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의 열매

갈라디아서 5:18-21 육의 열매 일을 했는데 자꾸만 잘못된 결과만 나온다면 그 일에 '문제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겉모습과 움직임은 생물학적으로 봐서 그다지 차이나지 않습니다. 동물세포로 구성된 인간의 신체는 외부를 통해서 에너지원을 받아 자체적으로 세포 가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뽑아내고 전달하고 소모하고 재생산하는 공장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남는 게 뭐지요? 결국 언젠가는 그 에너지의 활동이 쇠약해지면서 공장 가동을 멈추게 되면 더 이상 인간 몸을 통해서 에너지가 방출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니라 흙이라는 무기물로 모습을 바꾸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슬픈가요? 꼭 슬퍼해야 되나요? 에너지가 외부에서 나왔다가 기

성령과 약속

고린도후서 1:20-22 약속과 성령 성령은 관계입니다.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입니다. 성령님이 관여하지 아니하면 성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바 없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분석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근거와 예수님의 행적을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탐구해서 과연 예수님이 어떤 인물인지 정립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알게 되는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예수님에게 접근하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실수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이 실수한 것의 반복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들의 구원자를 고대했던 자들입니다. 행여 예수

자기 구원을 벗어나

빌립보서 1:19-21 자기 구원을 벗어나성경을 보면서 자기 구원 방식부터 먼저 생각한다면 이는 성경을 오해한 겁니다. 성경의 용도는 개인들의 구원욕망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고 쏠리고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제대로 진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워낙 자기 중심성이 강렬하게 각자의 내부에서 작렬하고 있기에 ‘예수님 중심성’이 되려면 하나님쪽에서의 가차없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인정사정 보지 않고 아주 단호한 조치가 구원받아야 될 사람에게 찾아오게

하나님의 원칙

히브리서 6:3-8 하나님의 원칙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소망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예상이 여지없이 깨어지는 식으로 찾아옵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될 때에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당황하게 되지만 동시에 참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에서 오는 그 생생함에 희열에 잠기게 됩니다. 일체 인간의 뜻대로 안 되게 해주시는 그 세밀함에 찬양하게 됩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자신의 뜻이 늘 좌절되는 경우가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이게 진정한 성도의 감사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사람의 사적인 일로 전환되어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평생, 자신이 자기를 관리하는 본성에 시달립니

예수님 부정

디모데후서 2:10-12 예수님 부정 마태복음 10:32-3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사람들은 일생을 걸쳐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투입하여 하루하루를 버터갑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 자신을 부정 못하는 지경으로 빠지게 됩니다. 자아는 더욱 굳건하게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물론 이렇게 자기를 위해 살면서도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질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추상적인 하나님과 자기와 비교가 아니라

다른 언약

히브리서 8:7-12 다른 언약 다른 언약의 내용은 먼저 번 언약, 즉 ‘율법에 대한 이해도’를 이미 갖게 된 사람들에게는 ‘비밀’이 된다. 율법의 진행과정은 율법의 내용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징계 형식으로 역사에 출현한다는 사실을 벌써 경험한 자들에게는 상당히 낯설고 생소한 내용과 그 적용이 됩니다. 즉 도무지 이 언약이 어떻게 인간 내부에서 성취가 되는지 암담할 지경입니다. 인간을 배제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 속에서 언약을 성취하시게 되는 상황은 인간의 모든 이해도를 넘어서게 됩니다. 마치 시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과 같습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영과 혼과 몸

데살로니가전서 5:23 영과 혼과 몸 우선 복음이 아닌 철학세계에서 인간을 어떻게 보는지 알아야 합니다. 플로티누스(204-270)라는 사람은 그 시대보다 몇 백년 전부터 내려오는 인간들의 지혜에 의해서 인간구조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인간은 감각적인 몸과 자율적인 영혼으로 나누어져 있다. 영혼은 신체와 다른 운명으로 태어났다고 본다. 영혼은 몸의 형상이 아니라 신의 형상이다. 영혼이 만약에 자기 존속을 위해 몸에 의존적이라면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존속의 기반을 잃을 것이다. 따라서 영혼의 불사(不死)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영혼은 육체에 의존적이지 않다. 인간의 구조에서 최상의 요소인 영혼은 불멸과 불사의 성질은 신으로부터

시험 받다

갈라디아서 6:1 시험 받다소원대로 되었다고 인생 성공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방향이 어디며 무엇을 위한 성공인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즉 누구 좋으라 는 성공인지를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시험’의 본질은 이런 겁니다. 과연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특정 내용, 곧 ‘예수님이 성취하신 복음의 내용’과 관련 있는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이성적으로 따지고 합리적으로 따져 봐도 세상 돌아가는 것은 그 어떤 특정 내용에 휘말리는 식으로 일관성 있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뭘 믿어도 그냥 덥석 물듯이 덤벼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는 경솔한 짓입니다. 요모조모 따져보고 믿을 만

예수님의 좋은 군사

디모데후서 2:1-7 예수님의 좋은 군사 사도는 사람하고 싸우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입니다. 예수는 실존 인물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입니다. 과연 그 예수라는 분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내내 약속하신 그 인물이냐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놓고서 세상과 양보없는 전쟁을 벌려야 하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신약 시대에서 구약 때 이스라엘과 같은 본질을 지닌 새로운 이스라엘이 등장했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 때 이스라엘은 전쟁을 주업무로 해서 등장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싸우도록 하나님의 이름께서 그들을 몰고 다녔습니다. ‘그리스도

생소한 계시

고린도전서 14:20-25 생소한 계시 이사야 28:11-12에 보면,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고 있던 계시의 내용이 이방인들에게 참으로 생소하게 들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생소함을 그냥 그대로 전해야 하는 임무가 바로 이스라엘에게 벌써 주어져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없는 일은 나서지 않는 법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 손실을 따지

주되심

빌립보서 2:9-11 주되심 현실이란 곧 ‘예수님의 주되심’을 나타내는 상황입니다. 현실에 중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이 현실의 주인공이나 중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현실관은 주로 ‘자기 스토리’로 채워집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식으로 인생을 살아 간다’가 늘 관심거리가 됩니다. 어느 듯 자신이 ‘주’가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에게 있어 ‘예수님의 주되심’을 받아들이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저 구석진 곳으로 밀어넣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실 중심의 자리에는 이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에 대해서도 심판하고 평가내릴 수 있고 구원을 결정

그리스도의 옷

갈라디아서 3:26-27 그리스도의 옷옷이란 신체 위에 걸치는 물질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이때 신체는 옷에 의해서 변형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옷으로 인해 자신의 신분과 직위와 기능의 특색이 외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것’으로 신분이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는, 성도란 태어난 몸 그대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몸+그리스도=성도’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아담의 몸과 그리스도가 어떻게 결합이 가능한가 하는 겁니다. 물체와 물체의 결합에서 접착제가 동원됩니다. 그리고 물질과 물질에는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결합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와 타인의 몸의 결합

기도의 내용

골로새서 1:9 기도의 내용 뜻이 통하지 않는다면 답답한 일입니다. 기도란 누구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인데 상대방께서 아무런 답변이 없다면 기도는 헛수고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내용도 중요하고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서 기도자가 목숨을 바쳤는지 여부도 중요합니다. ‘목숨을 건다’는 말은 자기 목숨을 자기 통제 아래에 두지 않겠다는 자세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옵시고” ‘하나님의 뜻’이란 구약시대때부터 이스라엘을 통해서 줄곧 알려졌습니다. 지적인 내용으로도 주어졌지만 구약 이스라엘이 그 지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갈라디아서 5:16-17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누구로부터 욕을 얻어먹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이 경우 대부분의 경우는 욕얻어 먹는 쪽이 납득되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같은 세상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서로 다른 판단 기준으로 각자의 생활을 하고 있다가 마주친 겁니다. 이는 곧 서로 다른 정의관과 죄악관을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선생님께서 어떤 학생에게 지적할 때, 그 학생을 본인이 만들어낸 질문이 아니라 선생님이라는 외부인으로부터 강요받는 질문 앞에서 노출된 겁니다. 그러면 그 학생을 그 외부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하면서 기존의 자기 세상관이 수정 내지는 교체될

사랑이라는 유산

히브리서 6:9-12 사랑이라는 유산사랑이 없으면 미움이겠지요. 사랑 아니면 미움, 참 하나님의 뜻은 이미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꾸준히 역사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면서 사랑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에게 다 바치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사랑만 쏙 빼가는 식의 관계란 하나님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 달성에 실패한 후에 하나님께서 구상하신 전부가 하나님의 아들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나라를 유업, 곧 기업이라는 형식으로 인간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기업이란 인간이 구상한 나라가 아닙니다. 언약(=약속) 안에 있다는 조건 하에 인간에게 선물을 주시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조건

표적과 기사

히브리서 2:4 표적과 기사 예수님 당시도 그랬지만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표적과 기사로 대단합니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우선 오순절날 성령강림부터 시작해서 사도행전 3장에서는 앉은뱅이가 걷게 됩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부부가 한날에 동시에 죽게 되며 옥에 갇힌 베드로는 천사에 의해서 옥에서 풀려납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는 베드로의 여성제자 다비다가 죽은 가운데서 소생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는 베드로가 또 옥에 갇히지만 천사가 또 구해줍니다. 사도행전 14장에서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걷게 되는 기적을 보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는 사도 바울의 손 수

구박 덩어리

히브리서 10:32-34 구박 덩어리 이 세상은 이미 한 마음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의 세계는 결국 동일한 목표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목표가 같으니 안 통할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살기’입니다. ‘나 살아남기’입니다. 살지 못하고 죽게 되면 이 인간 세계에서 탈락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왕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중도 탈락되지 않고 오랫동안 ‘이 세상 사람’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는 방법은 자기‘산업’을 갖는 겁니다. 소위 ‘전문직’을 갖는 겁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그것으로 남들 앞에 당당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것이 사람들의 일치된 삶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런

중 매

고린도후서 11:1-3 중매‘중매’는 미혹된 현실의 실정을 밝히는 식으로 사도는 실시하게 됩니다. 뱀이 먼저 인간을 향하여 미혹케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람의 능력으로 전의 시절로 되돌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혹’이란 세상을 보는 관점 자체가 ‘미혹된 상태’로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릴 때, 놀러가서 보았던 그 아름다운 경치를, 어린아이 때의 심정으로 다시 느끼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습니다. 이미 그 때와 다른 관점으로 지금의 현실관을 나름대로 철두철미하게 재구성하게 됩니다. 지금의 아름다움에 이르지 못한 것은 다 처냅니다. 그 결과로 어릴 때의 그 아름다운 인상은 사정없이 제거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영원한 위로

데살로니가후서 2:15-17 영원한 위로 구원은 들음에서 나며, 들을 수 있는 재료는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보낸 자가 하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은 아름답습니다.(롬 10:13-15) 이처럼 말씀을 전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는 것은, 인간들의 생리가 언어를 통해서 이 지상에 집단체계를 형성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타인으로부터 위로받으면서 생에 활력소를 넣으려고 합니다. 힘들거나 때로는 지루하고 괴로울 때에 자기보다 더 안정적인 환경에서 지켜주기를 원합니다. 이 큰 조직체가 유지되는 것은 그 안에 인간들의 말(언어)들의 관계가 얽히

종의 멍에

갈라디아서 5:1 종의 멍에자유를 받아야 한다면 애초에 자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 세상에서의 자유란 ‘인간의 자율성’을 두고 말합니다. ‘자기 결정권’을 마음대로 발휘하는 것을 ‘자유’라고 봅니다. 만약에 인간이 누구로부터 자유를 부여받게 되면, 이는 본인이 원하지 않는 운명을 강요받는 바가 되어 ‘자유라는 이름’으로 누구의 종이 되는 격입니다. 인간 입장에서 온전한 자유가 되려면 모두 외부 간섭이나 관여가 철수해야 합니다. 시작부터 자유로워서 마무리까지 자율적인 때, 우리는 그것이 ‘온전한 자유’라고 여깁니다. 이 ‘온전한 자유’를 상상해 봅시다. 과연 그 자유로 써먹을 데가 어떤 경우일까요? 그것은 홀로 신이 되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uy Now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Blog
About Us
Message
Site Map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Terms of UsePrivacy Notice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

Home
Gospel
Question
Blog
Hel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