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만나는 것은 ‘아직 내 것이 안된 것을 갖고 있는 자’라는 인식으로 만나는 겁니다. 즉 ‘아직 내 것은 아니지만 언제가는 내 것이 되어야 될 것을 갖고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상대를 죽이고 그 상대를 갖고 있는 자리를 자기 자리로 넓히는 식으로 만나는 것이 실은 대인관계입니다. 쉽게 말해서 타인에게 명령하는 것은 살인 행위의 시작입니다. 타인은 나의 심심풀이 먹잇감입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가 나의 역사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이로서 명령한다는 것만 살인행위가 아니요 그 명령에 순종한다는 것도 살인행위입니다. 가르치는 것만 살인행위가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자도 언제가 스승행세하는 그 작자를 죽여버리겠다는 노림수를 품고 있는 겁니다. 아들을 아버지를 살해하므로서 아버지의 전부를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키웁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이미 아버지도 알고 있다는 점을 아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권위를 느끼게 됩니다. 스스로 만든 죄책감으로 인하여 아버지에게 순종합니다. 이 죄책감으로 인하여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쌓여갑니다. 즉 “당신 때문에 나는 당신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다 말이야”라고 말입니다.
부모를 인생의 라이벌로 여기면서 어느새 자식은 그 부모를 닮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회에 나가면 가정에서 부모역할하는 대상자를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익숙해져 있는 자기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제발 나로 하여금 나의 살인 본성을 유발시킬 유발자가 없을까?”를 찾게 됩니다.
그래야지만 자신의 살인본능을 속시원하면서 안들키게 행사할 장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 살인 본성의 구조로 짜여져 돌아가는 인간 구조 속에 예수님께서 '틈'이라는 양상으로 끼어드십니다. "날 죽여서 너희들의 가인의 살인의지를 발산하라"는 겁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죄의 권세에서 못벗어나기 때문에 악마에 매여사는 그 구조 자체를 그대로 예수님에게 퍼부어라는 말씀입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아벨'의 삶을 보이게 됩니다. 성도는 이 예수님의 인하여 강제로 '아벨의 삶'을 강요받은 자들입니다. '예수 안'에서 성도 자신의 삶이란 없습니다.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그 안에서 예수님은 날마다 성도에게 죽임을 당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에서 '대신 죽음'이라는 효능을가지고 성도를 매일 죽이십니다. 그래서 성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직접 사시는 방식'을 취하여서 '아벨의 죽음'을 세상에 퍼뜨립니다.
이로서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증인으로 세상에 나타나게 됩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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