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목회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영성 목회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최근에 이르러 '영성'이란 용어가 교회 안에서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시대적인 요청이며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으로 여겨진다. 사실 우리는 사회에 만연된 부정과 부패에 탄식을 하면서도 이 민족을 향한 선지자적 소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그 뿐인가? 오히려 부정과 부패의 모퉁이에 오르내리는 기독인의 이름을 보며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또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이 여인을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자기 자신마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모든 기독인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영성운동은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자성의 목소리인 셈이다. 우리에게 양심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기독영성이 최근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2000년 기독교 역사와 함께 발전되어 왔다. 왜냐하면 기독교 영성이란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바울은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하였다. 영성의 출발점은 다름 아닌 각 사람 안에 살아 계신 성령 하나님이신 것이다.모든 그리스도인은 중생 했을 때 이미 성령을 영접하였다. 그리스도를 주로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 안에서 살아야한다(골2:6).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스스로 주인 되어서 옛사람의 일을 반복하며 산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야 한다. 2000년 동안 영성운동은 발전되어 왔으며, 이처럼 사회가 부패하게 되자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발견해야 한다. 주께서는 목회자인 우리가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서 이 시대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영성운동을 단순히 교회발전의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되겠다. 영성운동은 이 시대의 선지자적 소명을 감당하라는 하나님의 경륜인 것이다. 언젠가 어떤 이의 스쳐 지나가는 말에 가슴이 아팠던 적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목사들은 자신의 행위를 본받아 행하라 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본받아 행하라"한다. 얼마나 뼈저린 가시인가? 지나친 표현이긴 하지만 그의 말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빌 4:9)고 하였다. 이 말을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영성운동은 교인들보다 그들의 지도자이며 목회자인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운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영성운동을 하나의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렇다고 믿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가! 주께서는 아직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고 계신 것이다. 할렐루야!영성목회란 무엇인가?그것은 목회자의 영성을 성도들에게 나누는 일이며, 목회자의 충만한 생명으로 성도들을 섬기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는 일이다. 바울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形象)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라고 하였다. 영성목회란 단순한 방법론적인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는 생명적 사역인 것이다.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할 만큼... . 그러므로 영성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되어야 할 것이 있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내적, 외적인 준비'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Ⅰ. 내적 준비1.성령의 내적 충만이 이루어져야 한다.기독교 영성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각 사람에게 나타나는 성령이며 생명의 충만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지도자에게 성령의 열매가 보여져야 하며, 생명의 충만함이 있어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라 함은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즉 먼저 스스로에게 있어 "이제는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말하면 스스로 자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에 대하여 놀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에게 나타난 그 변화에 대해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성도들을 향하여 성령으로 변화 받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성령께서 자신의 안에서 이루신 사역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느끼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성령께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안에 일어난 일을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 그것은 기적이다. 일평생 신앙생활을 했지만 의지가 약해서 언제나 스스로에 대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성훈련을 통해 성령께서 내 안에서 참으로 많은 일을 이루셨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분주히(사실은 미친 듯이)다니며 영성을 외치고 있다. 또한 객관적이어야 한다. 즉 다른 이들이 내게서 변화를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단순히 듣고 있지만 않다. 그들은 끊임없이 살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성령이 열매로서 보여질 때 그들은 사모하며 자신들도 그 성령으로 변화 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생명에 대해 부분적으로 논한다면 그것은 전달이다. 누구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입술의 표현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생명력이 없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듣는 이들의 머리에 전달되어질 뿐이다. 그러나 전하는 이가 그 사랑에 젖어있고, 그 은혜에 감격하고 있다면 그것은 듣는 이들의 영혼에 전달되어 그들도 똑같이 그 사랑과 은혜에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사랑에 들뜬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사랑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여"라고 표한 하고 있다. 그렇다. 바로 그 사랑과 은혜가 내 안에서 생명처럼 충만하게 느껴질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2.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많은 이들이 '영적'이나 '영혼'을 말하지만 영혼의 자기발견을 이루어 영으로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스스로의 삶에서 영혼의 발견을 이루어 육체로 살지 않고 영으로 살 때(롬8:13) 비로소 다른 이들의 영혼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영혼을 만나지 못한다면 육체를 만날 수밖에 없다.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취하신다면 목회자들도 마땅히 외모를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평가하는 일에 그들의 행위를 중심으로 평가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다. 얼마나 열심인지, 얼마나 봉사를 잘하는지, 얼마나 성경을 잘 아는지, 얼마나 헌금을 잘 하는지...등의 보여지는 것이 사람을 아는 전부여서 참다운 기독인 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보여지는 것에 열심을 가졌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지 않았는가! 교회는 마땅히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왜 그것을 하는지, 어떤 사람이 그것을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스스로 영혼을 발견하여 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다른 이들의 중심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영성 목회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영혼의 자기 발견을 통해서 육신으로 살지 않고,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때 성도들의 영혼을 양육할 수 있는 것이다.디모데 전서 4장 8절 말씀은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였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더 이상 무엇을 하라고 강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되어져야 한다.3. 자기 자신을 위한 사욕이 없어야 한다.영성훈련을 하거나, 영성목회를 함에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의 지킴이다. 내 뜻이나 내 소원, 내 감정, 내 욕망, 이런 것들이 늘 가로막아 주님의 일을 방해한다. 내 것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주님의 것을 발견할 수 없을뿐더러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발견되면 그것은 주님의 원수이며, 나 자신이 원수인 것이다.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시기나 질투, 즉 감정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그들이 신령한 사람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또한 로마서 12장 2절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였다. 내가 있어서는 주님이 계실 수 없는 까닭이다. 만약 영성훈련을 훈련시키는 목회자에게서 이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향한 욕망이 발견된다면 누가 하나님의 신령한 것을 사모하겠는가?물론 목회자가 될 때에 우리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거절하기로 스스로 다짐했다. 그러나 점검하지 않는 사이에 혹, 그것이 오늘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깨어있어 늘 살피고 거절하고 비켜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분토만도 못하게 여기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4.영혼을 향한 열정이 타올라야 한다.주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교회 밖의 사람으로만 여긴다. 그래서 전도를 단순히 교회 밖의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정말 관심 있게 살필 것은 세 비유 모두 잃어버린 것들을 향한 표현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잃어버린 양, 드라크마, 아들이 너무 많다. 교회에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하지만 이미 그들의 안과 삶에 주님은 주인 되어 있지 못하다. 그들은 육신을 따라 살고 단순히 율법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며, 주님과 함께 동행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잃어버린 사람들인 것이다.예수께서는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는 기쁨에 대해 말씀하셨다. 영성목회를 한다는 것은 바로 이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일을 위해 온전한 헌신을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처럼 해산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2)고 하였으며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4)고 하였다. 그가 지닌 영혼을 향한 열정은 즐거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했던 것이다. 영성목회는 바로 이 열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생각해 보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그의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는데 어떻게 주님의 사람들을 위해 죽을 수 없겠는가!Ⅱ. 외적 준비1.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저자는 오늘날 복음을 가장 훼방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 자신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무능이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음으로 인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으로 살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성령은 단순히 소유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어주시는 목적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님께서 '진실로 진실로'라고 강조하신 말씀에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참으로 중요한 까닭에 강조되어진 것이다. 왜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가셔야 성령이 오시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주님은 이 예언을 성취하셨다. 어떤 이들은 이것은 초대교회에 국한 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나를 믿는 자는'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더군다나 오늘날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수많은 능력의 표적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러므로 영성목회를 하려면 성령의 외적 충만함을 입어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함평에 사는 어떤 집사님이 들려준 말이다. 그의 친구가 교회에서 기도를 하는데 예배당 문틈을 시커먼 귀신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그 말을 했더니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러면 교회당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참으로 가슴아픈 얘기였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사람만이 영성목회를 감당할 수 있다. 우리는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2.가정의 영성화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의 가정은 언제나 성도들이 표적이며 모델이다. 그러므로 영성목회를 하려면 가족의 영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아니 어쩌면 목회 자체가 그렇다. 디모데 전서 3장 4,5절은 감독의 조건으로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라고 말씀하였다.사실 대부분의 목회자의 함정은 가정이다. 교회에서야 성도들 앞에서 자신을 감출 수 있겠나, 가정에서까지는 불가능한 까닭일까? 오늘날 목회자의 가정은 큰 몸살을 앓고 있다. 목회를 가장 협력해야할 가족이 가장 훼방을 한다는 하소연을 상담을 통해 많이 듣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목회자 스스로의 문제인 것이다. 목회자는 당연히 가족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렇지 못할 때 가정의 영성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실제로 내 아내의 변화는 나로 하여금 영성훈련에 입문한 계기가 되었다. 아내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나는 영성훈련에 대해 신뢰할 수밖에 없었으며, 지금은 내 딸이 나의 변화를 통해 영성훈련을 열심히 받고 있다. 딸에게 역사하여 변화하게 하는 성령님을 찬양한다.주님께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 5:15)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모두가 등경 위에 두어진 빛이다. 그러므로 원하던 원하지 않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나 개인의 영성은 물론 가족의 영성은 참으로 소중하다. 성도들에게 있어 목회자의 가정이란 비추어내는 등불처럼 언제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목회자가 가정에서 존경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가족의 영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가족의 영혼을 무엇보다 사랑해야하며 그들이 주님 앞에서 변화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야 겠다. 하나님께서 가족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그들을 맡기셨다. 그런 까닭에 가족은 섬김을 받을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섬겨야 할 대상인 것이다. 유교의 전통적인 가치관에 익숙한 우리에게 있어 사실 윗사람은 섬길 수 있으나, 아내나 자녀는 오히려 섬김을 받을 대상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섬김을 받을 대상이란 없는 것이다. 저들을 잘 섬길 때 가정의 영성은 이루어질 것이며, 성도들에게 있어 그것은 좋은 모범이 되어져서 영성목회에 큰 힘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마지막으로 영성목회는 그야말로 성도를 주님의 사람으로 훈련하는 일이다. 주님을 만나게 도와주고 주님과 교통하게 하여 신령한 사람으로 양육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의 주체는 언제나 성령이시다. 목회자는 단지 안내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위해 무릎 꿇고 우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다면 아직은 영성목회를 위한 준비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저들의 육신이야 열심히 도와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단지 육신을 뿐이다. 진정 성도들의 영혼을 양육하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인 것이다.만약 그대가 영성목회를 준비하고 있다면 이처럼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는 일인 것을 다시금 묵상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만 성령의 도구로서 그들 곁에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디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울라, 그리고 모든 일을 다 행한 후에 "나는 다만 무익한 종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 우리는 다만 성령께서 저들을 인도할 뿐, 우리가 할 일은 다른 그 무엇도 없다. 오늘도 살아서 역사 하시는 성령님을 의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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