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하는 자라야,,,?
행하는 자라야,,,?
자료 1.
한국 교회에 문제점을 파악하는데 있어 기본 동기가 현 교회가 마음에 영 차지 않음에서 왔다고 한다면 그렇게 보는 시각을 바꾸면 된다. 그러나 현 한국 교회가 성경에 나와 있는 교회의 모습과 다르다고 한다면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다. 평소에 구상했던 교회의 이상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문제인가, 아니면 성경에 나와 있는 교회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교회라고 불리워지는 것이 문제인가
?교회라는 것이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취향에 따라 여러 가지 색조를 가질 수 있다. 하나의 틀로 고정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참 모습은 사람의 취향에 따라 변질되지 않는다. 계시가 하나이므로 하나의 교회상이 정립되어야 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주장은 참으로 위험한 논리이다.
"결국 초대 교회 시대의 믿음은 예수의 절대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전제로 한 것이었고 교회 공동체에 의해 철저히 검증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문제였을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관련된 사회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가 갖는 믿음 역시 사회적인 성격을 수반한다." (8페이지 위에서 10째 줄-14째 줄)
왜냐하면 그 시대, 그 사회의 신앙 공동체가 규정한 예수의 모습은,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늘 왜곡시켜 왔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적인 문제였을 뿐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였던 것이다"라는 주장은(8페이지 밑에서 4번째 줄), 개인과 사회의 불분명한 경계선을 전혀 고려치 않은 주장이다. '개인'과 '개개인'과 '개개인의 모임'과 '사회' 사이에 무슨 차이가 나는가
? 개인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었다고 그 가운데서 비개인적인 요소가 새로이 창출된다고 보는 것은, 관찰자의 과도한 기대 심리로 인해 허구적인 결과를 역으로 대입해서 나온 경우에 불과하다. 개인적인 신앙에 국한되느냐 아니면 사회적인 신앙으로 확대되어 가느냐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가 아니라, 죄가 무엇이냐를 성경은 말하고 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바로 사회문제나 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 연구를 해야만 한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를 두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앙을 가지거나 구원받거나 천국 가거나 교회를 세우거나 할 그 어떠한 자격과 권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죄로부터 실마리를 풀지 않고 단순히 미흡한 교회를 제대로 된 교회로 전환하려니 그 파라다임 자체도 바로 죄 밑에서 꿈틀거리며 요동하는 괴물적 사고일 뿐이다.
계시 중심의 신학이 되지 못하고 교회 중심으로 전개되는 신학은 아무리 이리 저리 성경을 탐구한다 할지라도 죄의 왜곡된 결과에서 탈피하지 못한다. 오직 인간들의 스스로 순수하다고 여기는 나름대로의 이상적인 교회상을 변명하기 위해 동원된 거짓된 각자의 해석만이 난무할 뿐이다. 정말 성경을 제대로 보려면 먼저 참된 교회의 증인이 되려고 하지 말고 참된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고 해야 한다. 환상과 환각에서 깨어나는 것을 가장 크게 방해하는 것은, 자신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무슨 의미나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주기철, 한경직, 옥한흠, 홍정길, 하용조 이런 자들이 단순히 목회에 실수한 자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한 번이라도 무가치한 사이비 목사라고 생각해 본 적 있는가
? 이들의 공통점은, 완전한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완전한 교회되기에 정신이 팔린 자들이다. 자신의 순교와 희생으로 교인들에게 본을 보여 완전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자들이다. 교회의 책임자 되시는 주님을 교묘하게 모독하는 현상이다.
생각해보라. 종말 때 민중들이 하나님을 원한다고 과연 참 하나님이겠는가
? 예수와 교회를 원한다고 참된 예수와 교회가 되겠는가
?제발 한국에 교회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전혀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바로 교회 같지도 않는 교회에서 오직 예수님만 고집하다가 고난받고 핍박받는 참된 성도들이 눈에 뛸 것이다. 하나님이 남기신 분들이다. [교회 사역 연구소]는 이들을 봉사하는 모임이어야 한다.
자료 2.
운동으로 시작된 복음이 기존 질서를 파괴하면서 사회 개혁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국내 교회사나 서양 교회사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동시에 복음이 지나간 이후 곧장 세속화되는 현상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권력에 편승하여 지배 계층으로 부각되려는 유혹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권력화된 복음의 이름으로 도리어 복음이 핍박을 받는 지경에 이른다. 복음 때문에 순교했다는 그 내용을 기반으로 해서 돈과 명예에 집착하려는 집단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박건택 교수의 주장은, 간단히 말해서 복음의 증인이 되지 않고, 복음의 증인된 적이 있는 역사의 증인으로 나타나려는 것이 기독교의 세속화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또다시 급진적 복음 운동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한국 교회사를 단순히 긍정과 부정의 두 측면으로 나누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도 얼마든지 부정적으로 변모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운동 그 자체의 본질에 기인된 것이지 아니면 복음 그 자체에 기인된 것인지를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있다. 즉 복음 운동 말고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반적 문화 운동들도 같은 현상을 이끌어 낸다면 복음 운동 나름대로의 특수성이 불분명해지는 것이 아닐까
?성경 속의 역사는, 단순히 긍정과 부정의 이중 구조로 나타내는 것도 아니요 박 교수의 논리의 틀처럼 긍정적인 운동이 곧 얼마 안가서 세속화되는 것도 아니라 처음부터 부정적인 운동으로 나타나서 그 부정의 정도를 더욱 강화되는 쪽으로 흐른다. 즉 박 교수는, "처음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은 복음이었다"라는 전제를 놓고 시작하는데 이러한 전제는 현재 한국 민중이 복음을 알게 된 그 바탕을 과거 긍정적 역사 운동에다 근거를 두려고 애쓴 결과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사 초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성령 운동은, 참다운 성경적 성령의 사역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반성의 기회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즉 은혜로서 죄를 극복하는 용서의 영이란, 결코 화려한 사건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그늘에 묻혀서 발생하는 조그마한 사건에 불과하다. 박 교수는, 복음을 운동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연속성을 강하게 어필하는 셈이 되었다. 그러나 성령의 활동은 늘 불연속성이며 단절되는 식으로 주어진다. 마치 1초에 수십번 깜박이는, 컨버트 조명 기구와 같다. 끊임없이 단절, 단절 사건을 유발하면서 택한 자만을 거듭나게 한다. 구원은 역사 속의 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서 성령을 통해 관장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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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페이지 밑에서 6째 줄부터 이런 말이 나온다. "이 글을 쓰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 편에서 독자적으로 계획되고 집행되었으며,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역에 의하여 그 결과가 현대인에게 적용된다 할지라도 그냥 하나님의 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격과 그 인격체가 만들어 내는 삶의 모든 유형에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구원의 결과, 효과 혹은 신적 사역의 인간적 흔적들을 다루려는 것이다." 본인은 이상의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된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이 글을 쓰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 편에서 독자적으로 계획되고 집행되었으며,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역에 의하여 그 결과가 오늘날 죄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의 증인으로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죄인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라 죄인을 통한 하나님 이름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죄인의 속성과 그 속성이 만들어 내는 죄악된 삶의 모든 유형에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죄인들에게 나타나는 구원의 결과, 효과 혹은 신적 사역의 희생적 흔적들을 다루려는 것이다."
정 교수는, 비록 본인은 인간을 죄인으로 간주하는 것을 기정 사실을 받아 드리고 그의 논리를 시작한다 할지라도, 죄인이라고 인식하는 것과 인간으로 인식하는 것 사이에서 그 어떤 신학적인 차이가 없다고 여기는 안일함이 그의 전체 논리 전개의 큰 장애로 등장하고 있다. 즉 죄인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은, 반드시 인간으로서 독자성을 주장하면서 그 독자성을 바탕으로한 '신종 예수 증인' 노릇하려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놓치고 신약 전체를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행함에 대한 부정적 견해의 바탕이 여기 있다. 이 독자성으로서 메시야에 대한 독자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이기에 메시야에 대해서 충분한 인식과 윤리적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 그 당시 예수님에 대적했던 자들의 사고 방식이었다. 이들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라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그들이 주장하는 죄인이라는 개념은, 믿음은 있으나 합당한 열매가 없어 하나님께 죄가 된다고 여기고 적절한 행함만 추가된다면 얼마든지 의인될 수 있는 바탕으로서의 죄인이다. 즉 지식으로만 죄인됨을 받아드리고 감정과 의지에 있어서는 의인 인체 하는 그런 인간들을 지칭하여 죄인이라는 것이다. 래서 그들이 이러한 신앙과 행위 사이의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율법으로 권면과 훈육을 동원하고 있고 시범도 보인다. 예를 들면, 자신의 죄를 위해 금식을 하는 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 제자들의 행함에 대해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마태복음 9:13-18) 이 본문의 끝 부분을 주목해 봐야 한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질서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 "손을 얹으면 낫겠나이다"라고 수용하는 것은 일방적인 주님의 긍휼 베품에 모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주님이 죄인에게 영향을 주는 긍휼의 한계를 인간이 복음의 실상을 드러내는 그 선까지만 다가 가게하고 나머지 믿음부터 행함들은 이미 거듭난 본인의 몫으로 남겨 놓는다. '믿음' '경건' '제자로서의 따름' '지식 확보' '영접' '열매 맺음' '행함' '거룩한 삶에 대한 의무' '복종' '은혜에 대한 응답' 같은 것으로 표현해 놓고 있다. 그리고 24페이지 위에서 9째 줄부터 중간까지에는 다음과 같은 단호함 주장도 보여준다. "예수님의 구 속의 힘이 하나님의 택한 사람들에게 그냥 -그들이 아무 것도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의 어떤 움직임도 없이 자동적으로- 적용되는 그런 방법은 없다. 어떤 사람은 불행히도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버림을 받지만,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이를 알리는 복음은 이를 수용하는 인간의 반응과 뗄 수 없이 관계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의 역사는 그 전체가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인간의 반응이 전혀 불필요했다면 하나님의 일을 인간에게 알리실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 이런 관점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일을 안다는 것이나 모른다는 것이 무슨 차이를 만들어 내겠는가
? 하나님의 일을 전하고 듣는 구차한 과정이 없이도 구원은 신의 세계에서 신의 의도요 방법에 의해 이미 결정되고 적용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사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영생과 영벌이 신적 법칙에 의하여 집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의 방법이 아니라 결정론 내지는 숙명론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소위 말해서 반응론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선택된 자냐 아니냐를 유대교인들과 같이 인간 쪽에서 추스릴 수 있는 반응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밑으로 7번째 줄까지 내려가면 "하나님의 일을 하시면서 왜 자신의 일을 인간에게 알리셨는가
? 신학에는 신의 존재와 신의 일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일도 포함된다." 결국 정 교수의 논리는, 신의 일과 인간의 일을 따로 구분 지으면서 이 논리에 따라 덩달아 인간들의 믿음과 행함도 구분 지어 놓고 있다. 즉 인간의 반응을 하나님의 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반응은 어디까지나 순전히 인간이 책임져야 될 인간의 몫으로 따로 떼어놓으려고 애를 쓴다. 정 교수는 왜 이런 노력을 하려고 하는가
?24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에 그 이유가 잘 나와 있다. "우리는 행위의 신학적 가치와 그 구원론적 역할을 이렇게 우리가 알 수 있는 경험과 인식의 세계에 나타나는 인생의 한 진실 된 부분으로 긍정하고 연구하려는 것이다" 즉 그의 주장의 취지는, 하나님의 일을 인간들이 주위에서 경험될 수 있고 인간들의 상호 격려와 권면으로 성취할 수 있는 행함의 차원으로 전환시켜 보자는 것이다. 그의 이번 글에 성령의 적극적인 개입에 대해서 일체 말이 없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원의 주도권자를 성령에서 인간으로 돌려놓아야 비로소 사람들이 제대로 선한 행함을 요구할 수 있는 동기 유발이 된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즉 종말 때에는 새언약에 의해서 성령에 주도권이 있다는 점을 정 교수는 도외시한다. 30페이지 위에서 11째부터 14째 줄까지를 보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태복음 28,19) 에도 믿음의 우선성이 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지키도록 권하기에 앞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인데,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누가 세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 행여 받았다손 치더라도 그 세례가 무슨 효력을 내겠는가
?" 라고 되어 있다. 정 교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름이 거론되면 하나님이 직접 적극적으로 개입된다는 사실을 정교수는 모르고 있다.(출애굽기 20:24) '하나님의 이름'이 하시는 작용보다 죄인의 믿음에 우선권을 주고 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에서 '되리라"라는 말을 마치 의무나 명령인 것처럼 여기는 처사와 같다. 말씀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역사 안에서 응해지고 성취되어진다는 그 자체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정 교수 논리의 치명적인 허구성은,"나는 반드시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권리가 인간에게 당연히 주어져 있는 것처럼 알고 있다는데 있다. 또 그 구원받은 결과를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을 할 수 있겠다는 사고 방식을 지니고 있다. 정교수는 죄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바로 자기와 같이 생각하는 그것이 불신의 세계에서 튀어나오는 반응이며 열매인 것이라는 점을 모른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라디아서 3:1) 죄악된 신앙이냐 참된 신학이냐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부터 출발해서 십자가로 돌아가느냐 딴 길로 새느냐에 달려있다. 인간이 메시야를 영접 안해야 비로소 죄인이 되고 죄를 지을 때에 비로소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전 세계가 죄 아래 있기에 날마다 십자가로부터 틸피하여 독자적인 윤리적, 종교적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그 성향을 늘 드러내게 되어 있다.
십자가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인가
? 그것은 인간들 속에 이미 다른 메시야 상이 자리잡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 가짜 메시야의 모습은, 하나님은 마치 인간을 구원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마땅하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반응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반응들을 줏어 모아 그 반응에 유사하게 접근하므로서 하나님께 구원받고 바른 교회로서 복받자는 시도 이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모방과 능력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재대로된 반응은 오직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상한 심령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고 날마다 회개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만이 하시지 죄인은 해 내지 못하고 또 해낼 자격권 속에 들어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주님이 이르키는 반응에 대해 마귀는 얼마든지 흉내내고 모방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일으키는 반응은 오히려 이러한 세상적 메시야관과 종교관과 교회관과 구원관에 대해서 낱낱이 정죄하고 고발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9) 십자가를 가지고 계속 세상을, 죄인들을 이리저리 못살게 쑤셔 대는 반응뿐이다. 창으로 찌르는 분이 잘나서 구원되는가 아니면 찔림 받은 죄인이 훌륭하게 반응을 보여서 구원이 되나
? 정 교수는, '동행'이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 둘 다 주체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상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쪽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의 주도권을 인간에게 넘겨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선택론에 대한 이해도 분명히 해야 한다. 반응론으로 점검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확인되어 진다는 사실이다. 즉 소위 구원받았다는 자들의 반응들을 조합해서 선택론을 구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그냥 선택론이 선포될 뿐이다. 이해되는 자와 안 되는 자는 그 때 그 때마다 구분되어 진다. 이해 안되는 자를 억지로 이해시키는 것이 복음 선포의 취지가 아니다. 성령님이 약속에 따라 택한 자만이 구원될 따름이다.
정 교수는, 인간이 가만있어도 죄인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을 공격하려 오신 메시야의 무기에 대해서 어둡다. 계속 인간의 몫과 가능성을 챙겨 가지고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하려 하고 있다. 하나님의 원수는 바로 인간 그 자체였다.(로마서 5:10) 마귀와 함께 노니고 있었다.(고린도후서 4:4) 다른 메시야를 구상케 한다. 바로 이점을 가지고 성도는 싸움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정교수의 싸움은 자기가 자기 지키기 싸움이다. 하나님 전쟁이 아니라 자기에 관한 전쟁이다. 즉 인간의 노력을 보태야만 비로소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예수상을 가지고 마귀로부터 독려 받는다. 정 교수는, 참된 제사가 상한 심령이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시편 51:17) 정 교수가 왜 하나님의 능력을 이토록 무시할까
? 그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이사야 6:5)라는 고백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2) 사도 바울이 과연 행함이나 윤리를 몰랐을까
? 아니다. 왜 그러면 이 말을 하는가
? 그것은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