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가 범한 진짜 잘못은? / 박진호 목사
(왕상19:9-14)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9-14)
목숨을 건지려 도망가는 엘리야.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갈멜산에서 대결해 완벽하게 승리한 후에 광야로 도피한 사건은 익히 알 것입니다. 지금껏 교회에선 그가 너무 큰 승리를 맛보았기에 그 반작용으로 곧바로 극심한 영적 침체가 찾아왔다고 배워왔습니다. 실제로 19:4절도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같이 믿음이 연약한 신자도 죽고 싶다는 말은 불신앙에서 비롯된 너무나 불경한 말이라 대놓고 입 밖에 함부로 내지 않습니다. 아무리 먹고 마실 것 없는 뜨거운 광야라고 해도 이제 겨우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육체적으로 죽을 지경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과 혼자 상대해 빛나는 승리를 거둔지 며칠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앞뒤로 잘 살펴보면 갈멜산 대결에 모든 힘을 쏟아 붓고 나서 탈진했을 가능성보다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생기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반드시 성경본문과 앞뒤 문맥 안에서 찾아야 하는 또 다른 좋은 예입니다.
우선 이세벨의 사자가 엘리야를 찾아와 내일 이맘때에 반드시 죽인다고 통보했습니다.(19:2)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냥 군대를 보내서 체포하고 처형하면 되는데 하루 전에 미리 통보했습니다. 그 동안 공포에 질리는 고통을 당해보라는 잔인한 심보입니까?
그 만큼 이세벨이 이스라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엘리야가 아무리 도망가본들 독 안에 든 쥐 꼴이라는 자신감의 표출입니다. 거기다 네를 죽이지 않으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다고 선언했습니다.(19:2) 네가 바알 선지자와 대결해서 승리했을지라도 아직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세벨은 자기 신의 이름을 걸었습니다. 네가 죽던지 내가 죽던지 사생결단을 하자는 것입니다. 신들의 대결을 한 번 더 해보자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럼 여호와가 이세벨과의 대결에서 질 것이라고 겁을 먹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 대결을 먼저 신청했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숫자까지 지정했습니다.(18:19) 여호와가 앗세라 신과 대결에서 진다고는 엘리야로선 아예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엘리야로선 이세벨이 이렇게까지 세게 나온다면 이차 대결에서 이겨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기를 체포해서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고 있었습니다. 이세벨은 남편 아합 왕을 뒤에서 조종했고 남편보다 더 포악했습니다. 아세라 선지자들 힘을 합쳐 엘리야를 저주케 하면서 그 신의 제물로 바쳐서 반드시 끔찍하고도 잔인하게 죽일 테니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우상 신에 바쳐지는 죽음이 얼마나 잔혹한지 알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거룩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결코 그런 수치를 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 일까지도 막아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폭군이라도 어쨌든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과 왕비입니다. 바알 선지자와 첫 대결의 의미는 엘리야가 삼 년의 기근에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아합 왕을 도와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이세벨과 대결에 대해선 그런 긴급하고 정당한 이슈가 없는데다 여호와의 계시도 아직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다 이세벨에게 내일 끌려가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19:3)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단 자기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간 것입니다. 영적 탈진에 빠져 도망한 것이 아니라 살려고 도망간 후에 우울한 증세가 찾아온 것입니다. 큰 승리 뒤에 따라오는 반작용이 아닙니다.
광야로 들어간 것도 순전히 추격대를 따돌려 일단 목숨부터 건지고 보자는 의도였습니다. 들어가면 생존하기도 너무 어려운 곳이라 군대들도 섣불리 따라올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온갖 장비를 갖춘 군대는 이동이 더딜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 광야를 벗어나는데 무려 사십일이 걸렸습니다.(19:8)
모세처럼 되고 싶은 엘리야
문제는 엘리야가 살려고 도망 가놓고 겨우 하루 만에 하나님더러 목숨을 앗아가라고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영적으로 탈진하거나 목이 타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물을 전혀 안 마셔도 사흘은 버팁니다. 엘리야는 하룻길 도망가면서 틀림없이 계속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세벨과 다시 대결할까요? 이번에도 완벽한 승리로 이끌고 끝까지 저를 지켜주실 것입니까? 하나님 이 나라를 우상숭배의 죄로 타락시키는 사악한 아합과 이세벨을 아직도 심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 묻고 또 물었으나 응답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광야를 벗어나면 당장 이세벨에게 잡혀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직 까마귀를 시켜서 먹을 것을 갖다 주기 전이라 사십일을 견디어서 시내 산의 온전한 피신처인 굴(9절)까지 갈 수 있을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을 것 같으면 차라리 지금 하나님이 데려가주었으면 좋겠다고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탄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너무나 정미한 기록인지라 항상 그러하듯이 전후 문맥을 잘 살피면 엘리야가 죽고 싶었던 진짜 속내를 스스로 밝힌 부분이 나오는데 19:4를 다시 보십시오.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무엘, 삼손, 여호수아, 아브라함, 특별히 모세 같은 위대했던 믿음의 종들에 비해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죽고 싶다는 간구는 “그들처럼 큰 승리를 하고 싶은데 왜 하나님 지금 침묵하고 있습니까? 그럴 양이면 차라리 저를 데려가십시오.”라는 원망 아닌 원망의 뜻을 표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가 영적으로 탈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은 영적으로 충만해져서 이세벨과 대결에 나서고 싶은데도 하나님이 그 간구에 응답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한 셈입니다.
그가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받은 호렙산의 굴을 최종 목적지로 삼은 것도 하나님이 자기도 모세 같은 능력 있는 선지자로 세워주길 바랬기 때문일 것입니다. 애굽에게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모세처럼 바알과 아세라 우상 신들과 사탄의 종 아합과 이세벨에게 연전연승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간구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단순히 까마귀만 보내어 먹을 것 마실 것만 공급해주셨습니다. 여전히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계시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연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를 해주셨으니 스스로 죽을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십일을 홀로 광야를 쓸쓸히 통과했습니다.
그 동안에도 틀림없이 엘리야는 하나님과 씨름했을 것이나 여전히 딱 부러진 응답은 없었습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완전 금식을 사십 일을 두 번이나 행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겐 완전 금식이 아니라 그나마 연명할 수 있는 연단을 통해 그를 낮추고 또 낮추시려고 계속 침묵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80년의 기나긴 침묵을 통과시킨 후에야 출애굽 구원자로 세운 것에 비하면 사실상 연단도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목적했던 도피처이자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 따지고 싶은 장소인 호렙산의 굴에 도착했는데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11,12절)
바람과 지진과 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했다고 성경이 세 번이나 강조한 것은 엘리야가 그렇게 기대했지만 그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후에 호렙산에서 여호와는 우레, 번개, 빽빽한 구름, 나팔 소리 가운데 모세 앞에 강림했고 마지막에는 불로 인해 온 산이 크게 진동했기에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서 근처에 가지도 못했습니다.(출19:16-18) 그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여호와를 만났던 모습처럼 그분을 만나서 계시를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모세처럼 되겠다는 나쁘게 말하면 일종의 영적 교만 내지 시기에, 좋게 말해 영적 열정에 빠져있었고 그 점을 하나님이 꿰뚫어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눈 두 번의 질문과 답변
주목할 사항은 하나님이 자기가 기대한대로 임재하지 않았음에도 엘리야는 그분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굴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바람과 지진과 불을 보낸 후 두 번이나 하나님은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9,13절)고 똑같은 질문을 그에게 던졌습니다.
엘리야의 두 번째 대답은 첫 번째 답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람 지진 불 속에도 여호와가 안 계셨고, 두 번째 질문에선 미세한 음성으로 물었지만 전혀 깨우침이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10,14절) 그는 분명히 스스로 하나님께 열심이 유별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큰 능력만 주시면 지금 당장 이세벨과 싸우러 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왜 죽게 내버려두느냐고 따졌습니다.
선악과 금령을 어긴 아담이 까닭모를 수치심과 공포심에 사로 잡혀서 무화과 나뭇잎을 만들어 입고는 동산 깊숙이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어들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그를 찾아와서 본문과 동일한 방식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나님이 숨어 있던 그들에게 먼저 오셨으니 그가 어디 있는지 모를 리 없습니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도 묻지 않았습니다. 이미 어떻게 된 사정인지 하나님이 다 알고 계셨습니다. 굳이 “네가 어디 있느나?”라고 물은 뜻은 간단한데 풀어쓰면 이렇게 됩니다.
“지금 네가 있는 곳이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지 않느냐? 왜 엉뚱한 곳에서 그것도 숨어 있느냐?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내 사랑의 품 안이다. 네가 선악과를 먹는 순가 정녕 죽음이 임한다고 그렇게 강조했지 않느냐? 지금 네가 부끄럽고 두려운 까닭이 바로 나를 등졌기 때문이다. 내 품을 벗어나는 순간 그 어디든지 죽음뿐이라는 것을 이제 실감하겠느냐?” 엘리야에게 던진 하나님의 질문도 그와 같은 뜻입니다. “네가 어째서 지금 여기에서 이러고 있느냐?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센케비치의 유명한 소설 쿼바디스에 나오는 설화를 잘 아실 것입니다. 폭군 네로가 순전히 자신의 광적인 예술 취향대로 로마를 새로 건설하려고 큰 불을 질렀습니다. 대화재의 원인이 황제에게 있다는 소문이 돌고 백성들이 반기를 들 움직임을 보이자 네로는 예수 믿는 신자들이 불 질렀다고 거짓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로마 시민들이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한데다 화마를 피해서 로마를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도 로마를 벗어나 한참 피난가고 있는데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 쿠오바디스”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아무 말씀 없이 로마 쪽으로 향해 걸어갔습니다. 화마와 박해에 시달리는 당신의 백성을 구하러 가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기 목숨만 건지려고 양떼를 버린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음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아와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서 그 죄를 깨끗이 씻어주셨습니다. 그 후에 내 양떼를 먹이고 치라고 당부하신 말씀대로 로마에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강한 바람, 불, 지진에도 강림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모세 같은 선지자가 되겠다는 엘리야의 개인적 욕심이 틀렸다는 뜻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이세벨이 아무리 온 군대와 온 이방 선지자들 다 동원해서 날뛰어도 너를 절대 대적할 수가 없으니 아무 염려 말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더러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한 뜻을 알기 쉽게 풀어쓰면 이렇습니다.
“네 소명과 사역을 다시 확인하러 올 필요 없다. 내 권능을 다시 얻으러 올 이유도 없다. 내가 너를 선지자로 세웠을 때부터, 아니 그전에 너를 택하여 나의 종으로 준비 훈련시킬 때부터 일순간도 너를 떠난 적이 없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도 너와 함께 한다는 뜻이지 않느냐? 네가 평생을 두고 헌신할 것은 오직 내가 네게 맡긴 소명이다. 내 품을 떠나지만 않고 쉬지 말고 기도하면 내 뜻을 분별하고 나아가 그 뜻대로 준행할 힘도 내가 넘치도록 공급해 줄 것이다. 네 혼자 살려고, 그것도 모세처럼 세워달라고 하면서 찾아왔지만 그 사이에 내 백성들이 얼마나 이세벨에게서 핍박을 당하고 있는지 아느냐? 네가 그러고도 이곳에 한가하게 있을 참이냐?”
너무나 어리석은 엘리야
이제 엘리야가 정작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점차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항상 함께 했다는 진리를 몰랐던 것입니까? 설령 영적으로 탈진했다 쳐도 엘리야가 그 간단한 진리를 모를 리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답을 찾을 때는 그 결론을 유심히 살펴야 합니다. 그 결론은 엘리야가 하나님께 따져보려고 제기한 의심과 원망에 대한 당신의 최종적 답변이므로 오늘날의 신자들도 반드시 붙잡아야 할 절대적 영적 진리가 됩니다.
이 사건은 알다시피 칠천 명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를 남겨두셨다는 것으로 끝납니다.(18절) 이세벨이 엘리야가 사라진 사십일 동안에 틀림없이 적극적으로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를 더 많이 강요했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들이 신자들에게 네 주인이 황제냐 그리스도냐 목숨을 걸고 택일하라고 강요했듯이 말입니다. 그 엄청난 독재와 핍박 가운데도 주님은 칠천 명의 순전한 신앙을 가진 자들을, 주의 일을 할 종으로 당신의 품 안에 숨겨서 보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것도 전혀 모르고 하나님께 두 번이나 “오직 나만 남았다”고 항변 아닌 항변을 했습니다. 결국 그의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불만은 왜 나 혼자만 일하게 버려두느냐는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을 혼자서 한 번은 상대했지만 두 번은 너무 버겁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책임지려니 외롭고 신도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심령 깊숙이 숨겨져 있는 진짜 불만까지 아시고 시원하게 해소해주었습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연약한 인간인지라 그가 현재 처한 형편과 그로 인한 감정의 기복과 흔들리는 믿음 등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선지자로써, 아니 한 사람의 성도로서 결정적인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혼자였고 혼자서도 충분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고 끝까지 혼자여야 한다는 너무나 간단한 진리를 잠시 잊은 것입니다. 주의 종이란 어차피 혼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곳에 있느냐는 꾸중 아닌 꾸중은 구태여 여기까지 올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처럼 네 혼자서도 얼마든지 이세벨을 상대할 수 있다, 네가 아니면 내가 다른 이를 시킬 수도 있고 심지어 내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 내게는 내가 맡긴 일에 충성하는 단 한명의 종이라도 충분하다. 너는 사람이 많아야 내 일을 더 크게 잘할 줄 기대하느냐? 내가 너에게 그렇게 시시한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하나님은 칠천 명을 남겼다고 격려하기 전에 먼저 엘리야더러 에후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행할 일을 지시해주셨습니다.(16절) 광야 사십일 간 앞으로 어떻게 사역해야할지, 이세벨을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 어떻게 대적해야 할지에 대해 묻고 또 물은 것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늙어서 힘이 빠진 선지자가 외롭지 않게 동역자는 물론 후계자까지 지정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기도로 후원할 자들과 실제로 당신의 일을 그와 함께 할 자들을 미리 다 마련해두셨던 것입니다.
좁고 협착한 길을 가야 하는 신자
믿음의 일생을 혼자서 걸어야가하는 것이 엘리야와 오늘날의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모든 신자는 세상에서 혼자만 부름 받습니다. 마누라 치맛자락 잡고 따라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더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하나님입니다. 주님의 나라 가는 날까지 혼자서 외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신자의 정체성이자 소명입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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