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의 이 글로 기존 보수복음주의는 다...박살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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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21일   이 근 호 목사


Ⅰ. 결국 자기에게로 귀환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지킨다. 자기 존재에 대한 포기란 없다. 성경을 보더라도 자기 존재를 변명하는 선이해(先理解)를 갖고 다가선다. 자기가 자기를 살려내려고 한다. 여기서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신학이 나온다. 그러나 진정 성경이 인간의 이름을 위한 책인가 아니면 주의 이름을 위한 책인가?

인간은 파편적이고 분산된 이미지들을 결합시켜 수시로 주체를 형성해 나간다. 인간의 주체는 마치 스크린과 같아서 위에 지속적으로 그림들이 투영되고, 그 위에 덧칠되고, 반복해서 말소되고 다시 표현되는 각가지 환상들이 아른거린다. 아이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통해 아이는 비로소 자기 몸의 전체상을 지각하는 것처럼 파편화된 몸을 하나의 전체(통일성)로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성은 자기가 아닌, 자기 바깥의 모습을 통해 얻은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연이어 주체가 자꾸만 분리됨을 느낀다. 새로운 타자를 대하는 순간 자아는 지금까지의 자아를 새로 구성되는 자아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즉 자아는 그 자신이 아닌 타자의 자리에서 확인된다. 다시 말해 자아는 타자가 나에 대해 말하고 나에게 바라는 바를 곧 내 자신으로 확인(동일시)함으로써, 그리고 타자가 나에게 상징적 질서 속에 배정해준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일정한 자기 동일성을 획득한다. 자아는 먼저 자기의 내재성에 머물러 있다가 비로소 자아가 자아로서 형성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타자를 통해서 비로소 자아가 자아로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자아를 자아로서 구성하는 것은 곧 타자의 요구이며 타자가 나의 욕망을 부축이고, 일으키고, 나의 욕망에 일정한 내용을 부여한다. 법이라는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로서 의식된 자아는 타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만들어진 상징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러한 자아상마저 아무리 해도 그 막 너머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자신이 어떻게 볼 수 있는 막 너머의 세계가 있다. 그것은 외부와의 의사소통으로도 속성 수정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곳은 '아담 안'에서 구성된 보편적 인간성이 자리 잡고 있는 영역이다. 인간으로서 근본 한계 설정을 담당하고 있는 구역이다. 마치 사울이 본의 아니게 악신이 들려 다윗을 공격해야만 하듯이 이유 없이 무조건으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에 대해 불쾌감을 갖고 대적하고 싶은 품성에 들 끊고 있는 구역이다. 스스로 절대 자유를 누리는 신이 되고 싶은 영역이라서 신마저 귀찮아하고 거부하고 공격하는 싶은 속성을 드러내게 된다. 악마가 죽음을 가지고 인간에게 위협을 가하는 곳이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바로 주님의 이름이 인간의 근원을 노리고 공격하시는 곳이다. 바로 십자가 사건은 인간을 공격하기 위해 근거로 삼기 위해 보편적 인간성을 담보로 잡은 채 혈육(육신)에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합류하신 일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구약의 모든 말씀도 그 십자가를 위하여 전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에 거역하는 것이 어떤 사태를 일으키는지 실제 심판으로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가 또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가라사대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로 각기 살륙하는 기계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내가 본즉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 좇아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살륙하는 기계를 잡았고 그 중에 한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 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그들이 칠 때에 내가 홀로 있는지라 엎드리어 부르짖어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겔 9: 1- 8)

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진노로 심판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만드신 세상이 아니라 멸망당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유지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오직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공개된 바 있다.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더 이상 지탱한 모든 이유는 박탈당한 상태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어두움'을 건져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 세상이 과연 어두움인지 아니면 약간이나마 빛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하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 증거가 확실히 확보되어졌고, 또한 성령님을 통해서 여지없이 전파된 사실이다. '주의 이름'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다. 물론 배후에는 악마의 활동이 있다. 이로서 같은 성경을 놓고서도 그 주제가 십자가냐 아니면 존재냐를 가려야 될 판이다.

이미 십자가가 터진 마당에서도 인간들은 자신의 죽음을 신의 심판으로 간주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력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시키려는 본능이 극을 달한다. 그 방법으로 나온 것이 자기 존재를 아예 신의 무한한 속성의 감싸고 있는 형태로 보자는 인식이다. 신이 자신에게 허락한 무한한 요소를 자신이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 무한의 요소를 중심으로 외부의 모든 우주의 속성을 거기다가 연결시켜 그 연결이 끊어지지 않게 무한대로 이어져 가면 결국에는 이 우주를 가득 채우는 신의 속성과 항시 교류가 가능하다는 아이디어다. 자기가 품고 있는 그 무한의 속성을 인간들은 자기 영혼이라고 본다. 영혼의 자리를 신의 자리로 선언해 버리는 것이다. 즉 자신은 신이 허락해서 존재하는 존재자라는 것이다. 신이 머물 수밖에 없는 그 영혼의 자리로부터 구원을 위한 작업을 개시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부정해도 신에 대한 의식과 무한에 대한 염원을 양산하고 있는 그 영혼의 자리만큼은 신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즉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은 스스로의 선한 뜻에 의해 인간 내부에 심어놓은 신적 속성을 스스로 파기하는 모순된 행위를 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 의의를 거부하는 것은 신도 용납하지 않을 일이라는 확고성만이 인간의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보이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 영혼의 자리를 확대하여 신의 은총 아래서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신의 무한성과 접촉하는 구원의 연결 고리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런 신학은 '주의 이름'의 살해소식인 십자가 사건을 피해 가는 셈이 된다. 사실 십자가의 의미는 인간들의 이렇듯 집요한 자기 구원의지와 관련지어서 발생된다.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가를 알아야 한다.


Ⅱ. 무한을 향한 인간들의 자기 확장

인간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존재다. 늘 자기 형편을 살피고 자신을 걱정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책임지고자 하는 본능의 힘으로 살아간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나를 돌볼 자가 없음을 늘 확인하며 산다. 누구를 믿기 전에 먼저 철석같이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기에 대한 믿음이 선점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신앙심은 요지부동이다.

이처럼 인간의 의식이란 엄밀히 말해서 자의식이다. 자의식이란 대상의식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응시'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 자의식으로부터 자기만이 세계가 부풀어 오른다. 자아의 유한함을 의식하는 그 순간부터 무한을 향한 도전과 도발이 시작된다.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응시하고 있기에 그 유한을 바탕으로 하여 조금씩 유한의 폭을 넓혀간다. 자신을 유한한 것으로 규정시킨 그 무한한 대상에 손끝이 닿을 때까지 이 욕망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숭고한 무한한 대상(이상적인 자아상)을 바라보는 욕망은 늘 충동적 시선으로 이어진다. 라이벌이 자기 앞에서 어른거린다. 목표점이 확실히 나타났다. 따라서 응시가 강할수록 주체는 대상에 사로잡힌다. 기다리던 신이 곧 자기 자신의 의식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긴다.

인간의 의식은 절대적인 그 어떤 대상과 일치되려고 하면서 지속적으로 '자기 구성'에 나선다. 자신의 영원성과 절대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주체의식이란 없다. 스스로 의지하고, 자신을 상대적으로 보지 않고 오직 그것 자체이고자 한다. 즉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음으로서 최초의 시작자로 행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아가 '자기 고유의 자아'가 될 때 진정한 실체, 생동하는 실체는 자기뿐이며 이런 의식의 전개는 자기 스스로를 정립시키는 운동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끊임없이 유한을 산출하는 무한적인 잠재력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즉 신의 무한성이 인간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무한성을 만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전개 과정'이다. 이 과정은 다음의 세 가지 과정을 거친다고 불 수 있다.

첫 째, 무한이 유한자(인간)에 이르게 되는 과정

둘 째, 무한이 유한자에 머무르게 되는 과정

세 째, 무한이 유한자를 통해 방출되는 과정


1. 무한이 유한자에 이르게 되는 과정

자기 유지를 위한 정신 활동은 직관력을 발휘하는 영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 '영혼'은 기억을 더듬어 추구하는 영역이며 인간에게 있어 궁극적인 실체로서 변함없이 머무르면서도 각종 다양함이 의미 없이 사라져버리지 않고, 다시금 자신에게로 모아들여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기관이다. 거기서 인간은 영원까지도 생각한다. 그 어떤 다양한 상태도 모두 영원의 전체성 안에서 이미 원천적으로 파악되어진다. 즉 영혼불멸을 인지하는 자아인식은 '전체성에 대한 신적 인식'과 유대성을 갖는다. 인간의 육체는 공간적으로 연장선을 지닌 결합체이기에 그 때문에-결합된 유한자로 인간의 육체는 무한히 쪼개어질 수 있기 때문에-그 자신의 고유성을 따로 가지지 않는다. 인간의 육체는 분해되고 소멸되며 나아가 산산이 흩어져버릴 수 있다. 이러한 해체, 혹은 파괴는 한편 만일 영혼에 의해 온전한 통일성을 갖지 못한다면, 곧 영혼이 물질적인 부분들을 조합하고 질서 지우지 않는다면 반드시 벌어질 사태이다. 거기서 조합으로 생겨나는 무기체들이란 그때마다 물질과 형태라는 두 요소로 설명된다. 그런 무기체는 공간을 따라 연장되거나 더 작은 알갱이로 끝없이 쪼개질 수 있다.

이처럼 참된 '하나 됨'의 성격은 유기체에 나타나기에 무기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 무기체로서의 부분들, 혹은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새로운 불안 속으로 몰아세운다. 이 현상을 통해 인간에게 있어, 도대체 주된 것이 무엇이고, 본래적인 것이 무엇이며 자신의 고유성이 무엇인지를 되묻도록 이끈다. 따라서 인간의 실체는 '영혼'이라고 칭해져야 하고 바로 그 영혼 곁에서 인간은 물질로서의 육체를 넘어서 자신의 본래적인 의미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영혼은 우월하다.

육체에 대한 영혼은 마치 물질재료에 대한 형상과도 같이 혹은 도구에 대한 예술가의 경우도 같은 우월성을 갖는다. 물질세계의 기본요소들, 불, 공기, 물, 흙 같은 것은 비영혼적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우연적인 결합을 통해서 삶 혹은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 영혼의 생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쩌면 억지로 '비정신적인 것이 정신을 낳았다'고 말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속성은 산산이 흩어져버리고 또 지나가 버리는 것이 때문에, 만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오로지 물질적으로만 이루어졌었다면, 모든 것은 벌써 다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만일 영혼과 같은 존재가 앞서 존재할 수 없었다면 육체란 도무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은 곧 영혼이 전체적인 것들(우주만물) 안에서 함께 고려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요, 나아가 그 어떤 질서 안에서 설명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도 남지 않았을 것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신의 형상과 세상만물의 형상은 영혼 이외에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물질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육체적인 것들에게 자신과는 다른 어떤 본성을 설정하도록 어쩔 수 없이 강요받는다면 그것은 '영혼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의 역할은 무엇인가?

영혼의 형상은 그 모든 육체적인 존재 바깥에 그리고 그 너머 저편에 자리한다. 곧 육체적인 것들에 앞서 혹은 그럼에도 육체적인 것들 곁에 있다. 이는 영혼이 모든 육체적인 부분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라고 할 때 그것은 육체적(혹은 물질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육체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통찰과 일맥상통한다. 그리하여 사물들을 근거 짓거나 스스로를 근거 짓고자 애쓰는 사고는 오히려 '본래적인 자아'에게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물질세계 내에 저마다의 존재는 하나의 장소를 점해야만 하는 반면에, 영혼은 - 정신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공간을 초월한다 - 그 본질상 도처에 현존할 수 있는 것은 영혼 자체가 양적인 연장성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서 영혼이 육체 안에 있다고 단언 할 수만 없다. 오히려 공간에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육체적인 것이 공간에 무제한적인 영혼에 의해 이해되어야 옳은 것이다. 한편 만일 영혼이 육체적인 어떤 것에 지니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분명 거기에는 어떤 모순이 자리한다. 왜냐하면 만일 영혼이 그때마다 느끼는 육체의 모든 부분에 존재해야 하고, 그것은 동일한 장소에 두 개의 육체가 존재함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이 감각행위 중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양적이지 않는 정신-영혼이 그 자체로 (물질적-육체적인 측면에서, 예컨대 하나의 일정한 신체적 움직임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무(無)는 아니다. 오히려 몸의 움직임을 낳는 원천적인 실체로서 이해된다. 정신-영혼의 양적이지 않으며, 크기로 측정되지 않는 특성 따라서 우리는 정신-영혼 곁에서 어떤 '초연할 수 있는 능력(거리감)'을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감각적인 활동에 의해 파악되는 다양성 안에서도 그러한 감각적 의미의 통일성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정신- 영혼에게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만일 한편 눈으로 보고, 다른 한편 귀로 듣는다면, 그 두 가지와 관련된 어떤 통일체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서로 다른 감각적인 현상들을 따라 하나의 동일한 대상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곧 여러 가지 감각들로 받아들여진 것들 곁에서 동일한 어떤 것 자체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동일한 어떤 것이 다양한 감각과 관련하여 중심적인 요소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이는 다양한 측면에서 드러나는 감각적인 현상이란 하나의 중심을 향하여 그어지는 무수한 반경과 같다 그와 같이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서로 상응하는 것이 결국 그 중심에 '하나'로 존재한다.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이러한 과정이 혹시 만일 그렇게 감각을 수용하는 정신-영혼이 감각적인 것들과 동일시되거나 혹은 거기에 머물러버린다면, 완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감각은 이러한 맥락에서 주체적인 요소와 객체적인 요소 사이에 '만남'을 주선하는 활동으로 이해된다. 곧 감각은 육체의 도움으로 감각적인 대상을 영혼이 수용하는 활동수단으로서 이해된다.

그래서 물체 안에 자리하는 형상들에게서도 정신적인 것이 발견된다고 주장할 경우, 그것은 육체적인 것에게서 '구별되는 것(형상)'이 '구별하는' 정신(곧 추상화하는 주체)으로 간주되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구별하는 (추상화) 작업 안에서 그리고 그 도움으로 인간의 자기 및 세계에 대한의식은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들과 관계하면서도 그것들을 뛰어넘는 독자성을 확보한다. 이로서 사고활동은 육체적인 사물에 두루 작용하는 원인에 대한 파악과 같이 '육체 없이도 포착되는 것'이다. 이렇게 순수 정신적인 활동의 실현과정은 육체적인 활동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다. 정신활동은 비록 외적이며 감각적인 충동을 계기로 시작하지만, '육체에서 깨어남'을 필요로 하고, 어쩌면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들에게 실상 '의미'를 부여하는 '근거'로서의 전체적 정신세계에 참여하도록 인간을 고무시킨다. 좀 더 자세히 살려보자면, 인간에게는 기억(記憶)이란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외적인 부재(不在)'를 내적인 현재로 되돌리는 작용을 한다. 기억 곳에서 공간적-물질적인 것을 초공간적-비물질적인 방식으로 특별하게 사고(思考)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다.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기억에 힘입어 공간적으로 연장되는 세계를 내면화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이때 하나의 순수 정신적인 '세계'가 확보되며, 거기서 다양한 감각활동을 우리는 경험으로 곧 인식을 위한 원리적 소재로 이끌어낼 수 있다. 저 정신세계는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에게 특징적으로 관찰되는 표층적인 구조의 제한성을 넘어선다. 경험 안에서 내면화된 기억내용은 오히려 더 이상 '크기에 구애받지 않는' 심층적인 구조를 실현한다.

이 구조 안에서 공간적인 제약은 극복되고,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들은 그들의 초감각적인 동일성을 따라 완성되어 질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시공간 안에서 그저 단편적으로 ,그리고 순간적이며 부분적으로 표출된 감각적 존재들의 본질-내면적 원인구조를 그의 전체성 안에서 통찰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억 속에서 인간의 정체성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 정체성은 외적으로 사라져버리는 것들 곁에서 결코 사라져버리지 않는 본질로서 기억 덕분에 밝혀지는 정체성이다. 이러한 자기 신원에 대한 확인은 실상 이 세상의 우연적 조건을 능가하도록 이끈다. 근본적으로 또 내적으로부터 세상의 사물로서 자리 잡는 것은 순수한 정신적인 자기실현과정 안에서 경험될 수 있다고 본다.

만약 영혼이 사람에게 덧붙은 낯선 무엇이라면 사람의 변화하는 몸체처럼 한편으로는 떨어져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덧붙는 것을 볼 때, 그 몸체 자체에 고유한 무엇이 과연 남아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도대체 부단히 영혼 자체의 동일성을 활용할 수 없는 가운데 어떻게 우리는 '기억하는 일'이 가능하고, 어떻게 우리는 낯익은 서로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즉 느끼고 생각하고 삶을 대비하는 인간내면의 종합적인 태도가 인간 외적인 육체적인 태도와는 다른 실체(영혼)를 요구한다는 관점 말이다. 예컨대 이 세상의 물질 자체에는 기억과 통찰과 사유의 힘이 자리하지 않으니 지나간 것을 붙잡고, 다가올 것을 앞서 예견하고, 현재 하는 것을 포괄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이 모든 능력은 단지 신적 존재에 의한 것이니 신(神) 이외에는 다른 어디에서도 그런 능력을 인간이 갖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영혼은 육체 안에 자리 잡음으로써 비로소 그의 존재함이 취해지는 것이라, 과연 이러저러한 생명체가 생겨나기 전에 영혼이 이미 존재해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영혼은 다시 말해, 육체가 아니며 나아가 육체의 감정도 아니다. 영혼의 실체성은 오히려 육체적인 행동에 앞서 취하는 또 다른 실천적 행위이지 그에 앞서 전제된 질서요 작용이며 창조적 능력이다. 이러한 영혼의 활동은 외적인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면적인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영혼은 모든 움직임의 시원(始原)이요, 그로부터 다른 모든 움직임이 가능하다. 영혼은 그렇게 스스로 움직이는 무엇이다. 영혼은 그로써 함께 하는 육체에 무엇보다도 생명을 부여한다. 그 생명은 영혼 스스로 취하는 것이요, 따라서 결코 외적인 강요로 상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이 그 자체로 길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육체적인 모든 것은 그때마다 생명을 계속하여 번창시킬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생명은 끝없이 무한히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영혼존재와 관련하여 처음부터 살아있는 어떤 본성이어야만 하는데, 그 본성은 필연적으로 파괴되지 않으며 불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찰되는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하는 '생명의 시원'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서 신적인 모든 존재와 복된 존재가 몸소 살아가며 존재하듯 거주해야 한다. 처음부터 존재하고 살아가는 존재는 항상 그러하다. 그들은 나뉨 없이 존재하며 계속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서 결코 되어가지도 사라져버리지도 않는다. 도대체 그들이 자신 외에 그 어디로부터 생겨나서, 그 무엇으로 사라져버린단 말인가?

더 이상 연소될 무엇이 남지 않는다면 불은 꺼져 사라져버리겠지만 영혼의 생명은 꺼져버리지 않을 것이니, 그에게는 결코 연소되어 사라져버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영혼의 실체는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생명을 따라 자체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그 영혼 실체로서 이것이 인간들이 찾고 있는 영혼의 정체이다. 그로써 영혼은 불멸하는 존재로서도 능히 불리어질 것이다. 혹 그렇지 않고 육체와 다름없이 사멸한다면 다시금 분해되어야 할 것이며, 영혼에게 그 스스로 움직이는 불멸하는 존재원인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운명을 전제하든지 해야 한다 영혼 개념을 가지고 그저 단순히 인간의 혼(혹은 식물의 혼이나 동물 혼)과 같이 개별영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런 관점을 훨씬 뛰어넘어서 '세계영혼'과 연관 있다. 왜냐하면 이들 영혼들은 저마다 그 과제에 있어서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하더라도, 그들의 존재론적 구조에 있어서 공통적인 요소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 두 영혼(세계영혼과 개별영혼) 모두 움직임의 원인으로 받아들여진다. 모두 스스로 길러내는 생명과 관계하며 그러한 움직임의 원인은 하늘 아래서나 하늘 저편에서 동일하게 고려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실체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추구하고, 그런 한에서 첫 번째 원인을 알기까지 계속 노력한다.

영혼은 이제 '정신'과 만난다. 곧 지적인 활동 안에서 순수 정신적인 생명을 지니기에 언제나 저 위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정신을 통하여 이제 영혼은 자신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산고의 고통'을 느끼지만 또한 그에 따른 창조적인 결실의 기쁨을 얻기 위해 영혼은 부단히 애쓴다. 이러한 욕망을 취하는 모든 영혼은 정신세계 안에서 바라본 것들로 인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받아 그로써 갈망하는 아픔이 생겨나 서둘러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꾀한다. 원천적으로 존재하는 것, 곧 참된 존재적 존재는 여기서 다시금 영혼에 의해 물질세계 안에 앞서 전달된 생명의 원천임이 밝혀진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보다 낮은 차원의 것과 뒤섞여 가장 훌륭한 삶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어 어떤 장애를 갖게 된다. 만일 사람들이 저마다 존재하는 것의 본성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거기에 놓여 있는 순수함에 유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외적으로 덧붙여진 것은 언제든 그 이면에 자리하는 순수한 것을 인식하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덧붙여진 것을 추려내어 본질적인 것을 볼 수 있도록 애써야만 한다. 더 이상 감각적인 것이나 그런 감각적인 사물들로부터 현혹되지 않고 진정 영원한 의미 안에서 영원한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의 내면에 대한 본래적인 통찰에 의해서 불멸하는 신적인 세계에로의 상승이 실현될 것이요, 그렇게 참여관계 안에서 곧 참여하려는 우리는 참여를 허락하는 그것에 의하여 성사될 것이니,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순수하게 만들어 자신의 영혼 안에 거처하는 가장 주인다운 주인에게 그의 자리를 내어준다면, 참된 의미에서 앎이라고 불리는 깨달음의 지혜가 영혼 안에 자리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러한 완전성 실현의 이해와 관련하여 물론 역설적인 표현이 뒤따른다. 예를 들자면, 완전성 실현의 의미는 도처에 있으면서도, 아무 곳에도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모든 개별적인 것들이 그때마다 시공간적으로 다양하고도 독특한 모습으로 나타나듯 존재하더라도, 그들의 동일성을 잃지 않게끔 저 완전성 실현의 의미가 도처에 개입한다는 것이요, 다른 한편 그것은 모든 그때마다의 개별적인 존재를 넘어서, 곧 순수 동일성의 실현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가운데 시공간적인 한계를 그때마다 넘어서 오히려 매번 그들 앞에서 전제는 한, 시공간적인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듯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 능력은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서 죽음으로 마감될 우리의 운명이 실상 불사하는 삶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말이다. 만일 도대체 존재한다는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떤 때는 존재하다가 어떤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영혼은 움직임의 시원이다. 영혼으로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관찰하면 존재하기 위하여 앞서 고려되어야 할 존재근거 및 원천으로서는 그는 '절대적인 하나'가 제안된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하나는 완전성 실현과정을 위한 첫 번째 상징이 된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하나가 자체로 고정되듯 머물러 있지만은 않고, 운동, 곧 자신을 내어주는 -다른 존재하는 것들의 근거로서의 계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면, 이미 절대적 하나 안에서 역동적인 요소를 생각할 수 있겠는데, 운동과 정지, 혹은 다름과 같음에 따른 존재의 역동적인 실현과정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존재에는 세 개의 역동적인 구조가 짜여져 있다.

첫째, 중심에 한결같이 머무르도록 작용하는 내존재

-이는 언제나 순수 동일성을 지향하는 관점에서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존재요, 그런 까닭에, 첫 번째 존재, 곧 본래적인 의미에서 존재근거, 혹은 하나라고 부를 수 있겠다.

둘째, 중심으로부터 밖으로 작용하는 외존재

-이를 가리켜 저 내존재를 밖으로 드러내는 운동, 혹은 표현하려는 움직임이라 이해하고, 두 번째 존재, 혹은 '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셋째, 중심에 의해 전개된 활동들을 다시금 하나로 모르도록 작용하는 합존재

-이를 두고, 저 내존재와 외존재를 물질세계에 해명하고자, 곧 실제적으로 내보여주고자 하는 관점에서 '행위'요, 그 때마다의 시공간 속에서 물질세계와 만나 정지된 단면을 보여주는 세 번째 존재, 혹은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같은 존재의 근본구조는 셋으로 동시에 하나 됨 안에서 전체적으로 작용한다. 이는 '존재한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자면, 존재하는 것은, 첫째 이미 자기다움을 내용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항존적인 동일성 안에서 '존재'로서 포착됨을 가리킨다. 둘째, 존재한다는 것은 그렇게 자신을 드러냄에 있어서 언제든 능동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기에, 정신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존재한다는 것은 가만히 머무르거나 그저 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따라 존재의 근원에로 되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곧 영혼은 살아있는 몸 안에서 그 운동의 출발점, 그것이 나아갈 목적지, 그리고 그 본질적인 형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운동과 정지, 다름과 같이 단순히 구별되는 것만이 아니라 부단히 서로의 관련성을 확인하며 '하나 된 완전성'을 이루려고 하는 점을 목격할 수 있다.


2. 무한이 유한자에 머무르는 양상

인간이 어쩌면 본질적으로 이 지상에서 살아가야만 하고, 따라서 영혼이란 그 육체가 관계하는 지상적인 삶에 봉사하는 무엇이다. 이로써 육체는 일찍이 인간 본연의 삶에 제약적이고 짐스러운 무엇이라고 여겼던 생각에서 벗어나, 성경적 창조론에 따라 모든 것이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믿음에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 그로 인해 그 육체를 조정하는 불멸하는 정신영혼의 힘입어 선(善)에로 나아갈 수 있는 성향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정신이 원하는 곳에 함께 하도록 해야 할 것이요, 정신은 오로지 정신만을 위하거나 오로지 몸만을 위하여 안일한 곳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다. 신적인 원천은 -끝이 없는 끝에서- '몸을 통해서'가 아니라 '몸 안'에서 보여질 것이다. 이 말이 의도하는 바는, 모든 감각적인 것이 모조리 타락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요, 또한 인간의 자아실현을 위하여 장애요소로 작용 하지만은 않고, 단지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근거가 '아직' 확정되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두 은총 개념으로 분류해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창세기 1:2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과 다른 하나는 신약성경에 분산해 있는 참여 개념이다. 이 형상개념은 곧 모상(模像) 개념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철저하게 닮아가고 있다는 사상이며, 참여 개념은 수동적 태도, 즉 하나님께서 당신 생명에 참여시킨다는 사상이다. 인간 영혼이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 자립적 형상이다. 영혼의 그 자체 자립성은 인간 영혼의 질료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창조된 것이고, 불멸하고 영속적이다. 인간 영혼이 곧 인간이고 인간은 곧 자신의 영혼이다. 육체는 영혼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영혼을 위한 것도 아니며 이들의 복합을 위한 것도 아니다.

영혼은 육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며,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는 것은 사실상 영혼의 충만한 삶에 있어서 하나의 방해에 불과하다. 영혼은 육체를 '움직이는 자'일 뿐이다.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선장과 배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이 단순히 육체의 실체적 형상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지적 작용의 영성이다. 그 결과 인간 영혼은 식물의 영혼이나 동물의 영혼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다. 모든 것은 존재인 만큼 현실성을 지니며 또한 행위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행위 한다는 것이고 또한 행위를 위한 것이다. 행위는 존재를 따르며, 작용은 본질을 따른다. 그러므로 작용의 양태는 존재 양태에 상응한다.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존재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그 자체로서 행위 한다. 지적 작용은 본질적으로 질료에 의존하지 않는 작용이며, 영-육 복합의 작용이 아니라 영혼에서 유래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지적 작용의 주체인 인간 영혼은 본질적으로 비물질적이며 자립적이다. 인간 영혼은 그 자체로서 자립적 형상 혹은 자립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 영혼은 육체의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형상 혹은 자립적인 존재이다.

인간의 단일성은 가장 우선적이자 근본적인 진리로서, 의문시되거나 상대화될 어떤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실체 이론과 실체적 형상 이론에 의해 굳건하게 확립된다. 인간의 단일성은 실체적 단일성이다. 그런데 인간 영혼의 자립성 또한 주장된다. 이와 같이 인간 영혼의 자립성이 주장된다면, 이 두 가지가 서로 화해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자립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영혼에 관한 세 가지 문제가 고려된다. 이 세 물음이란 인간이 영혼이 온전한 실체인가 하는 것과 온전히 자립적인 존재인가 하는 것, 그리고 개별적 실체인가 하는 것이다.

자립적인 영혼은 분명히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실체이다. 왜냐하면 자립성은 온전한 실체성을 전제하며, 실존에 대해 질서 지워짐을 명백히 표현하기 때문이다. 자립성은 실존의 현실성으로부터는 추상되되, 모든 속성들을 지닌 온전한 실체를 의미하는 추상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은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하나의 온전한 실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인간 본질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영혼이 하나의 온전한 실체라면 인간의 실체적 단일성은 파괴될 것이다. 이 경우 영혼 자체만으로 인간이거나 아니면 영혼은 천사와 같이 하나의 영적 존재일 것이다.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영혼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존재이며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실존 덕분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영혼이 개별적 실체인 것은 아니다. 실존하는 개별적 실체인 것은 바로 인간이다. 만약 영혼이 개별적 실체라면, 인간의 실체적 단일성에 대한 문제는 제기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난국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이 그 자체로서 자립적 형상이라는 전제가 더 이상 음미도 되지 않는 않은 채 폐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는 명백하다. 인간 영혼이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종적 완전성을 모두 끌어안는 온전한 자립적 형상은 아니다. 인간의 영혼이 그 자체로서 자립적 형상이며 그 자신의 실존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은 참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라는 것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참이다. 영혼의 이중적 역할의 문제에 있어서, 영혼은 하나의 동일한 영혼이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진리를 간과하는 것은 곧 신체에 대한 형상의 부여자라는 영혼의 본질을 부인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영혼은 육체의 실체적 형상으로서 그 자체로서 자립적이다. 가능성은 항상 현실성을 위해 있으며, 물질은 형상을, 그리고 육체는 영혼을 위한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지적 능력과 감각적 능력을 지닌다. 이 능력들을 수행하기 위해 영혼은 육체와의 결합을 요구한다. 영혼은 지적작용을 수행하며, 바로 그 때문에 오직 인간의 감각적 능력들이 수행될 수 있을 때에만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존재라고 말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오직 지적인 능력이 작용할 경우에만 지성성과 자립성을 얻게 되는데, 이러한 지적 작용은 오직 감각능력이 작용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미 자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지적 영혼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이미 자신의 지적 능력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신의 지적 능력에 더해 감각적 능력을 지니는 영혼 따위를 생각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럴 경우 영혼은 아무런 손상이나 손실도 입지 않은 채 육체로부터 쉽사리 분리될 수 있을 것이다.

육체에 형상을 줌으로써 육체를 활성화하는 것이 바로 영혼의 존재이유다.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인간의 영혼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하나의 존재에 그것의 존재성과 단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의 실체적 형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우, 육체에 존재성과 단일성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인간 영혼이다.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인간 영혼의 형상 부여행위가 있기 이전의 육체는 순수 가능적인 물질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물질의 가능성에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영혼이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의 육체는 인간의 육체가 되며, 인간이 되고 또 인간적 존재방식을 지니게 된다. 육체와 인간의 형상성과 실존 전체가 바로 영혼의 형상부여 행위 덕분이다. 인간이 살아 있을 때, 인간의 자립적 영혼은 인간을 하나의 온전한 실체이자 개별적 실체이게 만드는 것이지, 그 자체가 하나의 온전한 실체이거나 개별적 실체는 아니다. 실체이자 존재의 주체인 것은 인간이지 영혼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서 살아남은 영혼은 하나의 실체이자 온전한 실체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영혼은 인간 본질의 한 부분이며, 영혼의 역할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아니라 육체를 활성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영혼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온전한 실체는 아니다.

죽음 이전과 이후의 영혼의 위상과 관련해서, 존재의 이중 주체와 그에 상응하는 존재양태의 이중성은 매우 당혹스러운 형국을 띠고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당혹감은 죽음 이전과 이후에 존재하는 영혼의 동일한 영혼이라는 진리에 의해, 다시 말해서 영혼은 죽음 이전이나 이후 모두에서 동일한 본성을 유지한다는 진리에 의해, 그리고 또한 죽음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비자연적인 사태이며, 따라서 죽음 이후에 영혼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로 비자연적으로 진리에 의해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다. 영혼의 자립성은 인간 영혼이 신에 의해 직접 창조된 것이며, 불가멸적이고 불멸·영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물질적 존재들이 다른 실체적 형상들은 질료에서 이끌어져 나온 것이다. 이들은 물질의 가능성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이들의 현실성은 가능하였던 것에서 현실로 된 것의 현실성이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은 그 자체로서 신체로부터 독립적이므로, 물질에서 유래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인간 영혼은 부모에게서 전해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인간 영혼은 다른 영적 존재들에게서 유래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서는 그 영적 존재들 안에 형상의 전이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인간 영혼은 창조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그에 앞서 존재하는 아무런 가능성도 없이 오직 신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직 완전자이며 무한자인 신만이 창조할 수 있다.

사실상 신은 오직 자기 자신과 피조물들을 창조함으로써 존재하고 행위 한다. 따라서 인간 영혼은 2차적 원인의 매개 없이 신에 의해 직접 창조된다. 인간 영혼은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기 때문에 육체와 결합되지 않는 한, 자신의 본성적 완전성을 지닐 수 없다. 따라서 인간 영혼은 인간에 앞서 창조될 수 없다. 정확하게 어느 순간에 그것이 창조되는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이다. 물질과 형상의 복합으로 이루어진 물질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소멸하며, 이와 함께 형상 우연적으로 소멸한다. 하지만 자립적 형상인 인간 영혼은 우연적으로도 소멸할 수 없다. 자립적인 형상에게는 실존이 그 자체로서 속하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 볼 때에는 비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지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서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의 입장에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자립적 형상 역시 절멸될 수 있다. 신이 사물을 절멸한다는 것은 곧 그것에 대해 신이 아무런 관여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에 의한 절멸은 이 세상 전체의 완전성과의 관련성 속에서 뿐 아니라 신의 무한한 지혜 및 섭리와의 연관성 속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모든 존재는 본성적으로 존재하기를 욕구하며, 지적 존재들은 영원히 존재하기를 욕구 한다. 그런데 자연적 욕구는 허위일 수 없다. 죽음으로 인해 분리된 영혼의 존재성은 정확하게 어떠한 것인가? 유한자들의 존재성은 본질과 실존 그리고 작용에 있다. 모든 유한자들에게 있어서 본질과 실존은 구별되며 이들의 본질은 그들의 작용을 통해서 알려진다. 분리된 영혼의 경우, 우리는 그 작용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유한자들의 경우 지식을 지니기 위해서는 생득적이든 아니면 획득한 것이든 간에 가지상(可知象)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또한 영혼의 지적 작용은 오직 감각상으로의 회귀에 의해서만 수행된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추상 작용을 위해서는 감각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분리된 영혼은 새로운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리된 영혼은 새로운 감각상으로부터의 추상을 요구하는 지식 이외의 모든 지식을 지닌다. 분리된 영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습관적 지식을 지니며, 그의 수동지성 안에는 가지상들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며 이미 소유한 학적 지식을 부분적으로 보유한다. 이에 더해서 분리된 영혼은 신과 영적 존재들의 영향 덕분에 지식을 지닐 수도 있다. 이들이 영향 하에 혼동된 방식으로나마 물질적 사물들을, 그리고 불완전한 방식으로나마 개별자들을 알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죽은 자들의 영혼은 다른 영혼들보다 더 많고 탁월한 지식을 소유할 수도 있다. 이러한 논의 안에서 분리된 영혼이 본성적인 상태가 아니라 비본성적인 상태, 즉 본성 이외의 상태라는 것을 분명하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인간 영혼에게 본성적으로 적절한 앎의 방식은 육체와의 결합 안에서 추상 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점 역시 명백하게 긍정하고 있다. 분리된 영혼은 자신의 실존의 행위를 이전과 똑같이 수행하고 있다. 영혼은 자신의 존재성을 살아 있는 인간에게 부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직하고 있다. 죽음에서 인간 영혼은 인간에게 부여했던 존재성을, 즉 인간의 존재성을 되돌려 받는다. 죽음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영혼 자신의 존재성을 회수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분리된 영혼은 인간에게서 자신의 존재성을 회수하기 이전의 존재성을 갖지 않았거나 그것을 인간에게서 되돌려 받음으로써만 갖는 것은 아니다. 인간 영혼은 죽음 이전이나 이후에 자신의 존재성을 항상 가지고 있었으며 또 한 가지고 있다. 인간 영혼과 인간은 같은 존재성을 공유하는 것인데, 다만 그것이 동시에 인간의 것이며 그 영혼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따라서 분리된 영혼의 존재성과 실존의 원리는 자신의 고유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 영혼은 자신의 자립성 혹은 영성을 인간의 지적 기능을 바탕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그 영혼의 영성에서 유래되며, 그것의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 본래의 그 자체 자립성은 인간의 영혼으로서 수행하기 위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 영혼의 그 자체 자립성 혹은 영성의 등급은 인간이라는 종의 모든 완전성을 현실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 영혼은 항상 하나의 영혼일 뿐 인간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 영혼은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영혼이며 동시에 하나의 실체적 형상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모든 존재성은 그 자체 자립적인 인간 영혼의 존재성에서 유래된다. 육체의 모든 존재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엄밀히 말해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아니다. 자기 육체를 지닌 전체적인 인간은, 영적인 인간 영혼에 의해 신체적 가능성의 현실화로 인한 것이다. 영적인 인간 영혼은 인간을 현실화함에 있어 자신의 전체적인 존재성을 소모하지 않는다. 인간 영혼의 자립성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인격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것의 궁극적 목적인 인간을 영적 존재로 만드는데 있다. 그리고 영적 존재인 인간이 절대적 선(善)과 만남으로써만 자기 충족을 이룰 수 있다.

의지가 없는 지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지성이 있다면 당연히 의지도 있는 게 틀림없다고 말이다. 이 의지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지성을 통해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의 긍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긍정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필연적인 게 아니라 자유로운 결정에서 나온다. 신적인 의지가 필연적으로 신적인 지성과 연결된다는 교리가 형성됨으로써 이 교리를 확정 시켜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자로 표상할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된다. 그렇다면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개인은 무엇인가? 모든 개인은 신에게만 있는 속성과의 연결을 통해서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된다.

인간을 개인으로 보려는 사상의 출발점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동기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영원한 사랑이 하나님이 잃어버린 개별 인간을 찾아오시어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제공하는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신다고 선포했다. 이렇게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구원에 대한 희망의 종말론적인 전망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 구원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주어지는 무상하지 않는 생명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구원 소식은 이 땅에서 유일회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현존으로 하여금 영생에 참여 할 수 있는 희망을 품게 한다. 그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창조된 인간의 구성 요소로 파악했으며, 이렇게 규정된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사상을 몸의 부활과 연결시켰다. 그러나 몸으로 창조되고, 한편으로는 영혼으로도 창조된 자가 인간이라면, 몸 되시는 분이 몸의 구원에 개입해야 하고, 영혼 되시는 분이 영혼 구원에 개입해야만 한다. 이로써 이제 영원에 참여함으로써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표상이 개인화 된 것이다. 요컨대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이 땅에서 유일회적으로 현존하는 개인과 관련된 것이다. 이 지상적 현존은 이제 영원에 참여해야만 한다. 비록 그 현존이 영원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지금 여전히 구체적인 몸이다.

이처럼 구원 소식은 지상에서 개인적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 현존에게 영원한 의미를 제공했다. 당연히 이 지상적 삶에서 개개의 모든 인간들이 영원한 구원에 들어가는가 아니면 멸망당하는가가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지상에서 유일회적으로 살아가는 개인들이 영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부여받게 된 새로운 삶은 보다 인간이 보다 인간다워지는 그 품격에 대하여 생각하게 했다. 인간의 품격을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별하는 이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본다면, 기독교 교리는 인간의 품격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개개인들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그 토대를 둔다. 창세기 9장 6절에 따르면 개개인들의 생명은 신성불가침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신앙적 동기를 이어가면서 하나님과의 일치로 인해서 주어지는 생명과 자유라는 시각에서 인간의 품격을 개인에게 속한 신성불가침이라고 여긴다. 개인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인격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분여될 표준적인 인격 개념이 선행된다. 인격적 개념은 극장의 세계에서 수행되는 배우들이 가면을 쓰고 연기해야 할 역할을 가리킨다. 여기서부터 이제 이 낱말은 어떤 사람이 연기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역할'로 전가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곳에서 바로 그 개인이 이러한 특징으로 일컬어지지 않고, 오히려 완성되어야 할 사회적, 혹은 정치적 기능이 특징화된다.

인격을 '이성적 개체 본질'이라면 예수 그리스는 두 본성에서 하나의 인격이 되는데, 그 예수님의 인간적 본성이 인격의 단일성에 내재한 신성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질문이 곧 제기된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이 로고스의 인격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기독교에서는 설명한다. 로고스의 인격이 그 입장에서 삼위일체론적 관계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원적으로 아버지와 아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로고스의 인격 안에 있는 인간 예수님의 '엔휘포스타지(그리스도의 인성이 그의 신적인 인격 내에 존재한다는 뜻)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참여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즉 두 본성 안에 있는 인격의 단일성이라는 기독론 교의가 삼위일체적 인격 개념으로 소급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엔퓌포스타지적 인격 개념만이 아니라 인간 일반의 인격 존재에 따른 규정도 피조물로서의 인간 현존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구성적 관계에 의해서 '이성적인 개체 본질'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삼위일체론은 첫 번째로, 다른 인격과의 관계를 통해서 인격적 존재를 구성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상호적인 관계를 통해서 인격으로 규정되었다. 이런 관계를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된다. 즉 아버지는 아들과의 관계에서만 아버지이며, 역으로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만 아들이다. 인간론 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너와의 관계에서만 나이다. 즉 신적인 너와의 관계에서 우선적으로 피조물의 속성을 갖지만 또한 동료적인 너와의 관계에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기독교 사상에서 인격성은 인격을 규정하는 상관개념이 손상 받지 않고 늘 자유라고 생각되었다. 타자와 특히 고유한 인격의 신적인 근원과 자유롭게 맞서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유사상과의 이러한 연결은 기독교 사상에서 이성적 본질이 자유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다는 사실로 소급된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행위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도 역시 자유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가리켜 '자유로운 의지로 인간을 자신과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묘사했다. 신학의 과제란 무한한 실체인 신에 의해 만들어진 만물에 어떤 흔적이 남아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초자연적인 빛의 도움으로 신을 관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조 행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인격의 구성이 손상 받지 않고 인간은 자기의 현존을 구성하는 사태에서 자유롭게 이런 혹은 저런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도록 규정되었으며, 이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와 예수님의 아들 관계에 참여함으로써 확고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근대 사상에서는 이 주관성이 인격적 자립에 속한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주변 세계에서 창조적으로 행동한다. 근대의 존재 개념 중에서 극단적이라 할 이런 인간 이해를, 그것은 최초로 인간의 본질을 야기하고 있는데, 고대의 인간 이해에 대한 연구도 없이 전제되면 안 된다. 근대의 주관성 사상이 말하는 자명성에 우선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던 것은 교만에 가지 이르려하는 본능적인 태도를 간과한 채 인식의 의지가 종속적 위치로 떨어졌다는 점인데, 이 인식이라는 것은 인간 주관성의 창조적 행위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진리를 수용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인식이 이루어질 때 자기 자신의 참된 것을 가능한 최선으로 순수하고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분명히 인간이 창조적으로 인식의 과정에 참여하는 일은 그 내용이 변조시키는 원천으로 간주되고 말 것이다. 이런 앎은 외적인 인상의 동기를 통해서, 그리고 신적인 진리를 통해서 활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실제 활동은 여기서 신의 조명을 통해서 발생한다. 만물은 영원한 신적 이데아를 통해 창조되기 때문에 창조물 속에는 신의 모습이 피조물의 특성을 따라 더 강하게, 혹은 덜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만물이 창조주의 반영이요, 표현이요, 그림자요, 길이요, 발자취라고 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만물이 어떤 식이든지 영원히 변치 않는 신의 이데아를 분유(分喩)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물은 창조의 목적대로, 즉 창조주 안에서 완성되게끔, 모두 신께로 돌아갈 운명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창조는 완성에 도달한다.


3. 유한자에서 방출되는 무한

인간도 하나님의 모상(模像)대로 창조된 이상,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여정 중에 있다. 이성과 신앙은 이 여정 안에 통합되어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활동적인 이성은 곧 인간 영혼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고 보는 이러한 견해를 통해서 육체로 존재하는 인간의 개인적 영혼이 불멸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이러한 변역의 결과로 인해 서 인식 과정에서 '영혼의 활동성'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이 창조적 행위에 상응한다는 생각에서 발생했다. 이로써 이제 인식 과정에서 인간의 영적인 주관성이 근대사상의 중심부에 자리하게 되었다. 사물에게 이미 주어진 진리와 인간적 경험과의 조화는 인식을 이미 주어진 진리로 해석함으로써 고대 인식론에서 확증된 것으로서 인간 영이 바로 창조적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신적인 근원과 맺게 된 동질성을 통해서 그 토대가 잡혔다. 물론 신학적 전제가 떨어져나가 버리면 창조적인 인간 영의 활동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틀림없이 모호해지고 만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적 인간 영이 활동은 인간에게 의존적이지 않는 사물을 그 존재의 특성에서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을 문자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가르치며 한 모범을 보이기 위함이다. 이러한 모범은 너무 완전했기 때문에 인간들을 하나님에게로 이끌어 주며, 하나님은 여기에 대한 응답으로 고유한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에 의해서 인간을 용서해 주신다. 신앙 행위는 확실성을 갖춘 것이라기보다는 자유로운 모험과 인격적 경험에서 비로소 현실화된다. 인간의 선택적 행위에 대해서만큼은 신의 섭리의 직접적 적용을 배제된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책임, 그에 따른 칭찬과 처벌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신의 전적인 지배 아래서도 필연적인 결정론에 빠지지 않고 이 세계가 어떻게 우연적이고 인간의 자유선택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계의 목적적 질서에서 어떻게 제 1목적 안에서 모든 존재가 섭리적으로 규정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섭리가 왜 어떻게 제2원인자를 매개로 해서 실행되는가, 이러한 제2원인자의 본질에 따른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인 사태가 발생하는데, 특히 이러한 우연적인 결과는 제2원인자의 산물인 뿐인가 아니면 이러한 우연적 결과까지도 신의 섭리 아래 규정되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결과는 발생하도록 이미 결정지어져 있으므로 우연적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또한 제2원인자의 완전성에 따른 자유선택으로서의 우연적인 결과 역시 섭리에 의해서 성립된다면 이미 섭리적 차원에서 결정지어지므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의미가 상실되지 않는가 라는 물음들을 해명되어야 한다. 신은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자신 안에 한 목적을 위해 새롭게 규정되어질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신은 모든 존재의 목적과 그러한 각자의 존재의 목적 실현의 방법까지 규정한다. 섭리란 궁극적인 통치자로서 모든 존재를 규정하는 신적 지성 자체이다. 이렇게 신은 모든 존재의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실천적 방법을 규정하면서 동시에 궁극적인 한 목적을 위한 모든 실천적 방법에 대한 규정으로서 섭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존재도 신의 원인성이 미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존재로 신으로서의 궁극적인 목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섭리는 다음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신은 그의 지성 안에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범형을 자신의 지성 안에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물에 대한 직접적인 섭리를 가지고 있다. 둘째, 신의 섭리의 매개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신은 자기 힘이 결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선의 풍부함으로 인하여 낮은 존재를 탁월한 존재에 의해서 통치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왕이 집정관에게 자신의 권한을 양도하여 대리로 통치하게 하는 경우와 비교할 수 있다. 이 경우 집정관의 권위는 결국 왕에게 속하지만 왕 스스로 모든 지역을 직접적으로 관할 할 수 없는 힘의 결핍으로 인해 대리 통치는 불가피하다. 그리고 왕은 집정관들의 나름의 통치 계획과 실행을 남김없이 알 수 없다. 이에 반해 신에 의해 부여된 원인은 신적인 힘의 결여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풍부한 선성(善性)으로 인해 피조물에게 원인의 권위를 부여한다.

이러한 충만한 신격 사랑에 따른 매개자에 의해 통치가 실행되면서도 신이 섭리에 따라 실행을 위한 매개자들의 모든 과정이 낱낱이 직접적으로 규정된다. 그렇다면 섭리에 있어 인간은 행함은 무엇인가? 인간은 원리적인 원인자이다. 원리적 원인자는 스스로 움직이는 자기 내적 본성에 따른 목적을 지닌 영혼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원리적 원인자는 자기 성장과 실현, 자기 산출 그리고 자기 이외에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내의 목적이 따른 활동을 할 수 있다. 물론 원리적 원인자가 자기 내적 목적에 따라 스스로 활동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운동과 목적인 신에게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원리적 원인자는 세계 내의 다른 존재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자기 목적작인 활동을 한다. 과연 제 2원인자가 성립되어야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성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2차적 원인자도 능동적이지 못하고 오직 신에 의해서만 작용한다면 결과들 사이의 어떠한 다양성도 이끌어 질 수 없다. 이런저런 결과로 된 존재들에 어떤 작용의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이러한 존재들을 구분할 길이 없다. 우리에게 서로 다르게 알려지는 작용 역시 피조물이 2차적 원인이 되어 작용한 것이 아니라 신의 직접적인 작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신의 작용에 따른 어떤 결과들도 그 차이가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다. 어떠한 결과의 산출에 피조물들의 어떤 원인적인 작용이 없다면 원인에 관한 지식이 오직 공허하게 수반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2원인자가 원인성을 가지는 궁극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제 1원인자의 완성에 따른 필연의 산물인가 아니면 신의 자유의지의 산물인가? 후자라고 할 때 임의적인 우연의 산물인가 아니면 신의 자기 목적에 따른 신적 지식과 계획에 따른 선택인가? 물론 신은 완전한 실현자이므로 자기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 어떤 것도 필연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목적에 부합되는 어떤 존재나 세계를 우연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선택되는 세계 중에 불완전한 세계보다 더 완전한 세계가 신의 목적, 즉 지극한 선함에 부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은 최선으로 활동하므로 어떤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양태들을 신의 활동에 적용할 수 없다. 제2원인자가 작용하기 위해서는 작용의 주체로서의 실체적 형상이 있어야 하며 또한 작용의 목적이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실체적 형상과 목적이 신에 의해서 부여되고 보존된다. 또한 실체적 형상은 새로운 현실적인 작용에 대해서는 가능적인 능력이므로 그러한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제1작용자가 있어야 한다. 이점은 인간의 의지적 활동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1원인자인 신에 의해서 추구할 수 있는 힘이 실체적 형상으로 부여되고 그러한 의지적 활동이 실행되며 그러한 의지의 대상인 선이 주어진다. 이렇게 제1원인자가 인간의 의지적 활동에 내적으로 작용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인간의 자유가 실현될 수 없다. 이러한 제1원인자의 작용은 의지의 내적 원리의 근거라는 점에서 외적인 조력이나 방해와는 다르다. 외적인 작용자는 인간의 자발성을 억압하거나 아니면 설득할 뿐이다. 이처럼 제1원인자만이 억압 없이 의지의 자발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신은 어떤 억압도 없이 인간의 의지적 활동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이 섭리관에 준해서 윤리관이 나오게 된다. 모든 것은 원인을 가지므로 목적원인을 가진다. 마치 모든 철학적 문제들이 목적인에 비추어 다루어지는 것과 같다, 인간의 도덕성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과의 연관 하에서 고려된다. 그 결과 윤리학은 곧 행복론이다. 모든 인간이 행복을 추구한다. 이 명제는 분명히 경험론적 명제이다. 그는 행복이 그 자체로 지고의 선이며 총체적 선이다. 인간이 행복을 위해 모든 선을 추구한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행위가 행복 일반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각각의 인간들에게 행복에 대한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와 부, 권력, 우애 등을 추구한다. 또한 모든 행위자는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 생명체들은 자기 운동의 원리인 영혼을 가짐으로써 자발적으로 행동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행복 일반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의지가 선(善) 일반에 개방되어 있다는 인간학적 진리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무엇을 행하든 자신의 자기완성과 자기충족, 즉 형이상학적 의미의 행복을 위해서 행한다. 결과적으로 윤리학은 도덕성의 자기목적성을 함의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것이 행복 추구를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인간의 행위'와 '인간적 행위'는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는 다른 동물들과 공유하는 행위로서 인간이 이성과 의지의 작용을 통해 주인이 되지 않는 행위를 말하고, 인간적 행위란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적합한 행위로서 이성과 의지의 작용을 통해 인간이 주인 되는 행위를 말한다. 인간적 행위는 곧 자발적 행위 혹은 자발성을 가지는 행위이다. 이것은 영혼론의 원리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인간은 본성에 의해 궁극적 목적에 대한 수간으로서 하나의 목적을 설정하며 그것을 이해하고 의도한다. 이 자발성은 식물과 동물의 것보다 더 완전하다. 인간 행위의 내적 원리들이란 그 행위들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이 가진 기능들을 말한다. 그 기능들은 인간이 유한자로서 그리고 물질적이면서도 영적인 존재로서 가지는 원리들이다.

신은 창조자이다. 창조자로서의 신은 피조물을 기획, 통치, 주재 그리고 자신을 향해 목적 짓는다. 신은 세계에 대한 철저히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철저히 초월적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창조자인 신으로부터 유래되며 신에게 궁극적 목적으로 복귀한다. 그런데 모든 존재자들은 각기 다른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신에게 복귀한다. 이와 같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신에게로 복귀 과정이 신학적·철학적 윤리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런데 신은 단순한 일자로서 완전히 자기동일적이다. 신에게는 본질과 행위가 구분되지 않으므로 기능과 작용, 그리고 작용들 사이의 구분이 없다. 그런데 유한자는 본질과 실존의 복합물이다. 따라서 유한자의 경우 본질과 행위, 그리고 기능과 작용 그리고 작용들이 서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해 능력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것에 대응하는 욕구 능력이 있다. 이에 따라 하나의 영적 존재는 이성과 그것을 동반하는 영적 욕구 능력인 의지의 복합물이라는 것이다. 인간 이성은 이론 이성과 실천이성으로 구분된다. 이론이성의 경우 전체가 올바르고 추리가 형식논리의 법칙을 준수한다면, 그것의 결론은 올바르다.

그러나 실천이성은 개별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에 다다를수록 선과 악의 구분이 더욱 모호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성은 지식에 대한 자연적 욕구를 가지며, 의지는 선에 대한 자연적 욕구를 가진다. 그러한 자연적 욕구들은 작용의 증가에 따라 더욱 활발해진다. 이성의 지식을 확보하면 할수록 그것의 지식에 대한 욕구는 증가한다. 그런데 이성에 의한 지식의 확보는 의지의 욕구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의지의 대상에 대한 욕구는 이성의 그것에 대한 지식의 정도를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의지는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대상을 맹렬히 추구할 수 있다. 이성은 자신이 이해하는 대상을 의지에게 추구의 대상으로 제시한다. 의지 자체는 가능적 기능으로서 선에 대한 욕구일 뿐, 이성의 이해 없이는 어떤 것도 추구할 수 없다. 그래서 의지는 이성이 선으로 이해하고 제시하는 것을 추구한다. 행위자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의 주관적 이유는 그가 양심의 명령에 복종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의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이다. 자유로운 선택은 숙고 혹은 자발성의 과정을 거친다. 숙고는 이성, 의지 그리고 감각적 욕구 기능들의 공통된 작업이다. 자유로운 선택은 이성과 의지의 공통된 결단으로서 형상적으로는 이성의 것이지만 실체적으로 의지력과 관련 있다,

그런데 일상 언어에서 우리는 의지가 도덕적 선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일상 언어에 따라 말하자면 의지가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주로 열정들의 영향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육체를 가지지 않는다면 항상 도덕적으로 선할 것인가? 그리고 유한한 인간의 의지는 항상 도덕적으로 선한가? 그러나 육체를 가지지 않거나 의지로서 만의 인간 행위자는 모두 추상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유한한 의지가 그 자체로 필연적으로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인간 의지에게 도덕적 선이나 악을 선택하게 하는 주요 요인은 감각적 욕구 기능에 기초하는 열정의 영향력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열정들을 통제하는 작업은 덕들의 몫이다.

다시 말해 이성과 의지는 덕에 힘입어 열정을 지배한다. 따라서 선한 행위를 행하기 위해서는 덕들이 필수적이다. 열정은 우선 감각적 욕구들의 작용에서 비롯되는 영혼의 변모이다. 라틴어의 passio 라는 말은 수용함을 뜻하며, 가능태-현실태 원리에 기초한다. 현대 언어로는 그것이 열정을 의미한다. 열정은 영혼의 운동이며 인간과 동물은 공통적으로 열정을 모두 가지나, 그 열정들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열정이 행위의 도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인간의 욕구 기능의 강한 작용들인 열정들을 전체적으로 억압하는가 아니면 그것들에 대한 합리적 조절과 지배를 시도하는 가이다.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유적 차이인 동물성 그 자체는 선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은 철저히 영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체의 가능성과 결합하여 인간이라는 하나의 실체를 이룬다. 그래서 인간 영혼은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현실적 모습이며 실체적 형상으로서 인간의 총체성과 단일성을 보장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육체가 어떠한 물리적 혹은 육체적 변화를 겪을 때 영혼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육체가 큰 상처를 입을 때 인간은 의식을 상실할 수도 있는 것과 같이 영혼은 항상 간접적으로 육체적 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와 같은 육체 내의 변화로 인한 영혼 내의 변화는 어떠한 도덕적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러한 수동적 열정들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다. 그러나 윤리학에서 고려되는 정념들은 '인간 영혼 안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이성에 의해 이해되고 의지에 의해 의도되는 열정들이다. 인간 영혼이 육체를 움직이는 이상 그러한 열정들은 단순한 감각적 욕구들에 따르는 열정들이 아니다. 인간 영혼은 대상에 대해 어떠한 것을 인식함에 따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즉 자발적으로 추구하거나 도피하려는 열정을 가진다. 따라서 그러한 영혼 안에서 발생하는 열정들은 도덕적 의의를 가진다.

행위의 도덕성은 여러 차원의 기준을 부른다. 그것의 궁극적 기준은 신의 지혜와 동일한 신의 세계에 대한 기획과 통치를 표현하는 영원법이다. 모든 도덕적 법들은 그것에 기초하며 그것에서 유래된다. 더 가까운 도덕의 기준은 영원법의 일부를 반영하는 자연법이다. 그리고 행위의 도덕성의 가장 가까운 기준은 올바른 이성으로서의 실천이성이다. 인간은 우연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개별적 행위에 대해 결정을 할 때, 자신의 실천이성의 최종적 판단인 양심에 비추어 그 행위를 평가한다. 그러나 양심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도덕의 기준이 아니다.

유한한 영적 존재인 인간의 고유 속성은 자신이 자신에게 법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 이성이 도덕법의 궁극적인 원리일 수 없다. 인간 이성은 신성한 이성에서 유래되는 실재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사변적으로 인간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재에 대한 판단을 할 때, 그는 존재의 객관적이며 보편적 진리에 상응해야 한다. 명령하는 것은 의지의 특권이 아니다. 의지가 자신이 욕구 하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행위를 명령할 때 의지는 이성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러한 이성의 규정 하에서만 의지의 행위가 법의 성격을 가진다. 결과적으로 법은 항상 이성에서 유래되는 명령이다. 법은 영원법과 비영원법으로 구분된다. 영원법은 세계를 통치하는 신성한 기획이다. 이 법은 신성한 이성 안에 있다. 비영원법은 자연법과 실정법으로 구분된다. 실정법은 인간적 실정법과 신성한 실정법으로 다시 구분된다. 인간적 실정법은 국제법과 시민법으로 나누어지며, 신성한 실정법은 모세 율법과 교회법으로 나눠지고 모세 율법은 다시 도덕법과 예절법과 재판법으로 나눠진다. 자연의 법칙은 신성한 법에 의해 지배된다. 인간적이거나 신성한 실정법은 자연의 법칙을 내포된 신성한 법에 대해 외적이다. 그런데 도덕법으로서의 자연법은 어떠한 의미에서 자연의 법칙에 내재적이다. 자연법이 '이성적 피조물 안에서 영원법의 참여'이다. 다시 말해 자연법은 인간이 이성적 동물인 이상 불완전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영원법의 부분을 말한다. 주목할 것은 자연법은 인간 이성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 이성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 이성 자체가 사물의 지침이 아니고 인간 이성 안에 심어진 원리들이 자연적 이성의 지배 하에서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것들의 지침이며 기준이다. 그러나 인간 이성이 자연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것들의 기준이 아니다. 자연법은 물리적이거나 인간 본성의 필연성에 의한 행위가 아닌 자발적 행위만을 지배한다. 모든 도덕적 덕들은 자연법에 의해서 지시된다. 인간의 형상적 본성에 적합한 모든 행위는 덕스러운 행위이고 자연법에 적합한 것이다. 그러나 선한 행위들 모두가 도덕법에 의해 직접적으로 지시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법은 보편적인 것들이다. 자연법은 선을 행해야 하고 추구해야 하며 악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침은 그 자체로 자명하다. 그래서 이것은 증명될 수 없고, 또한 증명될 필요도 없다. 그 결과 이 법칙은 모든 인간에게 알려진다. 즉 정상적인 성숙한 인간은 이것을 이해한다. 이 법칙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과 악을 파악하는 이해력을 가졌다는 것과, 인간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한 이해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법칙은 이미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과 악에 대한 이해를 가졌다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법칙은 인간이 본성에 의해 근본적으로 도덕적 존재하는 것을 드러낸다. 인간이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선에 대한 경향성을 가지며 선을 행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진다. 물론 때로는 자연법 법칙들은 항상 예외적인 사례를 허용하며 이들 법칙들은 첨가나 삭감의 방식에 의해 수정될 수도 있다.

올바른 이성이란 순수한 형식적 이성이 아니다. 올바른 이성은 구체적인 내용을 담보한다. 이것의 내용은 알려진 바로서의 세계의 모든 법칙성이다. 이 내용은 자연과 우주의 법칙만이 아니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모든 관계들에 대한 법칙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연 및 우주, 타인과 공동체, 역사와 문화 그리고 때로는 절대자와 가지는 관계들이 그것이다. 이 올바른 이성이 기초하는 세계의 질서 혹은 법칙 자체가 이성적 존재인 인간 행위의 기준일 수 없다. 따라서 인간 행위의 기준은 그러한 세계의 질서 및 법칙을 반영하는 이성이다. 모든 법과 같이 도덕법은 보편적 지침이다. 그런데 한 인간 행위는 개별적인 이유로 구체적이며 또한 자유로운 행위로서 필연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우연적이고 상황 역시 반복되지 않는 것으로서 우연성을 지닌다. 실천이성은 도덕적 행위의 원리이며 그것의 질서지음의 원리이다. 따라서 보편적·도덕적 지식을 구체적 행위에게 적용하는 것은 행위자의 실천이성 몫이 된다. 개별적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해야 하는 하는데, 이것은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자신만이 자신의 의도, 자신의 선택의 동시, 그리고 구체적 상황을 알거나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위자 자신의 특수한 행위에 대한 판단은 자의적인 것일 수 없다. 마치 사변적 이성이 존재의 본질들과 그것들의 연관에 의해 지배되듯이, 실천 이성도 객관적인 올바름과 그릇됨에 의해 지배된다. 그러한 실천이성의 추리의 결론이 바로 양심의 내용이다. 양심이란 나의 실천이성의 최종적 판단이다. 그러나 양심은 실천이성의 보편적 기준의 하나의 행위에 대한 평가에 적용하는 것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 도덕의 기준은 아니다. 도덕의 가까운 기준은 올바른 이성이다. 도덕적 행위자인 인간은 타자에 의해 그리고 물리적이 아닌 조건적인 필연성에 의해 선한 행위를 행하도록 구속된다. 다시 말해 그는 타자에 의해 도덕적인 필연성에 의해 실천이성의 명령을 수행함에 구속된다. 즉 그러한 명령을 수행할 의무를 가진다. 그를 구속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세계의 창조자이자 통치자인 신이다. 그래서 인간 행위자의 양심이 유일하거나 전체적인 도덕적 행위의 원천인 것은 아니다.

행위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어떠한 행위를 행함에 자신을 구속할 수 없다. 자연적 필연성은 행위자의 내부에서 비롯되며, 도덕적 의무는 타자의 원인성에 의한 것이다. 도덕적 양심의 구속력의 궁극적 근거는 모든 인간을 통치하는 도덕적 질서의 주관자인 절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궁극적으로는 기초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도덕성이 성립되지 못하거나 인간의 행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양심이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이 무한과 관련된 생산자로서 행세하게 되면 이 생산의 주체는 객체와의 격차나 간격을 해소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여 생산된 객체를 계속 자기 안으로 귀속시키고 싶어 한다. 정신은 그 자유로운 사유적 운동으로 자연을 해석하고 통일한다. 존재란 결국 주체와 객체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을 객체로 삼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신을 경로로 해서 원래의 출발 자리인 자기에게로 신과 함께 귀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자아의 의식은 그 주체성을 그 어떤 경우라도 포기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Ⅲ. 인간을 위한 신학의 한계

1. 죽음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


이런 와중에서 신의 규범은 어떻게 되는가? 초월적 주체로서 신은 세계에 형식을 제공한다. 그 형식 안에서 세계는 신의 규범에 묶인다. 그런데 그 규범이 문자로 되어 있기에 과연 문자와 실재 사물이 일치되는 식으로 인간들이 읽어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난다. 인간은 의사소통의 차원에서 문자를 대하게 된다.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송신자가 수신자에게 매시지를 보내야 하며,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그 메시지가 지시하는 맥락이 있어야 된다. 그리고 그 맥락이 수신자에 의해서 파악되어야만 송신자의 의도가 전달될 수 있다. 메시지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공통된 코드를 통해서 전달되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메시지는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을 이루어질 만 한 물리적·심리적 접촉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코드화에 예술적 감성이 가미되면 작품 과정은 이렇게 된다.

작가→창작과정→작품→해석과정→독자

이 작품 과정을 거꾸로 하면 비평 과정이 된다.

독자→해석원칙→작품→창작과정 탐색→작가 탐색

이렇게 되니 작가와 독자의 만남은 작자가 지니고 있는 자기 목적성 안에서 우연한 만남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에는 자아가 타인을 통해 자아를 재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자기에게 의미가 되돌아가면서 그 의미성을 강화시켜 는 결과를 낳는다.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지각의 주체는 '사유'가 아니라 '신체성'에 있다. 나의 신체에 의해서만 나의 사물이 존재한다. 이러한 신체의 능동성에 의해서만 주관이 형성된다. 인간의 신체라는 것은 단순히 물질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이 주관에 의해서 세계의 모든 것을 흡수해 낼 수 있다. 육체라는 물성화된 인간은 육체를 통해서 외부의 환경과 접하고 비로소 자기를 파악하고자 하는 의식을 갖는다. 따라서 세계는 인간의 신체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신체는 세계의 일부로서 교류가 된다.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그 원인 규명이 돌아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 해석은 곧 해석자 자신을 해석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신의 진리성이 문자로 전달되면 인간들은 그 문자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신의 사법적 권위에 저촉을 받게 되고 판결을 받게 된다. 살기 위하여 문자를 보다가 죽는 수가 생긴다.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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