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몰트만 (J. Moltmann)의 기독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VI.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항목으로 종말론에서 다루어졌다. 그러나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를 기독론의 결론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완성으로 구성하고 있다. 파루시아는 예수의 길의 완성이다. 파루시아는 “도상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노정이 목표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즉 그분의 구원의 사역이 완성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종말론적 인격 속에서 완성되고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우주적으로 계시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이 파루시아로 완성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속에 세상의 완전한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지 않은가? 그러나 몰트만은 (바르트처럼)구원을 십자가 사건에 국한시키는 것과 반대한다. 왜냐하면 부활과 종말이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십자가의 죽음에서 일어난 구원사건에만 관련을 맺게 되면 구원이 일면적으로 축소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파루시아 역시 구원의 사건이다. 그것은 이 사건들을 통해 병들어 죽게 된 세계의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파루시아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우주적 현현이며, 그의 부활의 우주적인 성취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그리스도의 죽음속에 있던 구원의 의미가 알려지는 것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약속으로 가득찬 그리스도 역사의 완성이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때 비로소 “끝없는 왕국”이 시작되고 이 때에 “모든 눈물이 씻기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에 이스라엘은 구원될 것이고 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던 세계가 새롭게 창조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 미래는 세계 역사를 또 한번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마지막으로 한번 전환시킨다.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은 영광 가운데 오실 그분의 파루시아의 예기이다. 그리고 그의 파루시아는 그의 부활의 성취이다. 세상을 화해한 것은 모든 것의 새 창조를 위한 약속이고 새 창조는 세상의 화해의 성취이다.

 

몰트만이 기독교 종말론을 기독론으로 전향시켜서 파루시아를 그리스도의 역사의 완성으로 나타내 보인 것은 의미가 크다. 이로써 그리스도 신앙의 희망의 차원이 회복되며 기독교 종말론은 하나님의 영광의 종말론으로 바르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종말론이 메시야 예수의 역사의 완성으로 인식되지 않고, 기독론에서 유리되어 버릴 때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의 복음을 통해 의롭지 못한 자들에게 신적인 자비의 의를, 불의한 자들에게 신적인 용서의 법을 선포했던 예수,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조건 없는 원수사랑으로 원수관계를 극복함으로써 우주적 화해를 일으키고 평화의 왕국을 건설하는 예수가 최후의 심판 때는 보복 형벌적인 법을 따라 심판하는 두려운 세계 심판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분의 복음, 곧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에 따라 심판하시며 또한 그 의를 모든 이에게 부여하기 위해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의는 정의를 창조하는 의이다. 그분은 세우고 바로잡기 위해 심판하신다. 여기에서는 원수사랑을 통하여 악마저 선으로 바꾸어 놓는 그 능력이 하나님의 전능이요, 불의한 자들은 멸망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의롭게 하고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은 참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묵시문학적 보복형벌의 최후심판적 종말론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목베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오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두려움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 예측할 수 없고 거리끼는 미래의 일이 아니라, 불붙는 희망 속에서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로 마주하기를 열망하게 하는 사건이다.

그러면 몰트만은 새 창조의 종말론적인 순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는 “하나님의 자기 제한”(Zimzum)에 대한 유대교의 카발라적 도움을 받아 종말론적 새 창조를 설명하려 한다. Issak Lucia는 Zimzum이라는 표상을 발전시켰는데 이 표상의 의미는 창조에 앞서는 하나님의 자기제한(Selbstbeschrankung Gottes)이다. 전능하고 어디서나 현존하는 하나님은 자신의 무소부재하심(Allgegenwart)을 거두어들임으로 그의 창조물에게 공간(platz)을 부여하시고, 그의 영원을 제한시킴으로 그의 창조물에게 시간(Zeit)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몰트만에게 있어서 종말론적인 순간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제한을 폐기하는 순간이다. 하나님은 자기 제한을 폐기하고 영광스럽게 변화한 창조세계 속에서 모든 것 가운데서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신다.

새 창조의 피조물에게 주어지는 영원성을 몰트만은 고대 교회의 에온(Aon) 개념을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설명하려고 한다. “에온”은 하나님의 절대적 영원성(absolute Ewigkeit Gottes)이 아니고, 그의 영원한 존재에 연계되어 있는 피조물의 상대적 영원성(relative Ewigkeit)이다. 그 대표적 예로 하늘에 있는 천사를 들 수 있다. 천사는 유한한 피조물이지만 망아적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절대적 영원성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절대적 영원성에 참여하게 되고, 바로 이 하나님의 절대적 영원성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존재이다. 그런데 시간과 에온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운동에 있다. 피조된 시간은 장차 새 창조의 에온적 시간의 원형운동으로 변화될 것이며, 하나님의 절대적 영원성의 현존속에서 피조된 시간은 하나님에게 상응하는 새로운 창조의 상대적 영원성으로 변화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란 신적인 삶의 원천에 끊임없이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죽지 않게 된 피조적 생명, 즉 분여 받는 영원성(mitgeteilte Ewigkeit)이다.

몰트만은 그의 『희망의 신학』에서 미래와 희망을 기독교 신학의 중심문제로 두고 있다. 그러면 기독교가 말하는 미래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 역사를 한번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마지막으로 한 번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하나님을 통한 모든 것의 새로움, 궁극적인 새로움(novum ultimum)일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희망이 영광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로 전향될 때에 비로소 교회 공동체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마라나타”의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고전 16:22; 계 22:20) 파루시아에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하실 것이다(빌 3:20-21).

그리고 파루시아에 대한 기다림은 이 세계로부터 도피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땅에 충실하게 만드는 소망이 된다. 그것은 비록 지금의 세계가 구원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 있지만 장차 이 세계는 하나님의 새 창조를 통하여 영광의 나라로 변용될 세계이기 때문이다. 파루시아 소망 속에서의 삶은 단순한 기다림이나 자기 보존 내지는 신앙을 지키는 차원에 머물 수 없다. 파루시아를 기다리는 삶은 오시는 이를 “선취함”속에 있는 삶이고 “창조적인 기다림”속에 있는 삶이다. 그리스도의 미래에 대한 기다림은 현재를 오시는 이의 빛속에 두게 하고 육체적인 삶을 부활의 능력 속에서 경험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해서 파루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참여해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동역하는 삶에 헌신”하게 된다.

 

 

VII. 결 론

 

지금까지 몰트만의 저서인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중심으로 그의 기독론의 주요내용과 특징을 알아보았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신앙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였는데,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신론에 있어서 고대의 형이상학적 무감정의 공리(Apathieaxom)를 극복하고자 시도하였으며, 추상적 유신론과 추상적 무신론을 배격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더이상 본질적 “하나님의 고난”에 대하여 은유적으로 말하지 않고 직접 말할 수 있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은유 속에 실제적인 실체를 부여하려고 했지만, 결국 몰트만은 성부 수난설은 떨쳐 버린다. 그러나 몰트만은 자신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란 구절에 실제적인 의미를 주면서 - 말하자면 이 표현은 유일신론적인 표현방식이다.-동시에 이러한 그의 입장이 성부수난설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데 성공했는가? 그가 아들의 죽음 속에서의 “아버지의 무한한 슬픔”을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성부 수난설이 아닌가? 전통적인 정통주의 유신론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은 고통당할수 없다. 왜냐하면 헬라주의의 형이상학에 있어서 신적인 궁극자는 불변하며 따라서 아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음의 고통보다 더욱 격심할 수 있는 슬픔의 고통으로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고통’에 관한 언어를 사용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는 성부 수난설적인 이단에 대한 고대 교회의 편견에 퍽이나 집착하고 있다. 그는 단순히 아버지의 고통은 아들의 것과는 다르다고 강변하기보다는 좀더 분명히 이 문제를 다루었어야 했다. 분명히 그의 삼위일체론적인 관계 속에서의 아들의 죽음과 성부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입장은 성부 수난설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실제적인 고통이다. 왜 성부 수난설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왜 그가 성서 안에 나타난 더욱 결정적인 하나님에 관한 언어에 제한을 가하는 헬라 철학적인 하나님 개념에 진지하게 도전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왜 정면으로 대응하지 못하는가?

몰트만은 삼위일체적인 십자가 신학을 주장한다. 십자가 사건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서술되어지는 반면, 성령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이위일체적 하나님 개념이 아닌가? 삼위일체적 하나님 개념안에 성령이 포함되어야할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없다. 몰트만은 주장한다. “십자가에 대한 지식의 질료적 원리는 삼위일체론적이다.” 십자가 사건은 성부와 성자간에 발생하는 사건이다. 성령은 이 사건으로부터 발생하는 것, 즉 신앙과 자유, 희망과 사랑이다. 그러나 몰트만은 후에 창조론, 기독론, 교회론을 전개할 때 성령론을 보다 충분히 발전시키려고 하고 있다. 처음에 몰트만은 그의 신학을 약속의 역사와 종말론적인 미래로 부터 이끌고 왔으며(희망의 신학),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것의 사회 정치적 관련성으로부터 전개하고 있으며(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나아가서 역사와 창조와의 관계성 안에서의 신론이나, 철학사, 문화사, 종교사, 그리고 일반적인 삶과 교회적인 특수한 삶과의 관계 속에서의 성령론 교리를 다루고 있다.

전통적으로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본질적인 의미를 속죄론의 제목아래서 다루었다. 몰트만은 이런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기독교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독교 안에서 십자가가 말하여지는 방식을 단순히 습관화시키는 전통적인 구원교리를 버려야 한다고 한다” 고 말한다.따라서 그는 속죄교리를 세우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고전적 신학자들에 대하여 아무런 비판적인 분석도 하지 않는다.

한 신학자가 예수의 고통과 죽음의 구원론적 의미를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제한 할 때에, 우리는 그가 어떤 방법론적인 원리에 의해서 교회전통의 주된 흐름과의 비판적인 토의를 거쳐서 자신의 방식의 교회를 위한 정당성을 입증하지 아니하고 그 자신의 이론을 신학의 역사안에 밀어 넣을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몰트만의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해석은 신약성서의 기독교의 정체성의 극과 현대에 있어서의 신학적 관계성의 극사이를 왕복한다. 그러나 역사적 전통이라고 하는 제 3의 대화의 파트너는 상대하지 않고 있다. 몰트만은 주석적, 조직신학적 차원에서 현대 신학자들과의 대화를 수행한다. 그러나 속죄론에 관한 이레네우스, 오리겐,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안셀름, 아벨라르드 그리고 그 외의 신학자들과의 통시적인(通時的)대화는 부재하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텍스트를 향하여 제기하는 질문을 형성하는 해석의 지평이 너무 협소해지며 우리 자신의 문화적 상황의 지평을 넓혀주는 전통의 힘이 폐기되어진다. 예를 들면 교의학적 전통은 우리가 우리자신의 맹점 때문에 오늘 우리의 상황에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어떤 질문들을 신약성서를 행하여 제기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 몰트만은 예수의 죽음의 대속적(vicarious) 의미와 같은 전통적인 속죄 교리에 있어서 중심적인 질문을 자신의 관심사를 삼지 않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대속적(代贖的, substitutionary)인 의미를 갖는가? 어떤 의미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는가? 대속적 개념은 낡아 빠진 것인가? 그러나 분명히 이 개념은 신약성서 안에 있고 스탠달과 어리석음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일 수도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론적 의미에 대한 오늘날의 이론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전통과의 대화는 적어도 우리를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도록 몰고 갈 것이다. 전통에 있어서 중심적인 어떤 것으로서, 이것은 우리 눈의 비늘을 벗겨내는 힘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만일에 아들(Son)의 고통과 죽음 안에의 아버지(Father)의 참여가 오늘날에 홀로 고통 당하여 잊혀진 채 죽어 가는 자들을 위한 궁극적인 구원의 의미를 가진다면 근본적으로 대속 개념을 취급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본질적으로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 어떤 이론이 옛날 그곳에서의 예수의 운명이 어떻게 오늘 이곳에 어떤 유익을 가져올 수 있는가를 설명해 줄 수 있는가? 어떻게 그의 죽음의 혜택이 모든 인간들에게 전달되어 질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에 대하여 새로운 통찰과 이해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통적 구원 교리들이 오늘날 우리들을 위하여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의 몰트만의 가장 대담한 시도는 악의 문제 즉 신정론과 삼위일체의 관계를 다룸에 있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몰트만은 성서나 신학의 역사에 근거하지 않고 스스로의 독자적인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악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몰트만은 악을 하나님 자신이 걺어 지도록 함으로써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한다. 악의 잠재성만 모든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악의 현실성도 하나님 안에 포함되어졌다.

 

오직 모든 재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 절대적인 죽음, 가공할 파멸의 저주와 무에로의 전락,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 안에 있어야만 (교회)공동체는 영원한 구원, 무한한 기쁨, 깨뜨릴 수 없는 선택과 신적인 삶의 하나님과 함께 있다.

오늘날의 공포스런 현실을 생각하면서 몰트만은 “아우스비츠 조차도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몰트만의 신정론은 다소 사변적이기는 하지만 범재신론(panentheism)적인 신관에 입각한 화이트헤드적인 악의 문제의 해결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베를린, 보스니아, 소말리아, 르완다, 이 모든 악과 비극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all in all)이시다.

이러한 몰트만의 신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종말론적 우주적인 새 창조의 지평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문제는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창조가 과거로부터 계속되어온 하나님의 침묵과 숨어계심, 그리고 이 세상의 과도하게 넘쳐나는 모든 악과 슬픔과 비극에 대한 충분한 해결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끝이 좋으면 전체가 좋은가? 역사와 자연의 이러한 총체적 비극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계속 유지되는 자기제한(zimzum)으로 인한 파루시아의 지연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몰트만은 그의 책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인간 해방의 주제에 관한 내용으로 결론을 맺는다. 그는 경제, 사회, 정치적 차원의 해방을 더욱 확신 있게 다루고 있다. 루터는 십자가 비평을 교회에 적용시켰다. 오늘날에는 십자가 신학이 사회비평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에의 몰트만의 정치적 해석학에 대한 관심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연계점을 갖는다. 십자가에 계시되어진 하나님은 국적도 없고 계급도 없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정치는 구체적으로 가난하고 억압당하는자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정치적 해석학은 이 이론에 상응하는 실천을 산출할 것을 요구한다. 이 실천의 목적은 죽음의 악순환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경제적 영역에는 가난이, 정치적 영역에는 폭력이, 문화적 영역에는 소외가, 생태적 영역에는 오염이, 개인적 영역에는 무의미성이 있다. 만일 십자가의 정치적 해석학이 이러한 부정성들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또한 실천적으로 적극적인 것을 내어놓기 위해 일해야 한다. 결과적인 양상은 분명하다. 즉 그것은 경제적 영역에는 사회주의를, 정치적 영역에는 민주주의를, 사회적 영역에서는 해방을, 그리고 생태신학적 영역에서는 자연과의 평화를 추구한다.

몰트만이 다루지 않은 질문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곧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길에로 가지 아니하고 동일한 목표를 위하여 동일한 실천적 결론들과 투쟁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예수에 대한 신앙도, 아무런 십자가의 신학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가? 그들은 성문 밖의 십자가의 길로 돌아가는 기독교의 우회도로를 택하지 아니하고 직접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가는 것인가? 또는 몰트만이 많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신앙의 관점에서 공유하고 있는 사회 철학에 세례를 준 것인가? 비기독교적 사회주의자들은 몰트만이 십자가로부터 밖으로(out) 이끌어 냈다고 주장하는 해방의 의미가 실제로는 그가 십자가 안으로(into) 끌고 들어간 의미가 아닌가 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몰트만은 오늘날 기독론의 주요 주제인 예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예수의 탐구”를 충분히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제 1장의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에서 몰트만은 좀 더 다른 문제로부터 기독론으로 접근한다. “메시야”라는 단어가 암시해 주듯이 그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과 유대교의 미래 희망은 메시야적인데, 이 희망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생성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메시야적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 메시야적 신앙을 종말론적인 틀 안에서 보고 있으며, 그의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는 단계적인 종말론적 서술 형식을 띠고 있다. 즉 그의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는 “되어 감 속에 있는 그리스도”이다. 이“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이론적으로는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지내고 있으며, 실제적으로는 현실 참여의 성격을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메시야로서의 그리스도가 구약의 묵시적 표상을 이어받아 우주적 화해와 우주적 구원을 일으키는 근거가 된다. 또, 이 우주적 화해와 우주적 구원이 생태학적 위기의 회복이라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근거가 된다.

이상과 같은 몰트만의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기독론은 “넘어감”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그의 말대로 이 넘어감은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넘어감은 전통들을 보다 넓은 지평 속에 세울 수 있으며, 진리에 대한 과거의 인식이 새로운 상황에 적용되도록 함으로써 이 인식을 보존하도록 하는 것이다. 역사의 예수로부터 신앙의 그리스도로 넘어갈 때, 몰트만은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배격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신앙의 그리스도에서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로 넘어갈 때,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다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형이상학적 사고는 인간의 역사와 자연을 중재 화해시키고자 하는 우주적인 차원으로 그 지평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우주적 기독론은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론”의 바로 이러한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몰트만의 “신앙의 그리스도론”이 우리가 믿고 있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확인케 해주고 있다면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론”은 특히 생태학적 위기와 관련하여, 교회가 이 세상에서 실현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그리스도를 통한 세상과의 관계성 안에서의 신관이 있다. 이 신관은 오늘날의 공포스런 현실을 생각하면서 “아우스비츠 조차도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라고 하는 그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이러한 몰트만의 신관은 범재신론(panentheism)적인 화이트헤드의 신관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베를린, 보스니아, 소말리아, 르완다, 이 모든 악과 비극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시다(all in all). 이러한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의 종말론적 비전에 더욱 잘 나타난다.

 

시간의 마지막에 모든 시간적 사물들에게 동시적으로 일어날 새 창조의 영원이 종말론적이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그 무엇도 잊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에게서 상실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회복한다.

 

이러한 몰트만의 종말론적 세계의 하나님 안에서의 완성은 비록 종말론의 과정 자체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커다란 차이가 있으나, 귀결적 본성(Consequent Nature) 안에서 세계를 심판하는 화이트헤드의 신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신은 세계가 신 자신의 삶의 직접성 속에 들어올 때, 세계를 구원한다. 신의 귀결적 본성은 구원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버리지 않는 사랑의 심판이다. 또 그것은 시간적 세계 내의 단순한 잔해에 지나지 않는 것을 활용하는 지혜의 심판이다.

 

몰트만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복음, 곧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에 따라 심판하시며 또한 그 의를 모든 이에게 부여하기 위해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의는 정의를 창조하는 의이다. 그분은 세우고 바로잡기 위해 심판하신다. 여기에서는 원수사랑을 통하여 악마저 선으로 바꾸어 놓는 그 능력이 하나님의 전능이요, 불의한 자들은 멸망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의롭게 하고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은 참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묵시문학적 보복형벌의 최후심판적 종말론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목베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오신다. 이러한 몰트만의 사상은 결국 만인 구원론, 아니 만유 구원론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에 대하여 그는 마지막 심판이 “예수”의 심판이라는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 속에서만 이 심판을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라고 대답한다.

 

몰트만의 기독론은 결론적으로 삼위일체적 기독론이요, 메시야적 차원의 기독론이요, 우주적 종말론적 기독론이다. 그의 삼위일체적 기독론은 아버지와 성령과의 관계성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게 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기독론이 간과해 버렸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역사를 되찾음으로써 전통적 기독론들이 위축시켜 버렸던 구원의 의미를 메시야적 구원, 곧 세계구원으로 회복시켰다. 또한 그의 우주적 기독론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로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우주적 화해를 보며,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새 창조의 시작을 보고,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서 창조의 완성과 우주적 구원을 인식한다. 이 우주적 종말에서 길 위에 서있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완성된다. 이와같이 몰트만은 기독론과 종말론 결합하였다. 또한 이러한 몰트만의 기독론은 오늘날의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적절한 응답으로서의 구원론적 기독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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