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전도 패러다임 바뀌어야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짜증나는 전도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1. 전도에 열심인 나라 

우리나라만큼 ‘전도’에 열심인 나라도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일단 한 번 기독교인이 되면, 주위 사람들을 모조리 기독교인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 국가도 아닌데 유난히 ‘모태 신앙인’이 많다는 것은, 기독교를 믿는 부모들이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자식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기독교인’이라는 라벨을 붙여주곤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우리나라 남자들 사이에서는 ‘기독교인 마누라를 둔 남편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남편이 천하의 강심장인 폭압적 남편이거나 아니면 마누라의 신앙이 형편없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그 가정은 분란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오가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편은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가 기독교인이 된다.

 

주의 사람들을 모조리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는 운동선수들 사이에 종종 나타난다. 예컨대 한 팀의 감독이 독실한 기독교인인 경우, 선수 전원이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어떤 여자 실업 배구 팀의 경우는, 경기가 끝난 뒤 선수 전원이 코트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TV 중계에 방영돼 관심을 끌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이 팀의 감독이, 팀웍과 정신적 안정을 위해 선수 전체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신앙의 힘’ 때문에, 이 팀은 한동안 여자 실업배구의 강자로 군림했다.

 

이보다 더한 경우도 있었다. 몇 해 전에는 한창 인기가 있던 공중파 TV의 일일 연속극에 ‘교회에 나가 보라. 교회에 나가면 좋다.’는 식의 대사가 자주 나와 특정 종교를 선전한다는 구설수에 휘말린 경우가 있었다. 당시 이 연속극을 집필하던 작가는 세상이 다 아는 ‘열성 기독교인’이어서, 작가가 자신이 집필하는 TV연속극마저도 포교의 수단으로 사용하려 한다는 비난이 들끓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들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요즘 서울역 광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나, 전철 혹은 버스 안에서 십자가를 들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동네에서 특정 교회의 전도지를 나누어주면서 교회에 나가라고 권유하는 사람들도 자주 만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국민 모두를 자기와 같은 기독교인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기독교인들의 전도 열기에 대해 일반인들은 극도로 불쾌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전도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다른 승객들의 표정을 통해 금방 읽을 수 있다. 한 마디로 보통 승객들은 ‘예수’를 외치는 전도자들에 대해 한결같이 ‘짜증스럽다.’는 반응을 보인다. 참을성이 떨어지는 승객의 경우는 아예 ‘시끄러우니 다른 곳으로 가든가 조용히 있으라’고 핀잔을 준다.

 

 

 

이쯤 되면 이것은 ‘전도’가 아니라 거꾸로 교회를 ‘동네 북’으로 만드는 ‘이적행위’에 가까워진다. 게다가 지하철 등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찬송가를 부르거나 찬송가 테이프를 틀고 다니는 것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기독교인들의 전도는 더욱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도가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 남기신 지상명령이 바로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행1:8)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야 한다는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전도에 나서는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들의 열정과 용기를 칭찬해 줘야 할 형편이다.

 

더욱이, 일단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영혼들’이다. 게다가 나의 사랑하는 남편, 자식,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이 지옥에 떨어질 판인데, 어떻게 그냥 두고 볼 수만 있겠는가? 비록 그가 불구대천의 원수라 할지라도,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그에게 하늘나라의 값진 보물을 전해 주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신앙의 선배들은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에게까지 순교를 감내하면서 복음을 외치지 않았던가?

 

전도는 기독교인의 당연한 사명이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실현을 위해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한국 기독교인들의 전도는 짜증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더 나아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먼저 ‘전도’의 올바른 개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인터넷 백과사전 ‘두산 엔사이버’이 의하면, 전도는 ‘어떤 도(道), 즉 종교적인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는 일’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신앙적 내용으로, 복음을 다른 지역에 옮겨 심는 원심적, 확장적인 행위를 가리키는데, 사명 또는 파견을 뜻하는 ‘미션’(Mission)이라는 말로 표현되며, 또 하나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달함으로써 인간을 회개시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든다는 내용적, 구심적인 뜻으로, 이 경우는 ‘에반젤리즘’(Evangelism)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첫 번째 ‘미션’의 의미는 기독교가 성립된 초기부터 철저하게 자각된 과제였다. 이것은 사회학적으로는 문화의 접촉, 변용(變容) 현상으로서, 이를 통한 게르만인의 서유럽화와, 근대에서의 세계적 규모의 접촉이 외국 전도의 눈부신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19세기는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위대한 전도의 세기’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 각처를 향한 ‘미션’이 조직적으로 행해져, 기독교는 사실상 세계 종교가 됐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복음의 눈부신 팽창을 가져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서유럽의 비기독교화에 따라 국내 전도라는 새로운 사태, 특히 특수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전도(특수선교)의 필요성이 야기되기도 했다.

 

두 번째 의미에서의 ‘전도’는 내용적인 것인데, 단순히 주변 사람들을 교인으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흔히 ‘전도’는 그것을 전파시키는 수단 방법, 때로는 대상에 따라 이름이 지어지고 분류되기도 한다. ‘개인전도’, ‘대중전도’, ‘교육전도’, ‘방문전도’, ‘가두(노방)전도’, ‘직장전도’, ‘문서전도’, ‘시청각전도’ 등이 그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전도’와 ‘선교’를 구분하는 경우도 많다.

 

 

 

즉 단순히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는 것을 ‘전도’ 라고 한다면, ‘선교’ 는 이보다 더 큰 의미,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과제를 실천해 나가는 것을 ‘선교’ 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70년대와 80년대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산업선교’, ‘인권선교’ 등이 중요한 선교적 과제로 부각되기도 했으며, 최근에 들어서는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노력이 가장 절실한 선교적 과제로 얘기되고 있다.

 

‘전도’와 ‘선교’를 구분할 경우 그 차이는 아주 명료해 진다.

 

즉, ‘전도’가 사람들을 죄된 세상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방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는 반면, ‘선교’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흩어지는’ 것을 강조한다. 이른바 ‘미시오 데이’, 즉 ‘하나님의 선교’라는 이념 역시 이처럼 ‘흩어지는 교회’의 모델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도’를 강조하거나 ‘선교’를 강조하거나에 상관없이 분명하게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일 수 있으나,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하고 회개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점이다.

 

 

 

이는 결국 전도와 선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위대한 전도자’인 바울도, ‘내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고백했는가 하면, 전도를 잘하는 것 자체도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 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고전12:6이하)

 

그러나 우리나라의 교인들은 전도를 하는 것을 개인적인 신앙의 척도로 보고 전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신앙도 좋을 뿐만 아니라 능력도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앙이 좋은 사람이 전도 역시 많이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전도가 개인적인 역량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은 전도의 주체를 혼동하는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성령의 은사로서 주어지는 전도의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사유화하는 것이다. 특히, 교회에서 해마다 ‘전도왕’을 선발해 시상하는 것은 이 같은 은사의 사유화를 부추기고 교인들 사이의 쓸데없는 경쟁을 유발하는 유치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도와 선교를 통해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확정시킨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일관적인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보편적 교회’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전도를 자신의 교회를 확장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앞서 말한 ‘전도왕 시상’에는 교인들의 전도를 통해 교회를 키워 보겠다는 목회자들의 속셈이 숨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교인들이 동네에서 주민들을 자기 교회로 끌어가기 위해 전도지를 돌리는 일이 요즘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심한 경우는, 다른 교회에 다니는 친구를 자기 교회로 끌어가는 경우도 ‘전도’에 포함되기도 한다. 이런 행태는 하나님의 교회를 확장하는 일이 아니라 교인 쟁탈전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땅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거나 ‘민족을 복음화한다.’는 구호들이 반드시 ‘최후의 한 사람까지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다원 종교사회에서, 그 사회의 문화적 특성과 다양성을 완전히 무시한 채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시도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히려 그런 태도는 사회 속에서 종교들 사이의 반목과 갈등만을 키움으로써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짚어 봐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전도는 아주 순수한 신앙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목표는 여러 차례 지적된 바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있다. 하지만 순수한 신앙의 열정이 반드시 전도만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 꼭 길거리에 나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쳐야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부 교회나 교단에서는 전도를 신앙의 척도로 보고 교인들에게 노방전도 등을 강요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일부 통신신학원 등에서는 아예 노방전도를 교과목의 하나로 정해 놓고 이를 학생들에게 강요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의 전도가 먹혀 들어가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만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전도가 뭔가 잘못돼 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잘못 되었기에 전도활동이 사람들의 불만을 사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타개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2. 미성숙한 공공장소 전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은 이젠 기독교인들에 보다 비기독교인들에게 더 익숙한 말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명동과 서울역, 강남역 등 서울 도심 중심지에서 이를 쉬지 않고 외쳐되는 이들 때문이다. 또한 서울 시내 지하철 각 호선마다 고정적으로 복음을 전도하는 이들의 단골 전도 명귀(名句)가 이것이다. 지하철로 출퇴근한지 10 년차 되는 김모씨는 아예 몇 호선 전철을 타면 어떤 방식으로 전도한다는 것까지 외웠을 정도다. 심지어는 찬송가를 틀어놓고 구걸하는 이들이 어떤 찬송가를 틀었는지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다.

 

 

 

예를 들면, 3호선은 양복을 입은 40대 남자가 한 사람 앞에 고정적으로 서서 일방적으로 큰소리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 또 1호선 시청역 안에는 쪽진 머리에 한복을 입은 60대 할머니가 성경책을 들고 세례 요한처럼 ‘종말이 가까웠으니 주 예수를 믿으라.’며 외치고 있다는 것까지. 또 지하철 2호선의 경우 40대 여성이 그 교회 목사의 부흥회 소식이 담긴 전단지를 무차별로 뿌리며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저주를 퍼붓고 있다.

 

 

 

서울역 광장 앞에는 시간대별로 조직적인 전도대가 피켓을 들고 전도하고 있으며, 명동의 소비지구에서도 일군의 전도대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피켓을 들고 찬양과 노방전도를 하고 있다. 이같이 공공장소라 할 수 있는 지하철과 서울시내 한복판에서의 전도 방법은 솔직히 믿는 이들에게조차 거부감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 현실. 그러니 믿지 않는 이들은 오죽할까? 라는 소리가 믿는 이들 내부에서조차 나올 때가 많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 라는 지상명령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도방법은 시대상황의 변화와 무관하게 몇 십 년 동안 일관된 방법으로 지속되고 있어 개선의 목소리가 요구되고 있다.

 

 일단, 이러한 전도 방법은 첫째 공공장소에서 너무 큰 소리로, 때로는 과도한 제스처까지 취해 일방적으로 행해진다는 점에서 다를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또 두 번째는 복음을 전하는 언어적 방법에 있어서 너무 저주스런 말만 되풀이해 듣는 이들로 하여금 거부감을 안겨준다는 점이다. “당신은 죄인이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다.”등 처음 복음을 접하는 이들에게 복음의 기쁨과 참 자유를 느끼게 해주기보다는 부정적인 한쪽 측면만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또한 공공장소에서 전도하는 이들 중에는 이단교회의 전도자가 많다는 점도 한국교회의 시급한 대책을 요하는 부분이다. 귀신론을 주장하는 이모 목사 교회, 몇 년 전 일반 언론에서 여자 문제와 거짓 안수 행위로 문제가 됐던 모교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단교회에서 전도를 하고 있지만 한국교회에서는 두 손을 놓고 방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기존의 건강한 교회 신자들이 하는 전도와 맞물려 비 기독교인들에게는 교회에서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수 백 개에 달하는 개신교 교파나 신학적 이단 가름의 잣대도 없기 때문에 점점 극성적인 이단교회의 전도 방법을 기존 교회와 기독교에서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상이다.

 

아무튼 공공장소와 길거리에서 보여 지는 이 같은 노방전도 방식에 대해 ‘싸구려 전도방식’이라고 일갈한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믿는 이들로서는 당연한 일이고, 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문제는 있지만 순수하게 봐야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건 그 사람의 은사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고 많은 이들을 구원하고 싶어 나선 노방전도 방식이 그 순수한 의도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때론 지하철에서 큰소리로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전도자와 ‘조용히 하라’고 반박하는 이들 간의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번질 때도 많기 때문이다. 또 기독교 교리에 대해 믿지 않는 이와 논쟁을 벌이다가 신학적 이론이 약해 밀리는 경우도 있다. 이는 오히려 전도를 하지 않느니만 못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이젠 시대변화에 맞게 전도방법도 세련되고, 성숙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물음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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