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건강을 위한 윤리의 회복
I. 들어가는 말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심리학은 미국 문화 전반에 걸쳐서 뿐만이 아니라, 신학 특히 목회상담 분야에서 큰 영향을 끼쳐왔다. 1920년대에 임상목회교육(CPE)의 등장과 함께, 정신요법적 심리학이 개신교의 목회적 돌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켜 왔으며, 그후 목회상담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심리학이 일반적인 구조를 제공했고, 또한 로저스의 내담자 중심 상담이론이 주요 자원으로 등장하였다. 목회상담 분야에서 이러한 심리학의 영향은 대표적인 목회신학자였던 씨워드 힐트너, 캐롤 와이즈, 웨인 오츠, 하워드 클라인벨 등의 글에서 잘 나타난다.
오늘날 상담이나 심리치료에 관한 글과 책이 많이 나오고, 교회나 종교단체에서도 이러한 주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는 현상을 보면, 심리학이 얼마나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나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심리학의 영향은 사회, 문화, 교육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교육 영화로 추천할만하며 교사들에게 한 번쯤 보라고 권하는 "죽은 시인의 사회"나 로빈 윌리암스가 주연하는 "굿 윌 헌팅"이라는 감동적인 영화에서도, 철저하게 인본주의 심리학의 기본 전제--인간은 신뢰할만하며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므로,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가 배어 있음을 본다. 교육 현장에서도 종래의 교육이 전통적인 가치를 존중하고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 강조를 두었다면, 이제는 수동적으로 지식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학생중심의 열린 교육을 강조하는 흐름 속에서 심리학이 깊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본다.
이런 현상은 상담의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오늘날 상담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절대 상담자의 가치를 내담자에게 강요하거나 쉽게 답을 던져 주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한다. 즉, 상담자가 내담자에 대해 무조건적 사랑의 마음을 갖고 그를 진실로 공감하고 받아준다면, 내담자는 자신 안의 분노나 열등감이나 자신을 미워하던 모든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며 스스로 새로운 삶을 시작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실로 오늘날 갈등과 마음의 상처로 괴로워하며 현실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에 있어서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심리학의 통찰력을 이용하는 이러한 상담의 접근 방법에 문제는 없는가라는 질문이, 특별히 목회상담에서, 제기될 수 있다. 물론 목회상담에서 심리학이 신학을 이끌고 가는 현상에 반발하여, 70년대부터 기독교 신학의 뿌리를 회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경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심리학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제이 아담스, 그리고 중도적 입장이지만 성경적인 것에 더욱 강조를 두는 게리 콜린스, 로렌스 크랩, 영성과 성장을 강조하는 클라인벨 등 성서적인 가치를 주장하는 많은 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오늘날 상담이 갖고 있는 문제중 가장 심각한 것은 상담에서 '윤리의 결핍' 이라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심리학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목회상담에서 신학의 뿌리를 회복하는 구체적인 대안이며, 다원주의 상황하에서 목회상담의 정체성을 올바로 찾고, 앞으로 목회상담에서 전인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다루어야 할 중요한 주제라고 본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윤리의 결핍 원인을 분석해보고, 상담에서 윤리의 필요성을 제시한 후,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II. 오늘날 상담의 문제: 윤리의 결핍
1. 윤리결핍의 원인
오늘날 규범적인 문화적 가치가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목회적 돌봄과 상담은 대부분 도덕적 안내의 과제를 저버리고 고통받는 사람의 정서적 역동성에 대해 분석하고 정정해주는 상담에만 그 활동을 집중해왔다. 대부분의 주요 개신교 목회학 저서들은 추론적 상담을 옹호해 왔는데, 이는 고통받는 사람의 정서적 반응을 그 사람이 상담상황으로 가져오는 가치구조 안에서만 분명히하고 재구성하는 것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추론적 상담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해결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담을 요청하는 개인들로부터 정서적이고 도덕적인 해결책을 이끌어 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담에서, 사람들이 갖고 살아야할 규범적인 도덕과 문화적 가치 상징들을 재구성해야하는 어려운 문제들과 씨름하려고 하지 않고, 골치 아픈 가치 문제들은 개인의 취향과 편애에 맡겨버리고, 단지 상호인격적이고 정서적인 역동성에 대해서만 말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칼 메닝거가 그의 책 Whatever Became of Sin?에서 제기하는 것도 바로 이 문제이다. 그는 만일 교회가 매일 매일 생활의 결정을 돕는 규범적 가치 상징들과 관련된 문제들을 더 이상 직면하지 않는다면, 정서적이고 상호인격적인 역동성에 초점을 맞추는 정신요법이나 목회적 돌봄이나 어떤 돕는 직업도, 도덕적 맥락을 제시하지 못해 결국은 가치 혼돈을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한다. 메닝거의 책의 요지는 가치문제와 정서적-상호인격적 역동성 둘 모두에 대해 균형 있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목사가 되었든 심리치료자가 되었든 거기에는 치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오늘날 상담에서 윤리가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가? 크게 두 가지 요인--다원주의의 등장과 심리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윤리적 규범이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권위의 중심이 그 영향력을 잃는 경향이 있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하나의 윤리적 규범을 요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것은 서로의 상황이 다름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역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그들의 생각을 분명히 정리하도록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사람들의 삶에 교회의 전통적인 가치를 절대적으로 강요하거나 영향을 주기가 어려워지
고 있는 현실이다.
또 한편 상담에서 가치관이나 윤리의 결핍은 심리학의 영향에서부터 온다. 프로이트나 융, 하르트만 같은 심층심리학자들은 도덕 철학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다. 특히, 프로이트는 그의 심리학이 도덕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생각을 갖지 않는 가치중립적이라고 생각했다. 초자아를 도덕성의 중심으로 본 프로이트는 만일 초자아가 너무 억압한다면 사람은 신경증적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예를 들면, 너무 성적인 것을 억압하는 문명의 도덕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경증적 히스테리를 갖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떠한 가치관이나 윤리 규범을 제시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프로이트의 후계자인 하르트만도 "과학은 어떤 목표를 사람이 추구해야하는가 하는 것이나 어떤 가치가 최상이라고 간주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도덕주의를 피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본주의 심리학자인 로저스의 "내담자중심 상담" 방법 안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외부에서 주어지는 가치는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 결정이 무엇이 되든 내담자가 자유롭게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상담자는 내담자에 의해 어떤 결과가 선택되더라도 완전히 허락해야 하며, 그것이 내담자의 온전한 성장 가능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 규범을 강요할 수 없다는 입장, 즉 가치 중립(Value free)적 입장에 있어서는 프로이트와 로저스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로저스의 입장은 더욱 확고하다. 그는 인간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낙관주의와 인간이 악의 있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신념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이론의 근거인 "개인은 그 자신을 인도하고 규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가정으로부터, 프로이트보다는 이런 가치 중립의 입장을 더욱 지속성 있게 갖게 되었다.
이렇듯 윤리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 부정적이라고 보는 심리학의 영향이 목회상담에서도 나타난 것은 씨워드 힐트너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의 하나인 Pastoral Counseling (목회상담)에서, 도덕주의는 목회적 돌봄과 상담에서 가장 위험한 것중의 하나라고 말하며, 돌봄과 상담의 상황에서 개인적인 도덕적 확신은 접어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내담자들이 그들의 윤리에서 좀더 자율적이 되도록 돕는 것이 적절한 목표라고 믿으며, 상담은 추론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상담을 보면, 그는 목사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접어두고, 교인의 가치 구조 안에 전적으로 머물기를 시도하는데, 이 점에서 확실히 그는 중립성, 다른 말로 도덕 상대주의 쪽으로 흐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힐트너의 이러한 방법, 즉 상담에서 목사의 도덕적 가치가 분리되는 방법은 목회심리학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과 많은 목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당시 폭넓게 읽혀지던 로저스의 영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1950년대에 이미 거의 모든 개신교 신학교에서 주요 교과과정으로 등장할 만큼 상담의 훈련 과정으로 크게 자리 잡은 CPE(임상목회교육)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CPE는 병원이나 요양소 같은 의료 기관을 주로 이용하면서, 목회상담을 위한 훈련에서 의학, 정신병학, 정신치료적 기술에 크게 의존하면서, 목사와 신학생들이 짧은 시간 안에 그들 자신과 남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하는 수단으로서 큰 도움이 되어 왔다.
그렇지만, 이것은 신앙의 언어를 정신의학적 용어로 대치해 버리는, 즉 영혼의 돌봄에 대한 관심보다는 모든 문제를 심리학적 문제로 처리하고자 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여기에서는 신학적인 윤리가 설자리를 잃고 심리학적인 수용과 내담자 자신의 가치관만이 주요 관심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어반 홈즈는 CPE운동이 일대 일 상담 상황에 대한 선호와 예언자적 민감성의 결여에 의해 인간 인격의 사회적 차원에 대한 인식을 상실하고 있다고 말하며, 개인의 느낌과 감정에 대한 강조만을 하다보니 사회적 경험에 의해 축적된 가치관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상담에서 이런 가치관과 윤리의 결핍은 이 훈련을 받는 모든 목회자로 하여금 이제까지 배워온 신학적인 윤리, 기독교적 가치관을 과연 포기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어떻게 이것을 조화시킬까 하는 고민을 갖게 만들었다.
2. 상담에서 윤리의 필요성
1) 현실적 필요성
깨어진 관계나 깨어진 삶의 회복과 치유를 위해서는 사랑이나 수용, 용서는 필수적인 조건들이다. 그러나 한편, 무조건적인 수용을 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가치관의 혼돈으로 말미암아 삶에 혼돈이 오고, 더 나아가서 정신적 질병을 유발하게까지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도덕적 혼란과 가치의 왜곡은 온갖 사회 문제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정신적·영적인 문제를 만들어내는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건강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가치와 의미를 필요로 하는데 낡은 권위주의와 그 동안 사회를 떠받치던 가치관의 붕괴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치관 혼돈을 겪게 하며, 마치 바다 한가운데 키나 나침반이나 지도도 없이 폭풍을 만난 작은 배를 타고 표류하는 것같은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이제까지 그들이 배워온 원리들을 더 이상 지키지 않으므로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특히 이혼, 낙태, 동성애 등은 규범이 빠르게 변해 가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혼돈을 느끼는 문제들이다. 이제 다원주의 환경에서 전통과 세속가치의 경계선 상에서 살고 있는 그들을 전통은 더 이상 만족시킬 수가 없으므로, 사람들은 옳은 일을 하기를 원하면서도, 도덕성에 대해서 혼란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서구 사회의 도덕적 혼란과 무질서는 바로 이처럼 절대적인 도덕 기준이 상실되면서 인간의 자율과 이성적 판단을 우선적으로 신뢰하는 데서 출발한다. 즉,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를 오랫동안 지탱해오던 전통적인 권위와 도덕적 가치관들이 무너지고, 이에 대신할만한 새로운 가치체계를 찾지 못한 채로 개인의 자유만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무질서와 혼란이 성행하는 것이다.
그 동안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강조하는 인본주의 심리학의 영향으로, 각 사람의 억눌려 있던 감정을 표현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격려하여 우리 사회가 평등 개념과 다양성을 수용하는 데 있어 획기적인 발전을 하는 등 사회 구석구석에 많은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나친 자율과 자유만을 강조함에 따라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가르침이나 권위를 무시하는 풍조가 생겨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하는 현실이 초래되었다. 문화의 축척과 역사의 교훈 및 인생의 경험으로 생긴 지혜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올바른 권위에 순복하는 것은 사회가 정상적인 질서 가운데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기틀이 되는 것인데, 인본주의 심리학과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속성 또는 타락한 본성이 맞물려 개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사회의 정당한 권위를 인정하는 인식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특히 목회 상담의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 사회의 가치관이나 윤리를 제처둘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예를 들면, 로저스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정신건강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혼외정사도 가능하다는 법을 제정하는 캠페인에 앞장섰던 적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 정신 건강을 위해서 혼외정사를 처방한다고 하면, 혹 성적인 억압에서는 해방될 수 있을지 모르나 양심의 고통이라는 더 큰 문제를 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다양한 욕구, 예를 들면,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 부부간의 지속적인 사랑 등이 있는데, 한 가지 욕구 때문에 다른 것을 잃게 되어 삶의 불균형을 초래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삶의 행복을 위해서 목회 상담은 내담자의 윤리적인 삶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윤리적인 맥락에서 상담을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의 혼돈은 점차적으로 삶의 문제, 심한 경우 정신적 질병의 주요 원인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2) 신학적 근거
목회상담의 근거가 되는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본래의 삶의 질서가 윤리의 근본이기 때문에 윤리를 깬다는 것은 근본적인 삶의 질서를 깨어 버리는 것으로 믿는다. 즉,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지으실 때 그 속에 질서를 부여하셨으며, 피조물들은 각자 자기가 부여받은 질서를 지키며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 그 질서는 각 피조물의 기본적인 삶의 원칙들이기 때문에 이 질서가 무너지면 피조물들은 진정한 삶의 길에서 떠나 고통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삶의 질서인 윤리를 범하는 것 자체가 곧 풍성한 삶을 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브라우닝은 이 문제에 대해 좀더 역사적인 접근을 시도하는데,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는 명백히 윤리적 타입의 종교이며 현세적 금욕주의의 종교임으로, 기독교는 유대주의 맥락에서 볼 때 윤리적 타입의 종교로서 이해되어질 수 있으며 이 전통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유대주의의 윤리적 성격에 대해 논하는 그의 주장을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에는 영혼의 돌봄자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성인--사제, 예언자, 현인, 그리고 후기의 서기관과 랍비 등--이 있었는데, 여기서 사제들의 제의적 활동은 계약법이 깨졌을 때에 죄를 속죄하도록 고안되었으며, 힌두 브라만이나 그리스 신탁과 비교해볼 때, 이들의 현저한 특징은 계약법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특별히 개인을 위해)이라는 것이다. 베버 역시 "사제인 레위인들은 공동체를 위한 희생제물을 드림에 있어서의 훈련이 아니고, 야웨의 명령을 순수한 합리적 지식으로 전할 수 있는 훈련을 통해서 그들의 특권을 얻는다"고 말한다. 비록 그들의 가르침이 내용에서는 원시적이라 할지라도, 레위인 사제들이 합리적이고 교육적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포로후 시대에 이들은 제의식으로부터 독립되어 율법전문가, 해석가, 선생의 그룹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후에 서기관, 랍비, 후기 유대주의의 바리새인이 되었다.
이렇듯 유대종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특별한 것은 실천적 합리성(practical rationality), 즉 마술적이고 신비적인 기술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밀접하고 매일의 행동에 관심을 갖는 것이었다. 이들은 뛰어난 목회적 돌봄의 실천자들이었으며, 이들의 지식은 비밀스럽거나 신비적인 지식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합리적 지식, 그리고 이것을 평범한 사람들의 매일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후대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법률적 의미까지 갖는 구전으로 보충했는데, 이들은 사제들과 비교해 볼 때, 변화하는 시대에 더욱 잘 적용할 수 있는 생동적인 율법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물려받은 전통에 충실하고 동시에 그것을 삶이 야기시키는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도록 확장하고 수정시키는 것에 부지런하던 뛰어난 실천적 합리주의자였으며, 따라서 연구와 합리적 논쟁은 그들의 주요한 연장이었다.
여기에서 구약종교의 소위 율법주의는 종종 신약의 사랑, 용서, 은혜에 대한 강조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본래 고대 근동에서 이루어지던 종교의 마술적 행위--초자연적이고 세속적 힘의 조작을 통해서 대중이 원하는 소원 성취, 고통 제거, 현재 보상 등을 약속하는 것--와 대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처럼, 마술이나 점을 통한 삶의 문제해결이 아니라, 유대주의는 매우 개인적이며 공적 행동의 실천적, 현세적, 금욕적, 그리고 윤리적 합리화를 일찍부터 강조했던 것을 본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에서도 계속된다. 예수는 반율법주의자가 아니었고 초율법주의자였음을 기억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사람은 도덕을 갖지 않고는 도덕을 초월할 수가 없다. 이상적인 초율법의 통찰력이 받아지기 전에 매일 삶을 인도할 법규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초대교회에서 대체로 음식과 할례를 포함한 제의적 구속은 거부하였지만--이것은 기독교가 우주적 종교가 되기 위해 불가피했던 것--사회 윤리적 행동의 영역 안에 있는 유대 율법의 배경은 옳은 행위의 척도로서 계속되었다. 이것은 바울이 믿음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삶의 실제적 안내를 위한 올바른 행위에 대해 강조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런 기독교 역사의 맥락에서 브라우닝은 교회의 중요한 사명은 오늘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윤리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규범적 유대주의의 도덕적 행동성격과 실천적 합리성의 전통에다가 '영적 존재'의 차원을 덧붙인 것이 기독교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용서는 무엇보다 죄의식과 패배감을 씻고 도덕적 삶을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윤리적 질문과 행위에 대한 심각한 요구가 없다면, 용서는 그 의미와 그 힘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의식의 중심은 용서의 차원이 되어야만 하며, 사실 용서는 기독교 예배의 불변하는 차원이다. 비록 도덕적 비젼을 제시하는 것이 진화하는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적합하도록 우리들이 변화하도록 돕는 의식의 한 부분일 수 있지만, 용서의 차원은 기독교 예배의 더욱 지속적인 부분이며 크리스챤의 도덕적 질문보다 더 높은 차원이다. 그러나 브라우닝의 주장처럼, 용서가 단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거나 죄책감을 제거하는 것으로만 이해되어져서는 안되며 이것은 언제나 윤리와 늘 함께 가야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돌봄은 먼저 사람에게 삶의 구조와 성격을 해석해 주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종교문화적 가치체계를 주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럴 때에 심리학의 치료적 수용이나 기독교의 용서가 간과하기 쉬운 윤리의 결핍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기독교는 유대주의의 힘있고 실천적인 도덕적 합리성으로부터 자라났으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본래의 전통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목회상담(크게는 목회적 돌봄)에 대한 유대-기독교 전통의 신학적, 윤리적 근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윤리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 맥네일의 책 A History of the Cure of Souls (영혼돌봄의 역사) 그리고 클랩쉬와 재클의 책 Pastoral Care in Historical Perspective (역사적 관점에서의 목회적 돌봄)도 기독교 전통에서 윤리와 목회적 돌봄은 거의 동의어였다고 주장한다. 즉, 목회적 돌봄의 역사에서, 윤리와 치료적 기능이 구분되지도 않고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목회상담은 윤리를 강조하는 신학적 전통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III. 윤리 회복을 위한 시도들
최근 많은 학자들이 상담에서 윤리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그 가운데서 클랩쉬와 재클, 하워드 클라인벨, 돈 브라우닝의 주장을 서로 비교하면서, 윤리회복의 움직임에 대한 시도를 분석해 본다.
클랩쉬와 재클은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목회의 기본적 기능을 다루면서 현대 목회에 결정적으로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영혼을 치유하는 세가지 기능인 치유, 지탱, 안내보다 화해의 기능이 이해되지 못해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전통에서 화해의 목회는 상호 의존되어 있는 두 개의 형태를 활용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두 개의 형태란 징계(교정, 목회적 훈계 또는 교회의 규범)와 용서(고백, 참회 및 사죄의 선언)이다. 어떤 개신교의 주류에서는 이러한 목회가 내용 없는 도덕주의에 대한 지나친 반응의 결과라고 과소평가하여 왔었다.
그러나 징계를 포함하는 화해는 현대 목회상담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것이라고 클랩쉬와 재클은 분명하게 주장한다.
현대인을 억누르고 있는 죄책감--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에서 오는 죄책감과 동시에 동료 인간으로부터의 소외에서 발생되는 죄책감--은 인간 고뇌의 한 형태로서 목회에서 다른 어떤 돕는 직업에 있어서보다 오랫동안, 깊이 있게 관심을 가져왔었다.... 화해에 대한 새로운 강점에서 볼 때 목회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은 치료 기술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보다 깊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단순히 듣는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지나간 이천 년 동안 서구 세계의 모든 분야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화해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실천했던 참회를 듣는 일, 사죄의 선언, 그리고 훈육을 통해 얻은 축적된 지혜를 사용하여 귀중한 공헌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화해에 대한 새로운 강조는 영혼을 치료하는 목회를 촉진시켜 우리 시대에서 치유의 능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한다.
그 동안 많은 개신교의 목회상담자들은 죄책감을 그 파괴적인 결과가 입증하는 것만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아 왔다. 율법주의적인 도덕주의를 파괴적이고 비기독교적이라고 적당히 배척한 나머지 죄책감을 해결할 효율적인 방법을 발견하는 데도 그렇고 사람들을 도와서 건설적인 양심을 발전시키는 데도 실패하여 왔는데, 이 점을 클랩쉬와 재클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클라인벨은 이 윤리의 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다룬다. 그는 일찍이 그의 책 Basic Types of Pastoral Counseling(1966)에서 수정된 모델이라고 부르는 목회상담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이것은 아직도 어느 정도 힐트너가 그의 추론적 방법에서 사용하는, 프로이드와 로저스의 성향과 "내담자 중심" 통찰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클라인벨의 모델은 많은 경우에 상담에서 지지적이고, 실재를 직면하고, 미래지향적이며, 정보를 주고, 적극적이며 행동적 접근에 대한 필요를 강조함으로써 프로이드나 로저스 이론에 깊이 영향을 받았던 다른 이들을 넘어선다. 클라인벨의 글은 현대 세속 심리치료 심리학의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목소리--과학적이 되고자 하고 도덕주의에 두려움을 느끼는 심리학--를 여전히 많이 취하지만, 이 책의 한 장에서 상담에서 윤리적 관심의 필요성, 즉 상담에서 도덕적 대결의 역할에 대해 논한다. 그는 자신 있게 "목사는 상담에서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결코 소심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후에 Basic Types of Pastoral Care and Counseling(1984)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이 윤리의 문제를 다룬다. 특히 그는 죄책감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그에 대한 접근 방법도 다양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사사로운 죄책감, 혼돈된 양심, 독선적인 양심, 개발되지 못한 양심,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 사회적 양심이 개발되지 않은 사람들 등을 제시하며 이들에게 어떻게 바른 윤리관을 심어줄 수 있을까를 구체적으로 논한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사사로운 죄책감은 다섯 단계를 거쳐서 해결될 수 있다: 대결(confrontation), 고백(confession), 용서(forgiveness), 회복(restitution: 파괴적인 행동의 변화), 그리고 화해(reconciliation). 이것은 공식적으로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속죄의 성례전으로 불리는 것으로, 오랜 화해의 전통을 가진 성례전의 지혜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 다섯 단계에 대해 좀더 논해본다.
첫째 단계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대결이다. 만일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만을 이야기한다면 이것도 문제지만, 상담자가 너무 수동적이고 수용적이 된다면 그도 역시 내담자에게서 신뢰감이나 공감을 얻지 못한다. 적절한 때에까지도 전연 대결을 하지 않는 상담자는 "잔인한 친절"에 종사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의 행동의 고통을 경험해 보기 전에는 변화가 되지 않는다. 대결은 이 고통을 알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그 행동이 변화되도록 돕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목회자를 그들의 종교적인 전통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죄책감을 느끼는 어떤 사람이 목사에게 와서 도움을 요청할 때, 만일 목회자가 그들을 수용한다고 하여 마치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직면하지 않고 묵시적으로 용서하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한다면 그들은 오히려 혼돈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상담에서 목회자는 결코 옳다고 판단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면 안된다. 도덕주의적, 독선적, 그리고 배타적이 되지 않으면서 기본적인 성실성 문제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둘째 단계로 고백이다. 자아 대결은 두 번째 단계인 고백으로 자연스럽게 이르게 한다. 자발적인 고백은 흔히 상담에서의 초기 카타르시스 단계에서 일어난다. 내담자에게 죄책감의 상처를 알아보게 하고, 죄책감을 쏟아 놓도록 격려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죄책감을 경험하고 표현하는 것은 정화하고 치유하는 과정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상담자는 내담자를 도와서 죄책감을 모든 면에서 충분히 경험하고 표현하게 하여야 한다. 시편 기자는 죄책감의 고통과 고백을 통해서 오는 정화의 해방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하고 주께 내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시편 32:1-5.
셋째 단계는 용서이다. 참회를 듣고 하나님의 용서의 통로로서(교회와 그 전통의 대표자로서) 봉사하는 것은 목회자의 기능이다. 이 목회자의 잠재적인 가치는 흔히 교회의 전통을 중요시하지 않는 자들에 의해 무시되기 쉬운데, 이것은 우리의 귀중한 유산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음주로 여러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과 상담을 한후(깊은 참회를 포함해서), 목회자가 그를 위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게 될 때, 이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인 기쁜 소식을 상징하는 화해를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은총의 통로로서 이로 인하여 정화와 용서가 그 사람에게 생생하게 와 닿게 되는 것이다.
넷째 단계는 회복이다. 만일 참회와 용서가 지속적인 변화와 화해로 이어지려면 사람들에게 근원적인 해를 끼치는 파괴적인 행동, 태도 및 신앙을 변화시키는 회복과 책임적인 행동이 따라와야 한다. 정화와 용서를 경험하게 되는 내적인 통로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나 자신들에게 행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또는 보다 관심을 갖고 책임적인 삶을 살기 위해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하지 않는 한 부분적으로 차단되게 된다.
"값싼 은혜"는 결코 변화를 가져오는 은혜가 아니다. 알콜 중독자들의 회복을 위한 열 두 단계의 프로그램은 준엄한 윤리적 자아대결의 중요성을 설명해 준다. 열 두 단계 중의 처음 일곱 개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잘못의 정확한 성격을 인정하는 것(참회) 을 포함하며, 나머지 부분은 "우리들이 해를 끼친 모든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것" 과 그렇게 함으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면 가능한 한 그런 사람들을 직접 고쳐주는 것"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내적 정화가 알콜 중독자로 하여금 영적인 각성을 회복하게 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목회자는 알콜중독자가 아닌 내담자에게 죄되고 무책임한 생활에서 오는 도덕적인 찌꺼기가 쌓인 삶을 철저하게 정화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대가로 내적인 평화와 용서 및 회복된 관계를 얻을 수 있다.
마지막 단계로 화해이다. 위에 언급한 과정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게 된다. 이처럼 대결적인 상담접근방법은 흔히 죄책감으로 마비되었던 사람을 해방시켜 보다 책임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며, 그들을 도와서 계속되는 자신의 악순환의 덫에서 해방될 수 있게 하여 온전히 기능하는 인간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시카고 대학 신학부의 돈 브라우닝 역시 "상담의 필수적인 요소인 수용의 개념이나 용서도 만일 도덕적인 명령이나 심판이 결여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주장하며, 상담 및 목회적 돌봄에서 윤리의 상실이 가장 심각한 문제임을 말한다.
목사는 병자와 죽어 가는 사람을 상담할 명백한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먼저 공동체로 하여금 병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종교문화적 견해를 갖도록 도와야만 한다. 확실히 목사는 결혼문제, 성문제, 이혼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상담해야 하지만, 먼저 그 사람들 안에 결혼, 성, 이혼의 규범적 의미에 대한 긍정적인 비젼을 갖도록 도와야 한다. 오늘날 목회 상담에 있어서 어려움은, 상담을 위한 맥락을 구성해야하는 의미의 구조를 발전시키는 것에 대한 도전보다도 상담의 도구를 토론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단지 윤리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학자들과는 달리 오늘날에 있어서 어떻게 윤리 규범을 만들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어느 경우에는 전통적인 규범이 자동적으로 오늘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적인 권위가 무너지고 있는 때에, 우리는 우리의 실천적 행동을 인도하도록 이제까지 받아지던 전통을 더 이상 무비판적으로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전통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한다.
오늘 우리의 상황에 맞는 실제적인 도덕 규범을 만들기 위해 그는 전통과 세속 문화(특히 심리학)와의 비판적 대화를 주장하는데, 다음 다섯 차원에서 상호간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첫째, 은유적 차원(우리는 어떠한 세계에 살고 있는가? 무엇이 가장 궁극적인가?). 둘째, 의무적 차원(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셋째, 욕구-경향성 차원(도덕적 판단을 하기에 앞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과연 무엇인가?). 넷째, 상황적 차원(지금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마지막으로, 규칙-역할 차원(위의 대화들을 통해 어떤 행동 규정을 우리는 만들 수 있는가?)이다. 이와 같이 대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권위주의는 오히려 신경증적 질병을 초래한다는 것을 오늘날 심리학에서 잘 밝혀주고 있기 때문에, 권위주의에 빠지지 않고 대화로서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도덕 규범을 세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트레이시(David Tracy)를 따르면서, 브라우닝은 그의 방법을 "수정된 상호 연결방법"(Revised Correlational Method)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틸리히의 상호연결방법--심리학 같은 세속 분야에 의해 제기되는 실존적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종교적 전통으로 연결시키는 방법--과 달리, 브라우닝은 '질문'들 뿐 아니라 '답'들도 심리학(또는 일반세속문화)에 의해 제시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브라우닝은 일반세속문화(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예술 등)중에서도 특히 심리학에 큰 관심을 보이는 데, 그 이유는 심리학이 현대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미국이란 상황에서 오늘날 삶의 복잡성, 종교적 언어의 상대적 약화, 우리 세계 안에 넘치는 의미성에 대한 요구 때문에 심리학들이 점점 종교의 영역을 차지해가고 있음을 그는 보면서, 다원주의라는 오늘의 상황에서 신학이 단지 일방적인 독백이 아니라 공적신학(public theology)으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 이런 상호비판적 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심리학의 기술적 배후에 있는 철학들과 기독교 신앙과의 상호 비판적인 대화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더나아가 비기독교인인 현대인)에게 오늘에 맞는 도덕 규범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IV. 나오는 말
오늘날 우리 문화의 도덕적인 혼란과 충돌 및 복합성은 혼돈된 양심의 문제를 만들어 내는데, 이러한 시대의 모습을 폴 틸리히는 이미 정확히 표현했다.
그 형태는 각각 다르지만 모든 개인에게 잠재적으로 현존하는 불안은 만일 익숙해진 의미, 권력, 신앙, 그리고 질서의 구조가 분해된다면 일반적인 것이 된다. 이 구조가 불안을 붙들어 매고 있다. 그러나 커다란 변화의 시대에는 이런 방법이 더 이상 실효가 없다.
롤로 메이도 우리 시대의 만화경처럼 변하고 있는 생의 도전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한다.
문화가 전환기의 깊은 충격을 받게 될 때 사회 속의 개인들은 점차 정신적, 감정적 충격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된다. 통용되었던 관습과 사고방법이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사람들은 독단주의나 순응주의로 전락하든지, 사실을 알려는 생각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확신과 새로운 토대 위에서 그들의 실존을 파악하려는 보다 높은 자의식을 가지려고 노력하게 된다.
현대인이 처한 이런 상황에서, 낡은 윤리적 확신을 회복하려는 광적인(그러나 쓸모 없는) 권위주의적 종교집단의 노력은 걷잡을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불안과 불확실성에 대한 방어적인 반응으로서의 반사작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람직한 정신건강을 위해서 어떻게 올바른 윤리를 회복할 수 있겠는가? 먼저 목회상담자들은 모든 가치관에 관한 문제에 대해 권위적인 해답을 주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랑과 관심을 갖고 지지해주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서 가치관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브라우닝이 제기한 비판적 대화를 통해 오늘날 기독교적인 윤리를 상담자는 자신 안에 갖고 있어야 한다.
일반 상담자가 가치중립(value free)적 입장을 취한다고 하나 분석해보면, 나름대로 어떠한 가치규범, 특히 프로이트나 로저스의 경우처럼 윤리적 이기주의를 그 배경에 가질 수 있으며, 이럴 경우 이러한 윤리적 이기주의를 내담자에게 제시할 가능성이 있고, 이것은 기독교적 상담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 기독교 전통 속에 구현되어 있는 인간을 향상시키는 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 오늘날 목회상담에서 전인건강을 위해 해야할 중요한 역할인 것이며, 상호 신뢰하는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혼돈되고 충돌을 일으키는 파괴적인 가치관을 재평가하고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목회자 개인이 사회학, 심리학 등의 연구를 통해 바람직한 윤리를 추구하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전교회적으로 이러한 일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카톨릭이나 일부 미국의 개신교회들은 사회문제, 예를 들면, 동성애 문제, 이혼, 낙태, 성, 결혼, 여성, 노동, 가난 등의 문제에 대해 교단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러한 바른 가치관을 교회가 사회 속에서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상담학적 측면에서 볼 때, 기독교인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이런 작업이 앞으로 목회상담자들이 해야할 과제라고 본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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