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성도님의 노트(9)-울산 새순교회 이능우 집사님…
어느 성도님의 노트(9)-울산 새순교회 이능우 집사님…
제 9 강
(딤후 3장1~5절) 1)말세에 자기를 사랑하며, 2)돈을 사랑하며 ,3)자긍하며, 4)교만하며, 5)훼방하며, 6)부모를 거역하며, 7)감사치 아니하며 ,8)거룩치 아니하며, 9)무정하며, 10)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11)참소하며, 12)절제하지 못하며, 13)사나우며, 14)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15)배반하여 팔며, 16)조급하며, 17)자고하며, 18) 쾌락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19)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
이렇게 19가지 항목들이 나오는데 실컷 십자가 믿음 이야기해 놓았다가 끝부분에 와서 이것 한두 개 위반하면 본인들이 구원 못 받고 지옥 가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와 원인이 어디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그 시도가 수련회를 마치고 난 뒤까지도 계속해서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말씀이 여러분 속에 박히는 것이고 그것이 새 언약의 혜택이고 묵시의 혜택이고 성령의 충만한 역사라는 것입니다.
(렘 31장33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와서 우리에게 박혀 버리면 우리는 그 말씀의 효력을 날마다 저촉 받고 있어 지킬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시작하신이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새삼스럽게 말씀을 지키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에 유명한 말씀이 있는데.
(시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 이다.
말씀이 박혀버리면 거부반응이 나타나지 않고 말씀이 꿀 송이보다 달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말씀을 지키려고 하면 말씀 오는 것이 오히려 겁이 나고 말입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이런 저런 말씀이 와서 우리의 부족함을 들어내어도 십자가 피만 오히려 더 고맙게 느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사람에게 매이지 않고 지금도 활동해서 나는 너를 창세전에 택해서 피로 너를 건지시리라는 말씀이 촉촉하게 우리 심령을 젖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대해서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아야 묵시적인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 할 수 가 있고요.
동양 철학으로 경건의 티를 내는 그들과 성도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면 다 이루심이 그들에게 없고 그냥 애쓰며 자신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몸부림치는 그것이 바로 성령 없는 육적 경건훈련 이라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의 결론은 말씀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포기 하라는 것이고 말입니다.
(딤후 4장10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달마디아로 갔고
이것은 사도 바울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을 통해 주어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말씀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포기 못하느냐면 나의 착함과 나의 선행과 나의 행함을 포기 못하겠다는 것이며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이 아니고 싶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지옥이라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이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에 한번 완료되었던 것으로 끝나버린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성령이 오셔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현재 우리에게 덮침으로써 이젠 미완료가 없어지고 창세전 예정된 자를 건지는 작업이 된다는 겁니다.
나의 미완료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성령을 통해 지금도 적용된다는 것을 믿어지면 어떤 말씀이 오더라도 다 이루심의 일환으로 말씀이 이 속에 박혀서 발휘되고 사랑이 방출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이 사람은 자기 행함을 따로 챙길 필요가 없으며 이런 선물을 믿음이라고 한다는 거지요.
(딤후 2장26절)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 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쫓아가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쳐들어 와 버리면 그때부터 우리는 사로잡힌바 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사로잡힌바 되어 버리면 비로소 그때부터 우리는 무엇이 잘못이고 무엇이 문제가 있고 우리의 믿음과 행함에 어떤 오류가 있는 지를 그때부터 새롭게 알아가는 즐겁고 기쁜 시간이 우리에게 계속 남아 있는 것이고요.
과거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라는 그것이 시간을 뛰어넘어서 믿어진다는 것은 우리 솜씨와 능력, 우리 경건의 훈련결과가 아닌 주님이 우리를 사로잡고 지배했다는 증거가 된다고 하십니다.
성령과 더불어 새 언약이 들어오고 새 언약이 들어오면 모든 말씀이 택배로 그 안에 들어 있어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서 차후에 성경을 보게되면 아 그때 일이 이런 일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가운데 모든 공로를 주님께 돌릴 수 있는 그런 구조 와 영역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딤전 6장9절) 부하려 하는 자는 시험과 올 무에 빠지게 되나니
(딤전 6장10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우리의 죄를 밝혀주는 이런 말씀 자체가 즐거워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행함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통해 너를 계속해서 만왕의 왕이신 주를 바라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을 달콤한 꿀처럼 반갑게 그냥 편하게 받아들이시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빠져 나올 수 없는 역사적 환경 속에서 거뜬하게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약속의 말씀밖에 없다는 겁니다.
(딤전 6장15절~16절)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내가 이 땅에서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그 분의 빛 앞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만 그 빛 되신 분의 말씀만이 우리 속에서 너를 키워 나갈 것이라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항상 십자가에서 역사적 해석을 먼저 이야기하시고 그 다음에 맞은편에 보이지 않는 묵시적 해석을 같이 이야기를 해 주어야만 이 말씀이 나온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라고 연사는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존재 자체가 묵시적 성령을 받았기에 두 가지 모두 볼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우리 속에서 나온다는 거지요.
역사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행함으로써 무엇을 행해도 십자가에서 스톱이 되며 건너갈 수 없는데 성령이 와서 건너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의 끝도 십자가요 구원의 시작도 십자가이며 끝과 시작 중간에 십자가가 있어서 성령께서 십자가로 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피로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식으로 주님께 영광만 되게 한다는 것이랍니다.
(딤전 6장19절)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십자가 안에 참 생명이 있지 이 세상에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딤후 4장10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나를 위해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위해서 우리가 있다고 하니까 말씀이 달지도 않고 말씀이 고맙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사도바울의 말에 동의할 하등의 이유와 함께 동행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딤후 1장9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창세전이지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창세전에 있었던 예수 안이 그대로 이동해 와서 지금 성령을 통해서 너희 안에, 창세전에 그 상황에 너희를 집어넣었다 이렇게 말씀 하고 있습니다.
(딤후 1장12절) 이를 인하여 내가 이 고난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이 땅에서는 분명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은 수치스럽고 저주받은 모양새로 사람에게 평가를 받아요.
그런데 그 수치 중에 가장 수치가 무엇인고 하면 바로 십자가 죽으심이라는 겁니다.
(빌 2장5절~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께서 제일 낮은 자리까지 일부러 오셔가지고 자기를 치는 사람들의 종이 되어서 그들이 하라는 대로 다 합니다.
고후 13장4절에 보면 주님께서 연약하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셨다고 하십니다.
강자도 아니고 권력자도 아닌 연약한자의 종결 자로써 예수님이 오셨다는 겁니다.
연약 중에서 그렇게 연약할 수 없는 가장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가난하게 되심을 그것마저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은혜의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로 오신 것이고요.
구원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느냐 그리고 십자가 피의 의미를 알고 믿느냐가 표가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 피의 의미를 말입니다.
(딤후 2장4절)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자기 자신보다 말씀의 역사 활동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딤후 2장8절)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예수님의 죽음을 다윗의 씨와 연관시키시는데 다윗의 씨라는 것은 과거에서 내려오는 씨가 아니고 미래에서 먼저 주어진 것이 다윗의 씨라는 특징이며 시간세계를 무시해서 태어난 분이 다윗의 씨라는 겁니다.
미래의 씨와 다윗의 씨 사이에 어떠한 연결점도 없는데 없는 이유가 실제로 육적인 다윗의 자손 솔로몬에서 미래로 가는 씨에서는 끊어진 다리라는 겁니다.
역사성을 이야기해서는 구원하고 상관없고 다만 이것이 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윗의 씨가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것이랍니다.
인간에서 나오는 메시아는 악마가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증명하라면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증명할 길이 없으니 사람들에게 믿지 말라는 것이고요.
성령이 오시게 되면 믿지 말라고 해도 믿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수그리스도가 다윗의 씨라고 말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분이 에스겔 37장27절에서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다윗의 씨를 통해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동안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했던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묵사발 되게 하시고 그냥 주면 구원이 되는 그분의 의가 우리 속에 마음속에 박혀버리는 그것으로 구원을 다 이루었다가 우리 안에서 생성되는 방식으로 구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며 모세와 엘리아의 수고와 행위로도 안되며 그들의 삶은 장차 피 흘림을 보여 주는 시범 조교 역할에 불과할 뿐이지 구원은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주셔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장차 어떤 분 즉 예수님이 그 제물의 자리에 가서야 그 효과를 본다는 것이지요.
어떤 구원도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예정되어 있으며 우리의 몸이나 우리의 행위가 끼어들어서 구원이 되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헌금하는 것도 주의 십자가로만 구원되고 십자가로만 영광 된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헌금하는 것이며 헌금하는 행위조차도 십자가 앞에서 구원에 보탬이 안 되는 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성령이 없으면 자기 행위만을 계속 주어 담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죽을 때까지 결코 포기 못한다는 것이죠.
성령 받아도 마찬가지지만 감사한 것은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뭔가 돌발적으로 또 다시 되풀이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 그것도 죄라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만 증거되는 것이며 그런 삶이 성도의 삶이고 하는 것이고요.
이것은 육적으로 불가능 한 것이며 계속해서 그런 불가능함이 십자가의 은혜로 감사하게 나온다는 겁니다.
(딤후 3장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학에 유익하니
성경에서 3장16절에 중요한 구절이 많은데 요한복음 3장16절에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에서 세상은 모든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보내준 자만 사랑한다고 요한복음 17장6절에서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거예요.“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인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한일서 15장7절과 요일5장14절에 가면 주의 뜻대로 하는 것만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지 우린 모르는데 위의 말씀들을 합쳐버리면 주님께서 주님 마음대로 하신다는 겁니다.
마음대로 하시고 마음대로 주시고 주의 뜻대로 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환경이 된다는 것이에요.
(딤후 3장15절)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천국 갈수 있는 사람을 기존의 기준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기준에 의해서 가르치시는 것이 성령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쓰였고 성령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것이며 그것이 십자가 안 예수 안 이라는 것을 알면 이 해석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고요.
(딤후 4장1절)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여기에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한다는 말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심판이 실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은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가라지와 알곡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누는 것처럼 갈라지게 한다는 거고요.
어린 아이(그리스도인) 속에 같이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네가 어떻게 대우 했느냐로 이미 심판이 그렇게 갈라진다는 겁니다.
목마를 때 물주고 그냥 예수님을 믿고 했는데 그것이 누구에게 한 것이냐면 주님께 한 것이라는 거죠.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그리스도인을 핍박 한 것이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랍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행적들이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가지고 움직이신 것인데 바울 본인은 사람만 보이고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니 예수님은 살아계시는데 이미 과거에 죽은 사람으로 오해했지요.
그래서 역사적 해석이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딤후 4장3절~4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사욕이라는 것은 내 것이 있으므로 해서 그리스도께는 관심 없고 자기 잘 되는 것에만 관심 있다는 겁니다.
(딤후 4장6절) 내가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하늘나라로 갈 기약이 다 됐다는 거고요.
(딤후 4장7절~8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받아 봤자 도로 돌려 드리지요. 써 보아야 내게 합당치 않은 것을 안다는 겁니다.
(계 4장10절)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딤후 4장14절)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사도바울이 앞치마로와 손수건으로 죽은 자 살리고 죽은 유두고를 살리고 또한 이적을 베풀고 계시를 전하지만 사도바울 중심이 아니며 자신의 행동이 계시의 내용에 들어가지 않는 다는 겁니다.
계시는 영원토록 예수님의 피지 복음 전하는 자의 피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성경에서 의라는 것은 우리의 전부를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되게 하는 능력 자체를 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고자 그런 시도 한다면 우리도 역시 행함 주의자에 불과 할 수밖에 없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본성상 늘 그러한 행함 주의로 자기 잘남과 자기 우수함을 주님 앞에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평생토록 지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십자가의 피가 다시 생각나게 해서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보지 않고 믿도록 성령께서 말씀자체를 십자가를 통해 심어 놓았다는 사실을 다 시 한번 감사할 수 있는 자가 성도라며 수련회를 은혜 가운데서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