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사도신경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의미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도신경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의미

 

I. 여는 말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 Symbolum Apostolicum)은 프로테스탄트교회 뿐만 아니라 로마천주교회 및 동방정교회가 모두 인정하고 있는 고대 에큐메니칼 신조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권위있는 신조이다. 개신교회는 공적인 예배에서는 거의 사도신경만 사용해 왔으며, 개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 표준으로서 사도신경을 사용해 왔다. 대단히 짧은 분량으로 만들어진 것 가운데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중적인 요약으로 평가된다.1)

       주기도문이 기도중의 기도요, 십계명이 율법들 중의 최상의 율법이듯이 사도신경은 신조들 중의 신조이다.2) 구원에 필요한 모든 기독교신앙의 근본적인 조목들을 단순한 성경적 용어를 사용하여 기술하고 있으며, 가장 자연스러운 순서인 하나님과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부활과 영생으로 끝맺고 있다. 기독교신앙을 이보다 더 간단히 잘 요약한 것은 없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사도신경은 삼위일체론적으로 구성되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성부, 그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한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에 대한 고백이 그 뒤를 잇고 있으나, 오늘의 사도신경 형태로 발전된 3세기 로마공동체의 세례고백은 그것들을 세 번째 항목인 성령에 대한 고백에 병렬시켰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근원적으로 신앙고백의 전승에서 삼위일체적인 세 주제가 핵심이며, 따라서 교회와 그리고 세례 받을 때 얻게되는 죄의 용서, 또 기독교의 희망이 성령 항목에 귀속된다는 것이다.3)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모든 시대와 모든 분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띠와 같다. 사도신경 속에 들어있는 모든 내용은 신약성경과 전적으로 부합된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한 가장 중요한 신조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사도신경이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의미가 제대로 알려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사도신경을 마치 하나의 주문처럼 암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신앙고백과 주문과의 차이가 전자는 그 의미에 대한 인식을 근거로 함에 비하여 후자는 기계적으로 함에 있다. 만약 사도신경을 아무 생각없이 되풀이만 한다면, 거저 허공에 맴도는 메아리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신경의 의미를 명확히 알고 고백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 본문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II. 사도신경의 역사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조 가운데서 구전을 고려할 때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전설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열흘만에 사도들이 작성한 것이라고 하나, 오늘날 그렇게 믿는 학자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매우 적합한 대중적 요약이요, 신약성경과는 그 정신뿐 아니라 그 문자에 있어서까지도 잘 조화되는 신조로 평가된다.4)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사도신경은 원문상으로 볼 때 예수의 제자들이 직접 구성했다는 의미에서 사도적인 고백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사도적일 수 있다. "사도들에게 연원되는 사신을 총괄적으로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도적이다."5) 사도신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메시지가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도신경은 주후 약 100년 경에 널리 인정되고 있던 신학적 교리들을 전달하는  신앙 조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내용과 문장대로는 아니지만 일찍부터 이 신경의 전신들이 있어서 세례 문답에서도 고백된 것이 틀림없다고 이장식은 주장한다.6) 215년경에 쓰인 히폴리투스의 『사도적 전통』(Apostolic Tradition)의 '질문형식신조'(Interrogatory Creed)에 다음과 같은 사도신경의 원시형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로마신경'(Symbolum Romanum, The Old Roman Creed)이라고도 한다.

당신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느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에 의하여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그리고 장사되어)7)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당신은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몸의 부활을) 믿느냐?8)

     이 로마신경은 약 2세기 말, 주후 170-180년경 로마에서 발전하고 있었으며, 사도신경은 이 로마신경의 증보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로마신경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340년에 나온 마르셀리우스(Marcellius of Ancyra, 336-341)의 신조(헬라어로 되어 있음)를 들 수 있는데, 마지막 부분에 가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이 첨가되어 있다.9)

      서방교회에서 최초로 라틴어 사도신경의 본문을 작성하고 거기에다 주석을 덧붙인 사람으로 루피누스(Rufinus)가 있는데, 그가 404년에 소위 '루피누스의 신조'(Creed of Rufinus)를 작성하였다. 이 신조는 아퀼레이아(Aquileia)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대신에 "전능하신" 이라고 되어 있고, 마지막에 "영원히 사는 것"이 빠져있다. 또 "음부에 내려가시고"가 첨가되어 있다. 이것은 'descendit ad inferna' 로서 'inferna'는 'hades' 즉 '음부'로 번역된다.

      오늘날의 사도신경 본문이 확정된 것은 7-8세기로 본다.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된 것은 AD 390년 암브로시우스의 글에서였다. 그리고 이것을 범교회적으로, 범국가적으로 사용하게 한 것은 샤르망(Charlemagne, 742-814)대제 때였다.

       사도신경은 모든 신조와 신앙고백 가운데서 역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조이다. 개신교의 역사에 있어서도 사도신경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루터는 1529년 대소요리문답(The Small & Large Catechism)을 작성할 때 사도신경, 주기도, 십계명의 순서로 풀이하였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도 구조적으로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랐다.곧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교회의 순서를 취한 것이다. 20세기의 중요한 개신교학자들인 칼 바르트,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등도 사도신경의 중요성을 누구 못지 않게 인정하고, 사도신경을 해석함으로서 기독교의 신앙을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판넨베르크는 예배시에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고 유별난 양식들, 소위 시류에 편승한 양식들로 대체하면 안된다고 하였다.10)

III. 한국 개신교회의 사도신경 본문에 대한 비평

       서구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도신경 본문과 한국 개신교회가 사용하는 사도신경 본문을 비교하면 세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  ]에 들어 있는 부분이 서구교회의 일반적인 본문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장사되어 음부에 내리신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보편적 교회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11)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서구교회 사도신경과 한국개신교회 사도신경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음부에 내리신지'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로마천주교의 사도신경에는 이 부분이 '고성소(古聖所)'로 표기되어 있다. 성공회에서도 음간(陰間)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한국개신교의 문서를 살펴보면, 1894년의 <찬양가>에서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번역에 의하여 '디옥에'라고 되어 있고, 1905년 <장로교챤셩시>에서는 '음부'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1897년의 <감리교찬미가>와 1908년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 <합동챤숑가>에는 음부에 관한 내용이 없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이것이 언제 삭제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두 번째의 차이는 사실 심각하지 않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는데, 서구교회의 본문에는 하나님 뒤에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개신교회에서는 '아버지'가 삭제되어 있다. 이것의 기원은 1908년의 장감성 <합동챤숑가>이다. 그러나 로마천주교와 성공회 및 1894년, 1897년, 1905년의 찬송가에는 모두 들어 있다. 이로 볼 때, 이것은 단순한 누락으로서 실수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세 번째의 차이는 매우 의도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원래 원문에 있는 카톨릭(Catholic)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을 로마천주교회가 자기들의 교파적 의미로 사용하므로, 원래 사도신경의 의미를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이것을 '그리스도의'로 수정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신학적으로 의역한 것이므로 원문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개혁교회가 그런 의역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 여겨진다.

IV. 주요 본문의 오늘날의 의미

 1. 내가 믿습니다(Credo): 실존적 신앙

       '내가 믿는다'는 말은 사실상 원문에는 제일 처음 나오는 말인데, 우리말의 어법상 뒤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 말이 제일 처음 나온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두 가지를 지시한다.

       하나는 전제 없이 믿는다는 말이다. 안셀름(Anselmus)은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지식에 우선하는 신앙을 선포한 것이다. 신앙은 지식의 주체인 이성의 활동에 의존하지 않는다.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할 뿐이다. 계시에 의존하는 신앙은 이성의 영역에서 보면 불연속 또는 비약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신학적 지식은 신앙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신앙이 있고 신학이 있는 것이지 거꾸로 신앙이 신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은 신학(信學)이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내가 믿는다'가 지시하는 또 하나는 신앙이 '나'의 실존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다는 말도 가능하다. 신앙은 공동체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내'가 믿는다고 함으로서 실존적 신앙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심으로서 내가 그분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은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보시고 나를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의 믿음을 살펴보시는 것이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뵙기 전에 야곱은 하나님을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으로 고백했다. 그러나 벧엘의 체험 이후 그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었고,(창28:21,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하나님은 야곱이 그러한 실존적 신앙고백을 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신앙고백은 지식에 의지하는 신앙고백도 아니고, 공동체에 의지하는 신앙고백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에만 의지하는 신앙고백이요, 남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내'가 실존적으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선포하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2.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Deum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aeli et terrae)

       사도신경의 시작은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내용은 세 가지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전능, 창조 그리고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과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잘 증거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전능성과 창조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므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뜻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전능성의 증거가 바로 천지창조라는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보니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틀림없다는 뜻이 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진술은 본래 두 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세계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자유요 또 하나는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12).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는 하나님이 세계를 초월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세계에 대해 절대적인 우월성을 가진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즉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으며, 그 하나님이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따라서 세계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따라서 세계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세계는 시작이 있으며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세계와 동렬에 세우거나, 세계 안에 있는 것 안에 제한시킬 수 없으며, 세계 안에 있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런데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세계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 내재하신다.13) 하나님은 세계로부터 멀리 계시면서 동시에 가까이에 계시고, 자유로우시면서도 동시에 세계에 매이시기도 하시고,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세계 속에 현존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우리를 한없이 초월하시면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도 우리를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것, 곧 경외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보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필요하다. 세속에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화제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창조냐 진화냐 하는 논쟁이 일어나고 거기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직접적인 의미가 없다. 의미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말하는 바, 곧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면 우리는 이 분에게 우리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을 가지고 나아가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이 중요해진다. 칼 바르트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그가 실제로 아버지이시기 때문"14)이라고 하였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예수님의 하나님 이해의 핵심은 하나님이 개체 인간 하나하나를 돌보아 주신다는 하나님의 부성에 대한 생각이다.15) "따라서 아버지라는 이름은 특별한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한 성품과 연결되어 있다."16) 만약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하여도 그 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가령 우리의 적이거나 적어도 우리에게 무관심한 분이라면, 우리에게 이 전능하신 분은 다만 공포의 대상이 될 뿐이지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전능하시기만 한 분에게는 우리는 기도할 수 없고,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의탁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성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것이다.

  3.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Jesum Christum, Filium ejus unicum, Dominum nostrum)

       사도신경의 중심이 성자 신앙에 있다는 것은 사도신경의 분량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체에서 성자에 대한 분량이 약 2/3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이 작성되던 고대교회에서의 주된 관심이 성자에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신학적 논쟁의 주제가 대부분 성자에 관한 것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성자에 대한 신앙은 그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것으로 크게 구분된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인격에 대한 신앙의 내용을 말해준다.

       바르트는 사도신경을 크게 3항목으로 분류한다. 첫 번째는 아버지로서 사람 위에 계신 하나님이며, 두 번째는 아들로서 스스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며, 세 번째는 성령으로서 인간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이 두 번째 항목이 우리의 인식 순서에 있어서는 처음에 속해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인간 위에 계신 하나님과 인간과 함께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독단적이고 잘못되며 그릇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두 번째 항목이 증거하는 사실,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첫 번째 항목과 세 번째 항목의 해석에 있어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아버지와 창조자이신 바로 그분의 특별하고 직접적인 계시가 없는 것처럼, 성령의 특별하고 직접적인 계시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의 계시는 그 자체로서 동시에 아버지와 성령의 계시이다."17)

       외아들은 요1:14에 근거하고 있는데, 직접적으로는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말함과 동시에 간접적으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및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고백하고 있다. 즉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것이고, 거기에 비해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하나님의 법 곧 은혜의 법에 의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정확하게는 아버지와 양자의 관계다. 따라서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볼 때 형제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형제라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형제인 것이다. 바르트는 이것을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한 아들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이시고, 그리고 우리는 이 아들이 그의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기 때문에 그의 자녀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편에서 주제넘은 행위가 아니다."18)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6항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창조주는 그의 아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19) 바르트는 여기에 대하여 "그가 전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본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로서 그는 전능하시고 그리고 아버지로서 그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다"라고 주장하였다.

       예수님을 우리 주로 고백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외아들에 대한 고백이 빠지기 쉬운 위험성을 자연스럽게 방지해주면서 동시에 예수님과 우리와의 본질적인 관계를 말해준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종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롬1:1에서 잘 표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물론 이 본질적인 관계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주님인 줄 알고 그렇게 부른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이다. 지금은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었지만, 이것은 원래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 그 자체였다. 유대인들이 수백 년 동안 메시야를 기다려왔던 것을 생각하면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엄청난 의미를 가진 고백이었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는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는 제사장, 선지자, 왕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구원자라는 것임을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인류의 소망 그 자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4. 예수님의 생애: 구원의 사역의 역사성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한 다음, 이제는 이 신앙고백의 이유를 설명한다. 한 마디로 그것은 예수께서 그 사역을 통하여 구원의 근거를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구원의 사역은 예수의 잉태되심부터 부활 승천까지와 더 나아가서 장차의 심판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예수님의 사건의 역사성이다. 예수님의 모친의 이름을 마리아라고 밝히는 것, 예수님을 처형한 로마 총독의 이름을 본디오 빌라도라고 밝히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의 방법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상세히 밝히는 것, 그리고 부활하신 날을 죽은 지 사흘만이라고 밝히는 것 등은 모두 예수님의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이었음을 나타낸다. 즉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탄생하셨고, 고난 당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리고 부활하신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제네바요리문답 제56항 중에서 그것을 언급하고 있다.20) 바르트도 이점에 대하여 잘 언급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재직하였던 로마의 지방장관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다음의 사실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즉 이러이러한 역사적인 시점에 이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신조는 바로 이것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즉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역시 우리의 것이기도 한 그 시간 속의 어떤 일정하고 분명히 할당할 수 있는 시간에 일어났다는 것이다."21)

       예수님에 대한 고백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고백함에 있어서 그것의 의미를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고백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되어야 하는데도 생략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모든 신앙고백은 다 그 의미를 밝히고 있음을 고려하면 더욱더 그러하다. 예를 들어 325년에 작성되고 381년에 보완된 최초의 에큐메니칼 교회의 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에는 예수님의 탄생, 고난, 부활, 승천 등을 고백할 때, 그 의미를 "우리 인간을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사도신경에서만은 그것을 생략하였을까? 그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고 당연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말하자면 그것을 구태여 말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것은 말을 하면 오히려 군더더기가 되어 그 힘이 약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결정적인 부분에서 중요한 말을 생략한 것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매우 강조하는 고도로 세련된 문학적 표현법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처형 방법이 십자가형이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성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언급이다.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어떤 죽음을 당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crucifixus(십자가에 못박혀)는 하나님의 저주의 행위를 가리킨다. 제네바 요리문답(1542) 제60항은 십자가에 못박히심이 "예수께서 우리의 저주를 자신에게 내리게 하고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켜주시기 위하여 나무에 매달린 것이다(갈3:13).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죽음이 하나님에 의한 저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신21:23)"22)라고 하였다. 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년) 제39문항도 그것을 저주의 죽음이라고 하였다.23) 예수님은 저주의 죽음을 당하셨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하여 당하셨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음을 알게된다. 십자가는 갈라디아서와 신명기에 의하면 저주의 형틀이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하였기 때문이다.(갈3:13; 신21:23) 교회 안에는 십자가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이 더러 있다. 십자가를 하나의 우상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 발동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른 형태로 죽으시는 것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에는 그 의미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예수께서 암(癌)이나, 교통사고나 단순한 안전사고로 죽으셨다면 그 죽음을 우리를 위한 죽음 곧 대속적 죽음으로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매우 약화될 것이다.

5.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

       아마도 많은 신자들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사도신경 본문을 고백할 때, 마음에 거리낌이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미더워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에는 동정녀 탄생을 기독교신앙을 위하여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하는 신학적 경향도 있다. 무엇보다 현대과학 특히 생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동정녀 탄생을 주장함으로서 얻을 것이 없다는 주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사도신경과 함께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고백한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 이 고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바르트는 동정녀 탄생은 참된 하나님과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한 분만을 그의 아버지로, 동정녀 마리아를 그의 어머니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고 하였다.24) 그에 의하면 동정녀 탄생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인성의 증언의 유일한 형태와 양식이다.25) 그것이 말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존재는 그것의 기원을 직접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직접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존재라는 사실이다.26)

       바르트는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고백과 이 고백이 가리키고 있는 신약성경의 구절들은 하나님과 한 여인 사이의 결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인간 존재에 관하여 어떠한 아버지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 이것은 결혼에 대해서가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일어난 창조를 말한다고 하였다.27) 즉 동정녀 탄생은 이교적 신화에서 종종 있는, 하나님과 마리아 사이의 결혼에 의한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창조적 사건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물학적인 생각을 중지하여야 할 것이며, 오로지 창조라는 기적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바르트는 이 생각을 1946년의 사도신경해설에서 더 자세히 언급하였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결코 성령님이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과 마리아 사이에 결혼이란 없다! 2세기나 3세기의 그리스도인은 이 구절에 대해 그렇게 해석하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도 허락하지도 않았다."28) 바르트는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바로 새로운 인간성, 하나님을 따르는 인간성의 시작이기 때문에 인간적 아버지를 갖지 않았다."29) 이것을 바르트는 새로운 창조라고 말하는데, 그것의 의미는 인간의 죄의 배제이다. 성령의 행동의 의미는 죄에 대한 배제라는 것이다. 그는 죄의 배제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것은 성욕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나는 성욕이 그 자체로 죄덩어리고,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고대의 신학자들의 전통을 더 이상 따를 수 없다. 나는 성서 어느 곳에서도,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성적인 영역이 죄의 소굴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30) 바르트에 의하면 성적 금욕주의는 이교적인 개념이지 성서적인 것이 아니다.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자라는 타락한 군주를 배제하셨다는 것이다. "죄인이라 불려졌던 것은 그 사람, 아담이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남자이며 역사의 창조자인 아담은 하나님의 계획에 부적합하다고 평가받았다. 하나님은 여자의 남편이 되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자리에서 그 일에 관계하신 것이다."31)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3세기의 로마교회는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세례고백양식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하나님에게 연관된다는 것과(성령으로 잉태하사) 사람에게 연관된다는 구절로(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서로 구별되어 있지만, 이 표현 양식의 두 구조는 원래 하나로 묶여 있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의 실존이 하나님으로부터, 즉 성령에 기초했으며, 그리고 그는 동시에 바로 인간적 방법으로 마리아에게 출생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명백한 사실은 1세기의 교회에서 동정녀 출생이 영지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인정되었다는 점이다.32) 2세기의 반영지주의적 교부들에 의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마리아라는 여자를 통해서 출생했다고 진술되었다. 이 출생에서 동정녀라는 사실은 별로 강조되지 않는다. 예수 출생이 동정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기 보다는 타당한 일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판넨베르크는 이해하였다.33)

       그런데 오늘날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주장은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을 제한하는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와야만 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의 동정녀 출생 전승은 역사성이라는 점에서 심각하게 의심을 받았다.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은 오직 두 신약성서 본문인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만 발견된다. 바울과 요한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하게 견지했다고 판넨베르크는 말한다.34)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 여자에게서 출생했고, 율법 아래서 행했다(갈4:4)고 말했다.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이 근원적으로 예수가 다른 이들과 특별하게 구별된다는 점을 말하고자 했다면, 바울은 예수가 다른 인간들과 같았다는 점을 말하고자 했다. 판넨베르크는 바울이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35) 한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동정녀 출생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가 창조적인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마리아의 몸을 통해 출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36) 판넨베르크는 이 이야기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근거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37) 그에 의하면 원시 기독교 전승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역사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칭호가 예수의 부활과 세례에 소급됨으로써 다른 본문에서 이에 대한 다른 근거들이 주어졌기 때문에, 동정녀 출생에 대한 역사는 다른 곳에서 이미 주어진 칭호를 추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38) 판넨베르크의 추론은 다음과 같다.

예수의 동정녀 출생을 언급했던 첫 번째 사람들이 이를 통해서 분명하게 의도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신학적 동기는 예수가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또한 요한의 세례 이후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39)

       바르트는 동정녀 탄생이라는 기적의 필수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즉 그것을 제거하면 그 기적에 의하여 의미된 것을 제거하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과 함께 성육신을 잃어버렸다! 동정녀 잉태에 대한 부정은 필연적으로 자연신학을 위해 계시신학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40)

       앞의 논의를 요약하면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아버지를 갖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즉 예수님의 신성을 가리킨다. 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가리킨다. 성령으로 잉태되심과 동정녀의 몸을 통한 탄생으로서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겸전하고 계신 분임을 나타낸다. 또 한편 이것은 구원자로서 예수님이 자격을 갖춘 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구원자의 자격 요건은 세 가지이다. 곧 신성과 인성 그리고 무죄성이다. 성령 잉태와 동정녀 탄생은 이 세 가지 조건을 완전히 갖추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동정녀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원죄로부터 제외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동정녀 탄생은 무엇보다 성경적 신앙을 위해서 중요하다. 동정녀탄생 고백의 근거는 성경에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부인하면 최소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일부를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곧 바로 성경에 대한 이해와 직결된다. 인간의 이성이 성경의 증거보다 우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개신교신학의 출발점은 sola scriptura(오직 성경)!이다. 성경의 증거에 최종적인 권위를 두고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 개신교신학이며 개혁신학이다. 성경에 최종적인 권위를 둔다는 것은 성경의 증거보다 더 정확하고 더 신뢰할 만한 다른 권위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동정녀 탄생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성경에 최종적인 권위를 두지 않고, 과학이나 생물학이나 인간의 이성과 같은 다른 무엇을 성경 보다 더 우월한 권위로 수용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은 오늘날 신자들에게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도를 측정하는 하나의 표준이 될 수도 있다. 동정녀탄생이 현대 지성인들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곤란한 점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부인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창조자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어서 동정녀탄생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으며, 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데 있어서 동정녀의 몸을 통해 탄생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누군가가 동정녀 탄생에 대해 회의를 가진다면 그는 자신의 믿음의 근거가 무엇이며, 하나님을 누구라고 믿고 있는지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동정녀 탄생교리는 21세기에 있어서도 버릴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6. 음부에 내리시고(descendit ad inferna)에 대한 해석

       로마천주교회는 음부를 세례받지 못하고 죽은 구약성도들이 가 있던 곳 곧 고성소(古聖所, Limbus Patrum)로 이해한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그리스도께서는 삼일동안 고성소에 가서 세례를 베풀어 주심으로 거기에 있던 구약의 성도들이 천국에 이르도록 하셨다고 한다. 한편 영국성공회는 음부를 낙원으로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 낙원에 머물던 구약성도들에게 복음을 충분하게 강론하셨다는 것이다. 루터교회는 음부를 지옥으로 해석한다. 그리스도는 지옥에 가서 불신자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지옥에 내려가신 것은 그리스도의 승귀의 첫단계라고 주장한다.41)

       그러나 칼빈과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곧 지옥의 경험이라고 본다. 칼빈은 제네바 요리문답 65항에서,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신 것을 "육신과 영혼의 분리인 자연적인 죽음만을 겪으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성 베드로가 죽음의 고통(행2:24)이라고 부르고 있는 놀랄만한 고민 가운데 그의 영혼이 갇힌 것"이라고 하였다.42) 제 66항에 의하면,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그 무서운 고뇌를 당하셨으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울부짖었던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4항은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되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옥의 고뇌와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그의 영혼으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뇌와 고통과 두려움을 당하셨음을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43)

       바르트는 이것을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한다. 하나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련의 비참함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위한 신적인 승리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전자는 마가복음 15:34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의미이고, 후자는 벧전3:19의 '저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느니라' 및 계5:5의 '유대지파의 사자가 이기었느니라'의 의미라는 것이다.44) 1946년의 사도신경 해설에서 바르트는 이 부분을 다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음부에 내려가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절망 속에, 마음의 번민 속에, 하나님이 그를 대적하고 있다는 생각 속에 내던져졌다는 것을 다룬다. 말하자면 음부에 내려가심은 죽음과 무덤 속에서 외적으로 일어난 것에 대한 내적인 설명이다. 육신이 매장되자마자, 영혼은 음부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하나님이 단지 대적자이고, 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장소에로 가신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는 당연히 우리의 것이어야 하는 이 상황을 감당하셨다.45)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음부행에 대한 논의는 사도신경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추가된 요소로 본다. 2세기로 소급되는 로마 공동체의 세례 고백에서는 그리스도의 음부행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4세기의 신앙고백문에는 예수의 묻히심과 부활 사이에 음부에 내려갔었다는 암시가 확실하게 언급되었다. 이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해석은 이것이 예수의 죽음의 운명을 보다 자세하게 묘사해 보려고 한 것이다. 즉 예수는 육체적인 차원에서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음이 의미하고 있는 바의 것, 말하자면 하나님과 그의 구원으로부터 배척을 당한 것이다.46) 그에 의하면 하나님이 도래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중에 그에 의해 제외된다는 사실을 고대 교의학은 음부의 고통이라고 생각했다.47) 하나님의 임박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임박에서 제외되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음부에 내려간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바르트처럼 판넨베르크도 예수의 음부행에 대한 다른 해석을 소개한다. 그것은 음부에 내려간다는 것이 예수에게 고통이라기보다는 승리를 뜻한다는 해석이다. 여기서 음부행은 승리행으로 그려진다. 기독교 미술에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셔서 악마를 제압하고,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를 음부의 웅덩이에서 건져 내시는 그림을 자주 제시하였다.48) 벧전3:19이하에서 이 해석의 근거가 될 만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벧전4:6은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한다. 판넨베르크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한다. "예수를 통한 지하세계의 복음선포는 개종설교를 의미할 뿐이다. 이것은 이미 죽은 자들도 역시 기독교 복음을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로 살았을 때 예수나 기독교 복음을 만나지 못하고 죽어 지하세계에 가 있는 이들에게도 임박한 심판 앞에서 예수를 통한 구원이 열린다."49) 그에 의하면 기독교 주석학자들은 이미 고대 교회 시대에서 주장되었던 이러한 대담한 사상을 약화시켰다. 그들은 하데스에서의 예수의 설교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의로운 자들만을 향했거나, 아니면 일단 육체적으로 살 때 이미 의로운 자들로 판명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했다고 하는데, 베드로 전서는 예수가 회심 설교를 행했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들을 뛰어 넘는다고 하였다. 예수의 음부행에서 예수를 수난자로 해석하는 것과 승리자로 해석하는 것은 서로 배타적으로 보이지만,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서로 연관된다.

양자는 예수 죽음에 대한 해석이다. 이 안에 양자가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된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는 그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음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유기를 견뎌냈기 때문이다. 예수 죽음의 대리적 의미는 죽음을 극복했다는 표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승리의 의미는 예수의 십자가를 부활의 빛에서만 유지하게 했으며, 또한 십자가의 의미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부행을 부활한 자의 몫으로 돌린다는 것은 함축적이었다. . . 원시 기독교가 회심설교로 행한 선교 설교의 상에서 음부에 대한 예수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는 베드로전서의 사상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발생한 대리의 우주적 영향력을, 그리고 이로써 중재된 구원의 보편성을 주장하고 있다.50)

       판넨베르크는 예수님의 음부행을 우주적 구원론과 연관시키고 있다. 우리에게 제기되는 많은 구원론적 질문들, 예를들면 예수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구원 가능성, 복음을 접해 보지 못한 사람들의 구원가능성 또는 복음을 듣기는 들었으나 믿지 못한 사람들의 구원가능성에 대하여, 사도신경의 이 항목이 우주적 구원론적으로 답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류를 위해 예수에게서 발생한 일은 예수와 또한 그에 관한 사신과 결코 접촉해 본적이 없는 인간들, 혹은 예수와 그의 역사의 진리성을 결코 한번도 실제적으로 깨닫지 못한 인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51)

예수를 결코 알지 못하던 이들도 역시 그들이나 우리가 탐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류와 인류 역사를 통해서 예수와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된다. .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에게 구원 아니면 심판이 임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구원받는다고 확실히 보장할 수 없다. 명시적으로 예수와 일치해 있는 이에게만 구원은 보증된다. 그리고 이 일치에서 예수와 더불어 죽음을 극복한다는 희망이 보증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나머지 사람들 역시, 예수 이전에 이미 죽은 이들 역시 그에게 나타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이다.52)

Blog
About Us
Message
Site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