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죽으심

고린도후서 5:14-15 대신 죽으심사람들은 왜 자신이 힘들게 사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힘들게 생존에만 집착합니다. 근본 원인을 그때그때마다 병원 의사에게만 묻는 식으로 살려고 합니다. 성경 말씀보다 의학지식이 더 선호되는 이 현상마저 이미 ‘모든 인간은 죽은 상태’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죽었다’는 표현이 과학만이 최종 진리의 기준으로 인정받는 시대에서 ‘숨을 거둠’으로만 이해됩니다. 하지만 복음에서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집요하게 생존에 매달림’으로 표현합니다. 죽음에 대한 개념이 이처럼 다르게 된 것은 개개인의 죽음을 한데 모아 공통점을

영생을 취하라

디모데전서 6:11-12 영생을 취하라 하나님께서는 일관되게 일하십니다. 창세기 3:24에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확정하셨습니다.즉‘인간에게는 영생 안 주신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영생을 취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로로 인간에게는 영생이 허락되는걸까요? 영생이 주어지는 데는 ‘믿음의 선한 싸움’의 결과입니다. 이는 ‘믿음의 선한 싸움’이 없는 자는 그 어떤 경우라도 영생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주어지는 영생의 성격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유발한다는

사랑의 규모

에베소서 3:18-19 사랑의 규모‘충만’이란 예상 못할 정도로 넘치는 범주를 말합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충만의 폭주에 비례해서 작아집니다. 성도가 사는 재미나 즐거움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갈수록 작아지고 적어지는 겁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자신을 괴롭혔냐 를 철저히 수긍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로 인하여 속고 자기 지키기 위해 급급해서 악마에게 농락당해 왔습니다. 즉 “너의 것을 한껏 키워라”는 식으로 악마로부터 지시받고 살아온 겁니다. 세상은 ‘사랑없이’ 운용되는 곳입니다. 사랑 대신에 ‘선과 악’의 이념으로 사람들을 충동질해 오고 있습니다. 선한

예정하신 뜻

에베소서 3:10-11 예정 하신 뜻 신명기 18:15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은 ‘이스라엘’을 두고 말합니다. 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속량=속죄하심’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이 땅에 두신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은 실제적으로 역사상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 즉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게 하시고, 그 이스라엘을 유일한 역사

거짓이 아닌 두 가지

히브리서 6:16-18 거짓이 아닌 두 가지 거짓말이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감히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할 리가없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인간들 보기에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참된 하나님상’이 무너질 때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참/거짓 정도는 가려낼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이게 문제입니다. 인간들이 참이라고 여긴 것이 하나님에게 거짓이 되고, 인간들에게 거짓이라고 여긴 것이 하나님께서 참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인간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믿을 만한 대상이라고 여기면서 믿을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의 의도를 기피하

땅의 지체

골로새서 3:5-6 땅의 지체인간은 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땅의 지체란 ‘땅의 연속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어서 땅의 흙으로 합세된다는 것은 출생도 땅이라는 뜻입니다. 땅이 요소라는 인간의 육신을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세계는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에 수립과 더불어 없어질 세상입니다. 그 이유는,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의 요소로 장만되는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명예와 가치를 드높이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따라서 기존의 땅의 모든 요소들은 하늘의 요소에 의해서 부정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정당해야 하는 기준은 이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친히 오셔서

배설물과 의

빌립보서 3:8-9 배설물과 의 인간 속에 독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의로운 자로 간주하며 버티겠다는 겁니다. 다같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나’만이 의로운 자이고 싶어합니다. 비록 못 살고 못 먹고 비참하게 살고, 타인으로부터 밉상 받고 거부당하고, 몸까지 망가진 채로 살더라도 여전히 자신은 의로움 하나로 버티고 싶어합니다. 이게 바로 선과 악을 알게 된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인 여망입니다. “나는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천사같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전적으로 악하지는 않다. 이게 나야!”라고 주변을 향해 외치고 싶은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해하는 그

진리와 사랑

고린도후서 11:10-12 진리와 사랑구약에서 선지자의 등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필요에 의해서 투입된 자들입니다. 이들의 등장으로 인해 백성들은 자신들의 현 실정을 하나님의 관점에 의해서 조명 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관행에 익숙하게 마련입니다. 옳은 일이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줄곧 해왔기에 반복해서 무심코 살게 마련입니다. 자기 신체에 불편함이 없는 범위 내에서는 그게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불편해야 자신을 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이 ‘도적같이 오신다’고 말씀하시는 취지가 이런 분위기를 염두에 두신 조치입니다. 자기 만족과 자기 행복에

경건과 핍박

디모데후서 3:10-12 경건과 핍박 사도가 1차 전도때, 지금의 터키 안디옥에서 많은 개종자를 얻었으나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 그곳에서 추방되었습니다.(행 13:14-52) 이고니온에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선동하여 악감을 갖게 했고 바울 일행을 돌로 치려고 위협했기에 그곳에서 도피할 수밖에 없습니다.(행 14:1-7) 루스드라에서는 디모데의 고향으로 사도바울은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생각해서 제사하려고 했으나 바울과 바나가 이를 제지하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행 14:8-18) 그런데 안디옥과 이고니온애서 온 유대인들이 그곳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천국의 가족

디도서 1:5-9 천국의 가족디도라는 사람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 참석한 사람입니다.(갈 2:1-2) 그리고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이후 계속 함께 동행했으며 고린도교회에 파송되기하고 (고후 7:6/8:6), 그레데 교회를 돌보기도 했습니다.(딛 1:5) 사도는 교회마다 장로와 감독을 두고 싶어했습니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분명히 제시자가 각 교회에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장로와 감독이 이 일을 해야 할 사람입니다. 장로의 조건으로서 ‘믿는 자녀’를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장로’라는 직책이 교회에서 어버이의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는 교회

뒤로 물러가기

히브리서 10:37-39 뒤로 물러가기사람이 ‘뒤로 물러가는’ 이유는 주변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도의 내부에 들어와서 자리잡으신 분이 겪었던 그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성도의 외부 상황을 구성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가신 것은 그것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유일성’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집어넣습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란 먼저 가신 주님께서 ‘다 이루신’ 상황을 가지고 마중 나오신다는 말입니다. 자기 백성을 데리려 오신다는 말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아버지께로 가신 것을 성사시켰다면 자기 백성을 데리려 오시는 것도 가능하

범사에 감사

에베소서 5:20-21 범사에 감사세상은 멸망되기 위해 대기 상태에 돌입되어 있음을 아십니까? 심판모드가 작용하고 있음을 아십니까? 최후의 사이렌 소리가 귀에 들리십니까?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파멸 시나리오는 그동안 인간 하나하나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이 충분히 확인되었기 때문에 내려지는 합당한 하늘의 조치이십니다. 이렇게 되면, ‘범사’라는 것은 그냥 무의미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 이유가 움직이었던 겁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멸망 프로젝트에 준해서 빈틈없이, 착오없이 움직여 온 겁니다. 그러니 범사, 즉 모든 일에 감사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깔끔하게 세상을 끝까지 마무리해 주

빛으로 책망하기

에베소서 5:11-13 빛으로 책망하라 인간은 ‘개인’이라는 의식으로 무장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을 두고 객관적으로 보면, 모든 인간은 평균적인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각 개인은 이 평균적 인간됨을 거부하고 자기에게 있어 자기는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반적인 인간에게는 ‘타인’이라는 것이 허락되지만 ‘개인’에게 있어서는 엄밀하게 말해서 ‘타인’은 없습니다.자기 안에 오직 자기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타인 사이에는 환상이라는 상상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자기 주변에 누가 있더라도 ‘개인’을 유지하는 공간 안에는 타인은 없습니다. 오직 나만 있습니다. 이것

반대로 살기

고린도후서 6:7-10 반대로 살기‘미쳤다’는 말은 ‘정상이 아니다’는 겁니다. 즉 왜 정상인 범주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느냐에 대한 질책성 비난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이미 예수님께서 그 당시 권세자들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과연 예수님은 정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과연 ‘정상인지 아닌지’를 누가 평가하지요? 개

하늘의 시민권

빌립보서 3:20 하늘의 시민권 요한복음 1:12-13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라면 ‘사람을 따라 난 자’와 달라도 달라야 할 겁니다. ‘사람을 따라 난 자’들은 자기네들 끼리 비교하고 대조하고 경쟁합니다. 빌립보서 3:19에 보면,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의 최후는 이 세상 일로 마감이 됩니다. 그들

믿는 자의 모습

디모데전서 1:12-14 믿는 자의 모습신앙이 없이 신앙있는 척하는 것은 자신에 대해 자기가 고문하고 있는 중입니다. 타인의 시선을 감안해서 마음을 한없이 겸손한 척을 합니다.하지만 사도 바울의 신앙은 자신을 ‘주님에 대해 핍박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구체적으로 핍박 대상자가 있었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신앙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은 무심코 타인이나 그 누구에게 행한 자신의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예수님에 대한 핍박’으로 모아진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자기 가치와 생존에 목표를 둔 이상, 그 어느 한 순간도 예수님에 대한 핍박이 아닌 행위가 없습니다. 주님쪽에서 이 세상을 계속 압박하고 계

세상 정욕

디도서 2:11-12 세상 정욕 세상의 모든 의미들이 서로 얽혀 있습니다. 말씀 그 어느 것 하나를 제대로 지켰다고 해서 나머지도 다 지켰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 정욕 전부와 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대결하기 앞서 우리 자신이 이 세상의 자식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세상의 일부요 세상을 구성하는 한 요소입니다. 즉 우리 안이 세상의 요소로서 가득차 있는 겁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세상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 정욕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우리 내면 속으로 더 깊숙이 내려가면 인간은 칭찬 받기 위해 산다 할 수

그리스도의 고난

고린도후서 1:5-7 그리스도의 고난 교회가 올무가 된다는 사실도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서 통보됩니다. 즉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고난받으셨습니까? 예배당 유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교단이나 교회가 무너져내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 즉 ‘말씀 완성’을 위해서 고난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취지는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마귀와의 시험에서 그 내막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그 시험의 자리에 몰아세우신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 4:1) 그렇다면 성령받은 성도도 마찬가지로 마귀

사라의 임신

히브리서 11:11-12 사라의 임신인간의 예상은 가능성을 바탕으로 결과가 생기기를 바라는 겁니다. 만약에 이미 자궁이 죽었다면 이는 새로운 아기가 생기는 가능성이 전무(全無)함을 말해주는 겁니다. 구원받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들의 모든 ‘구원 가능성’을 배제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교회를 나가고, 하나님 믿는다면서 ‘천국 갈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통보받을 때 그 사람은 무엇을 획책하겠습니까? 이왕 이렇게 된 것은 남은 삶을 자신의 욕망에 준해서 즐길려고 할 것입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

새로운 심령

에베소서 4:21-24 새로운 심령증여, 선물이란 아무리 주겠다고 해도 주시는 분이 취소시키게 되면 받는 쪽에서 달라고 요청할 수 없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성령을 주시겠다는 하지만, 꼭 누구를 찝어서 반드시 주시겠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종교적 거래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지 못했을 경우에는 인간들이 성경 내용을 가지고 유사하게 모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다든지 사도가 살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해보는 식입니다. 조작이란 인간들의 눈과 시선을 의식해서 나오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즉 “이렇게 하면 사람들의 동의를 이끌어내겠지”라고 짐작해서 취해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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