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은혜 - 새순교회 이능우 집사님 글
주님의 은혜 - 새순교회 이능우 집사님 글
십자가의 사랑은 죄인에게는 참으로 낯선 사랑으로 다가 옵니다.
그 사랑은 섬김과 희생으로 다가 오니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죄인을 위해 대신 희생하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는 것을 사랑이라 합니다.
그러니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요일4:18).
두려움이란 자기가 주체가 되어 있을 때는 모든 일을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책임지고 처리 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항상 부담감을 안고 어떤 공포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 공포의 끝자락에는 보이지 않은 주님의 심판이 능력으로 늘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나라는 주체가 상실 되었기에 자기가 책임질 일은 없습니다.
애당초 이 세상에서는 자기 것이라고 여길 것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배후에 보이지 않은 어떤 세력에 의해 단지 그렇게 느끼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부터 보이지 않은 어떤 두려움 속에서 끝임 없이 자기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려는 강박감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늘 결핍 속에서 불안을 느끼면서 보이는 것에 성공과 실패를 논하고 살고 죽고 하는 문제에 매달리며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양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육을 가진 죄인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늘 죽음의 실체를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 그 이루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기에 이 땅에서 성공하고 실패하고 죽고 살고 하는 일들이 큰 의미가 없으며 문제가 되지를 않는 모습으로 살아 갈 것입니다.
자신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기에 모든 것은 주께서 그때그때 주시는 대로 살아갈 뿐이며 생명에 말씀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더욱더 알아가기만을 소원 할 것입니다.
즉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은 더 큰 주님의 영원한 나라가 있음을 알고 믿었기에 말입니다.
이 받은 사랑을 통하여 남에게 굳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필요도 없으며 보이는 세상 것으로 아옹다옹 다툴 필요도 없으며 그저 복음의 기쁨 속에서 가끔씩 느끼는 사랑으로 봉사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완료 속에서 살아가는 자와 항상 미완료 속에서 살아가는 자의 삶은 주님의 주시는 은혜가 그 사람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에서는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사랑이라 말씀 합니다(고전10:24,11:33,13:5).
즉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해 희생하시는 주님의 희생이 자신 속에서 사랑으로 봉사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성경에서 사랑이란 우리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 아들이 화목제물로 죽으심을 이야기 합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써 성령님을 통해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순간순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죽으심이 아니면 죄인의 죄가 용서 받지 못하기에 반드시 죽으심을 통해 대속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며 오직 생명책에 녹명된 자에 한해서만 긍휼의 혜택을 입을 뿐입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즉 사함이 없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죄로 인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죽은 후에는 영원한 저주의 불속에 들어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히9:27)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모든 인간을 심판하기 위한 근거가 되며(행17:31) 피 흘리심은 자기 백성을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여 구원을 이루기 위함입니다.(요일1:7)
이렇듯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통해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 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 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 사회에서 통용 되는 사랑이란 어떻게 표현 합니까?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이성간의 사랑 형제 이웃 간의 사랑 등은 모두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탐욕에서 발생된 것으로 자기 자신에게 명예라든가 재물이라든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면 반드시 그 마음속에는 증오와 미움 시기 질투 울분 등의 육의 본능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라디아서 5:19-21)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배경에 감사키는커녕 하나님을 배척하고 원망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이런 것은 모두 자기 영광과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 속에서 일어나는 각종 더러운 것들 곧 탐욕과 탐심에서 비롯된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이 자신을 사랑함에서 빚어낸 우상숭배의 모습 일뿐이며 하나님의 진노만 있을 뿐입니다(골3:5).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은 십자가 앞에서 죄인 중에 괴수라는 모습으로 발각되어 들어 날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음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용서의 피가 아니면 필히 저주 받아 지옥가야 할 죄인임을 통탄 할 수밖에 없어 십자가에서 주님 홀로 이루신 그 의를 입혀 주시는 그 사랑에 감사하며 고맙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즉 주님은 죄인에게 사랑을 한껏 베풀어 주시고 죄인은 그 받은 사랑을 흠뻑 받아 누리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모습 이것이 사랑의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진정 이런 관계에 놓여 있고 이런 사랑을 맛본 자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삶과 모습이
뭐가 크게 문제가 되겠으며 현재 있는 바를 족하게 여겨라 하는 주님의 말씀이 은혜로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단지 원함은 말씀만을 사모하며 말씀만이 자신 속에 출렁거리며 말씀으로 인도 해가기를 소망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님은 십자가 마을의 싸이트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속성과 그로인해 죄의 종으로 전락된 인간들의 실상.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자기 아들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어떻게 심판 하시고 구원을 이루어 가심과 진정 생명이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이며 왜 주님은 이 땅에 오셔야만 되는지를 긍휼을 입을 자와 진노를 받을 자의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지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을 잘 증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대에 보여 줄 수 있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이고 축복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영생을 받기로 작정된 성도 외는 없으며 이러한 사랑을 입은 자는 어디에서나 어떤 형편에서나 주님이 주시는 귀한 십자가 복음의 증인의 도구로써 살아가는 것이 현재 받아 누리는 상급이며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숨겨진 현실.
감추어진 현실은 공개 될 자에게만 드러날 뿐 어느 누구도 이것을 눈치 챌 수가 없습니다.
감추어진 현실을 계속 감추기 위해선 하나님께선 지금도 부지런히 마귀를 사용하시며 눈에 보이는 허황된 꿈과 인간의 열심으로 자꾸 환상들을 이루어나가 그것에 몰입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을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날그날 주시는 그 은혜대로 주님만으로 소망하며 살아가는 그 모습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하박국의 고백이 생각이 납니다.
이 세상의 부귀 명예(종교) 권세 다 집어 치우고 이 죄인으로 인해 십자가에서 피 흘릴 수밖에 없으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사나 죽으나 주님의 지체로서만 고맙고 감사하며 살아가기만을 소원해 봅니다.
“비록 무화가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줄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