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성도님의 노트(7,,8)-울산 새순교회 이능우 집사…

어느 성도님의 노트(7,,8)-울산 새순교회 이능우 집사…

제7강
종말에는 사람들이 자기만 사랑(딤후3:2)하는데 이것이 종말의 전형적인 모습인데 그러면 성도의 생활은 종말론적(종말 때의 현상)으로 바라볼 때 어떻게 나타나는가하면 세상을 유지하려는 윤리와 도덕과 법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다루어서 그 당시 질서와 윤리 도덕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났으며 그것 때문에 마귀 들렸다고 욕을 듣긴 했지만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같은 예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왔다면 성도 역시 주님의 길을 가게 되고요.

주님께 받은 사랑이 없으면 법이 나올 것이고 받은 사랑이 있으면 우리 자아 속에서는 사랑이 나온다는 겁니다.
사랑 없이 법이 오게 되면 법으로 맞이하고 사랑이 있으면 저 멀리서 오는 법이 이미 주어진 사랑과 같은 질의 사랑으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사랑 안에서는 두려움이 없으며 법의 최종 상태가 사랑이며 이 사랑 앞에는 모든 것이 용납된다는 겁니다.

법이 사랑 안에서 방출되기 때문에 이 사랑이 저 멀리서 오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모든 것을 용납하고 긍휼히 여기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받은 사랑을 마음껏 누리는 입장이고요.
디모데후서 2장에서는 이것을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라고 하십니다.

모든 말씀을 사랑으로 받으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죠.
죄는 죄대로 깨닫고 그 죄를 주님의 피로서 용서함을 입고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죠.
이렇듯 성도는 받은 사랑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자랑하는 모습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겁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사랑만 방출하면 이 모든 말씀들이 굉장히 반가워지는데 어떻게 반가운가 하면,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뒤에다 추임새를 붙이는데 “사랑으로” 뭐든지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사랑으로 마중을 나오고. 사랑으로 마중 나간다는 것은 나는 빠지고 내 속에 있는 사랑이 날 대신해서 이 성경 말씀에 마중을 나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하면 첫사랑이라는 거죠.
첫사랑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긴 것인데 그 불쌍히 여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다가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딤전3장 1절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여기에서 감독된 사람은 첫사랑을 유지하면서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보여줄 주님의 사랑이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의 고난이나 목사직 소유가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면 성경에서의 보여줄 사랑은 방출하는 사랑이라는 겁니다.

주께서 내게 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주셨다는 것 서로서로가 나로 하여금 나를 죄인 되게 만드는 그 위대한 사랑을 내 놓으란 것이지요.
나는 목사로써 내 사랑 끄집어내고 너는 집사로써 네사랑 끄집어내어 보라는 것입니다.

딤전3장 2절
감독은 하고 14가지가 나열되어 1) 책망할 것이 없으며, 2)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3)절제하며, 4) 근실하며, 5) 아담하며, 6) 나그네를 접대하며, 7) 가르치기를 잘하며, 8)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9) 구타하지 아니하며, 10) 관용하며, 11) 다투지 아니하며, 12)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12)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 13) 새로 입교한 자는 안 되고, 14) 외인에게 선한 증거를 얻은 자.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서 집사를 보면 1)단정하고, 2)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3)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4)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5)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이런 말씀 앞에 어느 것도 항상 지킬 수도 자격도 없는 자가 바로 저이며 나는 목사 값도 못한다고 고백되어 지고 활용되어지는 그 모습이 진정한 목사다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부족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주의 말씀은 살아있고 목사 된 사람은 늘 말씀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말씀(계시)만 성도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목사 값도 못하는 한 사람 뽑아서 말씀 앞에 대면해서 ‘이 말씀 앞에 어느 인간도 못합니다.’라는 말을 하도록 목사 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법이 올 때 사랑이 없는 사람은 법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사랑이 있는 사람은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법이와도 ‘이 죄인을 용서한 주님의 말씀’으로 받게 되며 이 사랑으로의 마주침이 성도가 보여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란 겁니다.

11~13절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여자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못난 인간을 사랑해 주신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얼마든지 즐겁게 어떤 일도 감당할 수가 있으며 이것이 믿음에 큰 담력이라고 합니다.
살아 있다는 말은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이고요.

4장1~3절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식으로 하는 것이 어떤 법이 오더라도 이런 법도 못 지키는 그 법을 통해서 내가 다시 한 번 마음 낮추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이것이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주의 이방 풍속과 차이 나는 모습이고요.
주 예수님께 감사하고, 용서하심에 감사하는 그 모습이고 말입니다.

5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이 말은, 기도와 말씀 읽는 행위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로 거룩해 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거룩의 실체가 자기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겁니다.

내 기도 행위로 내가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니까 기도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으니까 말씀으로 우리가 거룩해 진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모든 것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면 안 된다는 거고요.

4장 7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육체로 인하여 경건한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원하는 경건의 차이점을 알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이미 폼 나는 경건 형식화 된 경건이 많이 유행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건과 성도의 종말론적 모습의 경건은 다르다는 거고요.

종말은 어떤 힘으로 오는데 성령의 힘이 아니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결코 종말이란 의식이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종말이 언제인가 하면 시간을 보지 말고 질을 봐야 된다는 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전부 개인주의고 하나 됨은 없고 모두가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이 풍습이 종말의 모습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종말론적 삶에서 경건이란 것은 이 세상이 종말이라고 느끼면서 사는 것이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한테 복수를 할 수 있는 분인데도 그것이 우리한테는 감해졌고 우리는 용서를 받은 상태라는 겁니다.
복수를 당해야 마땅한데 용서를 받았으니까 그 용서에 감사하는 모습이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종말론적 삶이고 내 욕망과 성경 말씀의 차이를 깨닫게 해서 새롭게 내 자리를 확인토록 하는데 이것이 바로 경건의 모습이 된다는 겁니다.

14절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여기서 은사라는 것은 장로회가 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이며 장로회라는 것은 지나가는 하나의 매개체라는 겁니다.
단 조건이 있는데 그 때 장로회의 모임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가 인간을 거쳤다고 그게 무효로 끝나는 성령의 은사는 없는데 어차피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을 통과해서 은사가 주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장로회는 우리 장로회가 은사를 줍니다하고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주님께서 주시고 우리는 그냥 도구에 불과하다는  멘트를 장로회에서 날려주어야 된다는 겁니다.

성경 말씀에 죄인들이 동원되어서, 죄인은 어디까지나 죄인일 뿐이고 ‘너도 똑같이 사랑 없으면 못 살아.’ 그런 것을 서로 고백하면서 주의 은사가 드러나는 그것이 바로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의 모습임을 강조 하시면서 7강을 마치게 되었네요.

제8강
딤전 5장1절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교회에서 지도자는 낮은 마음으로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사셨는가를 교회에서 나타내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받은 사랑만이 사랑을 알아보는 그것만이 주께서 원하는 성도의 삶이라는 거죠.
그 사랑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죄밖에 나올 것이 없다고 고백하는 그 사랑만이 진정한 교회로써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이고요.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 모두가 주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며 주 예수님이 행하신 말씀입니다.

딤후 1장6절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은사의 마지막엔 고전 13장에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 일은 사랑이라.” 이 말씀은 뭐든지 사랑에서 흘러나와서 사랑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과부가 너무 억울한 일이 있어서 재판관을 찾아가서 간청을 하는데 불의한 재판관도 간청하니까 들어주는데 이 마지막 때에 우리 주님이 우리의 간청을 어찌 들어주지 않겠는가하는 겁니다.

재판관 되시는 주님이 불쌍한 우리를 도와준다는 말은 높은 자리에 계신 주님이 낮아짐으로 같은 눈높이에서 그 간청을 들어줄 정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한다는 그런 내용이고요.

모든 것이 주님 사랑으로만 되는데 사랑이 없으면 저주밖에 주어질 것이 없으며 나에게는  헌금을 하던 기도를 하던 내가 주님께 받칠 것은 없으며 죄짓는 이 몸뿐입니다. 라는 모습일 때 그것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주님 사랑과 매치가 되는 하나의 대상자가 된다는 겁니다.

딤전5장6절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일락을 좋아하는 늙은이는 죽었는데도 일락을 좋아하는 늙은이를 꾸짖지 말라 이 말은 주님의 취지는 항상 ‘디모데야, 제발 좀 마음을 낮추 어라는 것인데 마음을 낮추고 이야기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사랑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마음을 낮출 수가 있고요.

성경 말씀을 사랑이라는 바탕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여러분에게 오게 되면 그것을 우리가 마음대로 빼도 박도 못하게 되는데 우리의 행동은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건 십자가 앞에서 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낮춰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마음 낮춤을 통해 가족을 돌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면 사랑으로 돌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곧 믿음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14절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젊은이는 젊은 과부를 말하며 교회는 그리스도 안 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쾌락이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그런 장소로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해 보라는 식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주님의 교회 함부로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으며 역사적 존재로서의 교회는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정한 교회는 역사적 존재와 묵시적 존재가 만나는 지점 십자가의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고요.

이것이 새 언약이며 새 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를 드러내게 하는데 그것을 위해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도록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도 늘 그런 마음이 될 수밖에 없는데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 속에 박혀서 이 말씀을 되새기게 하신다는 거예요.

18절 봅시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고린도전서9장 에서는 전도자에게 생활비를 제공하라는 말씀이지만,
여기서는 19절이 주가 돼요.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장로는 당시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에게는 모함 같은 것이 올 수가 있어요.
그래서 두 세 증인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확실한 증인이 있어서 누가 봐도 납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납득이 되더라도 함부로 그렇다고 결정해서도 안 되며 그 사람의 인격과 품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전하는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의 신뢰도가 그런 모함으로 가로막힐 수가 있으며 그것이 사단의 역사라고 하십니다.

6장1절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높은 자리, 낮은 자리라는 이런 세속적인 것에서 구원 받으려면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으면 그 자리가 얼마나 복된 자리인 줄 깨닫게 된다는 합니다.

2절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사랑을 늘 하나님께 받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라고 경히 여긴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면 형제라고 경히 여긴다는 것은 인간성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직장에 가면 상관이면 상관답게 대우해야 되는데 자기 동료처럼 대해서는 안 되며 직책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존중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4절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항상 글을 쓸 때는 내용이 있어야 되는데 글의 내용이 있으면 그 내용이 귀해서 좀 성질나는 글이라도 그것은 남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사람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진린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식으로 봉사하는 입장에서 글을 쓰고 이야기 할 때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내용이 없이 쓸데없는 논쟁만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고요.

5절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내용은 없고 자기만 살아 있으니까 다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7절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구나.
죄 밖에 나올 것 없는 나에게도 주께서 복음 전하라고 이런 것들을 주셨구나. 라고 하면서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주신 마음이라고 하시면서 8강 마무리를 했습니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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