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형식]-송민선 성도님의 글

[텅빈 형식]-송민선 성도님의 글

조선 시대에 양반 가문에서 대를 잇기 위해 대리모의 몸을 빌려 아이를 낳는 풍습이 있었다. 영화에서 한 감독이 이런 풍습을 남아선호사상을 넘어서서 태가 죽은 이를 위해 산 자가 희생되는 악습으로 규정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극 중에서 어미가 자신처럼 대리모가 된 딸에게 이런 충고를 한다. ‘그 집에 가면 마당에 돌멩이 하나에도 정 주지 말어’ 아기를 낳는 기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신들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알기에 딸이 받을 고통을 예감하며 물체 하나에도 마음을 주지 말라는 어미의 말이 차라리 ‘그냥 숨을 쉬지 말어’라는 말보다 혹독하게 들린다.


뭣도 모르고 대리모로 떠난 딸은 남자의 씨만 받아서 잉태된 아이를 잘 낳아 배출시키는 역할만을 하도록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았고 중간에 결코 정분이 새지 않도록 철통같이 관리받지만 그게 인력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돌멩이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과 바꿔야 하는 상대를,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남자와 그 결실인 아기와의 단절을 겪으며 결국 자기사랑에 실패를 경험했고 그 공허함을 다시 메울 능력도 없었고 실패를 마땅함으로 받아들일 능력 또한 없었기에 극단적인 결정에 몸을 던진다. 힘이 없어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든지 아니면 힘이 있더라도 스스로 버려서 자신을 비우려고 안간힘을 쓰든지 결국 아담의 세계에 태어난 이상 아무도 자기의미가 제거된 텅 빈 형식을 만들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다.


이 세상에 출현해서 자동으로 죄인의 반열에 합류하는 자들에게 무덤으로 들어가기 전에 만날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은 자기숭배의 순환고리가 끊어지고 자기애를 찢고 나온 생명의 능력이 육체를 빈자리로 유지되도록 쉬지 않고 죄인으로 만드시는 새로운 순환고리로 편입되는 것이다. 나의 지각과 이성에 실패하고, 나의 예측에 실패하고, 나의 계획에 실패하고, 나를 사랑하는 것에 실패하게 하는 절차의 반복 속에서 한껏 죄가 쏟아져나오지만 나를 단속할 수 없는 것이 복인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약간의 피곤함과 세상에서 겪어야 할 부끄러움과 고난이 보너스로 주어 지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오늘을 살 가치가 없음을 분명히 해주시기에 금세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가 되고, 가치 없기에 살리셔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생명만 증거되게 하시는 주의 업무를 소급해서 보며 따라간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움직이고 말하는 하나하나가 나를 위한 이기심을 맘껏 발휘하며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착한 일을 하고, 남을 위해 희생도 한다. 걸음걸이나 물 한 모금 마시는 사소한 것부터 목숨을 내놓는 일까지 일거수일투족 조심조심 나의 열매를 얻을 때까지 심혈을 기울이면서 내가 만든 믿음의 정상에 올라서서 미소지으며 내뱉는 한마디는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주재이심을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어 십자가에 피 흘려주신 덕분입니다. 다 주님의 공로입니다’라고 할 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세계를 알 수 없기에 너는 우상숭배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라는 돌멩이가 날아와 내 안에 조심조심 쌓아 올린 믿음을 ‘없음’으로 만들 때, 다시 메울 힘을 공급해 주는 흑암의 권세를 의지하여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세계를 알기 위해 나의 믿음을 다시 쌓는 방향과 나를 향한 절절한 사랑에 실패한 것이 기적임을 알게 하는 능력에 힘입어 공백이 다시 메워지지 않도록 어린양의 죽음으로 꽉 채워져서 어디로 굴러가든지 육체에 들러붙는 모든 것들이 강력한 우상성을 발휘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갈라진다.


너무 역겨워 눈 돌리고 싶은 절망적인 죄가 황홀하면서 경외로운 보혈의 의로 덧입혀지며 떼굴떼굴 구르는 삶을 죄인의 하루라고 부르지 않는다. 안에 꽉 채워진 죽음의 동력으로 움직이면서 죄인을 감싸는 피가 만들어내는 생명의 하루라고 말한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을 때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는 순간 장모가 나아서 움직인 것이 아니다. 주님의 손길이 닿는 순간 병에 걸려 시체처럼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이 자신인 것을 알게 되었기에 그제야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죄의 열병을 대신 가져가신 분에게 있음을 보이는 행위가 예수께 수종을 드는 모습이다. 무의미한 것을 들어 쓰시니 사용하시는 분의 긍휼과 은혜만 높임을 받고 ‘나’라는 덮개가 치워지니 생명의 활동성만 돋보인다.


하나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건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거짓 조작이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증상 자체가 우상숭배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 온통 애굽 땅이고 애굽 사람들뿐인 곳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할 백성이 태어날 때, 사람이 육체가 되었기에 결코 함께하실 수 없는 진짜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기적같은 현상은 마치 물이 칼로 잘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결코 틈이 유지될 수 없는 사이, 하나님과 육체 사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죽음으로 채워져서 갈라진 채로 유지되는 것이다.


저주 속을 비집고 틈에 거하는 모습을 세상에서는 어리석다고 말한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에서 모세와 선지자들과 사도들로 이어지는 성도들의 어리석은 행렬을 성경은 믿음의 행진이라고 부른다.


향수를 예수님께 쏟아붓는 마리아에게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도와주지 않고 어찌 허비하느냐, 지금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데 가진 것을 유익하게 쓰지 못하고 한 사람에게 다 쏟아버리느냐”라고 그녀를 괴롭게 한 가롯유다 또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참, 어리석다’


인간 속에서 본능적으로 나오는 방향성은 인간 존엄성이고 그 존엄의 궁극적인 지점에 나의 안전과 생존이 있다. 인간은 귀하다는 말은 그러니 나를 귀하게 여기라는 말이고 나의 이성과 판단과 가치를 무시하는 ‘한 분만 인간이고 한 사람만 귀하다’라는 복음을 듣고 그 안에 내가 배제되었기 때문에 내면의 궁핍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내세우는 숭고한 자기방어책이 만인은 평등하고 인간은 귀한 존재라고 우기기다. 그는 한 번도 이런 정의로운 사고가 예수님을 무참히 살해하는 죄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마리아의 방향성은 세상이 흘러가는 쪽이 아니었기에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유일한 한 인물이 있는 쪽으로, 그분이 가는 길로 합류되는 증상은 나에 대해 아낌이 없고, 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님 공로의 충만 속에서 나를 찾을 수가 없는 상태로 드러난다. 마리아의 눈에는 그분만 보였고 예수님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향유를 깨뜨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명한 실존에 흠이 되는 내가 걸리적거리니 주체할 수 없어서, 쏟아내고 싶은 충동으로 한 것이다. 그 충동적 사랑의 출처가 되시는 분을 보며 드디어 자신을 던져버릴 자리를 마련해주신 주님이 너무 고마워서 미련 없이 했다.


설거지하는데 포개진 그릇이 아무리 애써도 분리가 되지 않는다. 미끄러운 세제를 더 묻혀보기도 하고, 무식하게 힘으로도 해보다가 검색을 통해 정보를 습득한 뒤 과학적 방법을 시도해 본다. 뜨거운 물에 담가 놓고 위쪽에서 차가운 얼음물을 부어 수축팽창의 원리를 적용해 보았지만 결국 분리가 안 돼서 버리게 되었다.


홀로 있지 못하고 찰싹 붙어 둘이 하나가 되어 더 이상 나의 세계에서는 쓸모없는 그릇들을 보며 신랑으로 말미암아 생산되고 빚어지는 신부와 신랑이 혼연일체 되어가는 모습에 가만있지 못하고 별짓 다 하며 분리해보려는 악마의 용쓰는 모습이 그려진다. ‘미쳐있지 말고 너의 정체성을 찾아. 너를 보호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이러다 진짜 망한다...왕왕왕~’


둘이 포개져 있는 그릇을 그대로 쓰면 된다는 생각을 못 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나의 속성과 맞지 않으니 그냥 불편하고 싫을 뿐이다. 원래부터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더 편하고 익숙하다. 누군가와 몸이 함께 있더라도 심리적 거리를 만들어내며 어떻게든 홀로 있음을 유지한다.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누군가가 들러붙어 나의 존재감을 희미하게 만들려고 하면 얼른 뭔가를 더 채우고 자신을 둘러쳐서 절대 포개지지 않도록 자신의 성과와 공로로 사이를 채우며 부지런히 움직인다.


더 가관인 것은 나만 홀로됨에 도전하는 타인의 홀로됨을 불쾌하게 여기는 더러운 속성까지 품고 있으니, 예수님 안에서 스스로 계시는 분의 이름이 작동될 때마다 가롯유다 안에 마귀가 발작을 일으켰듯이 홀로 주인공이신 주의 이름이 효과를 발할 때마다 내 안에 역겨운 죄의 실체가 저항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내가 나를 상실하게 할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되고 주님이 오셔서 너무도 소중한 나를 뿌리째 흔들어서 뽑아버리고 휑한 빈 구멍으로 만들어서 내가 찾지도 않은 진리를 그 안에 채우시는 예수님의 노동에 숟가락 슬며시 얹으며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둥, 착하고 바르게 살았다는 둥, 힘든 삶을 사는 나를 주님이 돌아보셨다는 둥, 이러쿵저러쿵 사건의 원인을 잡아당기며 끼어들 수 없다.


주님의 사랑만을 갈급하는 마음으로 버리고 비우려 해도 낯선 사랑을 담을 공간을 내가 만들 수 없는 한계를 보게 되고 다 버려도 버리려는 그 마음을 버릴 재간이 없는 나에 대한 공포스러운 집착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아서 지옥에서조차 나를 위한 생각만 하는 부자의 마음이 내 마음이다.


이렇게 죽은 티 제대로 내는 죄인 역할을 주의 엄중하신 심판의 바탕 위에서 펼치게 하실 때 고달파도 기쁘고 고맙기만 할 이유는 빌라도가 물어도 주께 듣지 못했던 진리를, 지혜자들이 얻고자 하여 부지런히 연구하고 찾아도 찾지 못했던 진리를 구하지 않은 자에게 채워버리시는 주님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부르심이 사랑인 줄을 믿게 되기 때문이다.


잠시의 평안이 찾아올 때 이렇게 편히 있어도 되는 건지, 주님은 일하시는데 아래 것은 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일과 말씀 우선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율법이 튀어나오며, 마치 자신이 주의 일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의 일과 주의 일을 구별하는 자의식이 튀어나올 때, ‘나만 남았습니다’보다 더 교만한 생각이 ‘나는 신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토악질이다.


주인이 하인에게 하나도 진지하지 않은데 혼자 심각하며 자신에게 진지해 있을 때 ‘너도 남아있을 필요 없음을 알 때까지 철저히 몰아세워 줄 테니 기다려봐’라는 성령의 냉정한 책망과 함께 소 몰리듯 밀려가면서 나에게 무가치한 육체의 움직임만 남기시고 머리 되시는 분이 따로 계셔서 살려내시고 길러내시니 나는 애초에 살아있을 필요가 없음을 알고 모든 것에서 손 떼는 자유를 맛보게 하신다.


이미 끝났고 불심판이 예비 된 이 세상에서 다급한 주의 마음에 동일시되어 세상이 옷깃을 잡아끌면 옷을 벗어둔 채로 도망하고 나를 위해 쌓은 정든 안락함을 뒤로 한 채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지런히 도망치며 심판의 날을 몸으로 보이게 되는 것 외에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루하루 즐기는 것은 성도의 몫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 신나게 즐기시는 것이기에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즐거움과 감사가 나오며 바보처럼 웃게 되지만 그건 내 몸 편해서 나오는 나를 위한 감사가 아니라 주의 뜻대로 주님에게 모든 것이 돌아가는 것이 기뻐서 나오는 주님을 위한 감사와 기쁨이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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