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저주하여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 14:71)
흔히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베드로를 배신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란 상대적이라서 어느 한쪽만 일방적인 아픔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 심정을 이해하자. 배신은 그에게는 성격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의리와 정의와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예수님을 해하려한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단칼을 날려보낸 자이다. 그는 예수님을 믿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자기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것이었다.
이럴 경우는 울음도 웃음도 안나온다. 분하고 분하고 원통하고 원통해서 차마 말조차 터져 나오지 않는다. 우울증이란 이런 경우에 생기는 것일까? 자살 외에는 진정 탈출구가 없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걸었다. 요즈음 교인들처럼 건성으로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다. 놀기 삼아, 인생을 보다 풍요하게 즐기기 위해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전부를 예수님 존재와 맞바꾸었다. 그리고 그런 행위의 보상이라도 된듯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부여받았다는 자부심에 도취되어 살았다.
하지만 예수는 이제 자기 곁을 영원히 떠나려 한다. 이로서 그의 자부심은 순식간에 휴지가 되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자신의 머리를 오물통에 처넣고 싶을 것입니다. “바보, 바보, 바보! 미련한 것아!”를 외치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싶을 것이다. 예수님이 결별하면서 그가 주위 사람들에게 말할 수는 바는 미움 뿐아다. 배신 당했다는 느낌, 이용당했다는 느낌에는 배신으로 되갚아주는 것 외에는 즉각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복수로도 풀리지 않는 내부의 분노, 베드로는 인생 마지막에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이 격분을 체험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교인들은 요령과 재치 덩어리입니다. 베드로처럼 후회할 짓을 할 정도로 미련스럽지 않다. 교회에 나와주면서도 자기 자존심만은 다치지 않는 방도는 다 챙겨놓고 있다. 교회에 발을 깊게 들여놓지는 않는다.
귀한 돈과 명예는 예수님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은행이 지켜준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교인들은 베드로의 격분을 동참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교회 다니는 첫날부터 교인들은 벌써 예수님은 배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막 14:27) 베드로의 배신조차 이미 말씀대로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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