시였다지요? “부재의 세계 속에 존재의 세계는 성립할 수 없”고 “구원은 본인의 결단이 아니기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구원의 시도는 다 빼버리는” 그 완벽하고 냉정한 시선이 불편하기만 합니다. 이러다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일본 가서도 살아보고 미국 가서도 살아보고, 절에도 가보고 점집에도 가보고 이 교단 저 교단, 이 파 저 파, 이 천지 저 천지, 이 목사, 저 목사, 하라는 것 다 해보고 심지어 중력도 찌그러들 것 같은 검은 오지에서 평생을 죽도록 충성해도 부질없었던 달음박질, 구원의 질문자체가 바뀌어야 한다지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가 아니라 ‘내가 어느 쟁반에 담겼습니까?’ 이거나 혹은 ‘내가 어느 노선을 타고 있습니까?’로”(갈 4장의 사라와 하갈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영적인 노선의 기호) 그 주의 현실에 언제나 행위의 귀환의 종점일 수밖에 없는 내 현실은 포기해야 하고요. 주님의 세계가 요구하는 발상의 전환, 그 외부강제의 불편한 여정을 우리가 무슨 수로 참아낼 수 있을까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몸이 한 결 개운합니다. 하지만 마음은 울고 있습니다. 텅 빈 바둑판을 앞에 둔 기사처럼. 복기가 영영 불가능할 것 같아서. 무슨 이런 게임이 다 있는지. 부재의 원리로 구원, 쟁반 같은 배당에서 레위지파의 위상, 유전형과 표현형의 계시를 우려내는 사골 가마솥 같은 이스라엘, 폭을 지향하는 선택에 균열을 일으키며 금으로 그어놓는 하나님의 선택을 품고 등장하는 남은 자의 전개, 타인의 얼굴을 도려내면서 비로소 부재의 얼굴을 들이미는 낯 뜨거운 율법, 두께 없이 떠오르는 낯선 경계선의 침투, 미래전쟁(완료전쟁)의 소년전사 나실 인의 위상……, 차원 다른 샷과 샷이 겹치고 앵글과 앵글이 수없이 날아들어 포개지면서 얼추 정제된 설탕 같았던 우리네 인생이 솜사탕처럼 풀어져 흩어지고 맙니다.
얼마나 더 울어야 할까요? 동방박사는 별 따라 이 도성에 왔을 뿐인데 왜 애꿎은 내 새끼가 죽어야만 한답니까? 그러지 말자고, 별일 아니라고, 다들 그렇게들 산다고, 시간 지나면 다 잊힌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을 날이 오고 해 뜰 날 온다고, 남들도 그러고 나도 그렇게 다독여 보지만 다 소용 없습니다. 차오르는 원망과 살기에 찬 독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4) 우리가 얼마나 더 울어야(그걸 감추느라 어설픈 웃음을 얼마나 더 흘려야) 하는 걸까요? 얼마나 더 울어야 “죄가 사라지는 그것만이 기적”이라고, 그래서 “죽는 것은 필연이고 사는 것은 우연”이라는 예수 안, 십자가 안, 말씀안의 현실을 우려낼 수 있을까요?
창덕궁 격자창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는 마루. 그 낯선 얼룩, 아무리 세게 문질러도 지울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그 불편한 여정이 남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지상에 길게 드리운 종말의 태피스트리이며 우리가 이미 등단한 연극무대라는 사실, 우리가 연기해야 할 진짜 이야기, 그 마루, 그 무대의 오직 한 주인공, 죽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계신 주님의 얼굴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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