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세상을 흑백논리로 갈라 보지않고 꿰뚫어보기
신학함에 있어서 세계는 세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첫째, 창조세계로서 우주 대자연,
둘째 역사와 인간경험현실의 총체, 그리고
셋째는 예수를 십자처형 시킨 영악하고도 악한 힘들이 판치는 죄악적 세계현실이 그것이다.
신학도는 그 세가지 세계 또는 세상을 모두 생각해야 하지만, 여기에선 특히 둘째번 의미의 세계 곧 ‘역사와 인간경험현실의 총체’로서의 세계를 주목하기로 한다.
신학함의 자리는 신학도의 마음이나 상상적 관념세계도 아니고, 천사들이 모여있는 천계도 아니고, 지옥불이 불붙는 연옥도 아니다. 신학하는 구체적 ‘삶의 자리’는 빛과 어둠이 교차하고,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며,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식들이 공존하는 역사적 현실세계이다. 그러므로 신학도는 세상을 흑백논리로서 한편만을 보아서는 아니된다. 세상은 온갖 망할 놈들이 살고 있고 사탄이 완전 지배권을 행사하는 저주받은 땅이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되고, 장미빛 찬란한 에덴동산 쯤으로 낙관해서도 않된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를 낙관하지도 않지만 비관하지도 않는다. 팽팽한 긴장과 힘겨룸의 한마당이라고 보아야 한다.
신학을 잘하려면, 세상을 가능하면 깊이 넓게 사실적으로 경험하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차피 복음이 들려져야하고, 그 안에서 복음이 재해석되고 받아드려지면서 변화시켜 가야할 현실세계가 ‘세상’이기 때문이다. 신학적으로는 ‘복음’과 ‘세상’을 어떤관계로 정립시키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목회관과 신학하는 근본자세가 결정된다고 본다.
리챠드니버가 말하는 고전적인 다섯가지 관계모델들은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다: 세상과 대결하고 맞서는 자세, 세상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자세,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별개로 독립된 두 왕국에서 살아가는 이원론적 자세, 세상적 성공과 이념에 홀딱 빠지고 영합하는 자세, 소금처럼 세상 속에 녹아들어서 맛을 내고 변화시키는 자세가 그것이다. 그 다섯가지 자세중에서 어느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복음적 태도인가는 쉽게 단정 할 수 없는 것이다. 신학도가 삶을 살아가는 세상의 ‘상황’이 다섯가지 중에서 어느것을 택하도록 하는 것 곧 ‘복음과 세상과의 관계는 컨텍스츄알한 상관관계’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대결하고 맞서야 할 때, 함께 영합하고 덩달아 딩구는 꼴이란 꼴불견의 교회를 만든다. 세상 속에서 ‘종교적 소왕국’을 설립한 교만증에 취하여, 세상이 전혀 바르게 보이지 않고 안하무인적으로 동키호테식의 저돌적 자세를 취하면서 한국이 기독교 국가라도 다된듯이 배타적 독선을 부리는 자만함이란 차마 보기가 민망하다. 더욱이, 성장주의와 축복론의 달콤한 유혹에 휩쓸리 나머지 복음적 신앙을 오해하여 이 세상 속에서 교회란 ‘남보다 승리하는 비법’을 판매하는 영적판매소로 선전하는 일부 사이비 성직자도 있는게 현실이다. 올바른 신학도는 세상을 도피하지도 않고, 영합하지도 않고, 흑백론으로 갈라보지도 않고, 그 정체를 꿰뚫어 보고 갈릴리복음을 힘입어 정면돌파하려는 담력을 길러가야 한다.
‘세상’은 복음이 던져져야 할 선교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내야 할 연못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런관점에서 불교의 ‘연꽃상징’을 음미하는 것이 좋다. 연꽃은 청초하게 피지만, 온갖 부유물질이 썪어 가라앉아있는 연못바닥 진흙뻘에 뿌리를 내리고서라야만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대승불교에 비해서 확실히 기독교는 시작할 때부터 영지주의와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영향을 너무나 강하게 받아서 ‘세상 부정적 견해’가 무의식중에 강하다. 부정되어야 할 세상은 ‘소유,탐욕, 온갖 혈기, 자기자랑, 명예욕, 분쟁과 다툼’이 지배하는 병든세상 현실인 것이지 ‘세상 그 자체’가 부정되어서는 아니된다.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꿰뚫어보기 위해서, 신학도는 직접 몸으로 ‘세상경험’을 하는것이 좋다. 동서종교사에서 ‘탁발’을 강조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신학도에게 있어서 세상 안에서의 모든 경험들은 후일 그가 목회자로 나설 때 귀중한 자산이 된다. 막노동판의 일자리 경험, 경제적 빈곤경험, 질병투쟁경험, 악의 유혹경험등이 모두 귀중한 경험이다. 그러나,직접 경험이 쉽지않을 때는 ‘배낭여행’과 ‘문학작품 다독’을 권하고 싶다. 그것들은 제2차적 간접경험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5. 교회는 내 영혼의 어머니처럼 사랑하며 섬길 것
신학도가 구체적으로 신학훈련받는 목적은 “교회를 교회답게 섬길 능력을 갖추기 위하여”라고 말 할 수 있다. 신학이란 궁극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라는 고전적 명제도 그런 의미이다. 그런데, 신학도가 신학함에 있어서 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하는 태도와 방법은 깊이 생각 할 점이 있다. 우선 최신 신학정보와 신학사조에 밝은 젊은 신학도는 ‘현실적 교회’를 통체로 비판하고 부정하는 비판자로서 자기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버릴 위험이 있다. 적어도 신학도는 “현실교회는 다 썪었고 병들었다”등등 극단적인 단언적 말은 삼가야 한다. 그런 말은 교회 밖에서, 교회와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회비평가들이 할 말이다.신학도에게 있어서, 교회란 마치 자기를 낳고 길러주신 영혼의 어머니와 같아서 교회에 욕을하고 침을 뱉으면 그것은 자기 어머니 얼굴에 그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거꾸로, 신학도는 ‘교회’란 오늘 눈앞에 보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왜곡된 교회모습에 안주하거나 영합해서도 아니된다. 흔히 현실교회론, 교회목회 현장론의 명분을 내세우면서 마땅이 극복되어야 할 교회모습을 긍정하거나 묵종하라고 다그치는 ‘교회현실론자’들이 많다. 병든 교권주의 모습, 교회 물량주의적 사고, 속물적 냄세가 진동하는 사람을 치켜 내세우는 타락한 예배행태,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방해하는 교회조직운영 형태, 에큐메니칼 정신을 상실한 나홀로 성공교회 경쟁, 이런 모습들은 극복되어야 한다. 오늘의 현실교회안에 극보되어야할 부정적인 요소들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되어야 할 점들을 스스로 점검하면서, 장차 내가 목회자가 되었을 때 보다 교회다운 교회의 목자가 되리라고 다짐하면서 준비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신학도는 신학수업의 3년-6년 기간동안에,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어느 특정교회에 메여 신학도 시절을 다 보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회학교 총무, 전도사, 청년부 간사등등의 명목으로 한 교회를 성실하게 봉사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신학도의 신학수업기간 동안 가급적 목회패러다임이 다양한 몇교회를 두루경험 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잘 정착된 교회, 고투하는 개척교회, 성가대가 잘 조직운영되어 교회예배의식이 모범적인 교회, 뜨거운 성령은사를 강조하는 교회, 교파도 다양할 수 있으면 더 좋다. 각 교회의 주보작성 형태와 내용으로부터 제직회와 당회 교회학교 조직운영등을 눈여겨보는 것은 졸업후에는 신학도가 다시 체험해보기 힘든 귀중한 경험자료가 되는 것이다.
6. 신학수련은 결국 자기영혼을 그리스도형상으로서 영글게 하는 것
마지막으로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물음은 신학도 자신의 내적 영성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신학적 실존 그 자체’가 마지막으로 문제가 된다. 앞서 언급한 하나님, 세상, 성경, 교회등 중요항목들이 결국은 신학도의 ‘실존적 영혼의 필터’를 거치면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함이란, 신학적 실존이 생래적인 자아,혈육적인 자기로서는 점점 죽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람, 성령 안에서 중생한 사람으로 변화해 가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세상 속에서 복음의 사역자로서 “썩어져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자!”라는 헌신다짐은 둘째단계 일이다. 아직 알곡으로 영글지도 않았는데 세상 속에 던져지면 거름밖에는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 영글지 않은체로 교회에 파송되면 하나님 백성을 괴롭히거나 종교로서 밥벌이하는 가장 불쌍한 직업종교인이 될 뿐이다. 신학도의 신학함에서 가장 어려운 최대의 난제는 신학도가 자기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성실한 사람’으로서 성장하는 일이다. 끊임없이 십자가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자기를 비우면서 성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곧 신학도의 영성수련인 것이다.
영성수련이란 ‘영성과목’ 수강이나 ‘영성훈련 채플강화’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작은 일부터 시작해서, 자기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이기심, 자기자랑, 명예욕, 물질적 탐심, 형제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면서 쾌감을 느끼려는 욕망, 게으른 태만심, 율법과 신학뒤에 숨으려는 하나님과의 승산없는 숨박꼭질을 청산하는 일이다.
같은 길을 걷자고 입학한 형제자매들의 희비애락에 무관심하는 무정한 이기심, 강의실 시간 지키기나 책임적으로 참여해야할 채플같은 일상사를 소홀히 생각하는 시건방진 똑똑한 신학도가 훌륭한 목회자로서 졸업후 큰 일꾼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좀 어리석고, 손해보기를 게의치 않으면서 뚜벅 뚜벅 끝까지 성실하게 일상적인 삶의 길을 걸어가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주목하시면서 기다리시고 찾으실 것이다.
김경재(조직신학)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