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 배려하기

상대방 배려하기

남의 입장 배려하기


 


 


“내가 기분 나쁘면 남도 기분 나쁘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남이 들어서 마음 상할 이야기는 아예 하지 말아라”


이것이 배려의 정신이다.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있어 필수적인 덕목이다.


이 정신이 마치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의 말씀을 구현하는 태도처럼 오해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의 말씀과 결부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눅 14:11-14)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의 진정한 뜻은 누구를 만나든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과 같은 태도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다가서라는 것이다. 이 복음 정신이 사도들의 편지에 나오는 모든 거룩한 행실 명령과 지시의 바탕 정신이 된다. 즉 십자가를 쳐다보지 않고서는 그 어떤 사도들의 명령이나 권면이나 지시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서 온전히 예수님에게만 모든 공과가 돌아가야 하는 성도의 본분이요 증거해야 될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만약에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낮추지 아니한 상태에서 윤리나 도덕을 요구하게 되면 필히 사도들의 명령이나 권면은 참담하게 의미가 왜곡되게 된다. 온갖 사도들의 말씀들을 끌어당길 대로 다 끌어당기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복음을 안다면서 왜 나에게 무례히 대하는가? 그래도 그것이 성령의 열매 맺는 성도라고 할 수 있는가?”하고 따져들게 된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도 당신만큼 못지않게 존경받을 가치를 지닌 하나의 인격자임을 잊지 말라”라는 뜻이다. 달리 이야기해서 “함부로 이단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나는 지금 당신과 경쟁하고 있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누가 더 잘 믿는지 누가 더 우수하고 훌륭한 심성을 소지하고 있는지 경쟁하고 있는 중이다 는 것이다.


 


바로 이런 태도는 악마가 주입해서 나오는 심성이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를 쳐다보고 사는데, 십자가에 아예 눈 돌리고 늘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누가 감히 날 무시해!”라는 식으로 사는 자라면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도 악마적인 발언일 뿐입니다. 심지어 성경 말씀을 그대로 옮겨 놓아도 악마가 사용하는 그릇이다.


 


문제는 복음을 안다는 사람에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과 화평케 지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서서 그들로 복음을 친절하게 가르치는 것이 미리 복음을 안 사람의 사랑이요 그들에 대한 미덕이라는 것이다. 마음을 십자가 앞에서 낮추지 못하고 (다른 표현으로는, 오직 십자가 피만 높이지 못하고) “우리 합력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같이 알아갑시다”고 우호적으로 나오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마음 상할 말은 삼가자는 주장을 편다.


 


그래서 누구 좋아라고? 그래서 복음 아는 본인이 상대방으로부터 “당신은 복음뿐만 아니라 생활면에서 참으로 복음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시네요 라는 칭송을 들어서 그 선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과연 이것이 십자가 복음 앞에서 마음을 낮추는 태도일까? 아니다!


 


진정 마음을 낮추는 자는 낮추는 척이 아니라 모든 세상 만사가 복음 중심으로 돌아감을 매사에 느끼며 사는 자이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즉 ‘지극히 크신 사랑’의 능력에 성령을 받아 감동하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의 체면이나 위신 같은 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 예수님의 피가 발생된 이 우주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심판과 구원의 위력으로 충만할 뿐이다. 이 세상, 그 어느 구석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


 


지금 이 세상은 ‘사람의 이름’의 더러운 손 때 묻은 용어들이 뒤덮고 있다. 열량, 열효율, 에너지, 뇌사 판정, 민주주의, 역사, 문법, 노래자랑, 트로트, 오프사이드, 자전거, 관광, 김장김치, 바나나 우유 등등 이 세상 그 어느 구석에도 이런 인간들의 자존심과 영광과 위세가 없는 곳이 없다. 하지만 성도는 그 가운데서도 세상을 달리 본다.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일들로 충만하다고 본다. 어린 양의 피, 지옥, 심판, 저주, 사죄, 사랑, 은혜 등 등


 


무엇이 사랑인가? “그래서 십자가 피를 바라보지 않고 당신 자신을 바라보는 당신이 곧 이단입니다”보다 말을 해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이것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함으로서 은근히 상대방으로부터 훌륭한 성도라는 칭송 듣는 것마저 포기하게 만든다. 십자가 피 앞에서만 나나 상대방을 낮추게 하는 기준이 발생한다. 십자가 피 언급을 비켜나서는 이 세상에서 그 어디에도 친절도 없고 대접해줌도 없다. 십자가 피 복음을 비켜나는 베풂은 위선의 극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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