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 담기

원망 담기

원망 담기 와 수치가 물러감 (선지자의 역할)

2011년 6월 29일 수요일 오전 10:14:11  김대식


사람이 자기 경험 속에서 살다보니 보통사람을 다 접하면서 나름대로 적응력을 완벽하게 구비해 놓고 삽니다. 그것이 지금 자신이 이루어놓은 삶의 안정성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 과거입니다.

이런 터를 비집고 쳐들어 오는 존재가 있습니다. 이질적입니다. 아주 낯설고 모든 경험을 다 동원해서 방어에 나서고 싶어도 막을수가 없습니다. 다 빼앗는 도둑놈이 쳐들어 온 것입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원망담기입니다. 이쁘게 아득한 살림을 지적이고 엘레강스하며 나름 거룩한 누가봐도 욕먹지 않을정도의 신앙생활까지 겸비한 그 아득한 에덴동산에 난데 없이 불도져로 밀어붙이는 아주 아주 나쁜놈이 자해공갈단처럼 찾아오는 겁니다.

선지자는 하나의 박스입니다. 원망을 담습니다. 아무리 도망칠려고해도 원망이 안담기고는 못배깁니다. 에이 바보 바보 넌 원망했으니 넘어갔지 나 봐 얼마나 순수해 아직까지 원망하지 않잖아? 소용없습니다. 어차피 물없는곳 양식없는 곳은 40년 동안 계속 되어 집니다. 원망 차라리 빨리 담기는 것이 더 나았을걸 껄 껄 이라고 혀를 차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 어 어 그런데 막상 원망이 담겨짐을 당하고 보니 저주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뾰료룡 너는 용서 받았다 라는 것입니다.

에이 이럴줄 알았더면 빨리 빨리 선지자 오라고 할껄 더 빨리 선지자를 영접할껄 껄 껄(지옥 간 부자)
그러나 이것도 내 욕심이고 죄며 정작 이 죄악마저도 담고자 주님이 하셨구나

이런줄도 모르고 선지자를 우리는 죽여버렸구나

주여 어찌하면 좋습니까?


수많은 선지자가 자신이 선지자라고 외치면서 출현합니다. 선지자의 출현은 곧 예수님의 출현이니까 말이죠. 메신져

그러나 원망을 담는 놈은 단 한 놈도 없습니다.

원망을 담아야 그 위에 피가 뿌려져서 수치가 물러가는 할례가 벌어지는데
십자가가 외쳐지는데

도리어 십자가를 외치는 것 자체가 할례받지 못하는 모습으로써
나는 선지자다 나는 목사다 나는 성도다 나는 칠(7ㅏ)수다 라고 우기고 있으니
원망이 담겨질 그릇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선지자 본인도 담겨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왕 바로는 멀쩡한 보통인간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미친놈 똘아이 하나가 굴러와서 내 백성을 달라고 합니다. 십자가 할례 할려고 빼내겠다는 겁니다.
아예 도둑질을 대놓고 합니다.

하필이면 그 때 가장 노동력이 필요할 절정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피라미드를 완공할 가장 중요한 클라이막스의 시기에
난데없는 장난질이 바벨탑의 언어를 흩어버리는 장난의 언어인 방언이 비집고 들어왔듯이
똑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애굽왕의 시선에는 어디에 고자같은 놈이 굴러 들어와서 박힌돌 뽑을려고 하냐?
너 고자 맞지 맞지 맞지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그 남성성기처럼 우뚝솟은 솟대인 바벨탑인 피라미드를 쳐 버리니까
애굽 나라 전체가 고자가 되어 버립니다.

세월이 흘러 흘러 이스라엘에게 왕제도가 들어오고 또 한참을 지나 드디어 솔로몬 왕이 죽고 난 뒤에 이스라엘은 괜히 솔로몬의 영광을 보고서는 따라하겠다고 성전을 중심으로 한 피 비린내 나는 왕자리 쟁탈전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어디서 어중이 떠중이가 굴러들어와서는 원망을 담겠다고 내 백생 내놔라 라고 하듯이
초를 칩니다. 아무리 봐도 미친놈입니다. 아니 누가 저런 미친놈에게 원망을 담겠다고 온 자에게 원망을 무슨수로 선뜻 주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막사는 놈에게 말입니다.

지금 당장 거룩한 십자가의 삶을 살아서 그 삶을 담아도 시원찮을 판국에
뭐 ~~~ 원망을 담아?
막살기를 담아?
죄를 담아?

여기에 거짓선지자들까지 악령을 받아서 천상회의를 통해서 투입이 됩니다.
절대로 원망을 담아서는 안돼
평화 화평 축복을 담아야 돼
부정을 담으면 안돼

그러나 고자 같은 또라이 선지자는 심지어 자신조차도 심판받은 모습으로써 원망을 담긴채로
이스라엘에게 외쳐지니

이스라엘은 이 성전(교회의 하나 되기. 일치 단결 연합)을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고자같은 선지자들을 죽여버립니다.

주님이 미쳤습니다. 옳치 옳치 박수 박수
또 있찌롱 또 선지자를 또 보냅니다.

또 죽입니다.

또 보냅니다.

얼마나 유치한지?

이 자체로써 원망을 담아버립니다.

아니 원망 안 담을려고 한 행동이잖아요?

어 그런데 그 자체의 결과로써 원망이 담겨진 모습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제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짜다가 우짜다가 말려들었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변명이 될수 없는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 이렇게 원망이 담겨지니 뾰료룡 용서받았지롱
이라고 나단선지자가 외칩니다.

아뿔사 다윗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를 겨냥해서 모든 말씀과 주님의 피 흘리심이 벌어졌다는 것을 말이죠.

원망 안담길려고 한다는 자체가 마귀에게 속은 겁니다.
막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마귀에게 속은 겁니다.

그런데 누가봐도 마귀에게 속은 것은 막살기를 담고자 하는 저 미친 선지자의 횡포가 아닐런지요?

예수님은 꼬끼오 세가지 원망을 담고자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지목을 했습니다.
사탄만을 의식하는 예수님의 횡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미 마귀에게 잠식 당한 주제에 그런 예수님의 원망담기를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광야에서 원망안하고는 못배기도록 3가지를 담습니다.

십계명 깨어진 두 돌판입니다. 즉 말씀 싫타 라는 속내가 들켰다는 증거물입니다.
만나를 담은 항아리입니다. 떡이 좋다 박한식물 싫타 라는 속내가 들킨 증거물입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는 것 싫타 내가 왕이다 라는 속내가 들킨 증거입니다.

이 3가지 안들키고는 못배기도록 다 들킬 때 까지 뺑뺑이 돌립니다. 드디어 수치가 물러가는 할례를 하고서야 요단강을 건넙니다.

여기에 모세라는 수치 덩어리도 짤라냅니다.
그래서 모세는 변화산에서 얼마나 기다렸으면 빨리 죽어주세요 예수님 이라고 했겠습니까?
자신의 수치를 굴러가는 할례를 행해달라는 겁니다. 십자가사건을 재촉하는 겁니다.

그 수치가 굴러떨어지니 베드로가 엉뚱하게 받고서는 모세가 한 짖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물론 성령을 받고서는 또 수치가 굴러가니 또 엉뚱한 자가 받게 되지요.
[수치 물려주기]라고 제가 멋대로 붙였습니다.

여성으로 치면 아이 못낳는 것이 수치가 굴러가는 겁니다. 부정이 굴러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시선에서는 도리어 부정이된 인간인 겁니다.
아이 못 낳는 죽은태의 여자가 어찌 수치가 굴러간겁니까? 세상의 시선은 도리어 수치가 된 여자가 되겠지요.

그래서 다말이라는 형수에게 시형제결혼법으로 장가온 시동생 오난은 어차피 자기에게 돌아올것이 단 하나도 없는 부정한 여자에게 자기의 씨앗을 줄 수가 없다고 땅에 설정해 버립니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다말은 얼마나 제대로 막살았으면 창녀짖을 해서라도 시아버지 유다의 수치를 물러가게 해야하는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서는 유다의 부정함에 수치에 뛰어듭니다.

아니 누가봐도 쥐가 고양이 걱정해주는 격이지요. 누가 부정합니까? 다말입니다.
그런데 다말이 유다를 부정한데서 끄집어내겠다고요?

이 말은 마치 소문난 화냥년 창녀가 의롭다고 정평이 나있는 이스라엘 경찰국장을 구원하겠다고 나서는 꼴이니 얼마나 비웃음꺼리가 되겠습니까?

이 경찰국장은 당장 이 년을 잡아 죽여라 라고 외칩니다. 다들 제대로 된 판결이라고 박수칩니다. 감히 막살겠다는 퍼트리는 신종악마바이러스는 초장에 근본뿌리부터 없애버려야 해 그것이 우리들의 사명이야. 절대로 막살지 않겠다는 우리들의 사명 말이야

어 그런데 그 비웃음이 웃음이 됩니다. 실상이 됩니다. 현실이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경찰국장인 유다가 휴 하고 다말 너 때문에 내가 살았다 라고 외칩니다.

참 뻔뻔하지요잉. 자기 입으로 막살지 않겠다고 막사는 인간들 조져놓을때는 언제고 이제는 자기가 막살자 라고 외치고 다닙니다. 바울이 스데반 죽여놓을때는 언제고 입싹 딱고 스데반의 외침을 바톤이어받아서 외치듯이 말이죠.

스데반 선지자의 박스에 바울이 제대로 담겼습니다. 원망 자체로써 말이죠.
아무리 봐도 막살지 않았음이 담겼다고 자부했는데 그것은 박스 바깥에서의 시선입니다.
박스 안에서의 시선에서 보니 막살지 않은 적이 없었음을 비로소 보게 됩니다.
그리고서는 자기도 뻔뻔하게 박스가 되어서 원망을 담고자 이리저리 미친 듯이 박힌돌 다 뽑고 다닙니다.

원망을 담지 못하면 수치가 굴러가지 않습니다.

이 이상 야릇한 일을 무슨 수로 감당하겠습니까?
또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일체 양보 없이 하십니다.
예수님의 자기 숙제 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볼 줄 아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인간의 신체 자체가 하나의 남성 성기모양처럼 우뚝 서 있는 것을
할례하듯이 쳐서 짤라내어서 수치를 굴러가게 하실 분은

우리의 원망을 담는 예수님 뿐입니다.
십자가 만이, 요나의 표적 만이 그 수치를 물러가게 합니다.

왜 이런 목사들은 안 보이고
거짓선지자들만이 설치고 다니는지?
막살지 않겠다는 가면을 벗길자도 없을 정도로 딱딱한 가면입니다.

우리의 수치를 굴러가게 할 자는 누구입니까? 여러분 ~~~~~

바 바 바 ~~~~  빠 빠 빠

내가 만약 수치스러울 때면
누가 나의 원망을 담지 ~~~~~

내가 만약 ~~~~~
막살때에~~~면
누가 나의 죄악을 담지 ~~~~


미쁘다 미쁘다 이 말이여

(딤전 1:15, 개역)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후 2:11, 개역)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 미쁘다! 정말 미쁘다!! 모든 사람들을 시험들어 넘어뜨려 실족케 하는 이 말이여!!!
이렇게 미쁠 (믿음직스러울) 수가?



ps

(요일 2:27, 개역)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마 23:8, 개역)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마 23:9, 개역)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아무도 자기를 가르치는 선생이 없고, 땅의 선생? 땅의 아비?도 다 그림자일 뿐이다. 오직 선생은 하나요 다 형제일 뿐이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uy Now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Blog
About Us
Message
Site Map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Terms of UsePrivacy Notice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

Home
Gospel
Question
Blog
Hel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