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제안합니다.
여러분의 목회의 목표는 사랑으로 공동체를 세우는 것으로 정해야 합니다. 서로 섬기고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이 있고 섬김이 있고 서로 하나되는 일에 뜻을 두는 바로 그것, 사랑이 충만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은 공동체 속에서 역사하시면서 공동체 개개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공동체 안의 개개인, 항상 공동체 안에 속한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개인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삶의 목표와 지양하는 바는 공동체의 지양하는 바와 항상 동일합니다.
우리의 공동체 일원으로서 개개인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 우리가 이야기할 때에 굉장히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직설법과 명령법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직설법, indicative of slavation(구원의 직설법)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 로마서 8장에서도 성령은 아들의 영으로서 믿는 자 마음 속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영이라 했습니다.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고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믿는 자들은 다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또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나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한 성령으로 우리가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 에베소서 1장 13절, 4장 30절에서 보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령님을 받았다.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았다.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물론 약간 다른 의미로 쓰인 것은 사실입니다.여기서 인치심을 받았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믿는 자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이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물론 약간 다른 의미로 쓰였지만 아무튼 믿는 자가 성령님을 받았다. 또는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았다.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영광스런 구원의 사실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성령님을 새롭게 받으려고 기도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바울은 indicative에 근거한 명령을 다시 하는데, 바울은 한번 더 성령님으로 거듭나라,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이용해서 우리가 스스로 거듭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나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아지는 거지요. 그렇지요?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수동적으로 받은 거지 우리가 우리 행위로 그것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으라 한번 더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거듭나고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은, 물론 믿는 자들에게 바울은 이제 다시 거듭나라,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라, 인치심 받아라 이런 요구를 하지 않고 이미 거듭나고 세례를 받고 인침을 받은 사람에게 바울은 되풀이 해서 뭐라고 이야기 하냐하면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 하고 이야기 합니다.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 이미 성령님으로 거듭나고 인침을 받고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명령이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또 이 말은 갈라디아서 5장16절 성령으로 행하라는 명령으로 나타나고요 에베소서 4장 30절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할지 말라. 이 말은 하나님의 성령님께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서는 성령님을 소멸치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여러가지 명령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으로 행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라. 이와같은 여러가지 명령들 --직설법에 근거한 여러가지 명령들-- 한마디로 이 성령의 거룩하신 능력으로 거룩하심을 행하며 계속 성장하라는 이야기 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라.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라.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네 자신을 성령님께 온전히 드리라는 표현입니다.
그 전에 우리는 누구의 능력으로 살았습니까? 죄와 마귀와 이런 것들의 능력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힘으로 산 것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우리 스스로 좌지우지 못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우리의 실존입니다.
우리는 종노릇하는 거예요. 죄와 마귀의 종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종이 되느냐? 우리는 양자 택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실존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전에는 죄와 마귀의 능력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는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고 성령님께로부터 인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제는 그러므로 이제는 네가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음으로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에 참여하였으므로 이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아라. 성령님에 온전히 네 삶을 맡겨라 하는 그런 의미로써 성령님의 충만을 받아라. 성령님으로 행하라. 또는 하나님의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성령님을 소멸치 말라 하는 명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제2의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없는 새로운 것을 구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성령,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임하신 성령님, 하나님의 전능이신 이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복종하면서 살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그 축복을 계속 누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어떤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사건입니다. 우리의 삶이, 크리스천의 삶, 우리 믿는 자의 삶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이 성령님 충만의 삶은 능력 충만의 삶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성령님과 능력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계신 곳에,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곳에, 하나님의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놀라운 일들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을 회복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모습이 믿는 자 안에서 점점 선명한 빛 가운데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곳에 반드시 그 열매에서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사랑입니다. 성령님이 궁극적으로 나타나는 것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입니다. 성령님의 아홉가지 열매는 한 마디로 사랑으로 압축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을 때 우리 안에 나타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바로 우리의 존재를 규정짓는데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놀라운 일을 일으키시는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는 것이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형상은 사랑의 화신이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로써 우리 가운데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의 경이로운 것이 많이 있지만 타락할 대로 타락해서 악마와 짐승의 모습을 가진 인간이 영광스런 우리 하나님, 영광스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되찾는 것, 그 모습을 취하는 것보다 더 경이스러운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한마디로 기쁨이 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체 일원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사랑으로 섬기게 함으로써 그 공동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띄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케하는 그러한 사역이 성령의 유일하고 최대의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목회의 방향과 목표는 이 성령의 사역에 따라서 행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이 목회에 성공했느냐는 얼만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느냐 입니다. 거기에 우리는 그것을 측정 기준으로 삼아야지 수가 많이 모이느냐? 재정이 얼마나 걷히는가? 다른 것 가지고 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서로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사랑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키워나가고, 또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지역 사회를 섬길 때 그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에 대하여 신비한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고 굉장한 능력을 받아서 사람들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해줌으로 말미암아 그 교회를 단숨에 부흥시키려고 하고 그런 생각은 다분히 미신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참으로 성령님충만한 사역자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기 자신을 우리 주님처럼 불살라서 교회 양떼들을 위하여 죽도록 사랑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충만이라는 것은 하나의 제2의 축복이 아니고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그 축복을 계속 누리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에 바울의 성령론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론과 상당한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의 능력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반해서 바울의 성령론은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믿음의 시작도 성령님이시고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이 삶의 원동력이 성령님을 이야기 하고 있고 근본적으로 우리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회복시키는 그 능력으로서의 성령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제가 누가복음에 나타나 있는 특별히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우리가 복음 사역을 할 때에 성령님의 능력을 무시해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 사역을 할 때에 반드시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해야겠지요. 그러나 그 목표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우리는 더 많은 강조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성령론 가지고 고민하다가 제 나름대로 논리를 세우려다 혼돈 상태에 있어서 상당히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로 이 강단에 섰더니 제가 만족 못하니까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헤매고 있어도 중요한 이야기는 다 했습니다. 제가 헤맨 것은 사실입니다. 하다가 보니까 아주 불만족스럽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과 교회의 관계, 성령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사역, 성령님의 교제, 궁극적으로 성령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모습을 우리 가운데 공동체를 이루시는 관계, 여기에 성령님의 유일한 절대적인 사역, 이것이 성령님의 절대적인 유일한 사역이라 명심하시면 됩니다
- 홍인규 교수/백석대학교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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