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새순교회 이능우 집사님의 디모데전후서 정리
이번 2011년 8월 가야산 여름 수련회를 통해서 참으로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고 봅니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각처에서 주님의 부르심 속에서 모이신 형제자매들과 함께 강사님의 열강이 서서히 불을 토하기 시작됨에 따라 모두들 복음의 기쁨 속에 빨려 들어가는 모습들이 참으로 보기에 좋았습니다.
이글은 나름대로 감명 받았든 부분들을 정리 하여 보았습니다.
제1강
교회 있음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 착각 그런 것을 지적할 수 있는 서신이 디모데전 후서라고 운을 때시면서 서서히 강의를 시작 합니다.
그래서 주재가 교회를 잊으라고 정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반응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반응은 교회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느냐 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권세로서 만든 교회가 있다는 겁니다.
둘째반응은 교회는 잊어도 주님은 못 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결과물로서 발생된 교회가 있다는 것이지요.
첫째반응의 주장은 ‘교회는 교회자체로서 의미가 없고 우리를 구원해낼 수 있는 교회라야 교회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인 구원론으로서의 종교라고 강사님은 지적 하십니다.
두 번째 반응의 주장은 예수님이 친히 교회를 만들어놓고 복음을 전해서 스스로 나갈 사람은 나가고, 들어올 사람은 들어오게 하신다는 겁니다.
즉 성령 받으면 교회고 받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누가 주느냐 하면 성령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주신다는 겁니다.
성령은 주님의 영이고 성령으로 역사해서 악마로부터 구출해낸 결과물 그게 주님이 세우신 교회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왜 성령을 보내야 되느냐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 뛰어들 수 없는 갭이 있답니다.
이 갭은 성령을 통해서만 갭을 뛰어넘을 수가 있고요.
예수님마저 십자가에서 스톱이며 예수님마저 십자가에서 스톱함으로 말미암아 뭐가 깨지느냐 하면 인간들이 생각했던 종교적인 구원의 구조가 모두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십자가에 끌고 가서 다 죽여 버려서 모든 인간이 십자가에서 죽은 거랍니다.
십자가에서 부활로 건너갈 수없는 이 구조가 성령을 통해서 온다 했는데 신약에 보면 이 성령은 새 언약의 영이라 했어요.
구약에 있는 모든 성경말씀을 십자가에서 부활 승천해서 나오는 성령을 근거로 또는 바탕으로 해서 구약의 언약들을 설명할 수 있는 출발점과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새 언약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새 언약을 설명할 수 있다면 모든 언약의 완성이 새 언약이라면 구약에 있는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서 새 언약을 모델로 해서 그대로 적용된다면 이 어린양이 유월절에 죽어버렸는데 그러면 어린양의 부활은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어린양의 죽음이 시내 산에서 언약 또는 율법이란 이름으로 주어진다는 겁니다.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어린양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죽어야 될 내 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너희가 움직인다는 그 내용이 언약 안에 포함된 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언약 앞에서 히브리인들은 언약 따라서 치러지는 제사의 피 앞에서‘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 속에서 언약이 살아있을 때 언약의 혜택을 계속 누리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이 언약이 신약에서 새 언약이고 새 언약은 십자가 사건이 되는 것이랍니다.
그렇게 되면 처음의 유월절은 한때의 에피소드가 아니고 언약 적으로 영원히 성령 안에서 십자가에서 계속 살아있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살아있으면서 성령을 주게 되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우리를 부활에 집어넣는 다는 겁니다.
우리를 죽이고 그리스도에 속한 몸이 될 때만 성령이 인도해서 예수님 계시는 부활의 나라에 가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될 때 그걸 비로소 교회라고 부르죠.
그래서 성경에는 몸도 하나 주도 하나 교회도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네가 어떤 일을 했던 간에 죽은 자로 간주하고 예수님께서 죽을 너희들도 살리시고 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모든 개념과 해석이 예수님 안목으로 달라져야 된다는 겁니다.
언약 땅 개념도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모든 것 어느 구석이든 수평적으로 여기저기가 아니라 수직적으로 저주냐 복음이 움직이는 생명이냐 수직적으로 층이 갈라져 버리는데 이게 사도의 전도의 의미라는 겁니다.
성령이 안 온 것을 육이라 합니다.
어떤 것도 십자가 앞에서 육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마저 저주 받은 것처럼 모든 인간도 하나님께 육이란 이유 때문에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성령이 와서 영이 돼버리면 그때부터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예수님의 증인이 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 이 땅에서 와서 예수님이 세상을 어떻게 보셨는지 그 시선과 동일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의 개념, 하늘개념, 율법개념, 교회개념, 남녀개념, 인간관계 모든 것이 예수님 안목으로 다 달라진다고 하시면서 1강을 마쳤습니다.
제2강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 같지만 예수님 스스로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죽었다는 겁니다.
인간의 정체와 주제를 알리기 위해 죄인인 육신의 모습으로 와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십자가에 죽음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진짜 하나님을 만난 것은 예수님 때문에 아버지가 나타난 것이고요.
예수님에게 하나님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아버지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아버지로 나타나버리면 여기에 아들이 성립합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만의 언약이 여기에 적용이 돼요.
아버지와 아들만의 언약은 역사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고 역사 이전 즉 창조 전에 있었던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그대로 여기에 적용이 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창세 이후에 존재이면서도 무슨 혜택을 입느냐 하면 창세전에 있었던 일의 혜택을 입는 그러한 존재로 탈바꿈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은 중심이 있는데 그 중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향하시는 언약의 핵심이 뭐냐를 알려주기 위해서 모든 천지만물이 그 중심으로 소용돌이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라(엡1장)해서 모든 만물은 예수님이 머리되신 교회 하나 세우기 위해서 모든 것이 투자되고 배치 배열이 되어있으며 각기 제 자리에서 그리스도 몸인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만물이 가득 차 있다고 말씀 합니다.
물론 그 교회는 머리되시는 예수님 본인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고요.
하나님의 이름이 갖고 있는 언약의 개입은 창세후에 만들어진 인간세계에 개입될 때 여기서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긴 답니다.
충돌이 생긴 분화구에 교회가 생기고요.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세계에 들어오면 충돌이 일어나는데 그 흔적을 피라고 말씀 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는 이유는 가짜하나님을 진짜하나님이라고 우기는 인간들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것이 십자가피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가해자로 들통 나는 것이고요.
예수님의 영을 받게 되면 아들이 될 수없는 인간이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이 혜택과 공로는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 덕분에 내가 아들이 된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예수님의 것으로 철저하게 예수님에게 종속되며 주를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요.
이것이 창세전에 이미 계획했던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보관해놨던 교회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부어진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런 식으로 만들어 진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았던 그 코스를 되풀이하게 되며 지상에서 되풀이 되는 걸 부활의 흔적이라 합니다.
창세전의 아버지와 아들만 알았던 계획이 창세후의 설치돼있는 창조세계에 침투했던 결과가 피라는 한 자에서 다 드러난다는 겁니다.
내 행함과 아무 상관없이 구원은 십자가로만 이뤄진다는 그것을 성령의 열매라 하고요.
성도의 주체는 예수님에게 가있으며 주님이 주체라는 겁니다.
성령으로 인해 성도됨이 먼저고 그 결과물로 내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성령의 개입에 의해서 성도가 내가 되게 하는 것이고요.
십자가에서 부활로 가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면 창세전에 준비된 것을 창세후 역사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입혀주는 것도 누구 몫이 나면 성령이 와서 ‘네가 바로 창세전에 예정된 택한 너, 맞아 라고 이야기해주는 것이고요.
아들이 아닌 자를 아들로 바꾸는데 여기엔 필히 고난이 주어집니다.
고난 가운데 결국 십자가로 데려가서 부활에 이르게 하는 거시지요.
이것이 주님께서 인자로 간 코스라는 겁니다.
성령의 일하심은 나로 하여금 내안에서 죽음 가운데 넘기는 그 능력이 죽이는 능력이 아니고 살려주는 능력으로써 지상에서는 죽는 모습으로 다가 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주님의 공로로 인해 고마워하는 것이고요.
지금 창세전의 계획이 창세후에 있는 세상에 덮쳐버리면 즉 복음이라는 이질적인 것이 전파되면 복음에 저항하는 불꽃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현상을 종말적 현상이라 합니다.
종말이 됐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을 종말론적 현상이라고 강조 하십니다.
처음에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땅으로 쫓겨나 땅을 만남으로 땅은 육을 육되게 드러내는 필수적 환경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육은 땅과 친화력이 있으며 육은 땅 없으면 못 사는 거랍니다.
종말론적인 안목에서 볼 때 이렇게 육이 되어야 되고 땅이 된다는 안목을 가졌다는 말은 이미 육에서 벗어난 인물만이 육과 땅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육에서 난 것은 무엇을 해도 육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성령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구원 받은 자는 자신이 무엇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는 것이 영광이고 성경에서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이 주께 주심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영광이고 예배라는 것입니다.
복음 또는 말씀의 개입으로 창세전의 예정된 육도 생기지만 놀랍게도 기적적으로 영적 존재도 생겨버린다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인간 힘으로 믿을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창세전의 이미 선택됐다는 것도 인간 힘으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선택한 것도 하나님이 아니고 주께서 선택했다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십자가 믿는다는 것은 육에서 난 어떤 죄도 육으로 해결하지 못하는데 육으로 해결하지 못한 죄가 예수님의 영적 육 그 몸이 대신 피 흘림으로써 이미 끝나버렸다는 겁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때 더 이상 자기 육에 대해서 기대를 안 하게 되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 아멘이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 피로 인해 법에서 자유로운 자가 건짐 받은 자요 성령으로 의의 종이 된 자입니다.
이로서 아쉬운 두 번째 강의가 끝났습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