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누군가가 선한 목자인지 아니면 삯군인지를 구별해 내는 기준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요한복음 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스스로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섬뜩합니다. 선한 목자 하고 싶지 않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선한 목자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 자신은 이미 죽은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봐라, 내가 널 위해 이렇게 죽었지 않니? 이제 알겠지, 내가 바로 선한 목자라는 사실을!"
선한 목자가 되는 순간 자신은 죽고,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의 칭송은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죽음을 극복할 수 없는 자는 선한 목자가 아예 처음부터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정의하신 선한 목자가 되려면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또한 다시 얻을 권세도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0:18
이를(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결론적으로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선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선한 목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선한 목자에 의해 이름이 호명되는 양들은 어떻게 태어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되어 있습니다.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해 도망하지만, 양들은 기가 막히게 선한 목자의 음성을 알아 챕니다. 도대체 그 양들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 역시 주님의 죽음 안에 포섭된 때에만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게 됩니다. 죽지 않은 양,정확하게 주님에 의해서 호명되지 않은 양은 필연적으로 삯군으로서 누군가를 착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피조물의 삶, 그러니까 창조주에게 철저하게 종속된 삶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 지고 그 분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자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목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에게는 선한 목자가 아예 없기에 자신의 목숨을 책임질 사람은 바로 나 자신 밖에 없다는 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런 삯군의 특징이 바로 자신의 행위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에 축적된 연습과 노력의 결과물을 쇠사슬처럼 철컹 철컹 끌고 다니면서 더 갈고 닦은 자가 나타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더 강해지려고 합니다. 그 강함은 경쟁을 통해서 약함을 창출하고 결국 먹고 먹히는 힘의 구조가 형성됩니다. 이렇게 삯군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삯군이었던 양은 선한 목자와 마주쳤을 때, 선한 목자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태어나게 됩니다. 즉, 양은 스스로 자신이 양인 사실을 알아챌 수 없습니다. 선한 목자 즉,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자신의 존재를 통째로 죽음 속으로 밀어 넣을 때, 자신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그 선한 목자마저도 자신의 목숨을 위한 음식으로 여겼던 삯군 중에 삯군이었음이 탄로나는 순간 바로 양이 됩니다. 바로 양은 선한 목자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양을 위해 선한 목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은 자신이 삯군일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예수의 피에 의해 매몰되었을 때 비로소 음메에~ 소리를 내게 됩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가 양에게 들려 줄 음성은 십자가 뿐입니다. "바로 내가 너를 위해 죽은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의 다시 살아나심은 목자와 양과의 소통은 오직 죽음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함입니다. 예수의 죽음 안에서의 소통, 이러한 선한 목자와 양의 모습이 요한복음 10장에 이은 11장에 바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양의 이름이 바로 나사로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죽은,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자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양. 죽음 안에 있지만 너무나도 또렷이 '나사로야 나오너라'라는 선한 목자의 음성, 그 능력으로 걸어나올 수 밖에 없는 양.
성도의 모습은 바로 이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를 죽었다고 하고 굴에 가두고 커다란 돌로 입구를 막지만, 선한 목자가 부르시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냄새를 같은 성도에게는 생명의 냄새를 피우면서 뭉대에 묶인 채, 즉 자신의 행위로써가 아닌, 오직 말씀에 의해 들것에 실린 양 모습이 드러납니다. 죽음 속이 아니면 결코 양은 태어나지 않으며 목자와 소통할 수도 없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지 못하는 자는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그는 죽음에 의해 자신이라는 존재자체가 없어질 것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서 필연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양을 도륙하는 인간 백정입니다.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음성에 굴복하는 양들을 양산하기 위해서 선한 목자라는 탈을 순간 순간 빌려쓸 뿐 그 본질은 살인자인 것입니다. 양을 그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소비되어야 할 음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우리 인간의 참 모습이니다. 단 한 사람도 - 그가 자식이건, 배우자이건, 그 어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불쌍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 사랑할 수 없는 삯군! 그 인간의 본질(삯군)을 폭로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라는 개념 속에 자신의 생명을 반드시 넣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목숨을 구별기준으로 삼지 않고서는 선한 것이 이 땅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기에.
결국 선함이란 십자가 피를 의미합니다. 자신의 양을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린 사랑을 선하다고 합니다.
결국 선함이란 부활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양에게 자신이 바로 그 선한 목자임을 음성으로 들려주기 위해 살아나는 능력을 선하다고 합니다.
선함이라는 단어에는 삯군된 인간에게 익숙하다는 이유로 이런 저런 잘못된 선입관이 겹겹이 덧칠되어 있습니다만, 선함은 죽음 조차 어쩌지 못하는 하나님 아들의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 외에 선함이란 없습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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