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과 구원의 관계
한국 사회에서 자살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29.1명으로 OECD국가 가운데 1위라는 불명예를 자그마치 9년 동안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20대의 자살이다. 2012년 통계에 의하면 20대 사망자 절반이 자살이라는 것이다. 자살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도 심각한 상황에서 한국 교회(특히 개혁교회)는 자살을 바라보는 극단적인 두 가지 해석이 대립을 이루고 있다.
그 첫째는 자살과 구원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무관론'이고, 두 번째는 구원 받은 사람은 결코 자살을 통해서 목숨을 끊을 수 없다는 '참 신자 검증론'이다(무관론과 참신자 검증론이란 표현은 본인이 임의로 만든 표현임). 이 두 입장은 모두 개혁주의 안에서 나타나는 입장이며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가지고, 성도들로 하여금 고민에 빠지게 만든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한 가지 공통적인 전제가 있다. 그 전제는 구원의 여부가 자살이라는 특정한 죄 때문에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은 오로지 믿음(Sola fide)으로 얻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두 진영은 동일한 전제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논의의 궁극적 핵심은 과연 구원 받은 사람이 자살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먼저 첫 번째 입장을 들어보자.
첫 번째 입장은 "자살과 구원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무관론'이다. 이들은 자살이라는 죄만 굳이 구원과 관련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한다. 거듭난 사람도 다윗처럼 간음 할 수 있다. 거듭난 사람도 때로는 살인 할 수 있으며, 어떤 심각한 죄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자살이라는 죄에 빠진다고 해서 그 죄만 유독 구원과 결부하여 해석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죄가 다른 죄와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죄를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회개할 기회가 없다고 해서 자살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보면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회개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으로만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은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로 더욱 강력한 지지기반을 구축하려 든다.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한 사람은 자살을 했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위대한 구원의 은총이 효력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도 얼마든지 자살의 충동을 느낄 수 있고, 그로 인해서 때로는 자살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자살과 구원을 연관지어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친 억지(비약)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들은 구원받은 사람도 얼마든지 자살을 할 수 있고, 자살을 했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구원은 믿음의 문제로 결정되는 것이지 자살이라는 특정한 죄로 좌우 될 성향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자살을 살인죄의 또 다른 양태 정도로 엄중하게 경고하고, 그 파괴력의 심각성을 각인 시키는 것으로 그쳐야지 구원의 여부로 말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빈약하다고 주장한다. 더군다나 이런 가르침은 자살한 유가족과 지인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 주장을 살펴보자.
두 번째 주장은 필자가 추구하는 자살에 대한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면 두 번째 주장이 무엇인가?
두 번째 주장은 ‘참된 신자 검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참으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결코 자살을 통해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중요한 두 가지 포인트(pont)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포인트는 구원받은 자가 자살을 시도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극단적인 어려움과 영적인 심각한 침체 가운데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살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포인트는 진정으로 구원받은 성도라고 한다면 비록 자살을 시도 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죽음을 허용하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자살 시도가 허용 될 수 있다고 해서 얼마든지 자살을 시도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살을 시도한 후에 미수로 그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을 일평생 품고 고통 가운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녀들에게 주시는 징계로 이해 될 것이다.
이 두 포인트를 염두에 둔다면 소위 '참된 신자 검증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듭난 신자가 결코 자살을 생각하지 않는다거나 자살을 시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장의 핵심은 과연 거듭난 신자가 자살을 통해서 인생을 마감하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시겠느냐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먼저 자살에 대한 개혁주의 대표자인 어거스틴과 칼빈의 입장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두 번째 주장(참 신자 검증론)은 분명히 어거스틴과 칼빈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먼저 분명히 하고 싶다. 특히 어거스틴은 자살에 대하여 아주 혐오스러운 죄악임을 분명히 하며, '구원을 얻는 회개의 여지가 전혀 없는 자살 죄를 짓느니 차라리 회개해 용서받을 수 있는 파렴치를 범하는 게 더 낫다'고 한다.
그리고 칼빈은 어거스틴처럼 자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룬 적은 없으나 어거스틴의 자살에 대한 논지를 그대로 수용했다. 칼빈은 하나님 주권의 신학자 답게 '인간이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지만, 인생을 떠나야 할 때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절대 허락하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제 구원 받은 자가 결코 자살을 통해서 인생을 마감 할 수 없다는 주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 주장의 첫 번째 신학적 근거는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 목적은 단순히 천국에 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구원이라는 사건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군사로 모집된 사건이요(딤후 2:4), 재창조된 사건이다(롬 1:14).
그러므로 바울은 구원받은 사건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값으로 치르시고 사신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서 우리 생명을 우리가 좌지우지 할 권리가 없음을 분명하게 가르친다(고전 7:23). 단지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고전 6:20).
칼빈 선생님도 말하기를 '군인이 언제나 자기 자리를 지켜 파수를 서야 하듯이, 인간도 하나님이 보내신이 곳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늘 행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라고 보면서, 자살을 하는 것은 그 자리를 이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과연 택하시고 독생자 예수님의 거룩하신 피의 대가를 치르시고 구원하신 백성들이 자살을 통해서 생명을 마감하는 것을 허용하시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분명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통계를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살을 시도 했다고 해서 결코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시도하지만 정작 성공률은 기껏해야 15% 정도밖엔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공중의 나는 새도 하나님의 허락 없으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쉽게 떠올리게 한다.
필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의 교리를 염두에 둘 때, 정말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파괴하면서 생명을 마감하는 일을 결코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라 생각한다.
두 번째로 이 주장은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해석된다. 개혁주의 어떤 학자는 자살과 구원의 문제를 연관질 수 없는 이유를 '성도의 견인교리'에서 찾는다.
즉 로마서 8:38-39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사망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 등과 같은 것으로 결코 끊을 수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비록 자살을 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견인의 교리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구원파가 이해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구원을 받는 데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도의 견인에 대한 이런 그릇된 이해로 말미암아 구원파는 성도들로 하여금 윤리를 등한시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의 견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먼저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한 이해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견인(堅忍) 교리는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지르더라도 믿음만 있다면 구원이 보장된다는 교리가 아니다. 이 교리는 성도가 어떤 고난과 환난과 핍박이 있더라도 끝까지 인내함으로써 그 믿음의 진정성(참 신자의 표징)이 나타난다는 교리이다.
존 머레이 교수는 말하기를 "성도의 견인은 오직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참 성도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매우 힘 있게 말해 주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견인'을 한자로 '굳을 견(堅)'과 '참을 인(忍)'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방금 살펴본 로마서의 말씀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구원을 취소시킬 수 없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 구절은 말 그대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랑하는 관계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견인이라는 교리의 관점에서나 본문의 문맥에서 더 정확한 이해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견인과 구원의 문제를 관련하여 선명하게 이해하는데 더 적절한 성경구절은 마태복음 24: 9-13의 말씀이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말세에 성도가 극심한 환난과 핍박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하시고 계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환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물론 이 말씀은 행위구원, 다시 말해서 끝까지 인내하는 자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아니다. 도리어 참된 성도라면 끝까지 인내하게 될 것이라는 참된 성도의 정체성을 예언하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자살과 관련하여 볼 때, 자살로 스스로 생명을 마감하는 행위는 성도의 견인 교리에 심각한 위배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자살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성경에 나타난 경건한 인물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 자살로 목숨을 끊은 사람을 굳이 나열한다면 사울과 아히도벨, 시므리, 가룟유다 등이다. 이 인물들의 특징은 경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이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 사람은 없다. 성경 어디를 봐도 경건한 사람이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자살을 선택하여 생을 마감했다고 가르친 흔적도 없다.
특히 욥과 같은 사람의 고통은 고난과 절망의 정점에 달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는 자신이 태어난 것조차도 저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는 결코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 점은 우리가 자살과 함께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첫 번째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서 '자살과 구원의 무관설'은 자칫 안락사를 합리화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불치병으로 지옥 같은 끔찍한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불치병은 질병으로 고통만이 아니라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는 절망감으로 인해 더 큰 스트레스를 가져다준다.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만일 구원과 자살의 무관성을 배우게 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죽음만이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가르침은 자살에 대한 큰 유혹을 갖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자동적으로 안락사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게 될 것이다. 안락사는 환자 개인의 고통을 덜어주고, 병원비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해소시켜 줄 뿐만 아니라, 환자로 인한 가족들의 피로와 고통을 줄여줄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안락사는 분명히 자살이지만 합법성과 가족들의 동의를 얻은 것이기에 다른 여타의 자살과는 다르게 파괴력과 상처는 최소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전자의 주장은 치명상을 입게 된다. 즉 자살은 구원의 문제와 무관하지만 그 죄가 가져다주는 파괴력은 엄청난 것이므로 자살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힘을 잃게 된다. 도리어 안락사가 이 모든 파괴력를 최소화 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살과 구원 받은 자의 정체성을 분리시키면 생명을 주시고 거두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무시되고 하나님의 선하심은 무시를 당하게 된다. 도리어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생명을 유지시킨 하나님은 잔인하며 불합리한 분으로 규정되고, 인간의 판단에 의하여 생명을 마감시키는 사람은 자비로우며 합리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 굳이 생명을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는 결국 이런 참혹한 결과로 비약될 것이 분명하다.
이제 결론으로 들어가자.
자살과 구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더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언급하고 싶으나 좁은 지면상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글을 통해서 목표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정리해야 겠다.
이 글이 궁극적으로 목표 하는 바는 자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상황에서 주변에 자살한 가족이나 지인들을 두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위로나 편안한 마음을 주는데 있지 않다. 도리어 그들이 제2, 제3의 자살로 가지 않도록 예방하고 성경적인 안내를 해주는 데 있다.
물론 자살을 막는다고 해서 지옥 갈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교회가 자살에 대한 엄격하고 준엄한 신학적 경고를 하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데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것은 신학을 통해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자살은 더 빈번하게 발생하며 하나님의 영광은 더 심각하게 모독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안락사와 낙태에 대한 정당성을 만들어 주는 또 하나의 신학적 통로를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김민호 목사/인천 회복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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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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