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몰트만 (J. Moltmann)의 기독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C. 십자가의 변증법과 묵시 사상적 고난

 

몰트만에 따르면 예수의 정체성은 초대교회 이래로 그에게 적용되어진 많은 기독론적 명칭들 때문에 은폐되거나, 혼란되어 왔다. 우리는 예수의 개별적 인격성과 구체적인 역사를 상실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역사적 예수와 그의 십자가가 단지 우리가 이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그것들은 예수 자신과 그의 십자가에로의 길에 대하여 우리에게 별로 말해주지 못한다.

우리는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 자신과 그의 유일한 인격과 역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변화시키고 수정하도록 해야 한다. 몰트만은 마틴 켈러가 십자가의 중요성을 매우 강력하게 강조한 것을 상기시킨다. “십자가가 없으면 기독론도 없으며 기독론을 십자가에 의해 정당화시키는 것을 회피할 수 있는 아무것도 그 자체에는 없다.” 이러한 진술은 예수를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 흡수시키려는 경향과 십자가로부터 너무 신속하게 부활로 옮겨가는 경향을 차단한다. 케제만(Käsemann)의 조언을 따라서 몰트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언제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로서 인식되어져야 하며, 우리는 사변적인 영광의 신학 즉, 십자가의 사실이 아무런 영속적 의미를 갖지 못하는 영적주의 기독론의 구름 속으로 급상승해 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복음의 스캔달은 위대한 설교가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복음의 거리낌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에 있다면 그러한 기적을 믿는 것이 스캔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스캔달은 저주 받고, 버림받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서 부활하신 그분의 인격적 특성(character)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대한 신앙은 우리를 위한 진정한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의 정체성을 가리킨다. 다른 하나님은 없다. 종교 현상학과 종교 역사학이 대학 신학부의 중요한 분야가 되어가고 있는 이때에, 그리고 조직신학이 처음으로 세계 종교들에 관한 새로운 신학(종교 신학)을 발전시켜가야 한다는 도전을 받고 있는 이때에, 그리고 교회가 다른 민족들의 “살아있는 신앙”과의 대화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이때에, 몰트만은 바르트의 가혹한 심판을 새로이 한다. ‘옳으냐’, ‘그르냐’ 이것이 좋은 것이다. 왜 좋으냐 하면 대화를 추구하는 것들은 통상 십자가의 가혹하고 비참한 현실을 망각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나약하고 낭만적인 개념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기독교 안에서 또한 세속적인 구원 체계와 폭넓은 세계 종교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미신을 대향하는 제동장치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세상의 신에 대하여 무신론주의자이다. 국가 또는 시민종교의 신들, 신화의 신들, 형이상학의 신들(gods)등 - 이것들은 하나님(God)이 아니다. 그래서 몰트만은 말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무신론자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 외에 다른 구원은 없으며 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도 없고, 이 계시 외에 다른 계시도 없다. 이러한 몰트만의 입장은 결국 그가 충실한 바르트주의자로서 기록되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몰트만은 십자가의 제의나 십자가의 신비를 비판한다. 십자가의 제의는 예수의 십자가를 교회의 제단에서 피흘리지 않고 반복하는 일을 통하여 종교적이고 비역사적으로 만들어, 결국 십자가의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탈색해 버린다. 십자가의 신비는 청빈과 금욕 그리고 순결한 생활을 통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신비적으로 참여하려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가난하고 억눌린 평민들을 중심으로 카톨릭 교회의 승리자 예수보다는 무력한 예수, 불안한 예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간 예수를 강조하면서 그 예수와 신비적 합일에 의해 하나님을 만나려는 경건주의이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가 예리하게 비판한 것처럼 ‘민중의 아편’이 아닐까? 이는 현재 당하는 역사속에서 고난을 그리스도와 연관시킴으로써 신앙을 너무 내면화하고 역사의 변혁력을 상실하게 한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영광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철두철미하게 이해하는 십자가 신학을 주장했다. 루터에 있어서 십자가 신학은 참된 신학과 거짓된 신학을 가려내는 근본적인 시금석이다. 그러나 그는 농민전쟁 때 취한 그의 자세가 보여주듯이 십자가 신학을 종교 비판에만 국한시키고 사회 비판적 차원에까지 끌고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과제는 십자가의 신학을 세계 이해와 역사 이해에 까지 확장시키며 그 가운데 참으로 억눌리는 자와 억누르는 자를 함께 해방시키는 데 있다 하겠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채 십자가에 달린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을 파악한다는 것은 “하나님 개념에 있어서 혁명”을 요구한다. 우리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양자택일을 넘어서는 신론을 구축해야 한다. 전자는 하나님의 개념을 세상으로부터 위로 향하여 세웠으며, 후자는 세상으로 하여금 혼자 서게 하였다. 이들 중 어느 것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지 못한다. 유신론의 신은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저 우주 위의 독재자, 도덕적 에너지의 인격화, 궁극적인 철학적 원리로 묘사된다. 이는 저 하늘 위의, 저 밖의 세계에 대하여 있는 불사/불멸/부동/무감동/전능의 한 초월적 인격을 의미한다. 유신론의 신은 고난당할 수 없고 죽을 수 없다. 그는 감정이 없는 신이다. 이런 하나님 이해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적용된다면 그 때의 신은 예수의 고난에 무감동하고 그저 쳐다보고 있는 신, 고통과는 아무 관계없는 신이 된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학이 예수로부터 시작된다면 유일신의 신은 버려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 말은 신이해를 통해 표현되는 현상 유지의 이데올로기 역시 함께 버려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페터슨(E. Peterson)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천상 위의 한 분 하나님을 말하는 유일신론은 군주제 내지 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다.

유신론은 경험될 수 있는 이 세계의 질서와 조화를 볼 때 선하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고 결론 짓지만 무신론은 똑같이 이 세상에서의 악과 고통을 볼 때 그같은 신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의 전쟁의 지옥들, 아우슈비츠, 히로시마와 베트남, 살 희망을 끊어버리는 수시로 일어나는 일상의 경험들 - 이 모든 것을 볼 때 선하고 전능한 한 분 하나님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있다면 오히려 그는 악마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호크하이머) 아니,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차라리 그를 없애버려야 하지 않을까?(까뮈-저항적 무신론)-라고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무신론도 유신론과 같이 이 세계에서 신성으로 가는 역추론의 논리를 이용한다. 그리고 유신론의 경우와 같이 신을 저 하늘 위의 무감동하고 고통당할 수 없는 독재자로 파악한다. 따라서 유신론이 십자가의 신학과 공존할 수 없다면 무신론이 제기하는 문제들 역시 십자가의 신학에 해당하지 않는다. 십자가 신학이 파악하는 “고통 당하시는 하나님” - 그의 피조물의 아픔에 한없는 연민으로 참여하여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 앞에서 무신론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침묵할 수 밖에 없다. 무신론은 십자가의 신학에 의해 비로소 극복될 수있다. 몰트만은 우리가 신론을 “예수의 죽음의 절규 소리가 미치는 거리 안에서” 전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몰트만은 전통적인 양성론을 비판한다. 이 양성론은 영원한 신성(Logos)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였다 하여 예수 안에서 구원자 하나님과 구원받을 자 인간을 같이 보았고 이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신성은 죽을 수 없고 고통받을 수 없으며 무감동한 저 하늘 위의 신성이다. 십자가에서 죽어간 것은 인간 예수였고 신성은 고난과 무관하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고난과는 전혀 무관하게 된다. 이는 예수 안의 인격을 분열시킬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신 이해와 구원 이해를 결정적으로 놓치게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고난 당할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함께 당했다. 고난 당할 수없는 신은 무능한 신이다. 고난 당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이다.

몰트만은 예수의 죽음을 양성론적인 신적인 사건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적인 사건으로 규정한다. 그는 예수가 아빠 곧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른 하나님과 예수의 특별한 관계로부터 출발하고, 신적 아버지에 대한 메시야적 아이의 이 상호관계로부터 무엇이 참으로 신적이며 무엇이 참으로 인간적인가를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자녀관계와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아버지 관계를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적 하나님 개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예수 때문에 그의 관계 속에 있는 아버지로 이해할 수 있고, 예수를 하나님 때문에 아버지의 자녀와 아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왜 교회는 삼위일체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유일신론처럼 될 수 밖에 없었는가? 몰트만에 따르면 이는 교회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다분히 상식적이고 철학적인 사고 방식에서 출발하여 이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의 통일성을 말한 다음에 세가지 인격이나 실체를 구분해 왔기 때문이다. 이때 삼위성은 일체성에 흡수되어 일체성이 드러나는 세가지 양태에 불과한 것이 되기 쉽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의 출발 장소는 예수의 십자가여야 한다. 그는 말하기를 “삼위일체의 내용적 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인식의 형식적 원리는 삼위일체론 이다”라고 하였다. 삼위일체론적 십자가의 신학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것은 “무한한 사랑으로 인해 고통당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으로 인해 아들을 죽음의 자리로 “내어준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의 자리로 내어보내어 거기에서 죽음을 고통당하게 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내어줌을 통해 사실상 자기 자신도 “내어주고” 아들의 죽음을 고통 당하신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의 고통을 연결하면서 함께 고통 당하신다.

그럼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은 오늘날 “고난 당하는 인간과 모든 피조물” 속에 함께 고통당하면서 동참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세상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는 저 하늘 위의 신성은 아니다. 그는 무한한 사랑으로 그의 세계로 내려오신다. 그는 그의 피조 세계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신다. 그는 그의 백성들과 고난의 나그네길, 유랑의 길을 같이 떠나신다. 인간성이 억압되고 거짓이 진리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곳에서 그는 그의 사랑의 이름으로 저항하신다. 마침내 그의 종말적론인 구원의 힘으로 그는 이 세상을 ‘더이상 눈물도 슬픔도 없는 나라’로 만드신다. 여기에서 삼위일체론적인 십자가의 신학은 종말론의 빛 안에서 새롭게 이해된다.

만일 십자가가 기독론의 핵심이라면 삼위일체가 ‘신’(神)학의 기본적 구조를 제공한다. 참된 기독교 신학의 가장 두드러진 두 특징적 모습인 십자가의 예수와 삼위일체 하나님이 오늘날의 대부분의 다른 신학자들에서는 단지 주변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몰트만은 더욱 엄격하게 일관성 있는 방향을 가지고, 바르트의 삼위일체적인 신학 접근까지도 갱신하고 넘어서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목할만하게도 나는 바르트가 실제로 여전히 너무 ‘신'학적(Theo-logically)으로 사고하여 그의 접근은 충분히 삼위일체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안에 있는 비판적인 한계를 본다.”

만일에 우리가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구별(아버지,아들,성령)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이상 단순히 단일신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이러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언어에 있어서의 삼위일체적 분화(分化)만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이야기 할 수 있게 한다. 십자가에서 고통당하고 죽는 이는 아들 나사렛 예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와 함께 고통당하신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발전시켰던 이와 같은 십자가의 신학을 전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묵시사상적 고난의 신학을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예수에게 제한되지 않고 우주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예수는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성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리행위 가운데서 이 시대의 묵시사상적 고난을 당한다. 묵시사상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마지막을 가져오는 동시에 새 창조의 시작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그의 고난은 자신을 위하여 당하는 개인적 고난이 아니라 세계를 위하여 당하는 묵시사상적 고난이다. 예수의 고난은 갈릴리 출신의 한 사적인 사람, 이스라엘의 메시야, 모든 백성들의 사람의 아들로서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의 머리와 지혜로서 종말론적 고난을 경험하였고 모든 사물의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온 세계의 종말론적 고난이 선취되며 대리하여 경험된다. 이러한 묵시문학적 고난 이해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부활을 위한 전이해가 된다.

 

 

 

D. 해방의 차원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과 해방의 차원들을 심리적인 차원과 정치적인 차원에서 전개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그는 실존적 역사적 인간 해방의 차원을 넘어서서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우주적인 차원의 구원과 화해를 전망하고 있다. 여기서는 해방의 심리적, 정치적인 차원만을 살펴보고, 자연적, 우주적인 차원의 해방은 다음 장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가 인간학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신학의 결과를 고찰할 때, 신학적 인간학의 독백 가운데서가 아니라 다른 인간상들과의 대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며, 따라서 인간 해방의 발자국을 찾고 그 자국을 증빙할 때 스스로 환자를 치료하고자 하는 인간학적인 학문과의 대화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특히 프로이드의 심리 분석이 중요하다.

심리요법과 신학 사이의 대화 형태로 기독교 신앙은 프로이드가 “종교의 풍자화”라고 비판했던 것과 동일시 될 수 있다. 프로이드는 종교를 노이로제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노이로제 가운데서 종교의 “이지러진 상”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미신 가운데 있는 병리학적 이중 과정의 파괴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프로이드의 비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합하다. 그리고 자신의 긍정적인 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프로이드의 종교비판을 부정적인 것의 부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학적으로 정당하다. 프로이드의 종교 비판은 단지 더 나은 비판적인 자기이해를 돕는 보조 학문으로서만 기독교 신앙을 도와서는 안되고 그의 정신분석은 또한 해방케 하는 힘을 전개할 수 있는 심리학적인 가능성을 보여 주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열정과 십자가에 달리신 자와의 형제관계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실제로 구체적인 권위와 속죄의 종교들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데, 프로이드는 이 종교들의 외디푸스적인 구조를 적절히 분석하였다. 프로이드의 꿈의 동기는 소원에 있다고 하고, 억압된 소원과 욕망은 꿈속에서 성희를 추구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종교는 그 신화와 이상향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가장 강하며 가장 긴급한 인류의 소원을 간수하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정열 안에 있는 인간의 상황에 대한 기독교의 상징적 표현은 사랑하고 고통당하는 인간을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상징학은 종교 비판적인 우상파괴와 악순환으로부터 정신 치료적인 인간해방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며 이와 동시에 우상 숭배에 대한 그자신의 예언자적 심판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 심리학적 해방의 부분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이다. 몰트만에게 심리학은 프로이드를 의미한다. 그러나 신학과 심리학의 비판적 대화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을 훨씬 넘어섰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상황 속에 있는 삶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학은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해석학으로 보충되지 않는다면 불완전하다. 정치적 해석학은 십자가의 신학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 뒤따름에 있어서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다. “사회에 대하여 비판적인 십자가 신학의 길은 부적절한 기독교 정체성과 기독교 정체성 없는 사회적 관련성 사이를 간다.”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정치는 구체적으로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자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이 그 정치적 차원을 숙고해 보면 이 영역은 언제나 이미 정치적 종교와 정치적 신학에 의해 항상 점령되어 있으며, 이 종교와 신학에 있어서는 정치적 관심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한 편으로는 기독교 신학이 지배하고 있는 정치적 종교의 욕구와 요구로부터 해방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해방의 신학도 성립할 수 없다. 다른 한 편, 기독교적인 종교비판 없이는 사회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수도 없다. 현실적 의미가 없는 기독교의 정체성과 기독교적 정체성 없는 사회적 의미를 사회 비판적인 십자가 신학은 비판한다.

가난의 악순환에 있어서 해방은 사회 정의를 의미하고, 권력의 악순환에 있어서는 민주주의적 인권을 의미하고, 소외의 악순환에 있어서는 인정가운데서의 동일성 의미하며, 생태학적 악순환에 있어서는 자연과의 평화를 의미하고, 무의미의 악순환에 있어서는 존재에의 용기와 신앙을 의미한다. 해방의 역사는 정지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진행 중에 있으며, 오직 참여적이며 변증법적인 사고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형제 관계는 이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에 고통당하면서 능동적으로 참여함을 의미한다. 그 표준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그 능력은 탄식하며 자유케하는 하나님의 영이다. 그 완성은 모든 것을 자유케 하며 의미를 완성시키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IV.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부활

 

A. 역사와 그리스도의 부활

 

몰트만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폭력과 죄로 얽힌 이 세계의 시간 속에서 일어났다 - 부활하신 그분은 의 속에 있는 새 창조의 장차 올 세계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부활이 죽은 자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며 죽음의 폐기를 뜻하는 한, 부활은 죽음이라고 하는 역사의 힘을 파괴하며 그 자체 역사의 종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계의 새 창조를 시작하는 죽은 자들의 부활의 선취로서의 종말론적 부활이다.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남을 장차 올 하나님의 영광의 미리 나타남으로 파악할 때, 그의 나타남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를 의미한다. 이것은 보편적인 죽은 자들의 부활이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폭력과 죽음의 이 세계 한가운데에 시작하고 있다. 부활은 재활이 아니다. 마지막 날에 일어날 “죽은 자들의 부활”은 죽음을 더이상 알지 못하며 언젠가는 죽을 이 삶의 연장이 아닌 질적으로 새로운 삶을 말한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사멸하며 지나가 버리는 모든 존재들의 새 창조가 그것과 함께 시작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적 행동을 나타낸다. 종말론적 상징의 틀에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모든 하나님 없는 자들과 불의한 자들을 대리하여 세계 심판을 미리 앞당겨 왔고, 그의 부활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롭게 하는 의가 나타난다.

바르트는 부활을 모든 인간적 현실에 대칭하여 서 있는 하나님의 역사의 종적인 범주 안에서 이해하며, 하나님의 위대한 판단이요 새로운 행위로서 십자가 사건에 대한 결단의 집행이며 선포로서 설명한다. 여기서는 신학적인 “일요일의 인과율”과 “평일의 인과율”이 공존한다. 몰트만은 이러한 바르트의 사고가 탈역사적이며, 또한 그에게 있어서 부활은 종말론적인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의 화해를 초월적으로 확인시켜줄 뿐 아무런 새로운 것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여기서는 재림과 새 창조를 향한 부활하신 주님의 길이 무의미하다.

불트만은 바르트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나님의 행위를 뜻하는 하나님의 역사의 범주에서 보지 않고 신앙의 경험을 뜻하는 실존의 역사의 범주에서 본다. “부활”은 세계의 화해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지닌 구원의 의미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의 생성을 나타내는 신화적 표현이다. 즉, 불트만에게 있어서 부활절은 죽은 예수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행위가 아니라 제자들에게서 일어난 실존적 사건, 곧 그들의 신앙이 거기서 생성한 실존적인 역사적(geschichtliche) 사건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불트만의 견해가 부활신앙을 탈실사화(Enthistorisierung), 탈종말론화(Enteschatologisierung)한다고 비판한다.

판넨버그는 보편사 신학의 틀 안에서 예수의 부활을 하나님 나라의 선취의 종말론적 증명으로 본다. 예수의 부활 속에는 “역사의 종말”이 역사 한가운데 현존하고 있다. 예수의 나타나심에 대한 제자들의 판단은 그들의 신앙의 반성적 판단이 아니라 예수의 운명에 대한 실재적 판단이다. 그는 실제로 부활하였다. 몰트만은 이러한 판넨버그의 생각에 상당부분 동의하지만 부활신앙을 실사적(historisch) 이성의 도움으로 역사파악의 장으로 옮기려 하는 것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 그리스도의 부활은 존재의 선취적 구조들의 실사적이며 상징적인 증명이 될 수 있고 아무런 새로운 것도 더이상 제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선포는 인간과 신음하는 피조물들이 파괴와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되는 해방의 역사의 지평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미래를 개방하며 역사를 열어주는 사건을 뜻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역사 한 가운데 있는 삶의 근거와 약속이다. 역사를 부활의 전망 속에서 본다는 것은 영 가운데에서 부활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의 현재적 능력들 속에서 인식된다. 부활은 역사적 과정이다. 이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 그 근거를, 성령 안에 그 역동성을, 모든 사물들의 생동적 새 창조 안에 그 미래를 가지고 있다. “부활”은 한 “사실”을 뜻하지 않고 “되어 감”, 곧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넘어감”을 뜻한다.

부활의 희망은 다른 삶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죽을 삶이 다시 태어나게 하는 힘이다. 부활의 희망은 어떤 다른 세계를 지향하지 않고 이 세계의 구원을 지향한다. 몰트만은 바르트와 불트만과 판넨버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그들의 일면성을 극복하려고 한다. (바르트와 함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사실”이며 그 자체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이다. “전혀 다른 자”로서의 하나님은 새로운 세계의 창조자이다. (불트만과 함께) 부활신앙 자체는 삶의 힘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부활이다. 죄와 권력과 소유의 세계 속으로 실존이 타락한 것에 대한 “해방하는 심판”은 참된 삶을 위한 봉기의 시작이다. (판넨버그와 함께) 죽은 자들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소급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구원의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부활은 죽어 가는 자들을 위한 영원한 삶의 선취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계사를 종말의 역사로 규정하며 역사의 경험의 영역들을 새 창조의 기다림의 지평 속에 세운다.

몰트만은 트뢸치의 세 가지 역사적 공식들에 반대한다. 부활신앙은 역사적 개연성의 판단에 근거하지 않으며, 따라서 무덤으로부터 예수의 부활의 과정은 실사적으로 확정될 수 없고 오직 현재적인 “영의 힘과 증명”에 근거한다고 본다. 또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부활은 역사적 삶의 현상들 사이의 인과적인 상호작용의 한 과정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의 상호작용의 단절인 죽음이 새 창조의 영원한 삶으로 지양되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은 모든 역사적인 삶의 사멸성이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의 불멸하는 상호작용 속으로 지양되는 과정의 시작이다. 마지막으로 역사적(historisch) 이해는 유비를 근거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죽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원한 생동성 가운데에서 인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을 인식하는 가장 근원적인 인식의 형식이다.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린 그분 안에서 인지하는 자는 세례가 상징하는 바와 같이 죽으며, 부활의 영으로부터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때에야 하나님과의 치유하는 유비들이 살리는 영 가운데에서 인지된다.

 

B. 자연과 그리스도의 부활

 

몰트만은 “역사”라는 파라다임이 현실 전체를 인식하기 위한 포괄적인 모델이 아니라고 본다. 역사와 자연, 정신과 육체는 상호관계 속에 있다. 인간의 정신이 그의 신체 속에 들어 있고 신체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역사도 땅의 자연의 기본적인 조건들 속에 있고 이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부활신앙을 역사와 역사과학의 영역을 넘어서서 자연 속에 있는 역사의 생태학적 조건들을 통찰하려고 한다. 즉 역사적 기독론은 생태학적 기독론으로 지양되어야 한다. 그가 추구하는 우주적 기독론은 이런 관점에서 전개된다.

이제 몰트만은 “역사”라고 하는 파라다임 속에서 아들을 살리신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위를, “자연”이라고 하는 보다 포괄적이며 생태학적 파라다임 속에서 살리는 신적 영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다시 태어남으로 이해한다. 성령론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에 대하여 역사적 은유들이 사용되지 않고 자연적 은유들이 사용된다. 여기서는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체성(Leiblichkeit)이 중요시된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 의하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영광가운데 재림하실 때 “우리의 낮은 몸”이 변형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은 형태를 갖게 될 것을 바라본다.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우리는 “몸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롬 8:23).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은 영광스럽게 된 몸의 원형이다. 신체적으로 일어난 그리스도는 이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죽을 생명의 새 창조의 시작이다. 신체적으로 일어난 그리스도는 그의 신체 안에서 인간의 본성을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이끌어 들인다. 자연적인 “육의 부활”이 없다면, 인격적인 “죽은 자들의 부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신체적 변형의 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을 단절과 새로운 시작으로 보지 않고 “변화”, “변형”, “변용”, “넘어감”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창조의 종말론적 새 창조는 지금의 이 모든 창조를 전제한다. 마지막에 옛 것 대신에 새것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옛것이 새롭게 창조된다(고전 15:39-42). 이러한 개념의 유비는 자연의 재생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한다. 새 창조는 피조물들의 죽음을 우주적으로 폐기함으로써 철저히 새롭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시작인 동시에 새롭고 영원한 창조 안에서 첫 창조의 사멸할 생명들이 변용 되는 일의 시작이다. 자연은 인간의 역사를 그 목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역사는 “자연의 부활”에서 완성될 것이다. 골로새서에는 이러한 우주적 기독론의 비전이 나타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모든 것이 화해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로 평화의 길을 열어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모든 것을 그를 통해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다”(1:20). 그리스도는 인간의 화해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피조물들의 화해를 위해 죽었다. 우주적 기독론은 실존적 기독론과 역사적 기독론을 완성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폭력으로 인하여 상처받은 자연이 인간의 평화의 역사를 통하여 그 속에서 치유될 수 있는 만유의 화해에 대한 기다림의 지평을 열어 줄 것이다.

인간이 기다리는 “육의 부활”은 “부활의 영” 안에 현존하며 지금 이미 작용하고 있다. 부활의 영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 자는 이 “악한 세계”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고난당하는 창조의 해방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으며 이 창조를 위하여 생동하게 된다. “육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기독교의 깊은 차안성”을 근거시키며 이에 대한 동기를 부여한다. 개인과 집단과 우주적 죽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땅에 계속 충성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희망이다. 죽음이 분리와 고립의 세력으로서 이 삶 속에 작용하듯이 부활도 희망의 힘으로 이 삶 속에서 죽음의 세력들을 폐기한다. 그것은 신체와 영혼의 인격적 통일성을 위하여, 시간의 형태들 속에 있는 인격의 통일성을 위하여, 사귐 속에 있는 인격들의 통일성을 위하여, 연속되는 인간의 세대들의 통일성을 위하여, 그리고 땅의 자연과 인간 문화의 통일성을 위하여 작용한다.

 

 

V. 우주적 그리스도

 

근대 프로테스탄트의 기독론에서는 “역사적 사고”가 “형이상학적 사고”를 배제하였다. 그러나 몰트만은 역사적 사고를 넘어서서 인간의 역사를 생태학적으로 자연의 틀 안에서 보는 새로운 우주론적 형이상학을 받아 들이고있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우주적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신체성과 땅의 자연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다. 우주적 기독론의 대두는 자연세계의 치명적인 생태학적 재난을 차츰 의식하면서 “역사적 그리스도론”에 대한 한계가 드러남에 따라 이해되기 시작했다. 우주적 기독론은 고대에서는 ‘세력들과 영들과 신들의 세계와의 관련에서 이해’되었지만, 오늘날은 인간에 의해 카오스로 돌변하였고, 오염되고 저주받은 ‘자연과의 관련에서 이해’된다.

이제 더이상 기독교는 인간 중심적, 또는 역사 중심적 종교가 아니라, 온 우주를 포괄하는 그리스도 중심성(Christozentrick)과 하나님 중심성(Theozentrick)의 종교이다. 성서적 기독교는 언제나 더 크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한 길이었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장자다 -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의 장자다 - 그리스도는 모든 창조의 장자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야이다 - 예수는 백성들의 사람의 아들이다 - 예수는 화해된 우주의 머리이다; 나사렛 예수의 실존 - 공동체로서 실존 - 우주로서의 실존.

기독론은 우주적 기독론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온 창조 안에 있는 적대관계를 극복하였고 창조의 모든 영역 안에 화해를 가져오기 때문에 숨어 계신 방법으로 이미 지금 만유의 통치자이다. 영광 속에서 일어날 그의 재림은 역사적으로 이 세계시대의 종말로 표상되고 기다려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 속에 숨어 있는 만유의 통치자의 궁극적 나타남으로, 또 화해되었고 구원받았으며 새롭게 창조된 우주 안에서 숨어있는 자연주체(Natursubjekt)의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나타남으로 표상되고 기다려진다.

“그분을 통하여 모든 것이 창조된” 우주적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의 근거는 부활하신 그분에 대한 부활절 경험에 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을 통한 창조의 영화는 창조의 완성이요, 창조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우주적 기독론을 위한 존재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며, 그의 부활이 지닌 우주적 차원들의 빛 속에서 그의 십자가 죽음은 우주적 의미를 가진다. 그의 죽음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화해 뿐아니라, 세계의 화해를 인지하게 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골1:20).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의 회복은 육의 부활이며,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과 같은 역사적 그리스도의 칭호들은 로고스, 지혜, 세계의 생명이라는 우주적 기독론의 칭호로 보완되어야 한다.

몰트만은 그리스도가 지닌 창조의 중재자직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1. 모든 것의 창조의 근거로서의 그리스도, 2. 창조의 진화의 원동력으로서의 그리스도, 3. 창조의 모든 과정의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가 그것이다. 먼저, 그리스도는 세가지 점에서 신적이며, 창조의 근거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그를 통하여”, “그 안에서”, “그를 향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① 영과 말씀을 통한 창조: 모든 것이 한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다양성과 역사성에는 하나의 초월적인 통일성이 선행되는 데, 이 통일성이 “지혜”, “영”,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운다. 창조자는 그의 창조적 말씀을 통하여 그의 피조물들을 구분하고 그의 모든 말들을 이끄는 그의 영을 통하여 그들을 결합시킨다. 즉 피조물의 통일성에 관하여 영과 말씀은 서로 보충하는데, 말씀은 그의 활동을 통하여 구분하고 정의하는 반면, 영은 그의 현존을 통하여 결합시키고 일치와 조화와 사귐을 창조한다.

② 창조의 확립: 창조의 중재자직이 지닌 둘째 관점은 창조의 확립과 보존이다. 우주의 보존은 계속적 창조로 파악될 수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에 대하여 인내하시고, 관용하심으로 피조물들이 그의 영광의 나라로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③ 창조의 쇄신: 계속적 창조는 하나님이 태초의 창조를 지킴으로써 일어나는 창조의 확립일 뿐아니라 동시에 모든 것의 새 창조의 선취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창조의 보존과 발전 속에서 이미 창조의 완성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창조의 계속과 완성을 진화론의 표상을 가지고 해석한 이는 떼이야르 드 샤르댕이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우주적 그리스도는 “진화의 그리스도”이다. 떼이야르는 “성육신”을 유일회적이고 역사적인 나사렛 예수의 인격으로 끝나지 않고, 온 우주의 신격화를 위한 출발로 보았다. 그는 인류의 인간화의 과정 또한 인간발생의 정점에서 의식의 마지막 목적지와 중심점 곧 “우리가 예배하는 그리스도가 빛날 수 있는 이상적 장소” 오메가 포인트까지 이르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진화론적 그리스도는 한마디로 “하나님이 세계화되고 세계가 신격화되는 우주적 성찬식의 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몰트만은 떼이야르가 구원의 문제를 창조적인 면을 발견하기는 하였으나 진화의 이중적 측면 즉 도태, 희생을 간과함으로 구원과 통일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진화는 약자와 병든 자와 무능한 자에 대한 일종의 세계 심판의 생물학적 집행이다. 그러므로 떼이야르는 “만유의 화해”를 말할 수 없었다. 구원자 그리스도 없는 진화자 그리스도는 잔인하고 감정 없는 도태자 그리스도가 아닌가? 자연과 인류의 진화의 여러 가지 과정들은 그리스도께서 희생자들 가운데에 희생물로서 인식될 때에만 창조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라너는 자기초월로 인한 “참 인간”과 그의 자기전달로 인한 “참 하나님”을 하나님-인간에서 보며, 그 비밀을 성육신의 개념에서 발견한다. 몰트만은 샤르뎅과 마찬가지로 라너도 그리스도를 진화의 정점으로 보지만 양면성(완성과 희생)을 가진 이 발전의 구원자로 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라너에게는 그리스도의 성취된 인간존재가 그 중심에 서 있고 그의 파괴되어 버린 인간존재는 중심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진화의 구원자이시다. 그리스도는 서로 역행하는 두가지 일을 행하시는 분인데, 하나는 되어 감 속에 있는 그리스도요, 다른 하나는 오심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이다. 전자는 진화의 발전적 나아감이요, 후자는 진화에 역행하여 일어나는 구원활동으로서 진화에 의해 희생된 모든 것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전자는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요, 후자는 미래에서 부터 오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적 기독론은 “땅과 하늘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화해되며 시간이 허무성의 매임에서 구원받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이 메시야 안에 모이게 되고 창조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다.

창조의 목적론은 창조의 종말론이 아니다. 과거에 있었고 지금 있으며 미래에 있을 모든 것의 새 창조가 종말론적인 것이다. 육과 모든 자연의 부활이 종말론적이다. 시간의 마지막에 모든 시간적 사물들에게 동시적으로 일어날 새 창조의 영원이 종말론적이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그 무엇도 잊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에게서 상실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회복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온 우주의 화해는(골1:20) 권리를 상실하였고 상처받은 모든 피조물들의 칭의와, 오직 그것만이 생명과 창조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의 정의의 관철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 인간 상호간의 화해, 인간 자신과의 화해는 자연과의 화해를 직접적으로 포괄할 수 밖에 없으며 이리하여 자연과의 정의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uy Now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Blog
About Us
Message
Site Map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Terms of UsePrivacy Notice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

Home
Gospel
Question
Blog
Hel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