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란 정으로 엮어져 있는 사회가 아니라 '생산성'으로 엮여져 있다. 농부가 농장을 경영해도 팔릴 만한 상품성 있는 작물을 내어놓아야 한다. 사과를 경작해도 실하고 크고 단 사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농부일을 접어야 한다. 농사일이 자연을 벗삼아 세월 보내는 식으로 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농협에서 융자받은 농자금 이자나 원금을 갚아 나가면서도 자신의 최소한 노동의 대가를 농생산물을 통해서 뽑아내야 한다.
일반 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생산성을 배가 하기 위해 직원들을 가만 놀리지 않고 계속 닦달낸다. 생산성을 뽑아내지 못하는 직원은 더이상 갈 곳이 없다. 요구하는 생산성에 능력이 딸리면 퇴출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공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관공사나 경찰서나 군대도 마찬가지다. 생산성 함양은 범세계적인 경쟁마당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본적 요건이다.
교회는 어떨까? 교회도 자본을 밑천으로 하여 자본의 흐름에 참여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의 일원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돈으로 평가되는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뽑아내야 살아남는다. 교회에서 말하는 생산성이란 무얼까? 교인의 증가가 더불어 헌금액의 증가이다. 적어도 물가 상승분 정도는 흡수하고도 남음이 있어야 생산서이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교인들에게는 물론 교회는 오락단체다. 교인으로 등록한 사람들 끼리 담화하고, 취미가 맞으면 같이 활동하고, 서로 아쉬운 것을 채워지고 도와주면서 관심을 나누는 친목의 장이다. 그러나 목사나 장로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로 머무르면 생산성에 박차를 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락이란 소비이지 생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담임 목사는 휘하에 있는 부교역자를 통해서 자교회 교인들에게 취미생활 생산활동생활로 전환되기를 강력하게 독려하게 된다.
여기에 동원되는 구호의 바탕에는 예수님의 희생정신과 사도들의 봉사정신이 깔리게 된다. 소위 '십자가 정신'이라는 명분하에 교인들에게 강요되고 있다. 강단에서 이렇게 설교할 것이 뻔하다. "십자가적인 희생적 삶이 없다면 껍데기 신앙자입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고 싶지 않다면 달란트를 땅에 묻는 우를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성경 말씀을 거역하는 자는 하는 일 쪽쪽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즉 교회에 돈을 내든지 아니면 시간을 바치든지 하라는 겁니다. 그래야 교회가 이 사회에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정체되어 있는 교회는 죽은 교회에 확장되는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니 확장되기 위해 생산성이 날마다 배가 되는 목표의식을 가지고 전 교인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놀려올려고만 하지 말고 투자와 희생을 병행해가면서 교회에서 놀아라는 것이다. 살아있는 교회가 되어야지만 진정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살아있는 교회임을 증명될 것이고, 이럴 경우에만 이 교회에 등록된 자들은 죽어서 천당가는 것이 확실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 생산성'이라면 그렇다면 과연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생산성을 원하는가? 신앙이라는 것이 과연 생산성과 관련있을 수 있을까?
출애굽 당시 유월절의 경우를 보자.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는 천사에게 있어 생산성이란, '피없는 집안의 맏이를 하나도 빠짐없이 제대로 죽여주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피'라는 격리막을 제시하셨다. 즉 어린양의 피없이 살아남을 자를 천국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에 동원된 천사에게 있어 생산성 있는 일이란 이 '단절의 기준'을 철저히 준수하는 일이다. 오늘날 성도에게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 종'이 아니다. 십자가의 피의 기준을 모든 일에 철저하게 적용시키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도 같이 파악해야 한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좋이하는 것은 '자기 행위에 근거한 자기 존재의 존속'이다. "이런 행위를 하니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음"을 사람들을 보편적으로 좋아한다. 바로 이런 성향을 향하여 단호하게 '단절의 기준'인 '십자가의 피'를 발사하는 것이 신앙적 생산성이다. 요단강 건널 때, 제사장들이 어깨에 맨 언약궤로 인하여 강물은 길을 터주었다. 홍수로 넘치는 강물과 이스라엘 사이의 단절막은 오직 언약궤의 상주였다. 이것은 영생의 넘쳐나는 생산성은 오직 '언약의 완성상태'에서 방출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이다. 즉 결코 우리 인간의 행함에서는 그 어떤 신앙적 생산성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로지 죄가 나온다. 그러나 십자가에서만 그 죄를 사해주시는 자비의 피가 동맥 끊어진 것처럼 분출된다. 바로 성도는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로 살아가는 것이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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