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사사기 강해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5장]
사사기 5장은 우리 말로는 매끄럽게 번역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구약을 공부하는 사람에 있어서는 가장 해석하기 까다로운 장 중의 하나이다. 사용한 말 표현 중에 이해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 많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내용에 있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대체적인 내용을 이야기 한다면, 첫째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구원을 찬송한 찬송시인데 이러한 말로 시작된다. 2절 말씀중에 “이스라엘의 두령이 영솔 하였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안된다. 이해하기 힘든 단어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에는 ‘플로아’( )란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은 나실인 들이 서원한 기간 내에는 그 규례대로 머리를 장식하지 않고 늘어뜨린 채로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머리를 풀어 헤치는 일이 있었을 때” 인데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해석하기가 난감하다. 그런데 그 다음 말 그것과 짝을 이루는 말이 “백성이 즐거이 헌신 하였을때”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과 관련 시켜보면, 즉 머리를 풀어 헤친다는 것이 백성들이 헌신한 것과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머리를 풀어 헤친다는 말이 헌신과 관계가 된다면 이스라엘이 시스라와 전쟁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 백성이 자원(헌신)했다고 하는, 즉 전쟁에 솔선해서 참여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 것과 관련해서 머리를 풀어 헤친다는 것이 만일 이것이 나실인적인 배경을 갖는다면 나실인은 특별히 자신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성별해 드리는 기간을 얘기한다. 그 기간이 평생이 될 수 있고 일정기간도 될 수 있다. 이렇다고 한다면 하나의 나실인의 그것을 상징하고 있지않은가 짐작 할 수 있겠다. 나실인이 자신을 철저히 구분해서 하나님께 드리듯이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자신을 철저히 헌신한 그것을 여기서 암시라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어떤 사람은 조금 더 상상을 엉뚱하게 해서 하는 말이 나실인들이 머리를 풀어헤친다는 뜻이 있으니까 대개 전쟁을 할 때 이상한 모습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상대에게 공포감을 주고 자신에게 신적인 각오를 다지기 위해 머리를 풀어 헤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즉 민족에 따라서 얼굴에 페인트를 칠하든지(인디안같이) 괴상한 탈을 쓰고 나간다든지 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렇게 전쟁을 하는 모습을 여기서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얘기를 한다.여하튼 2절의 내용은 교회를 괴롭히는 대적과의 싸움에 있어서 헌신한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이 헌신했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우선 이것만 보면 온 이스라엘이 나서서 자원했다는 정도로 들리기 쉬운데 그 이하의 내용을 읽어 보면 그렇지 않다.「3-5절」이 때까지 이스라엘을 선대 해 오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역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출애굽 시대 부터 하나님께서 어떠한 위대한 일들을 행해 오셨는가를 조금 언급을 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신 경이로움에 대해서 잠깐 말씀한다. (4절) “하늘도 새어서” 하늘에서 물을 내렸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갖게하는 현상들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구원의 능력의 위대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역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시대가 지날수록 쇄락의 일로를 걸었던 것이다.6-7절에 “.....” 길이 그쳤다는 것은 통행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상황이 위험해서 사람들이 길을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시스라가 굉장한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땅에 상주하면서 포악한 정치를 베푸니 사람들이 길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는 그런 뜻이겠다. 길에는 통행이 없고 농촌의 삶이 불가능해졌다.마을에 내려와서 사람사는 곳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말이다. 나중에 기드온 시대에도 나오지만 미디안이 쳐들어 왔을 때는 사람들이 동네에 거주하지 못하고 전부 다 산에 굴을 파고 지냈다고 했다. 그와 비슷한 상황이 드보라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퇴락한, 거의 폐허화 된 모습이 드보라가 일어나기까지 계속되었다. 즉 드보라가 일어나기까지는 이스라엘이 그런 지경이었다는 얘기다. 8절에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은 무리들이 즉 백성이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전쟁이 성문에 미쳤다, 외적들의 침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적이 침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4만명 중에....보였던고” 4만명 가운데 방패와 창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결국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전혀 전쟁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무력해졌다는 것이다. 교회가 능력을 상실해서 외적의 침입에 대해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9절에, “......” 우리말 성경(개역성경 표기)은 이것을 긍정적으로 해석을 하는데,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말이 나오니까 그 앞의 내용이 긍정적인 내용이 되어야 할 것 같아서 긍정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으나 여기 찬송하라는 것은 나중에 이와 같은 상태에서 행하신 일을 염두에 두고 찬송하라고 한 것이다. 오히려 그 안의 내용과 부합되게 해석한다고 하면 9절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관원(이스라엘을 통치한 지도자, 교회의 지도자)들이 특별히 백성들 가운데서 자신을 헌신한 자들에 대해 내 마음이 있었다는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교회가 이런 위경에 빠진 때에 자원해서 교회의 위경을 해결해 보려고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내 마음이 간절했다. 다시 말하면 제발 좀 누가 나서서 이러한 교회의 위경을 해결 해야 하지않겠는가? 그런 사람이 없는가? 안타깝게 기다렸다는 그런 뜻이 될 것이다.10-11절, “흰 나귀를 탄자들” 신분이 높은 그런 사람들 즉 귀인들이다. 직역을 하면 ‘흰 나귀를 탄 귀인들아 생각을 해 보라 그리고 이하의 내용이 샘물가에 있는 자들의 음성을 좀 관심있게 들어 보아라 그리고 그들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의로운 일들 즉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들을 말하는 것을 들어 보아라. 또한 이스라엘에 행한 의로운 일들 하나님이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우물가에 모여서 이야기할 때 들어 보아라.’가 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과거 역사 동안에 교회가 위경에 처했을 때 어떤 인물들을 일으켜서 그들을 통해 어떤 구원을 행하셨는가를 사람들이 많이 얘기하고 있는데 그것 좀 귀 기울여 보라는 얘기다. 이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결국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가 그 처럼 위경에 빠져있는데 그것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지도자로서의 맡은 바 책임 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바락이여 일어나 포로를 잡을지어다”라고 얘기했다. 마땅히 이런 위경에 처했을 때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할 교회 지도자들이 가만히 손을 묶고 앉아 있으니 결국 백성들이 누구에게 갔느냐 하면 드보라에게 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드보라가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래에서만 나올 뿐 만 아니라 바로 앞에서도 이것과 비교해 보면 상황이 대개 맞아 들어간다.드보라가 먼저 바락에게 당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했지만은 바락이 꽁무니를 뺀다. 당신이 함께 가야 내가 하겠다. 그 때 드보라가 일어나니 남은 백성들 즉 여러 지파들이 다 모였다. 15절에 보면 이렇게 많은 지파가 모인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이 지파들이 하나님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전쟁에 아예 참여치 않은 지파도 있었기 때문에 책망하는 말이 나온다.특히‘ 르우벤 지경에 대한 나의 마음에서 찾는 소원이 아주 컸다’는 말은 결국 이 전쟁에 르우벤(요단강동편지경)사람들이 와서 좀 도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는 말이다. 옛날 여호수아 때 정복전쟁을 할 때 먼저 요단강 동편에 정착한 두 지파 반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앞장서서 전쟁을 수행했다. 그때 일을 기억했는지 모르겠으나 아직 거기는 별 탈이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주된 공격로가 갈릴리 북쪽이다. 그리고 그들의 압제를 심하게 받았던 지역이 납달리 스불론 즉 북부 갈릴리 주변 지파들이었다. 이들의 압제를 직접 받지 않은 요단강 동편지역 사람들이 와서 좀 도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다”(15절)라고 히브리 원문을 긍정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석을 하면 그 다음 말과 전혀 연결이 되지않는다. 그들에 대한 마음이 컸다는 것은 그들이 좀 와서 어떻게해주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소원이 있었다는 것이다.16-17절 여기에 보면 특별히 르우벤과 요단강 동편지역과 아셀 지파의 얘기가 나오는데 이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양 우리에 앉아서.....어찜이뇨” 양 우리 옆에 편안히 앉아서 양 떼 부르는 휘파람 소리나 듣고 한가하게 앉았는가라는 말이다. 요단강 동편지역의 사람들아! 이 전쟁의 참화가 너희에게 미치지 아니하니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가만히 앉아있는데 어찌된 일이냐하는 책망이다. 그런데 18절에 보면 스불론과 납달리는 자기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이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이들이 전쟁을 수행했는데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셔서 이들을 통해 열왕을 쳐부셨다고 되어있다.19절 이 말은 그들이 어떤 유익을 바라고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참된 믿음에서 자원하여 참여한 이 전쟁은 하늘에서부터의 싸움이었다.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싸우셨다는 말이다.(20절)23절에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메로스에 대해서는 저주를 받을지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야엘에 관해서 말하되 여자 중에 칭송 받을 지어다. 야엘은 여인이다. 이것은 반대로 바락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남자가 전쟁에 나서야하는 것은 당연한데 남자가 나서지 않으니 여인이 나서서 큰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마땅히 일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 감당하지 않고 있으면 여인이라도 나서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일을 감당해야 될 사람을 향한 경고요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그런 뜻이 속에 들어있다. 전쟁에 자원해서 참여한 지파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전혀 관심도 갖지 않고 뒤에 물러 앉았던 사람도 있었다.이와같은 상황은 우리에게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하면, 이전에 옷니엘이나 에훗시대에는 에훗이 모압왕 에글론을 죽이고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었다. 즉 전쟁신호를 해서 온 이스라엘을 모아서 모압을 쳤는데 아마 그때까지는 이런 전쟁에 있어서 각 지파간에 유대의식이 강해서 합심해서 어떤 일에 대처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같다. 그런데 이 드보라 시대에 오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다 나뉘어져서 자기 앞에 불똥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저 강건너 불구경하듯 가만히 앉아있는, 그리고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처한 위기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할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무력한 상태에 빠져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여선지자가 나타난 이유그런 위경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우셔도 그 하나님께서 명하신 전쟁에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나선 자가 별로 없었다고 하는 뜻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 드보라의 노래에 단편적으로 암시된 내용에 비추어 보면 4장에서 시작되는 드보라에 관한, 서술체로 된 내용이 더 분명해 질 것이다.왜 여선지자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었는가?남자가 자기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남자의 일 여자의 일이라고 보기보다는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뜻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전쟁이나 혹은 다스리는 직분이라는 것은 결국 남자가 갖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서에 보면, 하나님을 거역하게 될 때 온갖 질서가 뒤바뀌게 되는데 뒤바뀌는 모습을 말하기를 여인이 남자를 다스리게 될 것이고 어린 사람이 노인에게 공갈을 하고 위협을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질서가 완전히 뒤바뀌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다시 말하면 남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나이많은 자가 다스리는 지위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렇지 못할 때, 즉 남자가 남자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이 많은 자가 나이 많은 자 값을 못하면 결국 질서가 전도되는 상황이 도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판의 한 형태다.결국 드보라의 경우를 통해 암시하고자 하는 바는 그 당시의 그와같은 교회의 위기 상황을 감당해야 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자기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특히 바락과 같은 사람에게 그와같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전쟁을 하라고 명하셨는데도 뒷꽁무니를 뺀 것이다.이스라엘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정복하기를 포기했다. 하나님께서 이 영역에서 그의 거룩한 나라를 이루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예 포기를 해 버린다. 그리고 적당히 함께 살자고 했다. 그런데 함께 살자가 될 수가 없다.결국 옆구리의 가시처럼 찔려서 그들의 종교적 타락과 도덕적 타락에 오염이 되어서 이스라엘의 자세가 자꾸 변질이 되고 그러니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의 의미가 자꾸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니 교회가 완전히 결단이 나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가 일반 믿지 않는 사람의 통제를 받는다고 생각을 하면 그 꼴이 어떠하겠는가 바로 그런 모습이 된 것이다. 교회에 속하지 않은 세력에 의해서 교회가 좌지우지 되고 지배를 당하는 형편이 된 것이다. 그것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렇게 교회가 완전히 위경에 처했는데 당연히 나서서 싸워야 할 지도급 인사들이 무얼 하는지 전혀 손을 쓰지 않는다. 이와같은 일들이 교회 내에서 처리가 되어야겠다는 소리가 들릴 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내버려 두고 가만히 있었다. 드보라가 등장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형편이 결국 이러했다. 처음에는 함께 살자고 했다가 결국 그들에게 물들어서 교회가 완전히 변질이 되고 세상 사람들이 판을 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고 그러다 보니까 그런 위경에 처했을 때 안되겠다고 얘기를 해도 그저 강건너 불구경이다. 다행히 목숨을 걸고 나선 사람도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교회를 다시 세우시는 은혜를 베푸시기도 헸다. 그것이 바로 드보라의 승리다.(5) 기드온 사사시대[6장-7장]6장(1-10)그런데 그 사사시대가 끝나자 또 이스라엘이 타락해서 하나님께서 미디안 손에 붙이는데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산에 가서 굴을 파고 살 정도로 완전히 자기 기업의 땅에서 다 쫓겨나서 굴을 파고 사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교회에서도 그렇다.실질적으로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교회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한 구석에 쫓겨나서 굴을 파고 사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형편이 난감해져 갔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어서 죄를 책망 하신다. 그 책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근동에서 최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손아귀에서도 소수의 미약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낸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다.출애굽을 언급한 것은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긴다니 어찌된 일이냐 라는 책망이다.그런데 그런 책망을 듣고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별 무반응이었던 것 같다.(11-12)그래서 여호와의 사자께서, 밀을 떨어 미디안의 눈을 피해서 숨기려고 하는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구원을 약속하신다. 그러자 기드온이 반문을 한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일이 닥쳤는가?「13-14」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이적 기사들은 도대체 어찌 된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셨으나 지금은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 손에 붙이지 않으셨습니까? 기드온의 이러한 반문은 실제로는 얼마나 무지한 자인지 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 손에 붙이셨는지 이유 조차 모르는 이스라엘의 영적무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이와같이 무지하고, 미디안의 눈을 피해 밀을 숨길 정도의 비겁하고 연약한 사람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맡긴다. 우선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를 찍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우선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할 자의 신앙의 재정비라 할지 신앙의 정화를 명하신다. 그리고 이런 여러가지 연단을 통해서 연약하던 기드온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용사로 점점 변모 시켜간다.[7장]기드온이 군사를 모은다. 하나님께서 모여든 많은 군사들을 정선하는 일을 행하시는데 첫째 모여든 사람 32,000명 중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아가게 하시니 22,000명이 돌아가고 10,000명이 남는다. 그 중에서도 물을 핥는 자(엎드려 먹는자 말고) 300명만 선정한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군사 숫자가 너무 많다고 말씀하시고 숫자를 줄여가신 이유에 대해 많은 군사들로 승리를 하면 자기들의 힘으로 행한 것으로 알고 자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 스스로 영광을 취할까 염려하셔서 그렇게 행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당시 형편을 암시하는 다른 뜻도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32,000명이 모였는데 두려워하는 자 22,000명이 돌아가고 10,000명이 남았다. 두려워한다라고 하는 것은 마지 못해 억지로 전쟁에 나온 사람들이다. 전혀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각오도 되어있지 않고 믿음도 없는 자 라는 얘기다. 특별히 시내에서 물을 마시게 함으로서 그 태도에서 과연 전쟁을 행할 만한 준비나 자격을 갖춘 자인가를 시험한다. 결국 온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 즉 전쟁을 수행할 만한 자가 300명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역으로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 형편이 어떠했는가를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드보라 시대에는 스불론 납달리 지파같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여호와의 전쟁에 자신을 헌신한 지파가 그나마 있었는데 기드온 때 오면 300명 이외에는 전혀 쓸모없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군대로서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이었다.하나님의 전쟁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수행할 믿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구원 베푸심을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요 숫자가 많아서 이긴다 할지라도 결코 자고하거나 이것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무엇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믿지 않고 전쟁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겠지만은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 즉 오합지졸을 모아서 전쟁을 해서 이겨 놓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겼다고 이야기 하겠는가. 자기 생각대로 자기들 능력으로 이겼다고 할 것이다.하나님께서 돌려 보내시면서 이대로 내어 보냈다가는 자기 숫자들 힘으로 이겼다고 할 것이니 도저히 안되겠다고 그 수를 줄이라는 말씀의 배후에는 이러한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 폐허상황 곧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300명밖에 남지 않은 교회적 상황을 암시하는 뜻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런 소수의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정병으로서 준비가 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가서 한 것이라고는 항아리 속에 휏불 집어넣고 항아리 깬 것 밖에 없다. 그럴 때 미디안 군사들이 자기들 끼리 쳐 죽이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래서 망한다.이런 믿음의 사람들에 의한 승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나타나고 기드온이 부르자 그때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미디안 사람을 쳐 죽인다. 일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 벌어지는 상황이 8장에 나타난다.[8장]미디안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나와서 왜 우리는 안불렀느냐고 한다. 기드온이 겸손했던 것 같다.(그는 므낫세 출신이다.) 그렇게 겸손하니까 무마가 된다. 이것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그때까지는 이스라엘의 주도적인 역할을 에브라임 지파가 맡아 왔던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하는데 왜 내 허락없이 함부로 그런 일을 했느냐고 한다. 이것은 지도자의 허세다.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도자로 세운 것을 알았다면 나서서 일을 해야지 가만히 있다가) 남이 다 해 놓고 나니까 그때서야 나와서 큰 소리다. 이것은 영적 능력을 상실한 지도자의 허세다. 이러한 능력 상실한 지도자의 허세가 입다 때 가서는 이스라엘을 동서로 완전히 갈라놓는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갈수록 이스라엘의 타락이 심화되는 만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돋보이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암시를 준다.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셔서 교회를 다스리도록 하신 만큼 일반 단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도자가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이 대단하다. 그런 만큼 책임도 크다.성경에서 말씀하는 영적 지도자, 그 영적지도자들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타락을 얘기할 때 단순히 그 지도자 한 사람의 죄악을 얘기하기 보다는 지도자란 것은 또한 백성을 대변하는 자이기도 하니까 이스라엘의 전체적 상황을 암시하기 위해서 지도자의 영적 상태를 말씀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 사사기에서도 지도자의 영적 능력 상실 즉 도저히 사명을 감당하기가 역부족인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은 지도자의 부족한 모습을 얘기하는 동시에 당시 이스라엘의 전체적인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앞에서 이스라엘의 전체에 대해 말씀한 얘기들이 지도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백성과 지도자 모두 전쟁을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공존의 길을 택하였고 다른 신을 섬기는데 지도자가 앞장 섰든지 아니면 백성들이 부추겼을 수 도 있다. 그러나 지도자가 공동체에 차지하는 비중, 끼치는 영향력, 직분상의 권위등을 생각할 때 특히 사사시대의 형편과 관련해서 생각할 것은 그들이 분명 앞장 서야 할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더 큰 책임이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지도자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책망 한가지가 덧붙여 지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왜 타락일로를 걷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앞에서 몇가지 얘기했다. 즉 전쟁의사 포기, 신앙의 변질 이것이 그대로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 한 가지가 덧붙여 져야 한다.기드온 시대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는가? 기드온의 반문을 통해서 짐작해 보면 옛날에 우리 조상들을 놀라운 능력으로 구원하셨던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영적 무지와 그들이 당하는 상황의 진정한 원인이 어디 있는지에 대한 무지를 나타내지만 동시에 이전에 그들의 교회를 놀랍게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능력이 지금은 과연 사라지고 없는가 하는 심각한 반문이 가능할 정도로 은혜가 핍절한 정도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영적으로 매우 곤고한 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긍휼이 여기셔서 연약한 기드온을 세우시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그의 믿음을 준비시켜서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교회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케 하셨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전혀 무력하였고 그들에게 있어서 볼 수 있는 것은 실패와 타락되고 변질된 교회의 모습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전혀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않은 미디안 군대에 대한 승리, 곧 하나님의 승리가 더욱 돋보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이 기드온을 통해서 베푸신 구원 이 구원은 사사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구원으로 꼽힌다. 히11장에 사사들의 인물이 언급이 되지만 특히 이사야서 같은 부분을 보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놀라운 구원을 말씀하면서 무엇에 비교하고 있는가 하면 ‘출애굽과 미디안의 날에’ 라고 비교 하고 있다.출애굽의 중요성은 새삼 언급치 않아도 잘아는 것이고 미디안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기드온을 통한 구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출애굽의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에 비견되는 구원이다. 사사시대의 하나님의 구원의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사사시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기드온시대 곧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이 가장 돋보인 이 시대는 또한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구원체험이 이스라엘을 패괴케 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 여기서 두가지 사건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에게 당신 집안이 이스라엘을 대대로 다스려 달라고 얘기한다. 그와 같은 요청에 대해서 기드온은 일언지하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린다는 말로 일축하고 만다. 나와 내아들도 결코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시요 그가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왕제도를 부정한다. 그리고 인간 통치자를 통한 간접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바람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많이 얘기를 하지만 그러나 직접적인 통치냐 간접적인 통치냐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기드온 자신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고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스린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분명히 백성들의 요구 속에 적어도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는 요소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사사시대 서두에서 여호수아가 명백한 후계자를 남겨놓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물었다는 것을 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모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백성들이 공식적으로 하나님께 물은 것인데 거기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어떻게 물었겠는가? 통성으로 기도를 했겠는가 나중에 사사시대 여러 경우를 보면 대개 어떤 식으로 물었는가 추측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제사장을 통해서 물었을 것이다.그리고 사사시대 때 여호수아와 같은 그런 사역을 감당할 지도자는 없었지만 제사장이라는 또 다른 하나님의 통치의 중보자(그런 영적지도자)는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지도자 공백기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하던 그런 성격의 지도자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지도자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느냐 아니 하시느냐 그것이 관건인 것이다. 이런 것이 전제가 된다고 한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통해서 구원을 베푸셨는데도 당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으니 당신과 당신아들 대대로 이스라엘을 다스려 달라고 하는 백성들의 질문에 대해 그냥 못하겠다고 하지 않고 왜 여호와께서 다스린다고 말을 했을까? 그 말이 있고 난 다음에 나와 내 아들도 결코 다스리지 않겠다고 말을 했는가? 이 말에 대한 배경에 대해 잘 생각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백성들의 요구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요구 속에는 적어도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참통치자이시라는 것을 부정하는 요소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나중에 사울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즉 다윗을 세우기로 하셨다. 그것은 이미 창세기 때 이미 다 예언을 하신 것이고 그리고 구약에서 세워진 다윗왕이라는 것도 그 자신이 궁극적인 왕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왕 제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백성들이 요구한 왕상, 왕권의 본질과 성격이 무엇인가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열방처럼 우리도 왕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이다.이들이 교회 밖의 대적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한계를 느꼈던 것 같다. 여호수아 같이 일사불란하게 백성을 이끌어 줄 지도자는 없고 그리고 시대가 진행될수록 백성들의 마음은 자꾸 갈라진다. 적과 싸우는 전쟁에 있어서 의욕을 상실하고 어떤 한 지파에서 큰 위기가 있어도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식으로, 말하자면 교회 내부의 긴밀한 결속감이 점점 붕괴되어 가고 느슨해져 가는 그런 과정이 시작되고 있음은 드보라사건에서도 이미 살펴 보았다.이런 때에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쑥밭을 만드는 이방나라들을 보니 그 나라에는 왕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 전쟁은 지금과 달라서 전쟁이 거의 백병전이다. 그래서 전쟁을 좌우하는 것은 사기다.심리적으로 지기 시작하면 그 전쟁은 불문가지다. 그래서 대개 보면 전열선두에 누가 서는가 하면 제일 강한 용사가 서거나 왕 자신이 앞장을 선다. 영웅적인 모습으로 군대 앞에 서서 호령을 하면 군사들이 나아가서 전쟁을 하는 그런 양상인데 열방들은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효율적으로 이스라엘을 몰아 붙여 초토화시키니 아무래도 우리도 저런 조직을 갖추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요즘도 그렇지만 국가 안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정권이양 곧 승계문제다. 사사들은 어떤가? 하나님이 세우고 죽고 나면 그걸로 끝이다. 그러면 그 다음은 또 무정부 상태다. 그러니 또 야단법석이 나고 그리고 안되겠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나라를 보니까 세습제다. 그러니 정국이 안정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우리도 저러한 지도자 즉 왕이 있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기드온에게 청을 한 것인데 기드온이 그 요청의 성격을 알았기 때문에(그들의 요구의 성격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교회)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이다 라는 것을 분명히 지적한 것이다.기드온이 300명을 뽑은 것을 가리켜 전쟁을 수행할 믿음이 준비된 사람을 뽑은 것이다 라고 해석하는 것이 별무리는 아니다.그리고 여기 이스라엘 백성의 기드온에게 한 요구에 대해 그 속에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성경에는 뚜렷이 그렇다고 말씀하고 있지도 않은데 너무 지나친 추측이 아닌가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글의 흐름을 보면 바로 이어 지는데 아비멜렉정권으로 이어진다. 거기서 전체적인 흐름이 나타난다. 백성들의 잘못된 요구에 대해서 기드온이 교회는 어떠한 곳이다 라고 분명히 하고 있고 또한 그 교회를 다스리는 분이 누구시라는 것까지는 참 좋았다. 적어도 기드온에게 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한가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암시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백성들 편에서 그들이 원하는 교회 지도자상이 이미 상당히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인(이스라엘백성)들이 요구하는 지도자상 즉 교회는 이런 사람이 지도해야 된다는 생각에 많은 변화, 변질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그 다음 그들의 잘못된 요구에 대해서 교회의 성격과 본질을 기드온은 분명히 했다.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다. 해놓고서는 곧이어 기드온의 실수가 시작된다. 기드온이 가장 돋보이는 시점에서 부터 또한 나락의 길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나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선 그가 전리품을 가지고,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힘들지만 하나님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에봇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교회 지도자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암시가 되었듯이 이미 백성들 자체 속에서 믿음의 변질이 오기 시작했는데 기드온이 세운 에봇과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결합이 되어서 우상숭배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기드온의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는 차치하고)그가 행한 일이 계기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오도하는 불상사가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