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당신은 뉘십니까?

대체 당신은 뉘십니까?

[2016.2.14 성경모임 / 히브리서 2장]



하나님을 봤습니까? 예수님을 만나 보았습니까? 아니면 천사나 마귀가 있나요? 성경에 등장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불확실한 것들 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성경을 읽고 생각한다는 것은 뭔가 수상한 의도가 깔려 있는 행동입니다. 확실하지 않은 것들에 관한 읽기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왜 모였을까요?



성경은 불확실한 내용으로 가득하지만, 인간에게는 확실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죽음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습니다. 너무나 확실합니다. 두 번째 확실한 사실은 살아있는 동안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너무나 확실합니다. 결국 인간은 확실하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살다가 확실하게 죽는 존재입니다.



확실하게 죽을 인생, 철저하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은 불편합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이유는 이 불편을 해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으로부터 편해지고 싶기 때문에 그 해결책이 혹시 성경책에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설명 속에 있지 않을까하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욕망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성경 해석의 방향이 벌써부터 분명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나 편한 방향입니다. 불확실한 하나님, 예수님, 천사, 마귀를 내 편하자고 왜곡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인간은 언제 편안함을 느낍니까? 인간은 자신의 말로 설명할 수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낍니다. 확실하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 맞서는 대안입니다. 인생을 마음대로 살 수는 없었지만, 그 이유는 나름 설명할 수 있으니 체면은 세웠다는 거죠. 또한 인간은 위로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위로는 어디인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단순한 소속이 아니라 관심 받고 있다는 증표이기도 합니다. 확실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달래는데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입니다. 비록 나는 죽지만, 내 가족, 민족, 국가 혹은 어떤 숭고한 대의명분은 영원히 살아남아서 나를 기억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명욕구와 소속욕구.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이 두 가지가 쉬지 않고 수고합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 예수님, 천사, 마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위로받으면서 하나님 쪽에 소속되고 싶어 합니다. 왜곡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히 2:1)”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간절히 삼가고 염려하면 떠내려가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삼가고 염려해야죠. 하지만 설명욕구와 소속욕구는 인간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감옥입니다. 그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아무리 삼가고 염려해도 감옥 속에 있다는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닙니다. 감옥 생활을 견딜 수 있도록 희망 고문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말씀은 우리의 감옥 현실을 고려해 주지 않습니다. 견고합니다. 순종치 않으면 공변된 보응을 받습니다(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큰 구원”일 수밖에 없습니다(3절). 큰 구원은 작은 구원도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구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증거하고 계십니다(4절).



지난 모임에서 히브리서 1장은 역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하나님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예수님이 아들이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보다 근원적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부자관계를 하나님의 부자관계 위에 덮어쓰는 오류를 범하는 겁니다. 그게 인간들 사이에서 설득력 있거든요. 설명 가능한 거죠. 편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장은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2절). 마지막입니다. 그 동안의 방법이 다 안 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카드가 등장합니다. 바로 아들입니다. 아들을 통해서만 인간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설명권한을 아들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하지 않은 하나님은 모두 반칙이요 사기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하신 일이 바로 십자가 지신 일입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인간에게 처벌받은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 손에 살해당한 겁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죽다니요? 과거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죽지 않습니다. 영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속에 담긴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에게 죽는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에게 친절한 설명을 할 생각이 없음이 분명해 집니다. 게다가 신과 인간이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당연히 신이 이깁니다. 힘이 더 쎄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살해당했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일종의 자살입니다. 오늘 2장 6절에 등장하는 사람, 인자가 바로 아들입니다. 그 아들을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십니다(6절). 죽음을 맛보게(9절) 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이신 아들은 죽어야만 합니까?



죽음을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그 승리가 아들의 형제요(12절), 자녀(13절)들을 마귀의 종노릇에서 해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종을 부리기 위해서 죽는다고 겁을 줍니다(15절). 앞에서 우리 인간에게 확실한 것 중 하나가 죽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마귀가 자녀를 협박하고 있는 상황인 겁니다. 혈육 중에 ‘자녀’가 있고 ‘자녀-아님’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마귀가 속인다는 말이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라면 육체의 죽음 때문에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데 계속 무서워한다는 겁니다.



무서워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노리고 있는 그 무엇의 실패가 예상된다는 말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먹고자 하는 영생 욕구가 영원히 좌절될까 무서워하는 겁니다. 내가 소멸할 것이 두려운 겁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까 무서운 겁니다. 나를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상태를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주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유지합니다. 기생하는 거죠.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 기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어쨌든 죽음은 확실하니까 확실한 죽음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죽지 않는 다른 존재에게 기생하는 겁니다.



이때 마귀 말고 다른 주인이 등장합니다. 그 주인은 마귀의 사망권세를 깨고 승리했습니다. 손쉬운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완력으로 마귀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와 함께 같은 혈육에 속해 있기에 그도 아팠습니다. 고난입니다. 아들에게도 시험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돕기 위해 승리하셨습니다. 이 승리의 비결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가 하나님이면서도 혈육으로 오신 것은 천사를 돕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시고자 하심입니다.(16절) 당신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은 어떻게 태어납니까? 죽은 태(胎)에서 태어납니다. 비웃음 속에서 비상식적으로 출몰합니다. 세상이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비밀로서 태어납니다. 매일 죽고 태어납니다. 없는 곳에서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등장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성령으로 태어납니다. 바람 같습니다. 잡히지 않습니다. 소유되지 않습니다. 규정되지 않습니다. 습관도 패턴도 없습니다.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예상이 안 됩니다. 항상 새롭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항상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기에 항상 낡고 헐어 있습니다. 낡고 헐어있는 죄의 소산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십자가와 창조 관계에 놓여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안’입니다. 예수 안은 그 어떤 소속감도 용납하지 않는 영역입니다. 소속감은 과거의 생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은 과거를 만들지 않습니다. 예수 안은 고정되어 있는 위치가 아니라, 늘 흐르고 있는 운동이며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비밀사건이고 해독불가한 상황입니다. 늘 의(義)로 변하고 있는 죄의 연속이며, 그래서 의롭다 인정받는 영역입니다. 인정을 늘 받아야 한다는 말은 한 번 인정받고 별도의 합격통지서를 챙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 번 호흡한 것으로 영원히 살수 없듯, 인정해줄 수 있는 자에 의해 지속적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겁니다.



한 번 호흡으로 영원히 살수 없어 계속해서 숨을 쉬어야 하지만 이걸 죽었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늘 죄를 범할 수밖에 없지만 십자가 피로 늘 용서받고 있다면 그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호흡은 죄의 증표이며, 동시에 구원과 용서의 확증인 겁니다. 이 때, 늘 죄를 범하는 옛 사람은 당연히 주인공이 아니겠죠. 모든 관심과 영광은 계속 피흘려주시고 계신 아들에게 자연스럽게 집중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자녀는 늘 교체당하고 있습니다. 기생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설명도, 소속감도 필요 없는 살아있는 죽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그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한 인간의 그럴듯한 설명이라고 읽으셨다면, 옳습니다. 결국 이 글도 죄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이해하셨다면, 정확합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뿐이라고 하신다면, 대체 당신은 뉘십니까?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uy Now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Blog
About Us
Message
Site Map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Terms of UsePrivacy Notice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

Home
Gospel
Question
Blog
Hel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