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류의 기술

계류의 기술


계류의 기술 (무한연기, 무한집행유예)

어제 설교를 듣고 그 동안의 감격 기쁨 환희를 만끽하듯이
무지 무지 기쁘게 느껴질줄 알고 무지 무지 기대를 했었으나
막상 설교를 들으니까 허탈했다.

어라 !! 뭐여 이거?
완전히 자기 변명이잖아? 푸하하하하하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수 있는지? 완전히 배꼽잡았다.
어쨌든 예상을 벗어난 설교라서 또 공부할 것이 생겨버렸다.

마침 차반(차이와 반복=영원회귀)을 설레는 마음으로 접하던 중에
처음부터 막혀서 도통 무슨소리인지 머리아파하는 가운데
계류의 기술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다.

뭐 말만 대따 바꿀 뿐이였지
해학(장난)? 채널돌리기 또는 전복 또는 비역질(계간 ; 강간)
끝을 미리 앞당겨서 소급하는 것(선취)
다 같은 의미이다.
이것이 종말의 이미지와 딱 떨어졌다. 그래서 구조(비역사 ; 판대기)라고 했던 것일까?
(오히려 시원하게 뻥뻥 뚫혀버렸다. 막힌 담이란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모두다 밀어버려서 첩경을 평탄케 하는
시원한 까스활명수다. 희년이다. 종말이다. 심판속에서의 구원이다.)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을 읽다가 갑자기 2부에서 베버가 툭 하고 튀어나오더니
뭐야 갑자기 재미가 없어져 버렸다.
이게 무슨 영원회귀랑 상관있는가? 또 장난질인가? 노마디즘을 한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결론은 무자아 로 귀결이 되니, 뭐야? 장난해? 갑자기 허탈해졌다.
또 다시 그거랑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피 라는 책도 그런 느낌이였다. 갑자기 뚝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계류의 기술 이라고나 할까?)

실컷 뭐 있는냥 이야기 해가며 사람을 끌여들어놓고서는
나도 모르겠다 라고 모르쇠 작전처럼 몰고가니 허탈했다.
이런 모호한 소리 할 것 같으면 말라꼬 꼬시냐 말이지?
그런데 이 무슨 장난질인지 또 뭔가가 보이니까
숨박꼭질 하듯이 찾아헤맨다.
안보이면 빨랑 접어버릴텐데
또 보여주니 뭔가 있나 싶어서 술래가 되어준다.

왜 갑자기 베버가 튀어나오나?
마침 우연인지?(요즘은 이 우연이 무지 싫타, 거의 농락당하는 기분처럼 찝찝하다. 또 보이니까 또 술래가 되어 이 수수께끼 놀이에 또 말려야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막상 답을 알고 나면 얼마나 우스운지! 아이고 이 바보야 이렇게 쉬운 것을 ㅋㅋㅋ)
잡히기만 해 봐라. 너 죽었어 !
나 잡아봐라 라고 하는 장난질에,
뭐 할짓이 없으니 장단 맞쳐준다.

우연스럽게도 공각기동대를 평가한, 니체는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 변이시키는가? 또는 신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이시키는가 라는 글을 보고서는 아 그래서 베버가 언급되는구나

국가 또는 정치 개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신체 몸 몸 몸, 인간은 자기 몸에 미쳐있다. 그것이 국가라는 거대한 신체에 집약되어있다. 리바이던 인줄 뻔히 알지만은 어떻게 해서든 대항해서 회개를 하고 전복시켜서 처음의 신체로 되돌리고자 하는 소박한 소망. 변신, 변이, 그래서일까? 돌연변이만이 희망이다? 정신분열의 특화화? 편집증(신경증)으로부터 미분화? 도주?)

국가와 국가가, 민족과 민족이 배신 때리고 가족의 구성원끼리 배신때려서 넘겨줄 때

(눅 21:5, 개역)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눅 21:6, 개역)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눅 21:7, 개역)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눅 21:8, 개역)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웠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눅 21:9, 개역)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눅 21:10, 개역)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눅 21:11, 개역)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눅 21:12, 개역)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눅 21:13, 개역)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눅 21:14, 개역)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눅 21:15, 개역)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눅 21:16, 개역)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눅 21:17, 개역)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눅 21:18, 개역)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눅 21:19, 개역)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이 배신 곧 팔아넘기기 가 선행되는 가운데 그 배경을 깔고서
종말은 등장한다. 참 얄밉다. 곧 해학의, 가로지르기의 전형적인 전복이 아니던가?
내만 남았나이다. 하나님 이러기요? 왜 날 왕따 시키는거요? 당신 시키는대로 했는데?
내 열심히 특심인데 이런 배신 때리기요?

니가 원했잖아 케보이 !!
제가 언제예?

7천명 남겨놨다. 우짤래 우짤래 뭐 뭐 뭐 ~~~~~~~ 우짤래 우짤래 우짤래!!
입이 쑥 들어간다. (자작극에 말려들었다.)

아닙니더 제가 뭐라 캡던가요? 전 그칸적 없심더
왕뻔뻔처럼 입을 가리우고 머리를 쳐박고 재를 뿌린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너무 너무 잘 아십니더 라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며 웃는다.
시치미떼기이다. 곧 이보다 더 낯설은 것이 없다. 그야말로 충격이다. 헉 헉 헉.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람쥐 다람쥐 ~~~~ 공황상태
입이 천개라도 할 말이 없도록 잠잠케 만드는 침묵의 종결자 !!!! (왕상 19:12 세미한 음성)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다 람쥐. 다람쥐. 허걱

(요 12:34, 개역)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배신과 해학이 짝이 되는 종말(인자가 들려야하는 판대기 구조에 말려들어야할 판국)
쉽게 말해서
개콘(개그콘서트)의 감수성 코너 어제 내용에서
왕을 위해서 모두다 충성하겠다고 목숨걸겠다고 그렇게 맹세해놓고서는(베드로)
정작 그 왕의 목을 배어서 현상금을 타서
처자식 먹여살리겠다고 암살하는 그런 전복(비역질:배신때리기)
그런데 산채로 잡아야 하는데 정작 죽여버렸으니 부랴 부랴 살리겠다고
다시 한번 또 전복 이중전복의 해학 웃음보따리 라는 가로지르기야 말로
무한한 집행유예라는 종말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마침 어제 설교가 그랬다.
하루 종일 어제 설교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웃음보가 터진다.

한참 심각하던 배신의 배신 때리기의 상황이
판대기가 무너지는 판국에서는 그것이 한낯 심각할게 없는
웃음의 공황상황이다. (꺽기도 공황상태)

얼마나 심각했으면 비웃었던가(비역질)
그런데 그 비웃음의 전복이(비역질) 벌어져서
팔을 어긋맞게끔, 웃음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말씀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행 2:21-37)

뭐든지 예 뿐이다.
아니요 가 없는 세계가 십자가 라는 종말의 세계이다.

(고후 1:18, 개역)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고후 1:19, 개역)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1:20, 개역)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 1:21, 개역)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고후 1:22, 개역)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뭐든지 예 가 되는
아니요가 없는 세계

종말(십자가의 피용서)이라는 판대기가 덮쳐버린 세계이다.
무시험 합격의 세계
무한 집행유예의 세계
죄를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세계
곧 용서의 세계를 따로 마련했다는 기쁜소식

그 기쁜소식은 나쁜소식이 판치는 가운데서
스스로를 빛내고 영광스럽게 하고자
일부러 나쁜소식에 가두어 희망조차 가질수 없을 때
모든 것이 소외 절망 배제 단절속에서 목마름에 허덕일때
우리를 모두다 비웃음의 세계로 몰아간다.

다 이루심을 보여주신다. 이미 처음부터 완료되었던 것이다.
심각한 것이 없이 넉넉함이 흘러넘친다.
(마침 어제 버스로 가는 길에 이런 멘트가 라디오에서 나온다. 찰리 채플린의 슬랩스틱 코메디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시대적인 상황이 모두다 영웅이 되고픈 돈이라는 자본에 눈뜰 때 쯤에 오히려 추락하는 계류의 기술자를 보고서는 그 피로감을 달랬다. 그것에 아다리가 된 것이었기에 그의 연기가 먹혀든 것이다. 모두다 가해자가 되어야 하는 샤디즘 마귀자식들이 되어야 하는 판국에 마조히즘자가 나타나면 전부다 그 피해자를 찢어버릴려고 달려든다. 판대기이다 보니 어쩔수 없다. 그런데 찢기기는커녕 도리어 계간하러 달려드는 십자가라는 스캔들에게 말려든 것이다. 도리어 찢겨져야할 판국에 놓인 것이다. 어쩔수 없다. 모든 아담들이 그를 찢었으니 이제는 찢겨져야함이 마땅하지 않는가? 그래서 원수 만들기를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해학 수수께끼 놀이가 아닌가? 심각할것이 없는 세계, 처음부터 명료하고 마지막도 깔끔하게 또렷한 세계)

그리고 부끄 부끄 부끄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무조건 죄 뿐인, 무조건 틀렸고,
남이 아닌 내가 무시했던 그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가 처음부터 무조건 옳았었었군요 라고 ...

(롬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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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브픽션 (Love Fiction 2011)

사랑이라는 우상

2012년 5월 9일 수요일 오후 4:32:59   김대식


허구라는 사랑을 아주 재미있게 표현해서 하루종일 웃었다.
아 진짜 배꼽빠지는줄 알았다.

사실 어제 책을 읽다가 깜짝놀랬다.
점점 책에 말려들고 빠져드는 것 같다.
이번에는 진정성이라는 단어에 푹 빠졌다.

저번에 진정성을 이목사가 표현했는데 사실 안미더워했다.
오히려 정말 기가찼다.
기가막히고 코가막혀서 그땐 정말 정말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변덕이 죽끌듯하는 사람이고 거짓말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바깥으로 세어나가지 않듯이 은폐 비밀이 됨과 동시에
노골적으로 곧 바로 공개를 해버리는
정말 정말 이상한 경험으로써 무지 무지 낯설게 격었다.

도리어 더더욱 매력적으로 어필이 되다보니,
당당하게 그런 단점을 바로 바로 즉각적으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즉각적으로 자수하다 보니,
오히려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치명적인 잉여가 넘쳐흐른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얼마나 정신없이 분주하고 분답스러운지
왔다리 갔다리 오락 가락 달가닥 달가닥 ㅋㅋㅋㅋㅋㅋㅋㅋ
왜!? 뭐!? 뭔데? 어? 뭘!? 와카는데!? 와카노!?
그냥 웃고 치워야 한다. ㅋㅋㅋ

가장 어두운 죽음을 거쳐, 추악함을 통해,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생명의 빛을 발산하듯이 말이다.
죄인의 자리에서 말이다.

분명 동전 앞이였는데 어느새 뒷면이였다. 눈을 아무리 비벼도 소용없다. 마술인가?

그래서 그 어느날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들었는데
또 티비에서 나가수의 나만 가수다 라는 임재범이 쓴 용어 진정성을
그대로 차용해서 이용해 먹나 싶었는데, 연기인줄 알았다. 워낙 연기를 잘해서리 ...
왜냐 위에서 말했듯이 연기가 아니다면(속임수) 자기에게는 전혀 안어울린다는 것을
오히려 누구보다 잘 알텐데 아예 얼굴에 철판 깔듯이 더 뻔뻔스럽게 자신에게 그런 표현을 써먹다니
과연 자유로운것인지? 아니면 살짝 ? 아니 심각한 것인지?
일단 그 표현 그 때 쓴 이후에 더 이상 들리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다.

아 그런데 이 용어가 철학책에 불쑥 튀어 나오는 것이였다. 눈이 번쩍했다.
과연 무슨 의도로 써먹었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라고
못땐마음을 품고 분석했다 흑흑흑(흑심 흑심 흑심 ㅋㅋㅋ )
역시 그러면 그렇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인의 생각의 진정성과 전혀 딴판의 의미의 진정성이였다.

그럼 그렇지 딴 의미가 있었는데
일부러 오해를 유발하면서 자신은 다른 의미로 말했다 라고
언제든지 발뺌할 준비를 하고
엉뚱하게 그렇게 오해한 놈만 헛다리 짚게 되는 식이다.
실족케 하기의 달인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흔하게 나타나는 방식이다.
가장 그 당시의 당연한 언어적 기의를
예수님 자신이 그런 용어를 쓰시면서
동시에 전혀 딴판의 기의(의미 곧 내용)로써 기표(표시, 문자, 기호, 싸인)화 시켜버린다.
요나의 표적(흔적, 표시, 기표)처럼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거쳐서 말이다.

(눅 11:29, 개역)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또 그 대표적인 것이 유물로써 비유를 드심이다.
잃어버린 동전이나
잃어버린 양
꼬끼오 세 번 우는 닭 등등 사람조차도 유물 곧 도구 소품 소모품으로 취급 사용해서 천국을 증거하신다.
(이 얼마나 모욕적인 것인가? 무시해도 유분수지 말야, 비천한 닭과 베드로를 충돌시켜서 두 벼락의 스파크 spark 충돌로 그 틈사이에서 새로운 생명을 새로운 낯설음을 보는 것이다. 전혀 새롭고도 낯설은 화목제물이라는 십자가를 도출한다. 사실 십자가가 먼저다.  그래서 이 놈이 아니고 이놈입니다 라고 하니, 안다 나도 안다 라고 팔을어긋맞는다. 여디디야)

그럼 차이와 반복에서 진정성이라는 의미가 어떻게 쓰이는고 하니
일반적인 의미로 진정성은 진실되고 정의로운 것이다라고 생각할텐데
(소위 미쁘심 이라는 용어와 같다고 생각하면 쉽다. 믿음직스럽다. 그러나 정작 성경의 의미를 전혀 믿음이 안가는 것만 골라서 인간의 믿음을 배신때리고 전혀 믿음안가는 예수님의 믿음만을 믿음으로만 세움으로써 인간의 믿음은 배설물로만 취급하는 방식만 취한다. 7천명 남긴 계류사건이 그것이다.)

거짓말을 잘하는 자가 진정성있다 라고 하면 오히려 반대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진정성이 있다고 여기게 되나? 뼛속까지 친피인데? 한국국민만을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진정성이라는 그런 차이 곧 구별성 선별성 분류성이다. 이것이 거룩이다.

캬 ~~~ 말로만 써먹었던 거룩이 깨달아 알아가는 신앙의 대상으로써의 거룩이 아니라
진짜 거룩이 나에게 쳐들어와서 나를 대상으로 한, 물건취급하듯이 거룩에게 지근 지근 밟히는,
주체가 거룩으로, 픽션처럼 거짓말같이 쳐들어오는, 이 진정성 ㅋㅋㅋ, 그야말로 거짓말같다.

당연히 이런 풀이에 반발하는 자들이 튀어나오도록 되어 있다. 또 반드시 나와야 한다.
얼마나 진정성 스스로가 진정성을 추구했으면 반이 쩔뚝 하고 짤라버렸다. 얼마나 살벌한 사랑인가?

이 보다 더 진정성 스러울수가 없다. 실제상황이다. 신실하심이다.

예로 진정성을 가장 잘 표현한 성경 내용이 바로(사실 전부다 인데)
기드온의 3번 하나님을 테스트하고 난 뒤에 그 유명한 박영선목사의 그 당시
유명해진 해석인 기드온 300명 군사 뽑는 성경내용이다.
어느 정도로 진정성이 있는고 하니
군사를 뽑는데 있어서 3번의 분류 구별 선별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일부러 숫자가 적은 쪽만 고르는 것이다.
어떤 이의 해석법은 거룩하고 더럽지 않은 행동으로 분류했다고 그 이전까지 이런 해석이 먹혔는데 박목사 지금으로 치면 20년 넘었던 때이니, 물론 지금 이 순간의 박목사와는 다르다(이 얼마나 진정스러운가?). 그러니 이단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해석의 주류를 뒤엎어 버려서 반대로 해석했기 때문인 것이다.
바로 이 이단성이 차이성이요 거룩성이요 진정성이다 라는 것이 이 책의 취지다.
그런 의미로 이 목사가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목사야 말로 가장 진정성이 있다가 되나?.
이단 중의 이단이니까 말이다.

차이와 반복은 그야말로 니체의 사랑학개론(영원회귀)의 확장판이다.
철학은 사랑학이다. “지혜를 사랑하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이 주체요 그 인간이 사랑하는데 있어서
사랑의 의미를 찾아내는 학문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혜가 정작 그 사랑을 흔들어버렸다.
그래서 인간은 어쩔수 없이 신까지 초대해서 사랑을 운운하게 되는 것이다.
목적이 사랑이다 보니 어절수 없나 보다.

그런데 니체의 놀라운 점이 기존의 사랑학이 순엉터리임을 밝혀낸다.
그리고 자진해서 이단이 된다.
이단이 되어서 정통의 이단성을 조목조목 명쾌하게 밝혀낸다.
그리고서 자신의 사랑학을 펼친다.

틀렸다면 지적해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정통이라고 우기던 그 당시 기독교가 니체에 의해서
거룩은커녕 아주 기본적인것도 안되는 것이 밝혀짐에 있어서

니체와의 단절은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판으로 꾸며버린다.
매장되는 분위기에서 더 이상 니체의 사상은 진화 되지 않는다.
진화라는 용어 조차도 다르다. 진화 곧 생명이 되지 못한다.
생명이 되지 못하도록 어두운 기독교가 밟아버렸기 때문이다. 이단인데 뭘

그래서 이단이 이단을 처단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정작 현대의 모든 사상의 뿌리는 니체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영향받기 싫으면 현대인임을 포기하고 산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산속의 불교도 니체로 깔려있다.
현대의 모든 문명 사고방식 하나하나가 다 그의 영향에서 뿌리삼아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가장 기독교에 잘 뿌리내린 것이 성화론 곧 개혁주의이다.

삶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긍정의 철학이다.

새로운 긍정의 변증법이다.

그럼 부정의 철학은 당연히 프로이드 모든 것을 성으로 보고 무의식이라는 실재계 죽음으로 보는 것이 라깡 지젝이 추구하는 부정의 철학이다.

이 둘 다 헤겔의 변증법을 가로질러 전복시켜볼려는 지혜에 대한 사랑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추구하고 있다.

헤겔이야 말로 가장 합의도출을 잘해낸 문제없어 문제없어 문제없어 신학이다.
말라꼬 싸우냐? 손 잡으면 문제될 것 없이 다 풀리는 것이다.
어차피 상호위선이요 상호기만이요 상호인정인데 안하면 지만 손해다.
어차피 하게 된다. 중용이니 어쩔수 없다.

자 그럼 영화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사랑이란 허구이다.
픽션이다.
그런데 허구 픽션이라고 해가, 우상이라고 해서, 거부하여 금욕한다든지 하면
누가 손해인고 하니 니만 손해다 라는 것이다.
그럼 유행을 타야 손해 안보나?
유행타라는 말이 아니다.

진정성이 없다 라는 것이다.

참 아주 아주 중요한 것 빠뜨렸는데
기드온 300 군사 뽑아서 그것이 진정성을 아주 잘 표현한 내용인데 그와 연결된 신약의 가장 대표적인 진정성 이야기를 반드시 연결해서 말하고팠다. 깜빡 넘어갈뻔했는데 ㅋㅋㅋ 
사실 기드온 300명 군사 뽑아서 전쟁하는 그 내용도 진정성이다. 즉 구별의 전쟁이다. 거룩전쟁이다. 기드온의 칼이여 라고 얼마나 거짓말을 치는지? 왜? 칼 한번 쓴적이 없기 때문이다.
횟불과 항아리를 깨뜨린 것 뿐이다. 오히려 적군들 저거들끼리 칼로 자기편을 찔러 죽인다.
이것이 진정성이라는 것이다. 계류다 계류. 머리를 들라 가 진정성이다. 불뱀에게 다 물리도록 해놓고서는 쳐다보라는 진정성. 종말에 기절 혼비백산할 정도로 땅을 흔들어 지진나게 해 놓고서는, 놀라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이 진정성이다. 그야말로 말장난 같다. 

깜빡 넘어갈 뻔한게 뭔고 하니
바로 예수님의 포도원농부 비유로써 하나님나라는 이와 같다 라고 이와 동일함을
도저히 그 동일성에 갭을 좁힐수 없는 차이나는 차이성의 간격이 더욱더 벌어지는 것이
비유의 목적이요 비유의 내용이다.

(마 20:1, 개역)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바로 아침 6시부터 일하러 나온 정규직 농부와
놀고있던 백수들을 중간에 투입시켜 일시킨 비정규직 일용직 농부에게
진정성의 삯값을 쳐주는 밭주인의 진정성 곧 선하심을 드러내는 비유이다.
그런데 그 선함은 반드시 악하다 라는 소리를 반드시 들어서 돌출시켜, 그 차이성으로써 간격을 쫙 쫙 벌려서 악함을 빼내고 뽑아냄으로써 드러나는 선함이지
그냥 내버려두는 선함은 선함이 아니다. 진정성이 없는 것이다. 차이성이 없다.
곧 진정성이란 차이성이다. 차이성이 없다는 것은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차이를 도출하는 것이 선함이다. 그 어떤 이유로도 차이성을 드러내지 않는 무차별성은 무관심이다.

그래서 새벽6시부터 일해서 저녁6시까지 12시간 풀 full 로 일한사람과
중간에 노는 사람 집어넣다보니 딸랑 30분, 딸랑 1시간, 딸란 2시간 등등 사이 사이에 집어넣은자들이 많다 보니
졸지에 풀타임으로 일한자들의 진정성에 대한 해석과 밭주인의 진정성에 대한 해석이 졸지에 갈라지는 새로운 진정성이 대결구조를 이루는 방식으로써
예수님 나라 곧 종말의 나라를 증거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참 진정성이다.
같은 언어에서 분신 쌍둥이를 만들어내어서 그 의미의 차이를 쌍둥이의 역설법으로(계간) 두 진정성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악한자의 진정성(거룩), 선한분의 진정성(거룩)

거룩도 그렇고 기적 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도 그렇고
언어 자체가 다르다.
말씀을 로고스로 쓰는 인간들에게서 말씀이 삑사리가 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못하듯이 말이다.

성경에서 의미로 진정성을 따져본다면 위에서 언급한 내용으로써
우리가 믿었던 것 행했던 것 실천했던 것
모조리 다 삭제당해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취급당해도
무익한종으로 취급당해도
심지어 죽임까지 당해도
상관없는 것이 주의 다 이루심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진정성이다.

주가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것을
오히려 나의 모든 것이 삭제당함을 통해서 더욱더 또렷하게 차이 구별 된다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개념이다.
이 거룩개념을 차이와 반복에서는 진정성이라고 표현했다.

니체는 이것을 사랑(영원회귀=권력의지=초인=생명)이라고 본 것이다.
들뢰즈는 바로 이 사랑(차이와 반복)을 이단성, n승의 역량 = 리좀 = 변이 = 창조 = 생명 이라고 봤다.

이단성 즉 다질성 이질성 차이성이 참 생명력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니 기존의 기독교 또 지금 현재의 기독교 보다 훨씬 더 제대로 공부하고 고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봐도 십자가는 그야말로 십자가 만큼은
(갑자기 개그투나잇에서 ‘이 말 만큼은’ ‘그 말 만큼은 제발’ 이라는 개그용어가 생각난다)

십자가 이 말(문자 개념이 아닌) 만큼은 아무리 들따 봐도 사랑으로 또는 지혜로 여겨지질, 공부를 백날해도 안되는가 보다.

그것이 인간의 지혜의 한계성이다.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안된다.

자신들이 만든 용어에 자신들이 말려들어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다.
철학자들이 이런 판국인데 신학자는 오죽하랴? 더 심하다. 아예 예수님을 믿지를 안는다.
자신들이 만든 종교에 사람이 놀아나길 바라는 앵벌이일 뿐이다.
사람이 늘면 늘수록 돈만 되는
그야말로 사람 하나가 돈으로만 보일 뿐이다.
그러니 그들은 신학을 절대로 포기하고 부인할 이유가 없다. 돈인데?
그러니 진정성에 걸려든 것이다.

진정성이란 그래서 서로가 서로가 싸우도록 충돌하도록 싸움을 붙이는 것이다.
여호와의 칼이여 라고 외치고서는 정작 칼은 부재성이다.
도리어 칼을 쥔 쪽은 이스라엘 쪽에는 아예 없고, 블레셋 쪽만 칼을 쥐었다.
칼을 쥐다 보니 열심히 열심히 서로가 서로를 찔러 대는 것이다.
눈에 불이 켜졌으니 작동해야만 하는 기계이니까 말이다.

(삿 7:12, 개역)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
(삿 7:13, 개역)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삿 7:14, 개역)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
(삿 7:15, 개역)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고 이스라엘 진중에 돌아와서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고』
(삿 7:16, 개역)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삿 7:17, 개역)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 가에 이르러서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삿 7:18, 개역) 『나와 나를 좇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그 진 사면에서 또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삿 7:19, 개역) 『기드온과 그들을 좇은 일백 명이 이경 초에 진 가에 이른즉 번병의 체번할 때라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삿 7:20, 개역)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삿 7:21, 개역) 『각기 당처에 서서 그 진을 사면으로 에워싸매 그 온 적군이 달음질하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삿 7:22, 개역)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삿 7:23, 개역)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에서부터 모여서 미디안 사람을 쫓았더라』

아무리 살펴봐도 칼은 부재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일인 성령의 은사다.

상대방이 이룬 업적과 공적과 공든탑을 매일 매일 부순다.
자기 손으로 차마 할 수가 없기에
대신 부서뜨려주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성도의 교제란 바로 서로의 공든탑을 대신 대신 욕먹어가면서 허물어 주는 것이다.
피 앞에서 눈을 가리우는 것들을 대신 치워주는 것이다.
어 누가 가리노? 쓰레기 안 치우나 라고 먼저 본 사람이 치우는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이런 이질성을 이런 이단성을
진정성이 있다 또는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한다.

액모부인 개털됐네 라는 영화를 보면서
계속 차이와 반복의 내용이 보인다.
어제는 차반 읽다가 예레미야 설교가 보이더니만 ㅋㅋㅋ

끊임없는 남녀의 차이
그리고 지난 과거와의 반복을 끊고
어떻게해서든 성공해야만 하는 강박증으로 다가오는 사랑
실패하든말든 상관없는 히스테리 사랑
이 둘은 서로 뜨거웠다가 서로 속였다가 서로를 찾아다가 서로를 권태로워했다가
또 다시 서로를 존중해 하는 그야말로 어느하나 맞는 것이 없는 사랑
간격을 좁히기는커녕 점점더 간격의 차이가 벌어지는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하나인 사랑
이질적인 이단성만 누리는 사랑이다.

일부러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랑을
뻔한 스토리 뻔한 내용이지만
그래도 그 계류가 그 낭떠러지가
되도않는 위선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깔깔거리면서
노아처럼 마음껏 발가벗고 쿨쿨 코 골면서 잠자도
뻔히 에게 에게 저게 무슨 은혜 입은자이고? 저게 무슨 사랑이냐 라고
손가락질 뻔히 할줄 알면서도
마음껏 벗어버리는 막사랑 곧 막술먹기의 막취하기의 달인의 노아의 진정성처럼

막 발가벗겨도 상관없고
막 유치해도 상관없고
막 버림받아도 상관없고
막 죽임받아도 상관없고
막 쓰레기 취급 받아도 상관없고
막 교회 쫏겨나도 상관 없고
막 성전파괴 되어도 상관없고
(에게 에게 너거가 믿는 여호와가 너희들을 그렇게 망하게 했더냐? 꼬라지 좋다)

막 망해도 상관없는

오로지 십자가만 높이 높이 높이 세워졌다면
이것보다 더 진정성이 있는 것이 어디있는가?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십자가 보다 더 진정성이 있는 것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

반드시 이단 취급 받았던 그 이단 나사렛의 죽음이

나보다 옳았음을

이 허상의 사랑 우상의 사랑
허구의 사랑을 보고서
다시한번더

이단 취급받은 십자가가
이 어리석다 취급받은 지혜가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 지혜였음을
세삼스럽게 또 다시한번

고개 들어서 보게 되었다. 어 누구야? 누가 내 목을 비틀어 꺽었어? 아 아파라 아이구 목이야

아무리 봐도 실상(현실)은 성전 교회인데, 예수는 이단인데
이단 나사렛 예수가 참성전이고
평생을 목숨걸고 짖는 저 성전은 돌 위에 돌이 남겨지지 않는 허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성전을 허물었으니 아뿔사

주여 뉘 시니이까?

(행 9:5, 개역)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22:8, 개역)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 26:15, 개역)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캬 이 이질적인 진정성의 음성
세상 어디에도 없는 목자의 음성

그러나 감사하게도 감사하게도 말도안되는 일이 벌어졌다.
삼일 만에 짖는 성전이라니? 우상이던, 이단이던, 뒤바꿔 친 것이다.
우상을 거치진 않고서는 참형상을 알길없고,
죽음을 거치지 않고서는 생명을 알길이 없다.

아 뿔 사 ~~~~ 그래서 우리를 불뱀에게 물리도록 했었 었었어야만 했었 었 구나  ㅋㅋㅋㅋ 
아 그래서 뱀이 그렇게 물었구나 얼마나 아프던지
아 그래서 사단의 가시를 빼지말라고 하셨구나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 라는 이질적인 이단 사랑이

참 사랑이 될 줄이야? 아뿔사 허걱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ps 

제발 좀 막사세요 라는 말을 자주 한다.
정말 정말 진정성이 있는 말인데
(어떤 놈은 이것을 흉내내다가 개털되었다 ㅋㅋㅋ)

오히려 놀랍게도 진짜 진짜 진정성의 말이기 때문에
전혀 진정성이 없는 말로만 들려야만 하는 것이다...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미쁘지 못한 시험들게하는 실족케 하는 말로만 취급당해야 한다.

십자가는 왜 이렇게만 할까?
오로지 마귀 보란듯이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요즘 세상에 무슨 마귀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해하면 아니 아니 아~~니 돼오 ~~~~~~~~~~~ㅎㅎㅎ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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