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과 이스마엘
이삭과 이스마엘
히브리서 11:17-19
이삭과 이스마엘 갈 곳이 상호 다른 두 명의 인물이 성경에 나옵니다. 겉으로 보기에 별 차이없이 보입니다. 겉으로 봐서 이 두 사람 사이에 갈 곳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영원히 갈 곳을 먼저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생존함이 우선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인간들은 죽어서도, 죽음의 세계에 들어가서도 영원히 살고 싶어 합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집착이 그 어느 것보다 강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언약)의 개입으로
이삭과 이스마엘의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이삭에게는 있는데 이스마엘에게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삭은 살아 생전에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험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경우라면 이스마엘에게도 경험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창 21:14-16)
이삭의 죽음 경험은 ‘자기 대신 죽게 되는 희생물’과의 만남을 성사시킨 경험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삭이 계속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삭 내부는 희생물의 본질이 계속 키워지는 운반체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희생물의 원출처로 제대로 이어져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삭 본인을 계속 살려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기존의 이스마엘 같은 종류의 인간들과는 차별화를 두면서 다른 세계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는 이삭이 자기 위주의 인생이란 애초에 성립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마치 임산부에게 있어 배 속의 아기가 더 중요한 것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