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탄
공격 21: 내가 구원받았는지 아니 받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답변 21: 본인이 구원받아 챙겼다는 즐거움 보다 예수님의 피의 효력을 증거하는 것이 더 즐거운 사람은 구원받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공격 22: 남이 구원받았는지 아니 받았는지 어떻게 장담합니까? 무슨 자격으로, 무슨 권리로?
답변 22: 참으로 구원받은 자는 자신의 어떤 행함도 그리스도 의 앞에서 ‘의(義)’가 아님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이단들은 누가 이단이라고 지적해서 이단 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스스로 “나는 십자가보다는 행함이 중요하다고 본다”고 큰소리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3-4)
공격 23: 모든 교회가 다 나쁜 교회가 아니라 그 중에서는 말씀대로 살려는 참된 교회도 있는데 어떻게 전체 교회를 한꺼번에 매도하느냐?
답변 23: 전체 교회는 하자 없이 완벽하고 완전합니다. 피로 용서를 받고 사랑과 은혜를 계속해서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완벽한 전체 교회는 놔두고 이 세상에서 따로 ‘우리들만의 교회’, ‘특정 건전한 교회’를 따로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경적 교회관에서 이탈되어서 소유성을 유감없이 노출시킨 바가 됩니다. 따라서 질문 속에 등장되는 ‘그’ 교회 개념은 이미 이단적 교회관에서 나오는 교회상입니다.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이니라”(엡 4:5)
공격 24: 목사가 부지런히 교인들을 돌보고 교인들도 교회 일에 열심내면 사람들이 모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복음만 외친다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모이지도 않는데 복음만 연구하고 성경만 연구한다고 교회가 되겠는가?
답변 24: 구원될 자와 교인하고 혼동하면 안됩니다. 교회가 사람을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대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하나님의 부르심’의 원리에 부합되도록 만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복음작업에 손실이란 없습니다. 축구 선수 22명을 이미 정해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유니폼을 22벌을 장만하는 겁니다. 따라서 ‘부르심’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까지 모집에 나서기 위해 복음 외의 것을 미끼로 던지면 안됩니다. 그래봤자 결국에는 화를 내면서 교회를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개한테 진주를 던진 격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사람들 아부용이나 사정용이 아니라 도리어 도저히 건너올 수 없는 내용만을 전파하여 오직 성령 받은 자만이 육에서 영으로 넘어오게 하시는 방식을 하나님을 사용하십니다.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기에 성령님은 십자가 중심으로만 전도하십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2-5)
하나님의 뜻은 사람 모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해놓은 자=성도’로 역사 속에 등장시켜서 모든 구원이 오직 ‘주님’ 혼자의 작업임을 온 우주에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노아가 큰 방주 만들어놓고 달랑 자기 식구 8명만 구원시켰다고 주님한테 책망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자기 식구만 구원하기 위해서 노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통제받아야 했고 동행 당하며 감시받아야 했습니다.
공격 25: 하나님은 일을 하셔도 ‘인간을 사용해서’ 일하신다. 따라서 ‘사용하는 인간’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일 자체도 전면 부정하고 매도하는 것이 된다. 이 매도에 어떻게 책임 질 것인가?
답변 25: 하나님은 인간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부터 사용당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는 주께만 범죄했습니다.”(시 51:4) 여기서 말하는 ‘죄’ 개념은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기준으로 나타남에 새롭게 파악되는 죄입니다. 그 반응이 곧 “나는 주께만 범죄했다”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성도는 이것을 ‘인간 매도’라고 보지 않고 실제 사실로 봅니다. 그동안 인간은 바로 감당하기 힘든 이 죄 세력에 둘러싸여 살아온 것입니다. 이 현실을 분명히 드러내려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증거입니다. “너희들의 죄가 나를 죽였고 나는 너희들의 의를 위하여 살아났다”고 말입니다.(롬 4:25). 그래서 오직 죄와 의의 만남이 하나님의 일의 전부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공격 26: 인간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구원받고자 노력하는 것이 왜 죄며 나쁜 짓이냐?
답변 26: 인간의 노력은 나름대로 틀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 틀에 맞추어서 천국도, 구원도, 부활이 세계를 구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성령 받아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성령받기 전에 육으로 있을 때 상상했던 그 틀 속에서의 천국이나 구원이나 부활의 세계가 참된 천국이나 부활의 세계가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구원을 받겠다고 내민 빈 그릇 자체에 구원이 담길 수가 없었던 겁니다. 구원은 도리어 그 빈 그릇마저 부셔버립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해서 그 내려놓은 자리를 예수님께서 선한 것으로 인정해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되는 겁니까? 로마서 9:25-26,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원칙을 실행하시는 겁니다. 인간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함의 결실로 구원되는 겁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5-6)
공격 27: 그렇다면 일단 구원받고 난 뒤에는 행함을 주장할 수는 있는 문제가 아닌가?
답변 27: 구원이란 획득하여 소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말씀의 지배하에 들어가기에 지속적으로 말씀의 취지로부터 지적을 받게 됩니다. 즉 처음부터 너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즉 늘 ‘무익한 종’의 자리가 곧 성도의 자리임을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의견 28: “나는 무가치하다 나는 무익한 종이다”하면서 결국 주장하는 것은 제각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변 28: ‘무익한 종, 무가치함’을 자기 안에 담아 두므로서 자신을 새롭게 가치 있는 존재,유익한 종으로 탈바꿈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어떤 요구도 다 수용할 테니 제발 이것만큼은 건드리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나의 마지막 마지노선입니다”는 내면의 아우성이 있습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나도 스데반 집사처럼 돌 맞을 각오되어 있다.”를 수 천번 고백하면서 기이어 ‘나 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최후의 자리만은 멈추지 않고 계속 형성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목사 같으면 “적어도 나에게는 150명 정도의 교인이 있는 교회를 가져야 내 실력에 맞는 합당한 목사답다”는 기대치가 있을 것이고, 몸이 아픈 교인은 “누구처럼 그 정도로 건강해야 나의 믿음생활에 합당한 보상이 된다”고 여길 것이고, 또는 “내 학력이나 내 부지런함이나 나의 착함에 합당한 한 달 수입은 적어도 이 정도 되어야 합당하다”고 하면서 자기 가치와 자기 유익함을 챙기게 됩니다. 또한 “자식만큼은 이 부모 마음의 속을 썩히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다 뜯기고 그나마 남은 나의 겨자씨만한 희망과 소망은 나의 자식 잘되는 것 뿐이니까. 자식이 잘될 때 비로소 나는 나다움을 느끼겠다”는 포부를 챙깁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이라는 굴착기로 말씀을 가지고 그 ‘가치 있음’과 ‘자기 유익함’을 생산하는 현장으로 매일같이 파 들어가십니다. 거기에는 선악과 의식이 자리잡고 있었고 악마가 활동하는 자리로 발각 당하게 됩니다. 결국 ‘나 다움’이라는 것이 악마가 계속 조성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성도라면 이 ‘막살고 있는 사실’을 설교단이나 어느 자리에서도 인정하면서 “오직 피 뿐임”을 증거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령받은 모든 사람들의 특징은 “막 살아온 자아+피”만을 증거하기에 제각각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공격 29: 복음을 알아도 율법 안에 들어 있는 도덕법은 계속 지켜야 한다. 율법에는 할례 같은 의식(儀式)법이나 제사법은 신약 때는 안 지켜도 되지만 도덕법만은 성령의 도움으로 완성해야 한다.
답변 29:율법에는 도덕법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율법에서 도덕을 따로 분리해내고자 하는 것은 어쨌든 의(義)를 얻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는 할례에서도 얻어질 수 없을뿐더러 할례 이외의 그 모든 율법을 통해서도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할례란 단순히 도덕법이나 제사법과 분리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법이 아닙니다. 도리어 모든 율법이 이 할례에 집결됩니다. 그것은 모든 율법이 오직 할례 받은 사람을 위해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할례를 거부하는 것은 할례법 말고 다른 법은 유효하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새로운 신분자를 새롭게 창조했다는 겁니다. 율법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피조물을 말입니다. 그래서 할례의 반대는 무(無)-할례가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는 곧 율법으로서는 아무리 해도 하나님의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십자가를 통해서 확정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공격 30: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행함에 나서야 한다. 만약에 계속 말씀을 실천에 옮기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속에서 달성할 수 없다.
답변 30: ‘하나님의 형상’은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담을 그릇을 스스로 만들어내십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오직 성도 안에 그리스도만이 존귀히 되는 식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말은 곧 성도가 따로 갖고 있을 능력이나 재주나 주특기나 의로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내가 가진 나의 하나님의 형상’은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실천의 증거요 열매이지 결코 자기의 실천력의 실적이요 업적으로 남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결론:
복음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도 닦는 사람’으로 어느새 변모되어 있다는 점이다. 불교는 성령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을 신으로 바꾸어 보는 일과 관련 있다. 온갖 좋다는 말씀과 귀하다는 말씀과 스스로 깨달은 말씀을 집대성해서 자신을 신으로 점차 변모시켜 나가기에 그 특징은 “날 건드리지 말라. 그동안 공들인 것이 얼만데!”라는 의식을 버릴 수 없게 된다. 즉 ‘나는 신이니 날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개혁주의신학’의 모토이다. 이 신학에 토대 위에 오늘날 교회라는 것이 운영이 된다. 왜냐하면 모두들 이 힘든 극한 상황에서 어쨌든 홀로 신이 되고 싶어 환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각자 마음속에는 악마의 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마다 목사들은 다음과 같이 외친다. “저의 교회의 지시에 따라 주시면 아무리 악한 여러분이라 할지라도 ‘선한 신’으로 변모되고 덤으로 세상 축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은 기본이고요!” 이것이 종교 사업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십자가 앞에 서면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의 앞에서 죄인이며 저주받아 마땅하다”라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노릇이다. 복음은 어디까지나 예수님 본인 생각이요 구원도 어디까지나 순전히 하나님과 예수님 몫이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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