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데 사람

디도서 1:12 그레데 사람 그레데 사람들을 욕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인간 세상 전부를 욕하는 말입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우상은 인간에게 욕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무당을 곁에 두고 사는 식이라고 보면 됩니다. 무당은 초월적인 것을 말하고 알려주는 일을 한다고 알고 있지만 더 정직하게 말해서 기존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고 적당히 수정과 보완책을 제공하는 자라는 인식이 있기에 세상 사람들이 무당을 자리를 마련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 무당, 곧 우상마저 기존의 인간들의 말을 들어야하며 고분고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특별한 경우에는 초월적인 신

얀네와 얌브레

디모데후서 3:6-10 얀네와 얌브레얀네와 얌브레는 애굽나라의 마술사들입니다. 처음에는 모세가 행한 기적과 거의 비슷한 기적을 행했습니다.(출 7:11,22/8:7) 그러나 연이은 기적에서 이 마술사의 능력에 한계를 드러냅니다. 애굽 땅의 티끌을 모세가 지팡이로 치니까 애굽 온 땅에 이가 그득해서 사람과 가축에 기어올랐습니다. 하지만 애굽의 마술사들은 이것을 모방해내지를 못했습니다.(출 8:18) 마술사들이 자신을 고용한 애굽 왕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입니다.”즉 인간의 모방과 흉내마저 바닥을 드러낸 겁니다. 곧 모세의 재앙 기적은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심판성을 담고 있었

행위와 믿음

에베소서 2:9 행위와 믿음성경에서 ‘~아니요’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세상 것과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인간의 행함으로 형성된 판을 염두에 둘 때에 성립하는 의미들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들이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믿음에 의미를 두는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아니요’를 필히 삽입시켜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정답을 찾을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질문 자체가 엉터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질문하고 하나님께서 답을 주시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이에 ‘~아니요’를 집어넣어야 합니다. 일단 시

하나님의 유언

히브리서 9:15-17 하나님의 유언한때 살았던 자가 죽어가면서 여전히 살아있는 남은 사람들에게 말을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과연 이 유언이 실효성이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유언이란 자신이 지상에 살아있을 때, 못다 이룬 것을 후손들이 마저 해주기를 바래서 남기는 말입니다. 이는 살아있었던 시절의 자아와 죽고 난 뒤의 자아가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을 때나 의미있는 겁니다. 만약에 죽고 난 뒤에 그 자신이 처한 환경이 살아있을 때에 감히 예상도 못한 엄청난 차이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자신이 후손들에게 남긴 유언에 미련 갖겠습니까? 도리어 자신의 무지함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나라

관용

디도서 3:1-2 관용 관용하는 그 배후의 마음가짐은 “안됐다. 측은하다, 어리석다, 실수하고 있다, 가련하다”이다. 세상은 끝났음에 불구하고 여전히 미완성된 채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고 여기는 것은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바보 같습니다. 권력자란 그들의 원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더 센 권력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권력자들에게도 관용하는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난 자도 모르는 자와 사소한 세상 일로 인하여 다투거나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성도의 이러한 마음 자세는 성도 자신이 사실상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고난

빌립보서 1:29-30 은혜와 고난은혜란 선물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선물이 고난이라면 믿어지십니까? 이 고난을 ‘애매한 고난’이라고 합니다. 즉 억울함에서 오는 고난이라는 겁니다. 이는 곧 ‘믿음’이란 예수님의 억울함에 동참되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것을 지키고 방어하려고 합니다. 모든 생물체의 본능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세계란 원래 그러합니다. 아무런 원인이나 이유도 없이 저절로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안에 ‘각자 나의 것’으로 무장하며 냉정하고 단호한 얼굴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단호히 배격하고 자기에게 이

용서하지 않으리

고린도후서 13:1-2 용서하지 않으리하나님께서 세상에 던지시는 가장 강력한 무시는 ‘용서하지 않음’입니다. 출애굽기 33:19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음’이 무서운 이유는, 이미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저주를 당해도 마땅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형편을 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철딱서니 없이 구는 어린 자식이 있다면 부모는 이렇게 말해주게 됩니다. “이렇게 까불면 엄마가 멀리 가버린

십자가만 자랑

갈라디아서 6:14 십자가만 자랑사람들의 자랑이란 현재 그 인간이 걸치고 있고, 둘러치고 있는 환경에서 나옵니다. 즉 “나 지금 이 안에 들어 앉아있다”는 겁니다. 고급 아파트를 사놓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을 때, 카페 앉아서 하는 것은 별 효과도 없고 실감나지 않을 겁니다. 직접 집에 초대하듯이, 십자가를 자랑할 때는 직접 ‘십자가 안에서 만나자’는 말 외에 다른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십자가를 대체할 만한 것들을 가지고 십자가를 설명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누가 선교지에서 심한 고난을 당하는 예든지, 아니면 본인이 난치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든지 아니면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을 ‘십자가의 고통’인 것처럼 곡해

공의로운 심판

데살로니가후서 1:3-5 공의로운 심판 공의로운 심판이란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부터 먼저 챙기는 그 사태에 대한 심판입니다. 즉 ‘나의 위한 심판’을 주님께서 행해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한 심판’이십니다. 따라서 공의로운 심판으로 인해 구원이 되려면 먼저 주님께서 당하신 그 경우에 합류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라는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성립이 ‘세상 나라’에 대한 심판 작업을 통해서 진행된다는 뜻입니다. 세상나라는 세상나라 나름대로 공의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든 인간들이 합세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말하는 ‘공의’란 필히 나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사단의 일군

고린도후서 11:13-15 사단의 일군 사단의 등장은 필히 복음의 등장으로 야기된 현상입니다. 인간 세상은 추상적인 직위라고 할 수 있는 왕의 자리를 쳐다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취하게 됩니다. 권력의 구심점에 대해 자진해서 복종하므로 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겁니다. 스스로 복종하고 싶은 심정에 입각한 체계 안에서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이 현실은 필히 정치성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즉 “우리 중에 누가 최고의 자리에 앉을 만한 위인인가?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자!”는 쪼로 나오는 겁니다. 정치란 곧 최고 권세의 자리를 구체화하는 활동을 말합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그 속성에 의해서 최고의 권

인치심의 삶

에베소서 4:30-32 인치심의 삶도장을 새긴다는 것은 소유권을 행사하실 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눈으로 봤을 때,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항상 홀로입니다. 옆에 유령이 붙어 있다고 해도 눈에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을 볼 때에 홀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은 본인도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인정하면서 살아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세상 각 사람들에게 악마나 귀신이 늘 따라붙고 있다고 인정된다면 그런 안목을 지닌 그 사람은 누구와 함께 있을 때에 가능한 일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의 인치심’이 나옵니다.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니 계신 게 아닙니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지 못

예수의 흔적

갈라디아서 6:17-18 예수의 흔적이 세상 살면서 괴로운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인간이 자연과 관련해서도 힘들지만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는 힘듭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를 ‘신’으로 옹립하고자 하는 성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절대자’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절대자에 맞는 환경을 조성하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늘 불안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억제할 수 없는 본능, 즉 절대자로 살고 싶은 본심이 자연으로부터도, 그리고 인간으로부터도 수월하게 달성할 수 없도록 막힌 있는 이 현실이 싫고 미운 겁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혹시 내가 어느 정도인가를 본인이 모르고 있는 게

하나님의 의

고린도후서 5: 20-21 하나님의 의 인간이 하나님에게 바치고 싶은 것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사람이 누구에게 선물을 주던 무엇을 베푸든 간에 필히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가치를 알아달라는 겁니다. 이 성향이 하나님에 대해서 통하는 줄로 인간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꼭 간직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에게도 내놓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도 신처럼 살아보자”입니다. 즉 최고의 위치를 맛보고 싶은 겁니다. 신에게 온갖 아부를 다하면서도 실은 신으로부터도 인정받아 신과 같은 레벨에서 놀고 싶은 겁니다. 그 누구로부터도 평가받지

율법의 저주

갈라디아서 3:10-14 율법의 저주인간이 저주받을 자들이 아니라면 애초부터 율법이 인간에게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인간이 저주받을 자이기에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찾아든 겁니다. 인간들 쪽에서도 쉬지 않고 신을 찾았습니다. 신을 사모했습니다. 신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그런 신들이 모두 가짜인 이유는, 신을 찾는 본인들이 곧 ‘저주받을 자’라는 내용으로 응답하는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꾸준히 이 지구상에 살아왔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도 모르고, 어떻게 역사가 마감될 것인가도 모르는 채 그냥 자신들이 태어난 그 시절에 같은 종류의 인간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들과

감독의 자격

디모데전서 3:1-7 감독의 자격감독의 자격은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악마를 주님께서 정죄하는 것은 ‘세상 것을 가지고 교만’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악마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은사를 악마에서 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선물과 땅에서 유통되는 땅의 산물을 잘 대비한 것이 야고보서 1:4-7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

약한 사도

고린도후서 11:28-33 약한 사도 사도의 기억은 예수님에 의해서 복음 전파용으로 쓰여 집니다. 자신을 강자로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반대로 약자로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 쓰여 집니다. “나는 약하다” 달리 말씀드려서 “주님은 항상 나를 약하게 만들어서 사용하신다”입니다. 자신을 약한 자로 만드시는 주님의 작업에 주님의 원수들도 동원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줄 자들도 드물게 만듭니다. 쉽게 말해서 인위적으로 의지할 만한 것들을 다 끊게 하십니다. 이런 약함은 예수님께서도 초반을 겪으신 일입니다. 광야에서 40일동안 굶으시고 악마로부터 시험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지켜보시기만 했습니다. 아무도 옆에서 도와주시는 존재는

평균

고린도후서 8:9-15 평균 가난하기에 더 많이 내어서 전체적으로 동일하게 만든다는 논리는 참으로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의 평균’을 여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균’이란 독자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균등함을 추구하는 겁니다. ‘균일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거시적으로 보느냐 미시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뜻이 됩니다. 예를 들면, 만원경으로 밤하늘을 보면 많은 별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여기에 은하 한 그룹, 저기에 은하 한 그룹. 어떻게 보면 균일한 것이 아니라 독보적으로 존재해서 무질서하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작은 범주를 따

남자답게

고린도전서 15:13-14 남자답게 사회가 인정하는 남성다움의 보편적 특징은 ‘책임지는 존재상’입니다. 비겁하지 않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책임은 곧 희생을 필수로 요청받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희생하며 살아라”가 됩니다. 희생은 ‘자신의 행함을 자랑하지 않아야 하는’ 원칙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동네방네 떠벌이지 말아라 는 말입니다. 곧 희생이란 ‘자기를 힘 구축작업’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는 늘 손해보고 타인은 그 덕을 보는 관계에서 희생이 발생합니다. 요셉이 그러한 인물이었습니다. 억울함이 줄곧 그의 인생을 지배했고 방향을 잡아나갔습니다. 억울하지 않았다

부르심에 합당한 자

데살로니가후서 1:11-12 부르심에 합당한 자자신을 통합된 의식을 가지고 세상이나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자기를 원하는 것을 몽땅 다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진정 통합된 전부를 가질 만한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거가에 비해 우리 인간들은 조각조각 난 의식으로 분해되는 것이 합당합니다. 예를 들면, 집을 구입하면서 집 전체가 나의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창문 틀하나, 부엌 하나를 세밀하게 살펴보면서, 그것들이 여기 있게 내력과 이것이 갖추기 위해 수고한 모든 보이지 않는 모든 손길들을 생각해봅니다. 내 손과 내 지혜와 내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들이 우리 눈 앞에 있습니다. 즉

육체의 자랑

갈라디아서 6:11-13 육체의 자랑종교의 시작은, 자기 안에서 ‘신의 법’을 만들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그 ‘신의 법’은 인간이 최종 수행할 수 있다는 수준입니다. ‘신의 법’을 만드는 이유는, 신마저 인간들의 열정에 호응하라는 겁니다. 신은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신을 만들어냅니다. 대화의 통로를 인간쪽에서 마련해놓는 것이 마음 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니 결국 ‘신’이란 인간의 호응에 부응하는 식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신을 부르면, 신은 인간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와야 하는 양상입니다. 물론 이 때, 인간들은 전혀 다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나타난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

The Cross Pend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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