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현대교회 문제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5. 선교 개념의 변질과 윤리적 부패

 

선교 개념의 변질

전통적으로, 선교(宣敎, mission)는 주께서 교회에 명하신 전도의 사명을 가리켰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얻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가장 귀하고 중대한 임무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에 대한 이 전통적이고 성경적인 개념이 변질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를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활동으로만 보지 않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행할 사회적, 정치적 책임과 활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1967년, 미국 연합장로교회(지금의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는 소위 ‘1967년 신앙고백’을 채택했는데, 그 신앙고백서는 교회의 사명[선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인간을 향한 그의[그리스도의] 봉사는 교회가 모든 형태의 인간 복리를 위하여 일할 것을 위탁한다. 그의 수난은 교회가 인류의 모든 고통에 대해서 민감하여 각종 궁핍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도록 만든다(2.1.1).

교회는 모든 민족 차별의 폐지를 위하여 노력하며 그것으로 인해서 상해를 받은 자들을 위하여 봉사한다(2.1.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 사업은 인간생활 전체 곧 사회와 문화, 경제와 정치, 과학과 기술, 개인과 단체, 전부를 포괄한다(3.1.1).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강조되는 선교 개념도 이런 개념이다. 1980년 멜본에서 열린 WCC의 세계선교 및 전도대회는 말하기를, “인권을 위한 투쟁에의 참여는 그 자체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말과 행위로 선포할 교회의 전체적 선교의 중심적 요소이다”라고 했다. WCC의 전 총무 필립 포터도, “우리는 경제적 정의와 정치적 자유와 문화적 갱신을 위한 투쟁을 하나님의 선교를 통한 세계의 전체적인 해방의 요소들로 본다”고 말했다.

WCC 1983년 선교와 전도 선언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개인의 회개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 . . 복음 전도는 이 세상의 구조들, 즉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제도들에 대해 말한다”고 말하였다.

1996년, 한국 개혁신학회 제1회 정기학술심포지엄에서 장로회신학대학의 이형기 교수는 불신자들을 회심시키는 일에 초점을 두었던 19세기 선교 개념이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교회의 사회 참여 측면을 포함하게 되었다고 전제한 후, 이 두 흐름의 선교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전체적(whole)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소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즉 ‘전체적 선교 개념’ 혹은 ‘넓어진 선교 개념’이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이러한 ‘넓어진 선교 개념’을 받아들인다. 1974년 복음주의자들의 로잔 언약은 교회의 사명에서 전도가 일차적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전도와 사회정치활동의 불가결의 연관성을 강조함으로 선교 속에 두 요소를 포함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로잔 선교대회의 지도적 인물인 죤 스토트는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마 28:19]의 결과들뿐 아니라 그 실제의 부탁 자체가 전도의 책임뿐 아니라 또한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나는 지금 더 분명하게 본다”고 말하였다. 밀라드 에릭슨은 교회의 삼대임무에 사회적 관심을 추가하였고, 웨인 그루뎀은 구제를 추가하였다. 총신대 교수 김광열은 총체적 복음사역을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주의자들과 교회연합운동가들과 또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넓어진 선교 개념’ 즉 ‘전체적(holistic) 선교 개념’은 정당하지 않다. 교회의 사명(mission)은 복음 전도 외에 사회정치활동을 포함하지 않는다.

전통적 신학의 정리대로, 교회의 삼대 임무는 예배와 영적 건립과 전도이다. 이 중에 전도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세상을 향해 가지는 임무이며 이것이 주께서 세상에 남겨두신 제자들 즉 교회에 주신 특수한 임무, 즉 사명(使命, mission)이다. 또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의 계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전도의 일이었다.

어떤 이들은 주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일이 사회봉사활동에 해당하며 그것이 주의 사명의 일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의 가르치심과 전파하심의 일과 분리된 것이 아니고 그 일에 종속된 부차적인 것이었고, 더욱이 주께서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단지, 긍휼과 능력이 많으신 구주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실 때 불쌍한 병자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고쳐주신 것이었고, 또 그러한 치료의 기적들을 통해 자신의 신성(神性)을 증거하셨던 것이다.

또 병고침을 받은 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왔던 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찾아다니신 것이 아니고 그에게 찾아온 자들을 고치셨고, 그에게 나아왔던 자들은 대부분 그를 믿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일은, 오늘날 교회가 교회 안에 병든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이나 혹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병자들을 치료하는 행위에 해당하지, 독립적 의료 활동이나 사회정치활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자신의 사명 즉 선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넓어진 선교 개념을 의식하며 선교가 영원한 구원을 증거하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선언의 초안자 피터 바이엘하우스는 “고전적, 전통적 선교 개념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사회정치활동이 교회의 임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주께서는 사회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으셨다. 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회정치활동을 명령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는 그들에게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를 명령하셨다. 또 주의 제자들 즉 초대 교회는 사회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이 확증하는 바다. 사회정치문제에 대한 신약성경의 교훈은 소극적이고 온건하다. 신약성경은 성도들이 사회의 질서를 존중하고 위정자들에게 복종하고 규정된 세금을 바치고 또한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칠 뿐이다. 또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대 사회적 말씀들은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에게 해당되었던 것이므로, 오늘날의 세속사회에 직접 적용되지 않고 일차적으로 교회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주 예수께서 교회에 명하신 전도의 사명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얻게 하는 사명이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가장 귀하고 중대한 임무이다. 이 전통적 성경적 개념을 수정하고 선교를 단지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활동으로 보지 않고 교회가 세상에서 행해야 할 사회적, 정치적 책임과 활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소위 넓어진 선교 개념은 잘못된 개념이다. 그것은 교회의 사명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자신의 사명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적, 전통적 입장에서 이탈하였다. 교회의 사명에 대한 개념의 변질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 전도에 무엇을 첨가하려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하는 중대한 오류이다.

 

윤리적 부패

 

낙태

오늘날 낙태는 성적 문란과 더불어 행해지는 매우 심각한 사회악이다. 낙태로 죽어가는 어린 생명은 셀 수 없이 많다. 1990년의 한 보고서는 전세계적으로 인공유산은 매년 5천 5백만건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한국도 연간 150만건에 달하였다. 낙태가 합법화된 1973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에서 낙태된 유아들의 수는 약 1,500만명이라고 하며, 세계적으로 연간 5,500만명이라고 하니, 이는 유아 대학살이 아닐 수 없다. 낙태는 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죄악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낙태를 용납하고 있다. 1970년대 초 낙태를 합법화한 미국의 대법원 판결이 있기 전, 미국 연합감리교회 총회는 낙태가 더 이상 범죄가 아니며 여성이 자유롭게 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었다. 1986년에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도 낙태에 관해 281대 266으로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긴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미연합그리스도교회도 공식적으로 낙태를 지지했다.

 

동성애

동성애는 동성간의 성행위를 말한다. 오늘날 사회에는 동성애를 용납해야 한다는 소리가 강해지고 있고 교회들 안에서도 동성애를 용납하려는 움직임이 널리 일어나고 있다.

1972년, 미연합그리스도교회는 윌리암 존슨의 안수를 허락하였다. 그는 대교단에서 안수받은 첫 번째의 공공연한 동성애자이었다. 1980년, 그 교단은 현행적 남녀 동성애자들을 목사로 봉직하도록 공식적으로 허용한 최초의, 유일한 대교단이 되었다.

1988년, 카나다 연합교회는 카나다에서 동성애자들의 목사 안수를 합법화한 최초의 교단이 되었다.

1997년 9월,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의 제일연합감리교회의 지미 크리치 목사는 그의 교인들 중 두 명의 여자 동성애자들을 위해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1998년 1월, 연합감리교회 목사들 일부가 동성애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국의 대표적 동성애교회인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교회 세계협회의 지도자 그윈 깃보드는 1999년 미국교회협의회(NCC) 총회에서 연사로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회집된 교회협의회 대표들 중 최소한 절반은 서서 그 여자에게 갈채를 보내었다. 2001년, 그 여자는 캘리포니아 교회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99년, 미합중국장로교회는 동성애 전도자 제인 스파를 그 해의 ‘신앙의 여성’ 수상자로 지명하였다. 두 명의 자녀를 둔 이 이혼모는 그 교단을 섬기는 첫 번째 공공연한 동성애자이었다.

2000년 2월 12일, 미감독교회의 올림피아 교구 세인트 마크 대성당에서는 공공연한 동성애자 로버트 테일러 주교의 수석주교 임명식이 거행되었다. 200명에 달하는 교구 대표들과 세계 각지에서 온 수백명의 성직자와 교회 대표들이 그 의식에 참석하였다.

2003년 6월 7일, 미국 뉴햄프셔주 관구는 미감독교회 역사상 최초로 공공연한 동성애자 진 로빈손을 주교로 선출하였다.

심지어, 일부 복음주의자들도 동성애를 옹호한다. 랄프 블레어가 인도하는 ‘관심 있는 복음주의자들’이라는 친(親)동성애 단체는 연례 여름수련회들을 가진다. 그 단체의 주요 강사들의 명단에 풀러신학교 윤리학 은퇴교수 루이스 스미즈 등도 포함되었다.

 

여자 목사

1997년에, 229개의 북미 신학대학원 학생들의 30퍼센트는 여성이었는데, 그것은 1972년의 10퍼센트와 비교할 때 크게 증가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개신교 감독교회 신학교와 디스트릭에 있는 연합감리교회 웨슬리 신학교는 학생들의 절반이 여성이다.

2003년 4월, 예수교대한성결교회는 여목사 안수허용 문제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 교단은 기감, 기장, 예장통합, 기하성, 성공회와 더불어 여목사 안수를 인정하는 교단이 되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그 이듬해 여성 안수 허용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여성 안수는 확실히 비성경적이다(고전 14:34-38; 딤전 2:11-14).

 

현대기독교음악(CCM)

오늘날 심각한 문제의 하나는 교회음악의 변질이다. 이것은 특히 청년집회들에서 일어나고 있다. 음악에서 교회와 세상의 구분선이 없어졌다. 온갖 세상적 음악 형식이 교회에 도입되고 있다.

W. A. 크리스웰 목사가 원로목사로 있는 남침례교단 소속 달라스 제일침례교회의 1998년 7월 25일 밤 청년 집회에 대해 그 지역의 한 신문은 “떠들석한 춤과 천둥 같은 기타들과 크리스챤의 경건으로 어울러진 연주회로 인하여 그 교회의 부속건물인 장엄한 스펄젼 해리스 빌딩은 흔들린 것 같았다”고 보도하였다.

미국 남침례교단의 2000년 신년 전야제에서 약 4만 6천명 이상의 남침례교 청년들은 미국 내에서 알려진 ‘기독교’ 록 밴드들에 의해 귀가 찢어지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찬양과 예배 음악을 즐겼고 약 새벽 2시까지 웃으며 노래하며 소리치며 춤추었다고 한다.

예장합동측의 총신대학교 평생교육원에는 재즈피아노, 재즈기타, CCM재즈반주법, 색소폰 등을 가르치는 실용음악아카데미가 있고, 광신대학교에는 팝과 재즈를 가르치는 실용음악과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목사와 장로가 임직서약에서 수납하는 예배 모범에 어긋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음악의 질서와 안정성과 아름다움을 버린 비성경적 풍조이다. 이것은 교회 음악의 세속화 현상이다.

 

열린 예배

오늘날에는 예배 형식까지도 세속화되고 있다.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가 처음 구상하였고 새들백 교회의 릭 워런 목사에 의해 인기를 얻은 열린 예배는 구도자들을 위해 밴드와 현대음악, 멀티미디어와 드라마 등을 사용한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교회들이 이런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시청각적 효과와 축제적 분위기는 그 예배의 한 특징이다.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이들은 교회의 외형적 구조 변경을 강조한다. 강대상을 큰 강대상 대신 작은 이동식 탁자로 대치하고 의자는 등받침 없는 것에 걸터앉게 하고 노래나 춤이나 연극을 할 수 있도록 요란스런 조명 세트를 장치한다. 조화나 생화로 강단을 단장한다. 전광판을 세우고 전문적 음향 장비를 설치한다. 목사나 안내 위원이나 성가대원은 청바지나 가벼운 옷을 입고, 전자 기타, 드럼, 심벌즈, 키보드 등을 사용해 기독교적 록 음악을 연주한다.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들은 찬송 대신 현대기독교음악(CCM), 곧 기독교 록 음악을 부른다. 릭 워런은 크리스챤 록 음악을 새 노래라고 말하며 새 노래를 부르라고 강조한다. 릭 워런은 교회가 해야 할 첫 번째 일 중의 하나가 오르간을 밴드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그는 몰아대는 비트를 가진 큰 소리의, 쉰 목소리의 음악이 그의 회중이 듣는 종류의 음악이라고 말하며 “우리는 주말 집회 때 정말, 정말 소리가 크다. . . . 나는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낮추지 않을 것이다. 자 그 이유는, 어린아이 같은 대중은 음악을 느끼기를 원하지, 단지 그것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심지어 전통적 음악의 사용을 주장하는 것을 우상숭배의 죄와 동일시하였다.

성경에 근거하여 작성된 전통적 예배 모범은 번거롭고 낡은 진술로 여겨지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과연 이런 예배를 받으실까? 이런 예배의 변질이 교회의 세속화가 아닌가?

6. 바른 길

이제까지 저는 오늘날 교회의 신학적, 윤리적 여러 문제들을 말하였다. 그러면 바른 길은 무엇인가?

 

개혁주의, 복음주의, 근본주의의 차이

우선,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개혁주의는

교파적 개념이다. 개혁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루터파와 구별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의 주류는 루터파와 개혁파와 영국교회이었다. 개혁주의는 개혁파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물론, 그것은 신학적으로 개혁신학을 의미하고 교회행정적으로 대의정치체제를 의미한다. 개혁신학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도르트 신경, 그리고 그 후 촬스 핫지, 루이스 벌코프, 헤르만 바빙크, 박형룡 등의 신학자들의 조직신학에서 잘 정리되었다. 내세론, 특히 천년왕국설에 있어서, 한국장로교회는 개혁신학의 전통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고 보지만, 역사적 전천년설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가장 자연스런 해석이라고 본다.

 

복음주의는

본래 개신교를 가리키는 용어이었다. 그것은 천주교회와의 구별에서 나온 개념이었다. 천주교회는 성례주의, 의식주의이었고, 또 행위주의적이었다.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왜곡시켰고 또 구원이 인간의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구원의 복음을 왜곡시키는 것이며 바울이 경고한 다른 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천주교회의 복음 왜곡과 구별하여 은혜의 복음을 재발견한 것이며 재천명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복음주의라는 이름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오늘날 복음주의는 그런 의미를 넘어서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가지는 너그러운 태도를 가리킨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적 교회들과 교제하고 협력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을 가지지 않는다. 복음주의자들은 말로는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단을 배격하라는 성경의 교훈은 순종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상 가장 심각한 이단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이상하게도 자유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오늘날 대표적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은사주의를 용납하고 또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우호적이다.

 

근본주의는

20세기 미국교회에서 일어난 입장 혹은 운동이다. 그것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의 수호이고, 둘째는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이다. 첫 번째 특징이 성경적이며 기독교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두 번째 특징도 성경적으로 옳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성경적 분리의 원리

현대교회문제를 생각할 때, 교회의 바른 길은 결국 교제 문제에 있다. 성경은 성도간의 사랑을 가르치지만, 동시에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그것은 개혁교회가 말하는 참 교회의 세 번째 표지인 권징의 충실한 시행에 내포된 바이기도 하다.

 

분리의 대상들

첫째로, 성경은 우리가 불신자와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리요”라고 말한다(고후 6:14-15). 교회와 세상,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에는 명확한 선이 있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교회적 교제에는 어떤 선이 있다. 누구든지 주께로 나오라고 초청되지만, 믿는 자들만 성도로서의 교제를 서로 나눌 수 있다.

둘째로, 성경은 우리가 이단자와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말하고(롬 16:17), 또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말한다(딛 3:10). 사도 요한도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고 말한다(요이 10-11). 오늘날에 이단들 중 대표적인 것은,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이단종파들과, 특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다.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해서는 안 되며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을 권징하거나 출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복음주의는 잘못된 입장이다.

셋째로, 성경은 우리가 드러난 죄를 짓고 회개치 않는 자와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 말한다(고전 5:11, 13).

넷째로, 성경은 우리가 사도들의 교훈 곧 신약성경의 교훈을 고의적으로 어김으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말한다(살후 3:6). 특히 이 말씀은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적용될 수 있다. 비록 복음주의자의 다수가 우리와 같이 복음을 믿는 참된 형제라고 생각되지만, 우리는 그들의 불순종과 타협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만일 그들이 그 행위를 고치지 않는다면 그들과의 교제를 끊어야 할 것이다.

 

분리의 이유들

우리가 이런 사람들과 교제를 끊어야 할 첫 번째 이유는 교회의 본질 때문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며, 참된 성도라면 성경적 교리를 믿고 성경적 교훈에 순종할 것이 기대된다. 기독교는 결코 물량주의, 숫자주의, 실용주의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성경주의, 진리주의이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의 순결성 때문이다. 교회는 거룩한 교회이며 또 거룩해야 한다(엡 5:26-27). 교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이단은 저주받을 사상이며 멸망케 할 사상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단이나 고의적 죄악을 포용해서는 안 된다. 비록 지상에 완전한 교회가 없겠지만, 우리는 순결한 교회, 흠 없는 교회를 건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교회는 뻔뻔스런 불신앙이나 고의적 불순종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 이유는 악의 전염성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 들어온 교리적 오류를 책망하면서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말했고(갈 5:9), 또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고 했다(딤후 2:17-18). 교회가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조만간 부패되고 회복 불가능한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네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명예 때문이다. 교회가 윤리적 죄악을 포용하면, 세상 사람은 교회를 비난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비난하고 조롱할 것이다.

 

분리의 방법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교제를 끊어야 하는가? 우선,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된 교훈과 입장과 활동들은 지적되고 비평되어야 한다. 또 교회 안에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이 있을 경우, 성도들은 성경이 가르친 대로 문제를 제기하고 또 교회 헌법의 권징 규칙을 따라 행해야 할 것이다(마 18:15-17).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막힌 담뿐 아니라 인간들 상호 간의 막힌 담도 허무신 위대한 화해자이시지만, 비록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우리와 똑같이 예수의 피로 구속받은 진정한 형제요 자매이겠지만, 비록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우리와 함께 천국에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불신앙, 이단, 회개치 않는 악, 고의적인 불순종에 대한 적절한 권징과 교제 단절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다. 교회는 권징을 충실히 행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교회적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과 개인적 교제를 가지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무분별한 교제로 악을 용납하고 승인하는 인상을 주위에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여호사밧의 실패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제를 끊을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우리의 교제 단절은 먼저 우리의 성실한 노력을 전제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의 잘못의 교정을 위해 먼저 진지하게 권면하고 교회적으로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또 우리는 겸손과 온유와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 미움이나 교만은 그 어떤 죄 못지 않은 큰 죄이다.

 

기타 문제들

이제까지 말한 대로, 현대교회는 자유주의 신학, 에큐메니칼 운동, 복음주의, 은사주의, 선교개념의 변질과 윤리적 부패 등의 중요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제자훈련 방식의 목회 혹은 교회제도, 신약성경의 전통본문 회복 등도 우리가 조만간 다루어야 할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

 

좁은 길

오늘날 교회의 바른 길은 좁은 길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바른 길은 좁은 길이었다고 본다. 노아는 좁은 길을 걸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은 좁은 길을 걸었다. 엘리야도, 미가야도, 또 아다나시우스도, 루터도, 칼빈도 그러했다. 주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가라고 우리에게 명하셨다. 우리는 성경적 교훈에 충실히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바른 정신, 건전한 정신을 지키기를 원한다. 우리는 앞에서 논한 여러 주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를 원한다. 우리는 물론 독선에 빠져 남을 경솔히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를 원하지만, 또한 진리의 확신이 없어 악과 타협하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아끼고 서로 사랑하자. 그러나 상대방의 부족을 지적해주고 책망도 하자.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사도 바울의 교훈과 권면을 기억하자. 고린도전서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디모데후서 4:2-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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