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 받는 식으로만 일하시는 주님과 인간을 무시하는 십자가
(마 25:1, 개역)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 25:2, 개역)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마 25:3, 개역)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마 25:4, 개역)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마 25:5, 개역)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마 25:6, 개역) 『밤 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마 25:7, 개역)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마 25:8, 개역)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마 25:9, 개역)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마 25:10, 개역)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마 25:11, 개역)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마 25:12,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마 25:13, 개역)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열처녀 비유는 종말의 비유다.
종말이란
인간 쪽에서 준비 할 것이 없다 라는 뜻이다.
종말로부터 개무시다
(종말은 반드시 개무시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무조건 인간이다. 인간은 수에 칠 가치가 없을 정도로 개무시 받아야만 한다. 여기서 그 트라우마로부터 인간은 방어적기제로써 그렇다면 검증받은 안무시받은것들을 쌓아 올린다. 성경에서 인정받을수 있는 것만 모으면 된다고 우기는 것이다. 가인의 제사가 그러했다. 이것이 성전이라는 바벨탑이다. 그 당시 존경받던 바리새인이야 말로 예수님에게만은 독사의 새끼라고 개무시도 그런 개무시 없을 정도로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무시했고, 그들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안 죽이고는 못 배길 정도로 새로 맹글어 버린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래서 발생된 것이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개무시로 치닫기 위한 십자가다.)
일방적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실행해 버리겠다는 취지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세는 무시 뿐이다.
너는 너 대로 해라 나는 나 대로 할 것이다 라는 것이다.
여호와가 누구관대?(애굽 바로 왕)
그렇다면 인간이 준비하는 것이 무엇일까? 안무시 받는 것만 모으는 것이다.
자기가 봐도 자기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것
또 독단에 빠지지 않도록 남들로 부터도 무시 받지 않은 것
여기다 칭찬 받은 기념비가 된 것들을 모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정작 그 종말의 비유를 보면서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까막눈이 아니라면 이미 해석할 줄 아는 능력이 이미 자리 잡아버렸고
또 그런 해석력에 있어서 삶을 지탱해 왔기 때문에
그 잇기라는 접속
천국까지 유비쿼터스를 펼칠려면
접속이 끊어지지 않도록 예수 안에 남기 위해서라도 준비를 가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접속 잇기 접촉 연합 화합 화목
십자가도 접속하기 위한 수단이요
부활도 접속이다.
클릭 이다. 클릭
내가 주님의 세계에 클릭 하는 것이다. 컴퓨터 마우스로 클릭 하듯이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 쪽이다.
접속 차단이다.
종말이란 단절이다. 그 단절이 바로 개무시다.
어느 정도로 인간을 개무시 하는고 하니
접속 자체를 차단하는 식이다.
단절 단절 단절 뿐이다.
종말의 비유는 곧 하나님 나라 비유다.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인간의 천국관을 개무시 했으면 직접 뛰어들었다.
그리고 단 한 놈도 이 하나님 나라를 반기는 놈이 없다 라는 것을 쪽쪽 밝혀버린다.
그런 숨겨진 내막을 무시하고
끝까지 자기 쪽에서 접촉 접속을 시도하는 그 가상한 노력을
부자청년이든 탕자의 형 맏아들이든
계속 계속 줄기차게 무시하지 말아 주세요 라고 넘어오고 있다.
" 나는 마음의 문을 열고 언제든지 맏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어서 내 품에 돌아오세요 하나님 나라" 라고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우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천국이 그들에게 다가가면
마귀 취급하듯이 내어쫏는다.
이 모순의 간격을 무슨 수로 좁히랴?
분명히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데
절대로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저들은 사기를 치고 있다.
간격을 좁힐 수 있다고 사기를 친다.
너가 안 행해서 그렇지 행해 보면 좁혀질수 있다 라고 우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주장이 왜 수세기 동안 충돌하면서도 멈춰지지 않는 이유는
놀랍게도 그런 주장을 함으로써 소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즉 유익 이익 인정 칭찬 댓가 보람 등등이다.
종말이란 종말의 영만이 활동하는 무대이다.
그렇다면 종말의 영인 성령은 단절 즉 개무시로만 일하시는데
놀랍게도 인간의 활동인 육의 소욕은 놀랍게도 자기가 자기를 봐도 인정할 만큼
도저히 개무시할수 없는 [인정받음]이
주님으로부터 심겨짐을 당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아니 펼치지 않고서는 안됨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국 사람이 아니라 서울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천국이가 말이다.)
인간의 그 어떤 행동(선이냐 악이냐의 행동)과 무관하게 접속의 단절로써
주님 쪽에서의 일방적인 결정으로써만
토기장이의 권한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독재에 그런 부조리에
여기에 자기가 자기를 변호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길은
오로지 개무시 받지 않는 것만 골라서, [인정받음] 것만 모으는 것이다.
또 그런 신앙인을 모은다. 사도바울처럼 행하면 접속이 되는 줄로 알고 있다.
중간에 중보자를 인정받은것들인 신앙영웅 따라하기로 일관한다.
종말의 비유의 내막은 이렇다 (마태복음25장에서)
기름이 얼마나 그 미련한 처녀를 개무시했으면
기름으로부터 그 여인들이 준비함을 당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다섯처녀 다. 정작 자신들에게는 슬기로움이 없는데 말이다.)
남들처럼 신랑이 그때 오면 그때 준비하면 될 것을
미련하기 짝이 없도록
기름으로부터 개무시 당해서
기름으로부터 준비함을 당해야 함을 당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에게는 그것이 일부러 기다리다 기다리다 기다릴때는 안오고, 일부러 비켜가고 꼭 조불때? 잠잘때? 한참 기다리다 잠깐 오줌 누러 간 그 틈사이에 신랑이 오는 식이다. 틈사이를 일부러 노렸듯이 말이다. 혼인잔치때 딴 때는 안오고 꼭 장가가는 날 잡으니까 그때 맞추어 온다. 초청이다. 사울왕이 기다리다 기다리다 안와서 제사드맀뿌니까 일부러 짠 하고 숨었다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초청은, 이 틈 사이에 오는 것은 가로막음이다. 단절. 종말. 주님 쪽에서 넘어가는 방식은 완료 뿐이다. 그래서 종말이다. 반드시 아브라함을 비언약으로 규정해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충돌하듯이 비언약과 언약의 차이성을 극대화 시키면서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이 주도권을 쥐는 식으로 육의 소욕을 단절 시킨다.
인간 쪽에서 넘어오는 방식을 개무시하는 방식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 또한 그렇다
양의 짖만 골라서 인정받을 짖만 골라서 했던 자들은 정작 개무시 당해버린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로 부터 개무시 당했다고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움으로써 우기기 때문이다.
주여 언제 주님이 우리들로부터 개무시 당했습니까?
언제 우리가 주님을 개무시 했습니까?
언제 헐벌었고 언제 목말랐으며 언제 주렸습니까?
만약 그랬단 것을 우리가 알았더라면 우리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시끄럽다
소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완전 개무시 해버린다.
그들이 내 세운 것은 인정 받을 짖만 골라서 했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예수님을 개무시 한 것이다. 성령을 개무시 한 것이다.
반대로
예수님이 배고파 주리든 말든 자기만 챙겨 먹고
예수님이 목말라하든 말든 자기만 마셨고
예수님이 헐벗든 말든 자기만 챙겨입는
그야말로 염소같은 인간에게 (특히 삭개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쳐들어 와서
너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 줬고
너는 내가 목마를때에 마실 것 줬고
너는 내가 헐벗을 때에 입혀 주었다.
아니 무슨 소리 하십니까? 예수님?
저는 그런 짖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저 밖에 모르는 놈입니다.
아냐 아냐 소자 한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야
일방적으로 해석해 버리니까
그냥 대략난감하지만 입에 떠 먹여주듯이 하시니 그냥 뻔뻔스럽게 먹는 것이다.
예수님이 분명 잘못 아셨을텐데 분명 분명히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저 분 보다 제대로 알 리가 없을터?
뭐 구지 저렇게 해석을 해 버리시니 나야 어쩔수 없지 라꼬
입 싹 딱고 챙겨먹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들의 상황 정황을 살펴보고 인간들의 각자의 의견을 수렴해서 해석하신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해석해 버린 것이다.
즉 개무시 해버린 것이다.
그 개무시가 도리어 감사하게 작용된 자는
그야 말로 개들이다.
그러나 이 개무시가 도리어 강퍅으로 작용된 자는
왜 개무시 하냐 라고 일방적인 예수님의 해석 때문에 졸지에 없던 강퍅이
새로운 해석 때문에 새롭게 심겨져서 생겨버린 강퍅인 진노이다.
종말이란 이렇게 육만 비켜 가버리는 식이다.
육은 아무리 선하든지 악하든지 상관없이 무조건 비켜 가버리는 식이다.
육은 그러든 말든 나는 영을 무시하면 되지 뭐 라고 반드시 영의 소욕을 무시하는 식이다.
그런데 꼭 그런 상황에 꼭 반드시 그 영이 태클을 걸고 들어와서태클걸어 맞물리는 식으로 일한다.
육은 종말의 영이 그러든 말든 자기 일만 하든데 있어서
성령으로 부터 꼭 육의 속내가 뒤짚어 지는 짖만 골라서 하기 때문이다.
육이 선을 추구한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면
반드시 그 육의 선을 무시하는 영의 악한 짖만 골라서 하고
또 반대로 눈치를 채서 육이 그러면 나도 악한 짖 하지 뭐 라고 하면
반드시 영은 선한 짖만 골라서 그 육의 소욕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육이 할 수 있는 짖은 딱 하나 뿐이다. 선악 이것 뿐이다. 문제는 영의 일은 못하는 겁니다.
영의 일
즉 영은 영만이 하기 때문이다.
안 보이는
개무시받는
눈에 아무 증거 안보이는 일을 못하는 것이다.
눈에 아무 증거 안보이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수 있겠는가?
그래서 육은 눈에 보이는 개무시받지 않는 짖만 골라서 하는 것이다.
해석 안되는 일은 못하고
해석 되는 일만 골라서 하는 것이다.
사실상 주님은 정녕 죽으리라 속에 다 가두어 버렸다.
그래서 죽음을 해석할 줄 아는 자는 없다.
도리어 죽음으로부터 해석 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까불락 거리면서 살아 있다고 여기니가 삶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 해석할 줄 안다고 하지만 정작 죽음을 해석할 줄 모르는 이상 생명은 당연히 해석할 줄 모르는 것이다.
결국 둘다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 쪽에서 해석해 주셔야 하고
그런 예수님으로부터 해석 당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가 해석한 것을 손 놓아야 한다.
때려죽어도 본성상 해석한 것을 손 못 놓기 때문에
성령의 소욕은 우리를 개무시하면서 가로막는 것이다.
즉 닭울음으로부터 해석당하는 가로막힘 곧 개무시 이다.
당나귀로부터 개무시
소자로부터 개무시
어린아이로부터 개무시
고창병 걸린자로부터 개무시
거지나사로 로부터 개무시
그 거지나사로는 개로부터 개무시
이 단절성 곧 성령의 소욕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들이 해석한 천국관 종말관 구원관으로
마귀 까지 넘어서가면서 천국으로 나아갈려고 하고 무한접속을 시도하는 것이다.
십자가도 그런 식이다.
그러나 그 반대다. 천국으로 개무시 당하고
십자가로부터 개무시 당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가 나에게로 넘어오는 것이요.
내가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천국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나에게로 쳐들어 오는 것이다.
거룩으로 내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룩이 나에게 쳐들어 오는 것이다.
그때 부자청년의 어릴적부터 가득 모아온(접속해온) 거룩은 순 엉터리였던 것이 들통나는 것이다.
그런 거룩이 가짜였다면 안 모았을 것이다. 유일한 접속의 길이라고 여겼기에 다른 길은 없다고 여겼기에 올인했던 것이기에 예수님 앞에서 까지 당당하게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주님 쪽에서 몰고온 거룩을 보니까 비로소 가짜였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주님이 몰고온 거룩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우리가 평상시에 무시 무시 개무시해 오던
비천한 닭이다. 마음껏 잡아먹었던 그 닭
마음껏 때렸던 당나귀
마음껏 따먹었던 무화과나무열매
마음껏 애들은 가라 라고 자신이 어른이 된냥 무시했던 소자,
(여자. 거지, 창녀, 세리, 강도, 저 사람과 같지 않음을 감사 합니다 라고 했던 그런 무시했던자, 그런데 그들이 선지자일 줄이야?) (결국 참선지자냐 거짓선지자냐의 차이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연관된다. 십자가란 종교꾼들의 수행의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개무시 받는 짖을 일부러 일방적으로 펼쳐서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정도로 너는 악마새끼다 라는 개무시를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그런 것만 골라 골라 골라서 담아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약속이다. 비웃음만 골라서 담아버린 웃음(약속) 이다. 인간이 개무시해버린 것만 담아버린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유일하게 인정한 것은 십자가 뿐이기 때문이다. 다 이루었다.)
그런 보잘 것 없는 육의 소욕으로부터 개무시당한 것만
영의 소욕으로 앞장세우는 것이다. 그러니 종말이란 단절성 뿐이다.
믿음이란 그래서 종말이를 쳐다보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이 그래서
아 나는 왜 이렇게 예수님을 개무시 했던 고 라고 어찌할꼬 라고
왜 나는 왜 이렇게 예수님을 비웃었던 고 라고 어찌할꼬 라고 가슴을 칠 때
주님께서 준비하신 죽음(개무시)이라는 약속이 도리어 나를 웃을 수 있게
영접해 주더라 라는 것이다. 이 영접이 준비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 이레
이 준비 된 것이 있는데 괜히 내 쪽에서 이 준비된 것을 개무시하고
내가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만 모았기 떄문에
예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의 죽음을 개무시했던 것이다.
그 어린양의 죽음을 피하고 싶어서
무지해서 몰라서 어리석어서
그 어린양의 죽음을 피하고 싶어서
그 어린양의 개무시를 피하고 싶어서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 아무리 달려봐도 못피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리어 그 어린양의 피가 나의 소욕을 곧 나 자체를 개무시하고 들어오는 것이다.
쳐들어 와서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사랑을 다 이루었다고
이 질투가 아니면
내 소욕을 개무시하는
성령의 단절성 곧 종말이 아니면
나를 개무시함이 아니면
인간은 자기 쪽에서 준비한 접속 잇기를 멈출수가 없는 것이다.
누가 과연 슬기로운 다섯처녀 일까?
기름을 준비하겠다는 똑똑한 처녀일까? 기름을 준비할 수 있다고 여긴?
아니면 기름으로부터 준비 당함을 당한 미련한 처녀일까?
놀랍게도 성경말씀은 그 어디에도 인간에게 주도권을 준 적이 단 한번도 없을 정도로
개무시 하고 있는 영의 말씀이다.
그래서 육의 소욕은 모조리 다 폭로 당한다.
사도바울의 삶을 우리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거짓말임을
자기가 해놓고도 자신이 그것이 왜 거짓말로써 인용했는지를?
발각당하는 미끼로써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농락당하는 것이다. 개무시 당하는 것이다.
거지나사로처럼 ...
얼마나 우리가 성경말씀을 개무시 하는지를
그거 안들킬려고 성경말씀 지키기로 개무시 안했다는 것을
도리어 인간들의 대상물로 취급당하면서 말이다.
(참!! 달란트 비유도 동일하다. 빠뜨렸는데! 인간이 은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가 인간을 소유하니까, 그 기능에 인간이 장악당하는것이다.
그러므로 잉여는 계속 잉여를 남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잉여가 잉여를 남기기 때문이다.
은사가 계속해서 기능으로써 잉여를 남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얼마나 은사를 인간의 소유물로 봤으면, 개무시했으면, 계산을 해보니 남는 장사가 안된다고 보니까, 접어버리고 땅에 파묻어버리는 것이다. 원금 그대로 원금을 바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계산법에 의해 불의한 청지기의 그런 똑똑한 계산법이 틀렸음이 들통난다. 은행에 집어넣었더라고 이자(잉여)가 붙었을텐데 왜 못 남겼느냐 에라이 지옥에 가라 이런 식이다. 즉 돈이란 잉여인데, 잉여가 인간을 사로잡으면 잉여는 남는 장사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이 잉여를 붙잡는 순간 제명이 된다. 남길수가 없다. 고여버려서 썩은 물이 된다. 물이란 그냥 흐름 그대로 흘러갈 뿐인데. 그 물을 그 잉여를 개무시하고 자꾸 자기 영역으로 흐름을 차단해서 고이게 해 버리니까 남는 잉여성 곧 흐름을 상실해 버리는 것이다. 자기가 관리하겠다는 자체가 문제다. 잉여가 나를 관리하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데 그것을 개무시하고 자기가 그 잉여를 관리하겠다고 하니, 남기기는커녕, 즉 잉여로 부터 남겨짐을 당할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썩어버리는 것이다. 모세가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을 보고 주님쪽에서 넘어와서 불 붙이시면 그냥 그 흐름을 그대로 탈텐데, 그것을 개무시하고 자신이 자신을 불 땡겨 버리니까 다 타버리고 소진해 버리니까, 왜 이제와서? 그 때는 안도와주고? 입도 허리도 몸뚱아리 다 늙어빠진 80세에 왜 하냐고? 뭘 할수 있겠냐고 따지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주님은 더 잘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너 자신을 너가 봐도 의지할 것 없으니 더 잘됐네? 라고 나무에 기름을 부어 불 붙여도 그 불이 활활 활 유지될까 말까인데? 도리어 찬물을 끼얹어져 불 붙이는 꼴이니, 내 열심히 특심이다 라고 개무시 할 수밖에 없는 것을. 그러면 더 개무시 해서? 오히려 잘 됐구나? 칠천명 남겨놨찌롱? 채널돌리기? 심각한 것 없제? 80살이 뭐 문제되냐? 라는 식으로 더 나은 개무시로써 일방적으로 쳐들어 와서 일하신다. 그만큼 얼마나 개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도리어 개무시 당함을 당함으로써 단절 시키는 것이다. 성령의 소욕 곧 종말 속에 넣기 위해서 말이다.)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
그러나
항상 주의 목전이오니
내가 주께만 범죄했사오니 주께서 순전케 하시리라
(시 51:4, 개역)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된 자라 내가 주님을 항상 항상 항상 개무시 했구나
누가 내가 개무시 당함을 폭로할래? 주여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제가 멍멍멍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짖겠습니다. 제가 가죠. 제가 가로막겠습니다. 눈을 막고 귀도 막고 마음도 막아서 단절 단절 단절을 외치겠습니다.
(사 6:1, 개역)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2, 개역)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 6:3, 개역)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4, 개역)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8, 개역)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10, 개역)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지롱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다윗 이사야 사도바울
이제 비로소 그들은 피조물 즉 개가 되어서 짖어 댄다.
유일하게 인간들만이 개 짖는 소리를 무시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만 외치는 것이다. 유일하게 인간만이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십자가
그러나 유일하게 십자가만 인정한 하나님
이 둘의 충돌이 거룩이다. 두 몸의 충돌이다.
십자가가 잉태한 피조물로써의 창조물이냐?
십자가가 잉태하지도 않은 인간이냐? 십자가도 믿음의 대상물일 뿐인 인간의 숙제물!
두 언약 : 하늘의 여자가 낳은 아들과 땅의 계집종이 낳은 아들의 싸움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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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참 신기하다
부자청년이 나름대로 자신도 인정할만한 것들을 가득안고 예수님께로 나아온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무시한다.
그것도 부자청년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자신이 개무시하는 하나님 말씀도 아예 무시하는 가난한자 개같은 이방인 이런자들에게 무상으로 아무 조건도 없이 다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이웃이라고 가치도 두지 않던 개무시하던 자들이다.
이것은 마치 스룹바벨 성전을 짖고자 할 때 그렇게 사마리아인으로부터 개무시 받았던 그 과거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저들에게 도리어 무상으로 목숨같은 돈을 전재산을 그것도 거룩을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문제는 더 심각하다. 만약 왜 너 거룩행한 것이 아무것도 없느냐? 뭐 개같은 이방인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지금 장난하냐? 라고 주님이 따진다면?
안식일을 나무했다고 처참하게 죽여버리는 그 주님이 따진다면 과연 어떻게 되나?
이것은 거룩을 어기는 것이다.
맞다 주님은 거룩을 어기라는 취지다.
인간 자신이 이룬 거룩을 무슨 수로 인간이 어길수 있으랴?
그래서 예수님이 몰고온 거룩 곧 유일한 십자가는 인간의 거룩과 일체 맞는 것이 없다.
인간이 십자가를 대상으로 해서 믿는 그 십자가의 믿음은
예수님이 몰고온 십자가란 전혀 다르다. 매일 매일 십자가가 다르다.
주님이 새롭게 만들어 낸 죄에 맞물려서 십자가도 매일 새롭게 다르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가 십자가 스스로 자기부인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회개나 자기부인은 십자가와 전혀 일치 하지 않는다.
흐르는 물에 자신의 회개 조각을 아무리 맞추어도 그 조각은 맞는 것이 없다.
차라리 그 회개했다는 자기부인조차도
십자가 라는 흐름에 던져 버려 물에 빠뜨려 죽여버려야 한다.
즉 항상 개무시했던 것을 맛물리게 해서 개무시하는 것이다.
부자청년은 가난한자를 알게모르게 개무시했다.
마치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개무시하듯이
어떤 인간도 자신이 개무시 안하는 자가 없다.
문제는 주님이 그것을 끄집어 내어서
맛물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은사의 기능이다.
개무시했던 자가 병들어서 죽었다 손 치더라도
그 기능은 늘 따라다니면서 역으로 공격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미끄러뜨리는 첩경을 평탄케 하는 성령의 일하심이다.
양쪽다 미끄러지게 하는 방식인
개무시 이다.
성전에 두 사람을 통해서 맛물리게 하는 방식
주여 저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 합니다 라는 인간의 꼬깃 감춘 속성을
콕 찝어서
들추어 내면서 십자가는 개무시 받는 싫어버린바 되는 방식만 골라서 증거된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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