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적 침체 극복과 신앙의 매너리즘에서 탈피
그리스도의 첫사랑에 대한 순결함과 신앙본질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습관적으로 교회 나오고, 습관적으로 예배드리고, 또 습관적으로 개인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종교행위는 결국 우리의 믿음을 형식적 믿음으로 고착시켜 외식적인 신앙인, 명목뿐인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게 한다. 습관화와 '형식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따로따로 가지 않고 동시에 함께 움직이게 된다. 이때 우리가 깨어 있어 경계해야 할 것은 습관화 뒤에 따라오는 형식화이다. 이것은 목회 현장의 일선에 있는 목회자부터 먼저 자신과 싸워야 할 이유이다. 너무 분주한 나머지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한 생각들로 일의 효용성도 떨어뜨린다. 심지어 예배 중에 찬송을 인도하다가 다른 생각에 갇히는가 하면, 성경을 읽는 중에도 말씀에 몰입되지 못함으로 인해 '신앙의 행위'만 남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언제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을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신앙의 본질을 그대로 유지하되, 목적이 아닌 방법상의 문제나 또는 내용이 아닌 형식상의 요소들은 과감하게 분위기를 바꿔 항상 새로운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예배 순서에서부터 설교 형식의 틀, 그리고 다양한 독서의 폭과 새로운 이웃들과의 교제를 통해 새로움을 익힐 필요가 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자신이 속해 있는 지역의 주민자치센터를 비롯한 복지관 및 여러 봉사 단체에서의 간단한 봉사 활동을 통해 교회 밖에서 벌어지는 내 이웃들의 삶을 살펴볼 수도 있다. 잠시 일상생활의 틀에서 벗어나 가보지 못한 곳을 여행한다거나 새로운 운동을 시작해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모험과 이에 대한 도전으로 신체적인 면에서나 영적인 면에서도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감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구호들이 도움이 되기 바란다.
"스트레스는 버리라. 그러나 적당히 긴장하라!"
(No stress, but strain!)
"일은 쉽게 하려 하지 말고, 대신 간단하게 하라!"
(No easy, but simple!)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No worry, but pray!)
4) 영적 무기력 회복을 위한 종말 신앙의 강화
이것을 보다 긍정적으로 표현한다면 '천국에 대한 소망'이 보다 현실화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풍토에서 '종말론' 신앙이 아주 약해졌다. 그것에 대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직접적으로는 불발탄으로 끝나 버린 '시한부 종말론'과 같이 잘못된 종말론 신학(신앙)으로 인한 부작용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며, 간접적으로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한 육적 풍요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제 먹고살만한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의 이 세상에서 쉬 벗어나고 싶어하기보다는 좀 더 그 안락함을 누리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종말론이 약해질 때 천국론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목회자의 영성에 따라 교회는 움직인다. 목회자 개인의 영성훈련의 목표가 그 교회의 영성훈련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점을 고려할 때 목회자가 영적 무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강화해야 할 훈련이 있다. 바로 종말 신앙이다. 신앙생활에서 어느 정도 필요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깨어있어야 함에도 종말 신앙이 약해짐으로 인해 천국에 대한 기대감과 목표의식도 없이, 신앙의 핵심을 잃어버린 채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되어, 현세 기복신앙으로 변질되고, 교회는 세속화의 파도에 휩쓸리게 된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목회자는 영적 침체의 늪에 빠져 영적 무기력의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 영적 무기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목회자 스스로 종말 신앙으로 영적 위기의식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마라나타의 신앙을 회복하여 영원한 본향인 천국에 대한 소망을 붙잡아야 한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후 세계에 관한 대답을 제시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이 사실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는 분명한 내세관을 제시해야 하며, 기독교는 바로 이 소망을 극명하게 나타내야 한다. 천국에 대한 소망은 세상을 도피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의 유한성을 깨닫고 더욱 이 세상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사랑하고 가꾸어 나가는 분명한 삶의 목적을 깨닫게 한다.
이 세상은 천국시민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장이다. 목회자의 영성관리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천국을 소유하고 또 그것을 양들에게 전하는 소임을 다할 때 생기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유지할 수 있으며, 밝은 영성으로 주변을 환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를 위해 아주 간단하고 실제적인 훈련방법이 있다. 될 수 있는 대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늘 보기' 훈련을 습관화시키는 일이다. 졸린 눈이 아니라 마치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는 것을 발견하기라도 하는 듯한 기대감과 설렘에 찬 눈빛으로 한 5분 정도(이것도 길게 느껴지면 2-3분 정도라도)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때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그냥 하늘만을 응시해야 한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야곱이 꿈꾸었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야곱의 하늘 사다리(창 28:12)를 그려 보라. 또한 스데반이 순교 당시 우러러 주목하였던 열린 하늘(행 7:56~57)을 떠올려 보라. 그리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순간이라도 세상의 모든 욕심에서 해방되는 것을 느끼며, 차분하고 깨끗한 마음이 되어 정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될 것이다. 하늘은 우리 인생의 최종 목적지를 생각나게 해 준다.
5) 육적 함정의 덫(자아본능) 다스리기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본능적 욕구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식욕'과 '성욕'이다. 이것은 우리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본능적 욕구이다. 문제는 이 자아 본능을 절대 필요한 만큼만 적절하게 사용해야지, 그 이상의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이것으로 인해 그 인격체는 망가지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로서의 삶이 인생본분의 첫째임을 알아야 하고, 이 존재 이유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에 필요한 '소유'들을 말할 수 있다. 항상 기억해야할 것은 '주 안에서'이다.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의를 구하는 것이다.
신명기 20장에서 하나님은 적군과 싸우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려는 군인들 중에 면제 대상자들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새 집을 건축하고 락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까지 하나님은 그들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그야말로 이해심 많으시고 자비와 사랑이 충만하신 아버지이시다. 신명기 24:5에서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자상한 아버지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동료들은 전장에서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는데 새로 장가들었다고 일 년 동안이나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새로 맞이한 아내와 더불어 신혼생활을 즐기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기본적 본능 욕구를 제어하시고 차단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주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을 풍족하게 허락하시며 자녀인 우리가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시는 아버지이시다. 전쟁은 우리의 일이기 전에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것이 믿음이고, 주 안에서 누리는 참다운 자유의 평안이다. 인간 죄의 근원은 욕심이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약 1:15). 탐심(貪心)은 부당한 욕심, 과도한 욕망(undue desire)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탐욕으로부터 연유된다. 탐심을 다스려야 한다.
돈을 다스리는 문제에 있어 목회자는 자신의 문제보다는 가족의 문제로 인해 세상적 방법과 타협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단호하게 그 제자도를 말씀하고 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하나님의 요구는 바로 오늘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사실 일반적으로 목회자는 주의 부르심을 받고 소명의식에 따라 신학교에 입학할 때 이미 돈의 올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자세와 가치관을 갖고 출발한 사명자들이다. 그러나 삶의 현실에 있어서 자녀 문제만은 하나님과 대립될 때가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는 말씀에 따라 이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야 함에도 자녀 문제만은 이 시대의 교육풍조 속에서(특히 한국사회의 교육풍토) 그 흐름에 편승할 때가 많다.
그리고 이 대립은 부한 자나 가난한 자 모두 돈과 연결되고, 자녀 문제로 인해 돈의 올무에 걸려든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목회자들은 믿음의 선구자가 되기 위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서 주어졌던 하나님의 시험(백세가 되어 약속으로 받았던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앞에서 정직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단편적으로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가 돈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시금석이요 출발점일 수 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라는 말씀이 믿음과 소망의 근거가 된다.
돈에 대한 목회자 자신의 개인적인 훈련도 필요하다. 가능하면 필요 이상의 것을 구입하지 않도록, 가능하면 그날 필요한 것은 미리 계획하여 쓸 만큼만 돈을 가지고 외출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때로 교통비 이외의 돈을 소유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외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도 믿음의 훈련이요, 돈에 대한 목회자 자신의 영성 관리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의 말씀을 기억함이 좋다.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눅 9:3).
인간의 필요를 위해 돈을 사용하되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돈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 가장 명쾌한 답을 제공한 자크 엘룰(Jacques Ellul)은 그의 저서 「하나님이냐 돈이냐」(L' homme et L' argent)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사회생활로부터 도피하는 은신생활이 아니며, 부자가 되어 돈의 권세를 장악하는 길도 아니다.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매매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거저 주는 삶을 실천하는 길이다.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상의 방법은 어떻게 하면 경제체제를 고쳐서 가난한 자를 부자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가난한 자에게 좀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방법은 어떻게 하변 가난하게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것이며, 어떻게 하면 가난한 자의 대열에 직접 참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돈의 문제보다 성적인 문제가 더 어려울 수 있다. 실제로 돈을 많이 갖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고 해서 죄로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물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지만 그것이 악의 뿌리로 시발점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해서 그 생각 자체를 악이나 죄로 단정 짓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적인 문제는 그렇지 않다. 실제적인 육체의 접촉으로써의 간음뿐만 아니라 "‥‥‥‥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형태이든 혼인관계 밖에서 성적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은 생각자체만으로도 이미 그 마음에 간음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비롯한 혼외의 실제적인 간음행위는 기독교 사회뿐만 아니라 일반 윤리적으로도 금기시되고 있는 사항이다. 현재 성 상담학을 다루는 많은 사람들은 성 윤리에 있어서 기독교윤리의 잣대를 대기 싫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 자신이 일반 사회윤리와 달리 성경에 기초하여 기독교윤리에 입각한 설교와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명한 논리 설정이 되어 있지 않으면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동성애를 비롯하여 관음증 등의 혼인관계 외에서 일어나는 모든 성적 행위는 직접적인 간음행위가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과 생각의 간음에 속하는 것이고, 이를 성경은 간음행위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남녀 모두 이성과의 개별 만남에 있어 배우자의 이해와 동의가 필요하다. 이성을 만나게 될 경우, 항상 자신이 목회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명심하고 자신의 힘든 마음의 상태나 사적인 고민들을 내놓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능한 대로 공적인 이외의 말은 하지도, 듣지도 않도록 주의함이 현명하다.
무엇보다 공식 석상이 아니면 외출은 가능한 한 부부 동반이 좋다. 배우자 이외의 이성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가장 강력한 대안은 배우자가 아내이기 전에 한 여성, 남편이기 전에 한 남성인 점을 명심하고 서로에게 멋진 파트너가 되기 위해 서로가 스스로를 가꾸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젊어서 취한 배우자를 더욱 사랑하는 일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또 그 나이에 걸맞도록 배우자를 내가 좋아하는 개성과 매력이 넘치는 이상형의 모습으로 가꾸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누가 뭐라하든 적어도 내가 배우자에게 있어서만은 가장 멋진 이성으로 다가서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마음뿐만 아니라 몸 관리도 잘해야 한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 때문이다. 특히 목회자는 일반인과 달리 자신이 원하는 바 대로 시간조절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운동이 가능하다. 원만한 부부관계 역시 건강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알고 건강하며 밝은 영성, 깨끗한 영성으로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사랑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서의 배우자와의 사랑에 있어서도 건강한 영성을 통해 건강한 사랑의 역동적 즐거움이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교회의 비밀이요, 신부의 비밀이며, 침실의 비밀이다.
고린도전서 7:5은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부부생활의 철칙이다.
6) 영성 관리의 모델 인물 설정
목회자가 최종적으로 본받아야 할 신앙의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전적인 인간으로서의 모델이 자신의 영성 관리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다. 가능하면 자신이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신앙의 모델이 좋다. 자신의 영성 관리를 위해 영성지도를 해 줄 수 있는 멘토와 같은 신앙의 선배, 영적 지도자가 좋다. 그에게서 구체적으로 신앙의 모델을 배울 수 있고, 세밀하게 영성지도를 받아 영성 관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7) 회개를 위한 실제적 훈련 모델(예시 : 기독교마리아자매회
의 삶) - "빛 가운데 교제"
독일의 '기독교마리아자매회'는 1947년 독일의 폐허가 된 다름슈타트(Darmstadt)에서 독일의 잘못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독신 여성들이 모여 성경공부로 시작된 기독교의 유일한 독신여성 수도 공동체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이들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고 온 생애를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공동체 삶 가운데 '빛 가운데 교제'는 끊임없이 불화를 겪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새로운 빛을 던져 줄 수 있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회개기도'가 하나님 앞에서의 수직적인 기도라면, '빛 가운데 교제'는 수평적 관계에서의 참회와 용서를 구하는 교제 행위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마음으로나 행동으로 지은 죄가 마음에 걸릴 때 특정한 시간을 정해 모두가 모여 있는 앞에서 서로에게 지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공동체 안에서 그 누구라도 서로 간에 그 어떤 막힌 담이 있지 않도록 한다.
'빛 가운데 교제'는 기독교마리아자매회의 가나안 영성을 대표할 만한 특성이라 말할 수 있고, 이는 우리의 공동체 삶 안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적용 부분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게 생각된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의 마찰과 갈등을 서로 간에 어떻게 해결해 나가고 있는가를 매우 잘 보여 주고 있다.
'빛 가운데 교제'는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요한일서 1:7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다.
어떤 특정한 룰이나 공식적 제도 없이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자신들 안에서 일어나는 필요에 따라 리더격 되는 자매들의 회의와 결정을 따라 시행된다. 전체적으로 모여 하기보다 각 공동체(부서)마다 자체적 별도의 모임으로, 언제 어디서나 모여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특히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서로 간 개인의 감정에서가 아닌, 오직 일에 관한 내용을 다루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과정에서 일에 관한 것이기보다 개인감정에 의해 상처받은 내용이라고 생각될 경우, 이는 각 개인에게 연결된 멘토 역할의 상담자매에게 찾아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과 연결된 상담자매는 어느 특정인물과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언제든지 다른 자매로 자신의 상담자매를 다시 세울 수 있다. 사실 '빛 가운데 교제'는 상담관계가 잘 되어 있는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열려 있듯 서로에게도 열려 있는 관계이어야 가능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매 주일(필요에 따라 주중에도) 고백성사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고 목회자로부터 직접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개인적 상담관계가 통로화 되어 있지 않아, 목회자의 설교를 통한 일방적 해결방식에만 주로 의지하게 된다. 특히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목회자와의 개인적 상담관계가 어렵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기도하여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초신자나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 알아 가는 기도의 과정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때로는 그 어떤 신비한 대답을 속 시원히 듣기 원하여 성경을 끼고도 점집에 찾아가는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물론 평신도 중에서도 믿음이 좋아 충분히 영적 지도를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겠으나, 대체로 교인들은 목회자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문제 해결을 받기 원한다. 그러나 목회자 자신이 개인적인 상담사역을 꺼린다면, 위에 소개된 '빛 가운데 교제'와 같은 방법이 화해와 용서를 위한 길이 될 수도 있겠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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