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학 개론요약[1]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Ⅰ. 내용요약 제 1 장 기독교 예배에 대한 기초적 이해 종교는 문화의 핵이다. 한반도에 정착한 우리의 민족이 이룩하고 지탱해 온 문화의 흐름 역시 그 출발과 과정은 다분히 종교적인 영향을 받아 왔다. 우리의 문화는 어느 민족의 문화보다 종교성이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재래적인 토착 종교들의 모습이 “전통 문화”라는 이름과 함께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는가 하면, 오히려 더욱 왕성해 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소 짓는 돼지머리를 잘라 상 위에 올려놓고 촛불을 켜고 스님의 목탁소리와 주문에 맞추어 관리들이나 대회사의 중역들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생을 맡기겠다고 나서는 젊은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의 바른 선택이란 한 민족의 역사와 한 개인의 운명을 결정지어 주는 가장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기독교란 타종교에서 들을 수 없는 ‘구원의 종교’이다. ‘구원’이란 죽음의 현장에서 아우성치는 사람, 또는 죽어 버린 사람을 구출하여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뜻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전인적인 감격 속에 자신이 받은 거대한 은총의 주인 앞에 나아와 감사와 보답의 표현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예배라는 말의 우리말 뜻은“신을 신앙하고 숭배하면서 그 대상을 경배하는 행위 및 그 양식”이라고 정의되어 왔다. “예배”라는 말이 그 첫째가“아바드”라는 히브리어이다. 이 말은 “봉사”또는“섬김”의 뜻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는 “샤하아”라는 단어이다. “굴복하는 것” 또는“자신을 엎드리는 것”으로서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이다. 이 말은 존경의 표시로“절하다” 또는 “굽어 엎드리다”, “입맞추다”라는 뜻으로서 순종한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끝으로 영어에서 표현하는 worship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기로 한다. 원래 “워십”이라는 말은 앵글로색슨어인 ‘weorthscipe'에서 나온 것으로 가치라는 말과 신분이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이 말의 뜻은“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자”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예배의 내적의미는 예배의 대상 앞에서 한 인간은 자신의 인간적인 요소를 다 버리고 그 대상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다. 왜 기독교의 예배는 이처럼 예배자들이 희생적 존재로 예배의 현장에 임해야 하는가? 그것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으며,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가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또한 어떠한 희생적인 일도 예배의 대상을 위해 스스로 감수할 수 있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성숙한 예배자들은 무엇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와 있으며, 어떠한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이 여기 예배 현장에 서 있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할 때 그 예배자는 맹종의 신앙인이 되기 쉽고, 또한 그러한 자세 속에서는 예배의 깊은 의미와의 만남을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예배자들은 최대한 다음의 몇 가지 신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필요로 한다. 1) 예배의 대상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2)오늘도 우리가 간격 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예배의 현장에 설 수 있도록 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한 이해이다. 3)오늘의 예배를 역동적으로 움직여 가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하시고 그 생명력을 불러일으키신 성령님의 기능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이다. 4)예배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인 이해의 요구는 예배자들의 가족적인 개념의 설정이다. 5)예배에는 연속성과 확산이 있어야 한다. 제 2 장 예배를 위한 교회 21세기의 문을 열면서 세계의 교회를 볼 때 한국교회만큼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도 드물다. 하지만 교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일만 되면 성경과 찬송을 끼고 나서는 무리들은 예배를 “보기”위하여 오는 사람들이지 “드리기”위하여 오는 무리들은 아니다. 교회란 무엇일까? 구약에서 대표적인 단어는‘카할’이라는 단어였다. 뜻은 “모인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주로 시정이나 군사적인 목적을 위하여 모일 때(창49:6, 민22:4)사용되었던 말이기도 했다. 이 단어는 후에 70인 역에 헬라어 ‘에클레시아’라는 말로 옮겨졌다. 오늘의 교회에서 가장 적절한 말은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교회”(롬16:16, 갈1:22)라는 가장 분명한 형태로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무리들의 모임이었다. 교회의 의미는 사도 시대에 와서 구체화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만을 모아 신앙의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이 공동체를 가리켜 교회라고 불렀다. 기본 성격과 임무에 관해서는 그 특수성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모임이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로 친히 제정하시고 조직하신 그리스도의 왕국이고(마3:47), 하나님의 집이며, 또 가족(행2:47)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는 유일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거룩한 속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사도적인 전승을 이어 나가야 한다. 교회의 기본 임무는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성례전에 참여하는 일이다. 또한 교회는 섬김을 사명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코이노니아를 실현해야 할 책임이 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사명 중에서 깊은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가 개혁 당시에 개신교 신앙의 지조를 천명하였던 1530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에서 교회를 “복음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그 복음에 일치되게 성례전이 거행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라고 정의를 내린바 있다. 교회가 그 존재의 목적 자체를 예배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제일 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폴 틸리히는 “예배란 교회의 고차원적인 응답이며 그 존재의 궁극적인 터전(ground)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와 하나님과의 연관만으로 모든 것을 단순적 개념에서 만족해 버리는 이러한 오늘의 경향은 교회내의 새로운 고립주의를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공동체 의식을 파괴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 공통성을 찾는데 필요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연구결과의 보고서는 그 문제를 셋으로 분류하였다. 1)성찬성례전을 예배의 핵심으로 여기는 예배 공동체이다. 2)설교 중심의 예배를 예배의 기본적인 요소로 인정하고 있는 교회의 형태이다. 3)성령님을 모시고 그 역사하심에 따르는 예배 전통의 교회이다. 그렇다면 가장 이상적인 예배의 모양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은 앞에서 열거한 세 가지요소를 모두 수용하여 예배를 드리는 일이다. 예배드리는 자들이 어떤 심성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시간낭비일 뿐만 아니라 섬기는 신에 대한 불 경건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존 윌리암스같은 학자는“예배의 핵심은 신앙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되며,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함께 내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하는 채무감도 아울러 느껴야 한다. 그럴 때 성도된 그리스도인들은 그 마음속에서, 그리고 행동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응답적인 존재들이 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러한 상태의 예배 현장은 마냥 즐거운 순간의 연속이 된다. 제 3 장 예배의 역사적 발전 기독교의 경전은 구약과 신약으로 분류된다. 구약의 말씀은 신약의 모체이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이 드린 예배의 실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신약성경은 하나님과 백성간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계약의 성립이다. 곧 구약성서부터 준비해 온 구원의 완성을 이룩한 내용을 담은 성경이 바로 신약이다. 기독교 역사에 이 66권의 말씀은 모든 신학과 교회의 기본 원칙으로 숭앙을 받아 오고 있다. 특별히 예배의 내용과 그 발전을 이해하려 할 때는 성경을 떠나서는 그 연구가 도저히 불가능하다. 아담의 아들가인과 아벨에 이르러 그들이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가지고 제단을 쌓은 일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들의 심성을 따라 응답하셨다(창4:3). 이것은 피조물들의 본능적인 예배 행위라고 하기보다는 아담 때부터 맺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계승했던 행위로 보게 된다. 아브라함은 하나의 족장으로 출발하면서 제사장과 예언자와 통치자의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칼빈의 말대로 그는 하나님을 향한 제단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다니면서 어디서든지 필요성을 느낄 때마다 제단을 쌓았다. 이러한 강한 예배 의식은 이삭, 야곱(26:24-25)에게 계승되었음을 보게 된다. 구약에 나타난 모세라는 인물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펼친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획을 긋는 인물이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십계명이라는 새 계약을 그 백성에게 부여하셨으며 예배를 위한 성소의 내용과 규례 문제, 레위 지파를 통한 제사장 계열의 확정, 그리고 제사 제도의 제정 등을 명하셨다. 모세 시대에 제정되었던 성전 예배는 솔로몬의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에 그 극치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중요한 변화는 1)십계명이 담긴 법궤를 성전에 모셨다. 2)진설병과 황금 등대를 비롯한 기구들로 성전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3)찬송과 함께 수금, 나팔 같은 악기를 사용하였다. 4)예배의 참례자들이 십일조를 비롯하여 각종 제물을 드렸다. 이것이 바로 성전 예배의 특수한 면이다. 주전 444년 느헤미야의 인솔 아래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마지막 귀환을 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때의 성전 회복과 종교 재건이야말로 하나의 민족적 신기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배에서는 동물을 제단에 바치는 의식이 점차 약화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집전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예배자들의 참여 속에 경청되어 이해를 가져오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면모의 예배는 오늘의 개혁 교회가 갖는 말씀 중심 예배의 전승근원이 되고 있다.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사역과 예배는 어떠했는가? 예수님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어떤 의식적인 제도보다는 심령에 부끄러움이 없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하는 회개 운동을 전개했다. 예수님은“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는 예배”를 강조했다. 예수님은 예배의 단절자가 아니라 완성자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언약된 계명으로 예배 중심의 종교성과 실천 중심의 윤리성을 계속 가르쳤다. 사도들의 사역과 예배의 형태는 먼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사도들의 예배와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회당을 중심으로 한 예배와 그들의 활동은 뚜렷하였다. 사도들도 예수님을 전할 때 회당 예배를 중심으로 하여 유대인들과의 접촉을 시도해 왔다. 그러나 사도들의 예배 활동이 유대교의 핍박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예배 예전의 정립이 무척 어려웠다 그렇기에 자연적으로 그들의 일차적 관심은 복음 전파에 있었다. 초대교회는 어떠했는가? 예수님은 왜 그토록 심한 반대에 직면하여 급기야 십자가의 고난까지 받아야 했을까? 한마디로 유대의 전통 사회에 도전하는 새로운 세계를 선포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성전과 회당 예배의 모든 뿌리를 자신의 사건에 근거하도록 제자들을 가르쳤다. 초대교회는 예배의 내용이나 형태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연히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집중적인 노력과 정력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찬성례의 정기적인 거행은 당시의 유대교와 로마의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중세로 가면, 기독교의 역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온 사건은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재위306-337)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공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게 되면서부터인데, 동굴들을 찾아 이십 명 또는 삼십 명씩 분산되어 소집단으로 모이던 기독교 무리들이 지상에서 햇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부작용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하였다. 의식 위주의 교회는 드디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간의 예배 양식에 대한 심각한 대립을 야기 시켰으며, 그 끊임없던 논쟁의 결말은 1054년 동방과 서방교회의 영원한 분열이라는 불행을 남겼다. 후에 루터를 중심으로 한 개혁의 기수들이 미사적 예배형식을 고수했고, 여려 형태의 예배 예배인식이 뿌리를 내려가게 되었다. 청교도를 중심으로 한 개혁자들의 후예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전통보다는 개척을 새로운 삶의 철학으로 삼은 그들의 줄기에서 본격적인 변화들이 일어났다. 유렵으로부터의 이주가 많아지면서 청교도의 신앙 형태와 삶의 장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종교 개혁자들에 비해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교회의 새 역사를 펼쳐가게 되었다. 19세기 중엽까지 유렵의 개혁 교회들은 예배에 대한 특별한 변동이나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교회들은 전술한바와 같이 청교도들의 정신을 그대로 지속시키면서 탈 의식적이면서도 오직 말씀 중심의 복음주의적인 특성에 정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예배에 대한 가벼운 이해와 무관심은 새로운 선교지인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을 비롯한 피 선교 지역의 교회에 예전이 없는 순수한 집회 중심의 예배를 이식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855년 찰스 베어드가‘장로교의 예배 의식’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개혁자들이 주창하고 사용했던 예전을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을 때 그 당연성을 대단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장로교를 비롯하여 감리교, 그리스도의 교회, 침례교회에 이르기까지 교단별로 예식서를 계속적으로 개정하면서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현대 교회의 예배 동향을 말할 때마다 빠뜨릴 수 없는 것은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들의 ‘현대 종교 개혁’이라고 불리는 이 회의를 통하여 지금껏 드렸던 그들의 라틴어 미사를 과감히 탈피하고, 미사를 드리는 사람들의 모국어로 대체하도록 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예배 회복 운동의 여파는 한국교회에도 상륙하여 1980년부터 예배학 고수들이 등장하였고, 현재는 신학교마다 전임 예배학 교수들이 활발하게 연구 활동을 펴면서 한국교회의 예배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상황이다. 제 4 장 어떤 신을 누가 예배하는가? 종교의 기본적인 3대 요소를 든다면 믿는 대상과 그 대상을 섬기는 의식과 그 종교가 제시하는 내세관이라고 하겠다. 기독교는 이상의 3대 요소를 훌륭하게 지시하는 가장 우월한 종교로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으며, 어떤 종교도 그 내용을 같이할 수 없는 고도의 예배 의식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지속으로 인한 내세관이 가장 확실하게 제시되어진 유일한 종교이다. 기독교의 예배의 대상은 우상이 아니다. 우상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신의 형상이나 개념의 표현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러한 조작된 종교를 허용하시지 않으셨으며 자신에 대한 일체의 형상마저 만드는 것을 금하고 계신다. 타종교들의 예배 대상은 인간이 만들었기에 인간 주도적인 예배의 내용과 형식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으나, 기독교의 예배는 예배의 대상인 창조주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피조물이 순종할 따름이다. 기독교 예배의 주체는 인간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응답하는 추종자들일 뿐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단순한 명령에 의하여 행해질 뿐이라고 판단되어질 때, 인간에게는 노예근성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러므로 예배는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응답이라는 또 하나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예배를 통하여 예배드리고 있는 자신의 생명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구원받은 기쁨”의 응답적 표현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한 새 계약을 주셨다. 예배하는 사람? 이란 어떤 이들을 말하는가? 먼저 예배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대화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예배하도록 명령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피조물로서 자신의 실존과 창조주를 깨달아 아는 존재들이다. 또한 구원받은 무리로서 그 구속의 과정과 주체를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그 대상에게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될 존재이다. 그렇다면 예배자에게 필요로 하는 요구사항들을 찾아보자. 먼저 예배자는 믿음이 있어야한다. 이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배자는 지적인 이해를 갖추어야 한다. 많은 예배들이 자신의 지성적 기능에 의한 예배를 드리기보다는 감정에만 도취된 채 흥분 상태 속에서 맹목적으로 예배하는 심각한 문제를 노출시키고 있다. 그리고 예배자는 언제나 자기결핍을 느껴야 한다. 자기 결핍을 느끼지 못한 이들의 대표는 바리새인들이었다. 자신의 결핍과 모순과 허물을 알고 있지만 정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찾아와 용서를 구한 무리들은 하나님께 환영을 받고 마음의 기쁨을 얻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맹종의 예배를 드리는 존재들이 아니다. 만인 사제론은 재세례파와 같은 급진주의 개혁 종파들에 의하여 사제 무용론 내지 사제 경시현상 등의 심각한 부작용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오늘의 어떤 교단에서 신학 훈련의 중요성이나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회중의 뜻에 따라 즉석에서 목사로 안수하는 모습을 발생시켰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는 사도적정신과 사명을 확고히 지닌 목사에 의하여 그 예배가 집례되고 말씀이 성실히 선포되어야만 더욱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성직 수행자의 자격에 관해 알아본다. 기독교 역사에서 예배 현장에 임하는 사제란 언제나 희생적 존재로서 성별된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레위지파 적 계승과 사명을 인식하고 갖은 희생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인 까닭에 모든 성도들이 우러러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성직자들의 상황은 그 성별된 사명과 기능에서 이탈한 채 우대받는 직업인들로서 살기 원하고 더불어 세속적 삶을 만끽하려는 퇴폐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몇 가지 갖추어야 할 조건은 먼저, 개인적인 소명과 그 응답이 있어야 한다. 또 부름 받은 자의 준비됨이다. 그리고 영성의 능력이다. 절실히 요구 되는 또 하나의 조건은 인격적인 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문을 위한 노력과 용기와 근면과 건강을 지켜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조건을 충족할 때 사역의 역사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5 장 예배 내용의 역사 예배란 예배자의 마음과 뜻과 정성이 모아진 총체적 표현이어야 한다. 자신의 신앙과 교리 또는 신학이 합리적이고 적극적으로 포함되어야 하며 현재까지 지켜오고 있는 성경적 내용과 전통의 핵심들이 내포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문제에 대하여 네빌 클라크는 그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예배 예전이란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응답 사이에서 발생되는 구속적 만남의 장소이다. 그러기에 이 만남의 장소에서는 그 예배의 기준과 구조가 성경적으로 기초되어져야 하고 신학적으로 뿌리가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한바 있다. 예배의 내용과 표현이 얼마만큼 역동적이고 신선한가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회중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유대 민족이 그들의 역사는 여호와를 예배하는 것이 전부였고, 그 명령과 섭리 속에서 민족의 존폐가 결정되어 왔다. 모세에 의하여 수록된 제사제도는 레위기를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에 나타난 예전의 형태나 레위기에 나타난 각종 희생제사 등은 그 유형적 분석이 가능하나 효율적으로 우리의 예배와 연관시키기에는 많은 거리감이 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월절은 원래 농목 사회에 근거를 둔 누룩 없는 빵의 절기로서 첫 결실들을 바치는 계절이었으나, 후에 출애굽의 사건과 함께 해방절로서 신학적인 의미를 갖는 절기가 되었다. 오순절은 원래 맥추절로 불렸으나 후에 시내산의 언약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예전 가운데 행하여지게 되었다. 그리고 장막절은 본래 광야에 천막을 치고 포도와 올리브를 거두면서 그 결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였다. 구역에서 지켜지고 있었던 이러한 절기의 감각은 기독교가 이어받은 중요한 유산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희생제사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다. 바벨론 포로 이후 잃어버린 성전 예배를 회당 예배로 대체시키면서 예배 요소를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장엄한 예배 의식은 축소시켰으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심을 키우려는 노력만은 언제나 뚜렷했다. 신약의 예배 내용에 있어서는 먼저 성경을 읽는 일이었다. 그리고 기도의 순서가 있었고, 무엇보다. 예수님은 영적인 면을 강조하셨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고 하신 말씀 속에서 우리는 참 예배를 위한 영적인 운동이 민중 속으로 파급되어 가야 할 필요성과 함께 그것이 예배의 내용으로 정착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성찬성례전을 제정하신 일이다. 최후의 식사를 하면서 자신을 모든 인류의 죄를 지고 희생당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임을 밝히시는 사건이었다. 이로써 지금까지 구약적인 예배의 의미가 새로운 예배로 전환되었다. 그 후 사도 시대의 예배 내용을 보면 맥스월은 지적한다. 1)초대교회의 교인들은 한동안 회당이나 성전예배에 참석했다. 2)그들은 모임을 자주 가지면서 애찬이라 불리는 공동식사를 했다. 3)그들은 이 식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부탁했던 명령을 받아 성찬성례전을 이어갔다. 4)이런 예전이 끝날 무렵에는 예언이나 방언을 비롯한 특별한 은사를 나타냈으나 대단히 조심하며 그것을 행하였다. 그러나 맥스웰은 2세기 후반에 이르러 두 번째의 애찬식 모임과 네 번째의 은사 교환 등은 기독교 예배의 구심점 밖으로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다. 서방교회는 로마인들의 심성 그대로 실용주의 정신이 예배 속에 적용되어졌다. 동방 교회와는 외형상의 모습도 전혀 달리하게 되었으며 예배의 내용마저도 단순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단순화 작업이 성전내부의 모든 장식이나 상징에 있어서까지 개혁자들이 지적했던 차원에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서방 교회도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감각을 살리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경외를 갖도록 하는 성전의 장식과 구성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제 6 장 종교 개혁과 예배 16세기의 종교 개혁은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기적적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그 시대의 현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퇴폐의 지경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질서가 무너지고“패역한 세대”로 전락된 중세의 교회와 사회의 어두움은 새로운 세계의 출현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놓았다. “무엇 때문에 중세시대가 그토록 어두움 속에 방황하였는가?” 먼저 신학의 부재와 교회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행위인 예배의 현장이 그 의미를 잃고 하나님과의 만남의 역사가 발생되지 못한데서 이런 결과가 파생되었음을 간과 할 수 없다. 미사의 집례 행위는 사제들의 독점적인 무대로 차차 변질되어 갔는데, 사제들의 절대권이 지나칠 정도로 숭상을 받게 되었다. 나아가 그들의 탈선과 직결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은 예배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개혁의 필연성이 의미를 상실한 미사에서 부터였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16세기 초반의 로마 교회를 보면서 개혁의 필연성을 절감한 것은 수많은 개혁자들 및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들 모두가 참된 교회로의 회복을 위한 신학의 정립과 교회의 구조적 개혁을 소원했다. 루터와 같은 개혁자들은 지난 천여 년을 지속해 온 예전의 모든 절차와 내용을 그대로 지키면서 부분적 수정을 하기 원했는가하면, 쯔빙글리와 같은 개열의 개혁자들은 교회를 병들게 한 당시의 미사를 대폭 간소화하여 말씀과 성례에만 초점을 두었던 초대 교회의 예배 형태로 돌아가기를 주장했다. 이들 개혁자들이 공통적 쟁점들은 다섯 가지로 볼 수 있다. 1)로마 교회가 성찬성례전만을 고집하는 미사를 반대하는 데 개혁자들은 노선을 함께 하였다. 2)로마 교회가 주장하고 지키고 있던 성찬의 화체설에 대하여 개혁자들은 한결같이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3)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부재한 미사를 한결같이 지적하고 나섰다. 4)모든 예배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국어로 집례되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5)하나님과 예배자들의 중간 존재로 군림한 사제의 위치를 부정하는데 뜻을 같이했다. 이와 같이 그들의 공동된 다섯 가지 견해를 열거해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통적의견과는 다른 분열을 초래한 개혁자들의 독자적 주장들에 관해 보고자 한다. 개혁자들마다 사상적 배경과 활동 지역이 달랐기에 그들의 주장도 구체적인 문제 앞에서는 하나로 될 수 없는 바가 적지 않았다. 먼저 독자적 형태를 취한 예배 형태로는 1)루터계와 성공회 계열이 펼친 예배이다. 2)스위스의 취리히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예배의 개혁을 주도했던 쯔빙글리와 그 계열이 펼친 예배이다. 3)예전이 없이 말씀만을 추구했던 재세례파의 예배이다. 4)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부처, 칼빈, 낙스의 예배이다. 가톨릭 미사를 대부분 계승한 루터교의 문제점과 지나친 개혁을 주장한 쯔빙글리와 재세례파의 입장 차이를 최대한 좁힌 예배 예전을 개선교의 예배 속에 이행함으로써 사실상 개혁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다음으로 개혁자들을 함께 묶을 수 없었던 중요한 제2의 쟁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찬성례전의 논쟁이다. 1529년 10월 초, 종교 개혁의 막후 공헌자였던 헤스의 필립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연방 체제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개혁파의 중요한 신학자들을 마르부르크에 소집했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던 마지막 항목“그리스도는 어떻게 성찬성례전에 임하시는가?”라는 문제와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가 실질적으로 성찬성례전에 임재하신다”는 루터파의 주장과“성찬성례전은 사람의 살과 피의 신비한 상징이며 이것은 계속적인 기념 속에서 지켜지는 것”이라는 쯔빙글리의 주장은 서로 일치점을 찾지 못한 채 기어이 동행의 역사를 외면하고야 말았다. 개혁자들이 결별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성찬성례전에 대한 자기주장들을 끝내 굽히지 않은 사실은 그 사실자체가 너무도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 7 장 예배의 다양성과 본질 개혁자들이 서로의 입장을 달리한 후에 개신교는 다양한 지체들로 분리되어 교단이 형성되었다. 개신교는 개혁자들과 그들의 활동무대에 따라 각각 다른 지체들을 형성하였다. 예배는 자연적으로 통일된 예배가 아닌 다양한 예배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어떤 교단의 예배를 개신교 예배라고 지칭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부터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일치되지 못한 예배의 현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현재적인 분석을 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설교와 성찬성례전을 매주일의 예배에서 지키는 교회를 본다. 대표적으로 두 교회를 들 수 있다. 영국국교회와 감독 교회이다. 즉 성공회를 말한다. 이들의 교회는 모두가 매주일의 예배에서 설교와 성찬예전을 철저히 지켜 나가는 교회로서 말씀과 성례전의 두 축의 균형을 유지한 예배를 지속하고 있다. 여기에 근접한 줄기를 가지고 있는 교단은 감리교로서 영국 국교회 신부였던 웨슬리의 신학과 예배이다. 어느 교단보다도 예배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으로 말씀만을 강조한 예배를 매주일 지속하고 있는 교회를 본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이해하고 그것을 강조하는 예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여기에 속한 교회들은 장로교회와 회중 교회와 같은 계열이다. 이들의 설교는 전통적으로 주해 설교 중심이 되었고, 말씀의 기본적인 의미 해석과 말씀이 주는 교리적인 측면의 제시, 그리고 회중의 삶에 적용되어질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 말씀과의 만남을 철저히 시도했다. 셋째로, 체험적인 신앙과 은사를 예배에서 강조하는 교회를 본다. 기사이적이나 방언 등을 통한 직접적인 신유의 은사 경험을 말씀이나 성찬성례전보다 우선적으로 하는 것이 이 교회들의 특성이다. 설교의 처소도 예배당 안의 강단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들판에 천막을 사용하여 누구나 다 듣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끝으로 형식적인 예배보다는 내적인 말씀의 계시를 강조한 교회를 본다. 이들은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감동을 받는 것을 예배의 중요한 행위로 여기고 있다. 초기의 침례교의 일부가 여기에 속하여 영적인 추구를 강조하면서 성령님의 인도 속에 체험과 은사 또는 예언의 활용을 중시하여 전통적 예배의 형태를 거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부터 침례교는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였다. 예배 안에서의 은사 추구나 활동을 금하고, 칼빈의 말씀 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어느 교단보다 성경공부와 설교 사역에 앞을 선 바 있다. 오늘의 예배는 성경에 근거한 예배여야 한다는 것이 현재의 많은 예배 신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개혁의 역사를 넘긴 오늘의 개신교 예배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1)기독교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예배자들이 마음속에 확신해야 한다. 2)모든 기독교 예배는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로 계속되어져야 한다. 3)개신교의 예배 가운데 최대의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예배의 형태와 내용과 메시지가 성경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개혁자 칼빈은 “하나님은 성경 가운데 우리에게 그 자신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주신다” 고 강조하면서, 기독교의 전체적 규범이 성경 외에서는 발견될 수 없음을 역설한 바 있다. 그는 그 이유로 “성경 그자체가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 이 성경이 없이는 탈선 할 수밖에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오직 성경 속에서 기초를 두고 그 말씀으로 예배의 방향을 잡아 나갈 때만이 개혁자들의 주장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 있게 된다. 제 8 장 개신교 예배의 내용과 그 의미 여기서는 개혁자들의 유산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교파들이 그들의 예배 가운데서 지켜 나가는 순서들을 차례대로 다루면서 그 의미를 해석적인 형태로 풀어 가고자 한다. 1)오르간전주, 쯔빙글리의 예배 개혁은 예배에 있어서 현재 악기의 사용을 예배에 전면 금지하는 급진성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구약 시대부터 사용되어 왔던 악기들은 예배 속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그 필요성이 루터의 후기에 와서는 오히려 강조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악기를 사용한 음악적 발전을 예배의 시작과 더불어 활용되어 왔고 오늘의 예배에도 중요한 부분들을 차지하게 되었다. 오르간 전주는 엄격히 말해 예배의 가장 첫 순서이다. 예배의 시작을 기다리며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장엄하면서도 경건한 음악 속에 예배자들이 각자 마음을 정리하고 흠 없는 자세로 준비를 갖추는 뜻을 지닌 중요한 부분이다. 2)예배에로 부름, 오늘날 한국교회가 종을 치면서 회중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모습은 기독교의 예배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부분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우리나라의 초기 교인들이 엄숙한 예배 분위기를 지키지 못할 때 회중을 조용히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종을 사용하였다고 본다. 우리의 개신교는 “이제 다같이 우리의 뜻과 정성을 모아 하나님께 예배 드립시다”의 선언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중을 예배 가운데 임하게 한다. 실질적으로 오늘의 주일 예배에 참석한 무리들은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바쳐질 준비가 되어 성전을 찾아왔으며, 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라고 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선언이 끝난 후 이어서 찬양대의 응답송이 있게 된다면 그 의미는 더욱 실감을 갖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3)기원, 짧은 기도로서 오늘의 예배 속에 성령님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현존을 예배 인도자와 회중이 깨닫도록 해달라는 단순한 기원의 성격을 띠고 있다. 4)찬양과 경배의 찬송,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는 준엄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두가 일어서서 응답하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순서가 곧 찬양의 찬송이다.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예배의 전체 분위기와 개인적인 신앙의 표현과 경험을 새롭게 할 수 있다. 5)성시 교독,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교독문이라 부르는 이 부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부분에 속한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순서는 구약에서부터 이어지는 예배의 중요한 순서였다. 그러하기에 기독교에서도 시편에 곡을 붙여 찬양함으로써 예배찬송으로 그 명맥을 오랫동안 유지하여 왔다. 6)고백의 기도, 예배 회복 운동이 19세기 말부터 일기 시작하면서 개혁자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이 “고백의 기도”라는 순서에 대한 새로운 가치성이 발견되게 되었다. 죄의 고백이 있어야 할 이론적 근거는 지극히 간단하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서 있는 실존으로부터 부끄러운 자아의 모습을 드러 내놓고 거기에 하나님의 용서와 임재를 간구하는 예배하는 공동체의 고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7)용서의 말씀, 1980년대 이순서가 한국교회 예배에 도입될 때 어떻게 설교자가 감히 용서의 선언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많은 이의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순서가 설교자의 말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으로 봉독되어지는 순서임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8)영광송, 회중이 함께 부를 수 있고 또 찬양대에 의하여서 불려 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9)중보의 기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탁받아 섬기고 살피는 책임을 가진 목양자로서 그들이 살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에서 발생된 죄와 모순의 용서를 구함은 물론 전쟁과 질병과 가난과 억눌림의 세계로부터의 해방을 간구해야 하는데, 이렇듯 사제로서 하나님께 아뢰고 구하는 기도가 바로 이중보의 기도이다. 10)말씀 봉독, 말씀이란(Word of God) 예배에서 두 가지 형태의 순서로 분류된다. 하나는 기록된 하나님 말씀(성경)의 봉독과 또 하나는 설교자를 통한 그 말씀의 선포와 해석과 적용이다. 11)찬양대의 찬양, 오늘의 예배 가운데서 찬양대가 맡은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설교 전에 부르는 찬양은 하나님을 향하여 가장 아름다운 경외를 드리는 부분이며 예배자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끌고 가는 헌신의 경험을 주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있도록 마음의 그릇을 준비시키는 역할까지도 수행한다. 12)설교 전 기도, 말씀을 선포하기 전 성령님께서 임재하시여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마음에 순종하도록 해달라는 기도이다. 13)설교, 설교란 예배 가운데서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에게 다시 그들의 언어로 해석해 주고 그들의 생활 속에 구체적으로 현장화시키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가 예배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성립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무리가 따른다. 14)설교 후 기도, 이 기도의 기본적인 성격은 칼빈의 입장대로 성령님의 도움으로 뿌려진 이 말씀의 씨앗을 성령님께서 가꾸고 결실 맺도록 하여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를 이루시라는 간결하면서도 간절한 부탁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 15)감사와 응답의 찬송,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를 통하여 선포된 다음에 예배자들은 즉각적인 감사의 응답을 표현하는 것이 예배의 의미에 알맞다. 응답의 찬송 대신 신앙고백으로서의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 말씀을 듣고 난 후 예배자들의 신앙을 새로이 다짐하는 결단적 행동을 가져도 좋다. 16)봉헌, 봉헌의 순서는 기독교 예배 가운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부분이다. 오늘의 예배 속에 봉헌이란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를 지칭하는 데 그치고 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정성을 다하여 경청한 무리들이 스스로 우러나는 감사의 응답으로 내어놓는 모든 마음과 정성의 표현이다. 17)강복선언(축도-Benediction), 예배가 끝날 때는 반드시 목사의 축도가 따르는 것이 개신교 예배의 상례이다. 물론 목사가 없는 경우는 마침 기도 또는 주기도문으로 끝을 맺고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축복 기도 후 찬양대의 응답 송, 그리고 반주자의 후주로 예배를 마치게 된다. 제 9 장 기독교 성례전(聖禮典)-세례성례전 성례전의 중요성은 오늘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탄생하던 때로부터 종교 개혁까지 가장 핵심적인 예배의 초점이 되어 왔다. 개신교는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두 개의 본질적 요소를 우리의 예배 속에 지켜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쯔빙글리의 과격한 개혁 의지는 지금껏 말씀과 성례전으로 이루어져야 할 기독교 본래의 예배 전통에 심각한 불균형을 가져왔다. 성례전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sacramentum 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sacraments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3세기 터툴리안(Tertullian)으로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약속한 후 세례를 받고 성찬성례전에 참여한 그 예전을 가리켜 성례전이라 불렀다. 신학적 의의는 먼저, 성례전이란 모든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또 성례전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와 예배자들의 진지한 응답이 나타나는 현장이다. 그리고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랑의 실체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또, 성례전은 성도들의 공동체 의식을 재확인하는 예전이며, 화육적관계 형성이 성례전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다짐되어야 한다. 세례 성례전(The sacrment of baptism). 세례는 기독교의 역사와 함께 변함없는 전통과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성례전이다. 세례란 무엇인가? 칼빈의 견해는“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자녀로 삼으시는 거룩한 인침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접붙임으로서의 새로운 출발” 이라고 말했다. 폴 틸리히의 경우는“세례란 영적인 공동체에 참여하는 한 인간의 결단이다”라고 했다. 존 맥콰리 같은 신학자는 세례를 구원론의 단계에 속한 하나의 과정으로 보면서 죄의 인정과 회개, 칭의 , 성화, 그리고 선택의 순간으로 해석하고 있다. 세례의 의미를 몇 가지로 보면, 세례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 사건이다. 그리고 세례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과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예전이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탄생을 의미하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는 의식이다. 세례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명령에서부터 시작된다. 기원의 차원에서 유대민족의 원시적 세례 형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나 거룩한 예전에 참여할 때는 반드시 물로 깨끗이 씻는 의식을 가졌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알고자 한다. 먼저 신학적 논쟁이 계속되었던바 예수님은 왜 세례요한 앞에 나아가 세례를 받아야 했느냐는 것이다. 그 대답은 이렇다.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 요한을 통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선포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이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는 순간에“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통하여 만인에게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시켰다는 점이다. 셋째로, 예수님께 임했던 성령님에 관한 이해의 문제이다. 끝으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또 다른 문제는 예수님께서 세례에 관하여 어떠한 견해를 가졌으며 무엇을 말씀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세례성례를 집례하기 위한 방법들을 보자. 1)먼저 세례를 받아야 할 후보자들의 선정 문제이다. 2)세례성례전을 갖기 위하여 교회는 주보나 기타 광고를 통하여 최소한 한 주일 또는 두 주일 전에 교인들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세례의 의미는 수세자나 견신례의 후보자들이 준비하는 공부 과정에서도 충분히 전달되어야 하지만 세례성례전의 전 주일부터 설교 가운데서 언급되어지는 것이 좋다. 4)유아세례만을 갖게 되는 경우는 설교 전에 행함이 좋다. 5)집례자가 집례시 수세자들의 이름을 부르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길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실수이다. 6)유아세례의 경우는 어린이가 낯을 기리기 전에 세례를 받도록 함이 좋다. 7)목사가 집례할 때 손에 책을 들고 거기에 너무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8)목사는 수세자들에게 자신이 창작한 질문을 하는 것보다는 교단의 예식서나 예배모범에 규정된 질문을 하도록 함이 좋다. 9)목사는 수세자나 입교자와의 문답이 끝나고 세례를 준 후에 또 하나의 질문을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 10)물세례를 주는 방법의 문제는 한 가지가 아니고 다양함을 알아야 한다. 11)세례를 주는 시기가 언제 어느 주일이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다. 제 10 장 기독교 성례전(聖禮典)-성찬성례전 초대 교회로부터 성찬은 예배의 중심적 순서였음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말씀으로 시작된 예전은 다락방 예배라 부르는 성찬성례전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세례를 받고서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인침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이 성찬성례전에 의무적이면서도 특권적인 자격으로 참여 할 수 있었다. 오스카 쿨만은 “새 계약의 재다짐” 또는 “그리스도를 다시 뵙고 경험하는 예전”이라 일컫기도 했다. 예전의 모든 주제는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시고 부활하셔서 성찬성례전의 현장에 임재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었으며, 이 예전에 참여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요, 그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 주신 하나님의 은총과의 만남이라는 생동적 신앙을 갖게 해주었다. 성찬성례전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례전의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교회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7성례 중에서 개신교는 세례와 성찬성례전만을 주님의 명령으로 엄수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성찬성례전은 예전을 지칭하는 어휘로서 우리말에는 “성찬”, “성만찬”또는 “주님의 만찬”등을 사용하고 있다. 성찬성례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초기 성찬성례전론에서는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성찬성례전의 테이블 위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희생 제사의 재현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견해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사실적 임재가 성례전의 현장에 임하신다는 견해이다. 셋째는, 초대 교회의 성례전에 특기할 것은 성찬성례전에 신비적 요소를 부여한 점이다. 개혁자들의 성찬성례전의 신학을 살펴보면, 성찬성례전은 초기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개혁자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기독교의 개혁이 아무리 거세게 일어나는 현장에서도 성찬성례전에 대한 신학적 내용은 초대 교회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개혁의 주역들은 성찬성례론을 자신들의 특유한 입장과 신학에 따라 재조명하면서 이를 최우선적인 신학적과제로 삼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예전을 통하여 구속의 그리스도를 언제나 새롭게 만날 수 있으며, 한 인간과 주님과의 생동력 있는 역사적 연접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교단의 계열에 따라 그 신학적 이해를 달리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화체설이 있다. 이는 집례자인 사제가 성물을 앞에 놓고 축사하는 순간에 그 성물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해석이다. 루터교는 더 나아가 화채설위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눈에 보이는 그 성물 안에, 그리고 그 성물과 함께 한다고 해석하였다. 다음으로, 기념설이 있다. 쯔빙글리의 학설로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것 이상으로서의 의미 부여를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칼빈이 주장한 영적임재설이 있다. 이는 성찬성례전의 현장에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임재하시고 그 사실을 경험하는 예전으로써 성찬성례전을 말하고 있다. 지금의 개신교는 성찬성례전에 관한 신학적 의미의 전달은 물론 그 깊은 뜻이 표현되어진 의식마저 결여되었음을 느낀다. 오직 설교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시도하는 현상이 개신교에 고착되어 버렸다. 최소한 다음 몇 가지의 기본적인 집례 원칙만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봉헌이다. 둘째, 감사와 성별의 기도와 에피클레시스. 셋째, 성례전 말씀이다. 넷째, 성체 분할과 분병 분잔으로 이어진다. 일반적인 준비로는 먼저, 집례자인 목사의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다음으로 분병, 분잔 위원들의 준비와 자세가 진지해야 한다. 셋째로, 성물의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실질적으로 성례전의 참된 의미는 성찬성례전을 제정하신 주님의 말씀과 행위에서 이것을 무슨 뜻으로 어떻게 주셨는지를 깨닫는데 있다. 그리고 제자들의 행위를 통해 그들은 거기서 무엇을 어떻게 받았으며 훗날 이것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오늘의 집례자에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제 11 장 예배와 설교종교개혁 이후 성공회와 루터 교회는 말씀과 성례전이 조화를 이룬 수준 높은 예배 예전을 지금껏 잘 진행하고 있는 교회들이다. 개신교들, 특히 장로교를 비롯한 개혁 교회들은 이러한 균형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직 설교중심의 예배만을 지속하고 있는 실정이다. 개신교의 성장과 확장에 절대적인 기틀을 마련해 준 것이 설교이지만 실제로 그 본래적 의미와 역사적 발전을 예배 가운데서 이룩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신약시대의 예배와 설교에 있어서 그들은 성전을 잃어버린 채 바벨론 포로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회당에 모여 간단한 예전을 갖추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하여 베풀어 주셨던 위대한 은총은 기렸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내려 주신 말씀들을 다시 상고하고 반복하여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중세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예배구조를 성례전 중심으로 장식했으며, 상대적으로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을 경청하도록 하는 구조를 외면해 버렸다. 교회는 회중과의 거리를 더욱 멀리한 채 오직 장엄하고 신비한 모습의 재현에만 초점을 둔 성전 건축과 교회 구조를 고집했다. 심지어 성찬대 위치까지 동쪽을 향한 벽에 붙여 사제의 독무대로 만들었고 집례의 모든 언어는 회중이 알지 못하는 라틴어로 진행하여 말씀 없는 예전으로 전락시켰던 비극을 가져왔다.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인간이 응답하는 대화적 관계 속에서 이룩되어야 한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서술은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말씀하셨고 행하셨다는 메시지 전달이 구약 선지자들의 주된 임무였다. 구약의 설교자들은 자신의 직책에 대하여 때때로 후회와 싫증을 느끼며 자신의 출생 그 자체를 한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전능자의 손에 붙들려 나아가는 하나의 실존임을 깨닫고 있었다. 신약에서 보여 준 설교 사역은 그리스도인신 예수님의 오심과 그 생애와 교훈,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의 승천, 그리고 재림을 선포하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였지 하나님에 관하여 말씀하신 제 삼자의 입장이 아니었다. 사도들은 계속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사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대속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보이신 그분을 믿으며 살고, 믿지 않으면 죽는다는 단순하면서도 의미 깊은 진리를 외쳤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 앞에 붙잡힌 사자들로서 전 생애를 말씀을 외치는 데 바쳤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들의 만족을 충족시키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직 이들은 하나님의 실체와 그분의 역사하심을 알리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즉,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알리면서 오늘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알려 주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설교란 인간이 자신의 사상과 지식을 전달하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는 특수한 사역이다. 이러한 설교의 특수성에 문제가 되는 요인으로 위기에 처하게도 된다. 먼저, 설교자의 정체성에 문제가 보이는 경우이다. 아무런 계획성 없이 대량으로 배출된 설교자들은 서로가 “말씀의 종”이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오늘의 예배 현장 속에서 설교하고 있다. 다음으로 설교자의 사역은 단순한 직종이 아니다. 의식주를 위한 직업인으로서의 설교자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독소를 품고 있는 것이다. 설교자란 칼빈의 말대로 말씀의 전달을 위탁받은 대사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란 “선택받은 존재”라고 바르트를 비롯한 신학자들이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소명에 따른 책임이 막중함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영적 생활과 학문적 생활이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언제나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뜨거운 관계를 갖지 못하는 설교자의 메시지는 회중의 가슴을 파고들지 못한다. 화려한 언어의 수가는 요란하나 깊은 감동을 안겨주지 못한다. 반면에 회중이 지닌 위험요소도 있다. 특별히 이들이 맡아야 할 부분들이 잇다는 것이다. 1) 능동적인 참여 의식의 발로이다. 2)이러한 능동적인 참여는 단순한 기다림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3)회중은 설교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준비하고 제공해야 한다. 4)설교자를 향한 격려의 자세가 필요하다. 5)구수한 대화에는 고개를 들고 말씀의 전개에는 고개를 숙이는 태도는 삼가야 한다. 6) 설교의 현장에서 회중은 진지한 감정을 가져야 한다. 7)설교자가 설교를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야 한다. 8)설교자의 설교 횟수를 줄여 주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9)습관적인 아멘의 응답은 삼가야 한다. 루터는 “설교란 설교자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사람에 의하여 이룩된다”고 말한바 있다. 오늘의 회중의 능동적이고 협조적인 참여는 언제나 훌륭한 설교의 전달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