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신학적 의미 -권수경 교수-
가. 고통과 복음의 관계
1. 복음과 보편적 고통1)
2021년 미래포럼의 주제는 “복음과 보편적 고통”이다. 여기서 ‘보편적 고통’은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첫째는 어떤 특정한 고통이 모두에게 미치는 경우다. 고통은 대부분 개별적이어서 내가 아플 때 남은 안 아플 수 있다. 그런데 그와 달리 모두가 함께 경험하는 고통이 있는데 그게 바로 보편적 고통이다. 우연성을 가진 개연적 보편성이다. 지금 인류 전체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19 범유행이 그런 고통으로서 초기에 제압했더라면 보편적 고통으로 확장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로는 고통 자체의 특성으로서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겪는다는 뜻에서 고통은 보편적이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죽음이든 질병이든 어디 부딪쳤든 배신을 당했든 모두가 아프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떤 종류든 반드시 고통을 겪는다. 고통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으므로 고통은 필연적이면서 또한 보편적이다. 코로나가 온 인류를 덮치기 전부터 고통은 전 인류가 함께 겪고 있는 보편적 현상이었다.2)
첫째의 경우 즉 우연성을 가진 보편적 고통은 하나의 개별적 고통이 어떻게 모두에게 미치게 되었는지 그 원인과 과정과 결과에 대한 분석을 요구한다. 그런 분석은 그 고통의 의미 곧 그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 이후 박해의 고통을 겪었다. 본인들은 무슨 뜻인지 잘 몰랐겠지만 성경은 그로 인해 복음이 확산되었다고 말한다 (행 8:1-4). 코로나19는 보편적 고통인 만큼 전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둘째의 경우 즉 필연성을 가진 보편적 고통에 대한 연구는 그 고통을 공유하는 인간의 공통된 조건에 대한 분석을 필요로한다. 인간 조건에 대한 연구는 보편적 고통의 심층적 의미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이 조건의 핵심은 피조성과 죄성이다. 보편적 고통의 경험은 근본적 인간 조건과 맞닿아 있으므로 삶의 다양한 측면을 살피는 좋은 통로가 된다. 그런데 두 종류의 보편적 고통은 함께 간다. 주로 우연적 고통을 계기로 하여 필연적 고통을 인식하게 되므로 코로나19는 고통의 보편성을 논의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된다.
고통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탐구하는 일이나 인간의 공통 조건을 연구하는 일 모두 현실이 제공하는 자료를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을 분석하고 뜻을 찾는 바탕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므로 보편적 고통에 대한 논의는 시작부터 신학적 논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볼 때 ‘보편적 고통’을 말하기 전에 ‘복음’을 먼저 언급한 점은 중요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복음만이 고통을 바르게 설명한다. 복음은 우선 특정한 고통이 보편적 고통으로 확장된 이유와 의미를 찾는 길잡이가 된다. 또 인간 조건을 설명함으로써 고통 자체의 의미를 찾는 근거가 되고 동시에 그 고통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도 가르쳐 준다. 복음은 궁극적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까지 제시한다. 그렇게 볼 때 코로나19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2021년의 미래포럼은 “복음과 보편적 고통”이라는 주제 하나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될 것이고 오늘의 첫 모임은 그런 노력을 위한 성경적, 신학적 기초를 놓는 작업이 될 것이다.
2. 고통이란 무엇인가?
고통의 신학적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이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 또 관련된 여러 개념도 분류하고 그것들의 상호 관계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고통을 논할 때 사용되는 용어에는 고통, 고난, 아픔, 고뇌 등이 있다. 슬픔, 분노, 번민, 답답함, 쓰라림, 외로움 등도 포함된다. 중요한 두 가지를 고르자면 고통(pain)과 고난(suffering)이다. 고통이란 무엇인가? 사전의 정의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통을 괴로움이나 아픔으로 정의하고 아픔은 괴로움으로 또 괴로움은 고통으로 풀고 있다.3) 일단 고통과 고난을 구분하자면 고통은 직접적인 아픔인 반면 고난은 고통을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고통은 우리 몸이 느끼는 감각의 하나다. 그런데 그 감각이 신경을 거쳐 뇌로 전달되어 고통으로 느껴진다. 고통의 여부는 마음이 판단한다. 고난은 그런 느낌에 더하여 그런 느낌을 갖게 만드는 상황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 논의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고통에는 정도가 미미한 것도 있다. 철학적으로 정의할 때 약간의 결핍, 순간적인 불편,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도 엄밀하게 말하면 고통에 속한다. 그렇게 본다면 고통은 피조물 곧 유기체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배가 고플 때 먹고 목이 마를 때 마시게 되는데 약간의 시장기도 고통으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은 고통에 대한 논의에 포함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결핍에 대한 느낌이 너무나 강하여 몸에 강한 증상을 남기고 마음까지 흔드는 그런 경우로서 그것을 겪는 본인이 싫어한다는 점이 핵심이다.5) 여기서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고통 역시 철학적으로 정의한 고통이 아니라 상식적 경험적 현상으로서, 싫은 어떤 것, 없었으면 또는 얼른 사라졌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그런 증상 및 느낌을 가리킨다. 한 마디로 고통은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없는 ‘문제’다.
삶에 고통이 있다. 몸의 아픔, 마음의 아픔이 있다. 다치고 병에 걸린다. 먹고 살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하고 무언가를 이루려고 더 많은 고생을 한다. 그런 뒤에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한다. 내가 성공하지 못해 괴롭고 남이 나보다 잘 되면 배가 아프다. 욕을 듣기도 하고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일이 잘 될 때도 혹시라도 닥칠 불행을 생각하면 괴롭다. 고통을 모르는 이는 없다. 고통은 정말 보편적이다.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다. 그 고통의 절정은 죽음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이 죽음은 인류가 겪는 고통의 보편성을 입증한다. 고통의 보편성은 모두가 겪는다는 긍정적 표현보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부정적 표현에 더 잘 나타나 있다. 모두가 싫어하고 멀리하려 하는 것이 고통인데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또 고통이다. 내가 바라는 행복과 기쁨과 즐거움은 나를 외면할 때가 많지만 바라지 않는 고통은 절대 나를 피해가지 않는다. 그것이 모든 인류가 겪는 공통현상 곧 보편적 고통이다. 고통은 정말 문제다.
고통은 관계를 통해 존재도 하고 증폭도 된다. 내가 다쳐 아픈 것이 나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내가 아프면 내 가족이나 친구 친척 등 가까운 사람들도 그 고통을 공유한다. 한 사람의 죽음이 전 인류의 고통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을 사랑했던 이들에게는 고통이다. 이 점에서 고통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개별적 고통을 보편적 고통으로 확장시키는 동력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고통을 위로하고 덜어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고통을 만들어내고 증푹시키는 원인이 된다. 빛과 그림자처럼 얽힌 관계다. 사랑의 반대인 미움은 미운 사람의 고통을 즐거워하여 반대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고통도 아니었을 경우가 인생에는 많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두는 마음가짐이 지혜로 통하기도 한다.
3. 고통의 신학적 의미
이 발제의 주제는 “고통의 신학적 의미”다. 신학에는 여러 분과가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조직신학 내지 교의학을 가리킨다.6) 그런데 교의학은 신학 전반을 아우르는 포괄적 분과이므로 “고통의 신학적 의미”는 고통의 뜻을 성경 전반, 기독교 신학 전체의 틀에서 찾아보는 작업이 된다. 전통적으로 조직신학에서는 고통이라는 주제가 부각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전체 신학의 관점에서 고통을 핵심 주제로 다룬 일은 거의 없고 다른 주제와 관련해 부차적으로 언급하는 정도였다. 고통은 주로 죄가 가져 온 결과로 또 그리스도 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등장한다. 물론 그 경우에도 고통 자체를 체계적으로 다루거나 분석하지는 않았다.
칼뱅의 ≪기독교 강요≫도 고통을 크게 다루지 않는다. 고통이 성화에 갖는 의미를 설명하고 또 그리스도의 수난이 성도들에게 위로가 된다고 언급한 정도다.7) 다른 개혁자나 신학자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다. 개혁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많이 사용한 벌코프의 ≪조직신학≫도 그리스도의 고통의 유일성만 간단히 설명한다.8) 고통을 개별 주제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사실 보수 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이나 별 차이가 없다.
신학에서 고통을 독립된 주제로 다루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은 핵심에 집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은 죄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전통 신학은 죄가 가져온 결과보다 원인인 죄 자체를 주로 다룬다. 게다가 죄가 가져온 결과에는 고통 외에도 불의, 탐욕, 속임, 폭력, 음란 등이 있어서 고통은 그 여럿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독립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고통이 독립적인 주제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세기의 일이다. 아마도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9) 죄가 낳은 다양한 열매 가운데서 고통은 상대적으로 늦은 관심을 받은 셈이다.
보편적인 문제인 만큼 모두가 고통의 문제를 다룬다. 의학이나 심리학에서도 고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지만 여러 분야 가운데서 고통을 원론적으로 다루는 분야는 철학이고 사상이고 종교다. 도대체 고통이라는 것이 왜 생겨났을까? 고통이 인생에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을 없애거나 줄일 수 있을까? 이런 문제와 씨름하다 생겨난 것이 소위 종교다. 종교는 어느 것이든 고통의 문제를 깊이 다룬다. 자연의 한계 내에서 고통 자체를 주제로 삼아 깊이 천착한다. 특히 불교는 창시자인 석가모니가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 부른 것처럼 고통이 거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런 종교들과 비교해 볼 때 기독교는 고통의 문제를 등한히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고통이 전체 신학의 중심은커녕 주요 주제의 하나로도 언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살펴보면 기독교 신학은 고통을 절대 가벼이 대하지 않았다. 고통이라는 제목만 따로 뽑지 않았을 뿐 고통은 기독교 복음과 신학의 중심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였다. 성경 첫 부분에서 이미 고통은 인류의 숙제가 되었고 구약 욥기도 고통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시편에도 고통받는 성도의 부르짖음이 가득하다. 선지자들의 메시지도 불의와 고통에 관한 것이 많다. 신약성경도 인류의 고통과 그 고통에 참여하시는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으며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도 고통과 악의 문제는 신정론이라는 분과를 태동시켰다. 사실 복음의 기본을 담은 창조, 타락, 구원의 구도 자체부터 없었던 고통의 등장 및 그 고통을 제거하고자 하는 노력과 나란히 달린다. 복음은 고통으로 가득한 인생, 고통이 넘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 고통의 의미를 일깨우고 또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참 방법을 제시한다.
나. 고통에 대한 자연적 접근
1. 종교가 탐구한 고통
종교가 전부 고통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종교라면 고통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삶의 근본 문제와 씨름하고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종교인데 고통은 인간 존재 자체와 깊이 얽혀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종교가 고통을 가장 큰 문제로 인식하고 그 해결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보편적 고통인데도 해석이 다양한 이유는 성찰의 바탕이 되는 신화와 세계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진리는 하나지만 비진리는 다양한 모양을 갖는다. 사람은 마음에 종교의 씨가 있어 하나님을 찾고자 시도하지만 어둠 속을 더듬는 형편이므로 각자의 상황에 따라 온갖 이론들이 태어난 것이다 (창 11:1-10; 행 17:26-27; 롬 1:18-23). 인도 종교인 힌두교와 불교는 범신론 및 윤회론을 바탕으로 고통의 문제를 설명한다. 중국의 경우 실천 중심인 유교는 고통을 거의 다루지 않는 반면 원리를 탐구한 도교는 범신론에 입각하여 자연과의 조화 문제로 고통을 푼다. 서양에서는 범신론에 바탕을 둔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세계관이 운명론이라는 틀에 맞추어 고통을 이해하려고 했다.
자연 종교의 공통된 특징은 고통을 개별적 현상으로 이해하고 탐구했다는 점이다. 몸과 마음의 온갖 아픔에다 모든 고통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의 문제까지 파고들었지만 그것을 보편적 고통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고통의 원인을 탐구할 때도 질병, 상처, 죽음 등 개별 현상에 대한 자연적 원인만 따졌을 뿐 그 모든 것들이 공통분모인 고통이라는 것 자체가 왜 있어야 하는지는 묻지 못했다. 자연의 한계다. 다른 모든 유기체가 그렇게 생겨나 자라다가 죽으므로 인간의 고통이나 죽음도 같은 차원에서 보았을 뿐 자연 그 자체가 문제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좋은 보기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나오는 저승 방문 이야기다.10) 저승으로 찾아가 병, 노쇠, 가난, 전쟁, 사형 등 죽음의 다양한 원인을 살펴보았지만 죽음 그 자체가 문제요 다른 어떤 원인이 낳은 결과임은 파악하지 못했다.11) 자연의 한계를 가진 종교가 죽음의 원인이라며 제시한 것은 사실 죽음의 계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죽음을 비롯한 고통의 참 원인과 그 고통이 삶에서 갖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보편적 고통이라는 개념에 도달하지 못했고 따라서 근본적인 문제도 묻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 한계는 모든 자연종교가 공유한다. 고통을 개별 현상으로만 파악한 결과 고통 그 자체의 문제점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고통의 원인이 욕망이라고 보고 욕망을 줄이거나 없앰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했다.12) 그래서 속세를 떠나 깊은 산으로 가 고행을 하며 도를 닦는다. 하지만 수십 년의 고행과 수련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는 욕망의 존재는 자연의 한계를 드러낼 뿐이었다. 다른 종교도 비슷한 경험적 분석를 시도하고 고행, 금욕, 절제, 자선 등 비슷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물론 대부분의 종교가 가르치는 실천적인 방안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사회적인 유익도 없지 않으나 보편적 고통이 갖는 근본 문제에는 전혀 접근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고통을 해결하기보다 그대로 수용하라고 가르친 종교도 많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사상은 범신론적 운명론을 가르친다. 범신론은 우주의 모든 것이 신의 일부로서 전체는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가르침이며 운명론은 우주의 역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정되어 있으므로 아무도 바꿀 수 없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우주와의 조화를 최고의 덕으로 가르치며 개별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관조의 태도를 강조한다. 고통의 경우 나 개인에게는 고통이지만 전체의 안목에서 볼 때는 좋은 것이라 여기고 그대로 수용하라는 가르침이 된다.13) 역시 범신론의 일종인 중국의 도교도 무위자연 곧 자연과의 합일과 조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도교에서도 고통은 그저 수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런 방법은 새옹지마 같은 처세술로도 나타났다.14) 지금 닥친 불행은 그와 반대인 복의 계기일 수 있고 지금의 복된 상황은 그와 반대인 불행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적당히 거리를 둠으로써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다. 아이소포스의 신포도 이야기도 같은 지혜를 전한다. 이런 논리는 대부분 심리학적 방어기제에 해당하는 것들로서 문제를 알아 해결하기보다 증세만 서둘러 없애려는 미봉책으로 그친다.
2. 고통과 악의 결합
고통은 개인적으로도 문제지만 사회적 차원에서 더 큰 문제로 발전한다. 사회 곧 인간관계는 그저 아픔을 증폭, 공유, 치유하는 역할로 그치지 않는다. 고통이 사회적 차원에서 갖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악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불의라는 악이다. 고통 자체도 아프지만 그 고통이 의롭지 못하다는 사실, 공평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더 큰 아픔을 가져온다. 사람은 자연의 빛 가운데서도 고통이 어떤 잘못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양심을 두셨기에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원리는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그래서 남다른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하며 억울함을 토로한다. 자신이 정말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런 고통을 받아 마땅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성찰은 언제나 고통 자체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그 고통의 불의한 측면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다.
고통 자체도 괴롭지만 그런 고통이 무원칙으로, 때로는 부당하게 주어진다는 점이 우리를 더 괴롭게 한다. 우리 삶은 부당해 보이는 그런 고통으로 가득하다. 특별한 잘못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뜻밖의 사고, 위중한 병, 쓰라린 좌절 등의 고통을 겪는다. 장례식에 참석해 보면 남보다 일찍 죽은 사람들은 유달리 착하게 산 사람들이다. 또 죄를 짓는 사람과 고통을 받는 사람이 다르다. 간음죄는 남편이 지었는데 고통은 아내와 아이들 몫이 된다. 갑이 술을 먹고 운전하면 을이 그 차에 받혀 죽거나 다친다. 술을 마신 사람은 잘 다치지도 않고 벌도 솜방망이다. 인간이 사는 어디에서나 이렇게 고통과 악이 결합된 경우가 가득하다. 이런 부당함이 있어 개별 고통을 통해 보편적 고통을 깨닫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자연 종교는 이 문제와도 씨름하였다. 현실에 존재하는 부당함을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냈는데 자연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보니 경험의 범위를 넘어가는 우주론을 활용하게 되었다. 스토아 철학은 범신론과 운명론이 결합된 우주론을 내세워 일어나는 모든 것이 결국 신의 뜻이므로 그대로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내가 보기에 부당한 일도 완전한 전체를 이루는 아름다운 일부가 된다. 로마의 황제 겸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이 이 입장을 잘 보여준다.
“바깥 일로 마음이 괴로운가? 그대를 힘들게 하는 건 그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그대 자신의 판단일세. 그 판단은 지금 그대의 힘으로 얼마든지 몰아낼 수 있네,”15)
마음을 비우고 그대로 수용하는 이런 태도는 언뜻보면 심오해 보인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불교 화엄경의 가르침하고도 통한다. 하지만 이는 고통받는 자의 아픔을 너무나 가볍게 무시하는 비정한 논리다. 지극히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심지어 현실의 부조리를 그대로 덮고자 하는 불의한 동기까지 품고 있다. 현실에서 돈과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게나 어울릴 그런 논리로서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저 체념하고 포기하라는 압박에 지나지 않는다.
인도의 종교, 특히 불교는 특유의 윤회론을 이용해 고통과 악의 결합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스토아 운명론처럼 윤회론 역시 입증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인도의 종교도 세상에 고통과 더불어 불의가 있음을 일단 인정한다. 악한 사람이 잘살고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일이 많음도 인정한다. 그러면서 윤회론을 이용해 그 상황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낸다. 언뜻 보기에는 착한 사람이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생에 지은 죄를 현세에 갚는 것이라는 말이다. 나쁜 일을 하고도 잘되는 듯 보이는 사람 역시 전생에 그런 복을 누릴 업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결론은 똑같다. 공의든 불의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한편 논리적인 듯 보인다. 하지만 인도 종교의 설명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은 현세의 부정과 불의를 그대로 용인하는 잘못이 있다. 이들은 자연의 한계 안에서 창조만 느꼈을 뿐 죄와 타락은 몰랐다. 둘째로는 돈과 권력을 최고의 가치로 높이게 된다. 사회정의나 공평, 자비 등의 가치는 외면을 당하고 돈과 권력을 무한 추구하게 만들 가능성마저 있다. 셋째로는 현재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는 노력마저 우주의 섭리에 대항하는 행위로 규정하게 된다. 결국 부패한 사회구조가 고착되고 영속화된다. 넷째로 고통받는 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바로 이 점이 이 이론이 가진 가장 불의한 요소다. 고통 자체만 해도 힘겹고 부당함 때문에 더 괴로운데 윤회론에 입각한 설명은 그 고통의 원인뿐 아니라 부당함의 원인까지 고통받는 당사자에게 뒤집어씌운다. 현세가 이미 고통인데 전생에서도 나쁜 사람이었다니 정말 견디기 어렵다. 윤회론도 스토아 사상과 마찬가지로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 억압하고 지배하는 일에 활용하기 좋은 논리가 된다. 불가촉 천민의 존재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부당한 고통을 설명하려다가 결국 그 고통을 더 부당하게 만들고 마는 것이 윤회론에 바탕을 둔 인도 종교의 설명이다.
다. 성경이 말하는 고통
1. 고통의 원인
자연의 한계에 갇힌 여러 종교는 눈에 보이는 것만 그대로 수용해 설명한다. 자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운명론이나 윤회론 같은 형이상학을 도입하지만 그 역시 자연의 한계 내에서 합리적 설명을 도출하기 위한 고안품에 지나지 않는다. 기발하기 그지없지만 입증할 수 없는 논리요 막대한 부작용을 안고 있다. 고통을 해결하기는커녕 증폭시키며 고통의 양극화라는 부당함까지 낳는다. 이와 달리 성경은 사람의 한계, 자연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고통의 문제에 대해 정확하고도 분명한 설명을 주며 올바른 해결책까지 제시해 준다.
기독교 복음은 처음부터 고통의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고통의 문제는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기본적 기독교 세계관 구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성경 첫 부분은 하나님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에 바로 이어 그 아름다운 우주에 왜 고통과 악이 들어오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처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의 형상 인간에게 고통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고통이 왔다. 원인은 죄다. 특히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교만한 욕망이 불순종으로 이어져 인간에게 고통이 왔고 그 고통의 절정인 죽음도 왔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고통은 인간의 조건 가운데 피조성이 아닌 죄성에 집중한다. 창세기 첫 석 장은 첫 사람이 죄를 지은 결과 다양한 고통과 죽음이 왔음을 말하고 있으며16) 로마서 5:12-21 및 고린도전서 15:21-22 역시 아담의 불순종의 죄가 죽음을 가져왔다고 확인하고 있다. 창세기 3:17은 땅의 저주를 말하고 로마서 8장은 전체 피조물이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고통은 하나님을 거역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다.
자연 종교도 고통의 원인이 죄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는 알고는 있었다. 사람의 마음에 남은 영광의 흔적 덕분이다. 그렇기에 신화도 신에게 대항하는 인간의 오만함을 그리는 것이 많다. 그렇지만 그런 도전과 그 도전에 대한 징벌은 개별적인 사건일 뿐 온 우주를 포괄하는 거대담론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쉽게 말해 보편적 고통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에 반해 계시는 인간이 우주의 창조주를 대항하여 저지른 명백한 죄와 그 죄가 온 우주에 미친 영향 곧 보편적 고통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인간의 욕심이 너와 나 사이의 수평적 차원 이전에 창조주의 자리를 넘보는 수직적인 욕심이었다는 것이다. 노아의 아버지는 죄가 낳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보고 아들 이름을 노아로 지었다 (창 5:29). 모세도 인생을 간단히 줄여 “수고와 슬픔”이라 하였다 (시 90:10). 창세기 첫 석 장의 의미가 구약 시대에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17) 주님이 오셔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죄로 멸망하게 된 인간의 상황이 거기 분명하게 나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18) 기독교 복음은 고통의 문제를 기독교 세계관의 틀에 맞게 정확하게 설명한다.
죄가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불신자들이 볼 때 자연종교가 말하는 윤회론이나 범신론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일 수 있다. 계시를 계시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당연한 판단이다. 하지만 계시는 자연종교가 내세우는 형이상학적 세계관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현실 가운데서 그 진리성을 명확하게 입증한다. 모든 인간이 겪는 고통의 보편성은 모든 인간이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한다는 사실과 통한다. 사람은 자의식을 갖는 순간 이미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 전도를 해 보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또 인간을 선하게 본 공산주의나 여러 사상의 실패도 성경의 진리성을 입증한다.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는 성경의 규정은 그 자체로는 숨어 있는 요소일지 모르나 그 선언의 유효성이 삶의 현실을 통해 강력하게 입증된다는 점에서 자연종교가 가진 세계관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2. 고통의 유익
고통이 죄의 결과라면 고통은 백 퍼센트 부정적일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라면 없을수록 좋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죄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고통이 왔다. 따라서 죄라는 부정적 조건이 뒤덮고 있는 세상에서는 고통 역시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에게 고통은 죄의 결과라는 의미 외에 다른 뜻도 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죄를 깨닫게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고통은 죄의 존재를 일깨운다. 죄를 병에 비기자면 고통은 그 죄의 존재를 알리는 증세다. 증세는 다양하지만 병은 오직 하나 죄다. 그렇기에 고통은 보편적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고통받던 수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셨다. 그런데 몸의 병만 고치고 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몸의 병이 나은 것을 계기로 영혼의 병까지 고쳐 구원받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주님이 당신을 의사에 비기신 것이 바로 그런 뜻이었다 (마 9:12; 막 2:17; 눅 5:31). 이들에게 몸의 병은 영혼의 병의 존재를 일깨우는 증세였던 셈이다. 자연종교는 개별적 고통만 알았기에 증상을 병으로 착각한다. 따라서 병을 고치려 애를 썼지만 사실상 병은 그대로 두고 진통제만 투여하고 말았다.19) 통증이 줄었으니 나았다는 착각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보편적 고통을 인식함으로써 이 땅의 고통은 병이 아니라 진정한 영혼의 병에 대한 증세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 죄의 병에서 고침받는 참 치료법을 가르쳐 준다.
고통에 담긴 이런 긍정적인 뜻을 지난 세기 최고의 변증가인 씨 에스 루이스가 잘 설명해 준다. 고통이 아니라면 그저 무시해버릴 수 있기에 하나님은 아무도 쉽게 외면하지 못하는 고통을 이용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은 우리를 가만 있게 놔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즐거움을 통해 속삭이시고 우리의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고통을 통해서는 고함치신다. 고통은 귀 먹은 세상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확성기다.”20)
아프지 않으면 무시한다. 그런데 고통이 있다. 그래서 찾는다. 자연종교가 그래서 생겨났다. 물론 계시가 없어 어둠 속을 헤맨다. 하지만 고통의 존재는 적어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히 알게 해 준다. 고통이 없다면 그대로 조용히 멸망한다. 그런데 고통이 있어 사람을 못살게 군다. 아프기에 찾아 나선다. 몸부림을 친다. 물론 자연의 한계 안에서는 답이 없기에 계시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진리로 나아오는 계기는 될 수 있다. 몸의 고통, 마음의 고통, 개인적 고통, 사회적 고통 다 해당된다.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는 이들은 주님을 잘 찾지 않는다. 반대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것을 계기로 참 구원에 이를 가능성도 크다. 세리나 창녀가 천국에 먼저 들어간다 하신 주님 말씀이 고통이 가진 유익을 일깨운다 (마 21:28-32; 눅 7:37-50). 따라서 고통에는 은혜의 요소가 포함된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