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이스라엘 12지파 연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9. 갓(행운)-진짜 복으로 바꾸는 역전의 신앙과 율법수호의 사명

창30:9-11

 

1. 자녀를 낳지 못하는 라헬이 자기의 여종 빌하를 빌려서 단과 납달리를 낳았습니다. 이것을 보고는 레아도 자기의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내어주어서 자녀를 생산하게 되는데, 갓과 아셀입니다. 먼저 갓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았을 때, 11절을 보면,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갓’이란, 한글로 ‘복되도다’고 번역되기 보다는, ‘횡재야!’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복되다’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는 두 개가 있는데, ‘바룩’과 ‘아쉐르’인데, 일반적으로 이 ‘갓’이란 단어는 좋은 의미로서 사용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야곱의 아들 ‘갓’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지 않고 유일하게 사용되는 곳이 이사야65장11절인데, “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운수의 신)에게 상을 베풀며 므니(운명의 신)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라는 구절입니다. 운수의 신, 행운의 신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이곳 창세기30장에서 자녀를 생산하였을때에 ‘갓’이라고 하였다는 것은, 횡재야! 라는 의미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레아가 ‘오직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고 하였던 그 신앙이 오히려 타락하고 변질되어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 역전의 상태로 대전환을 이루는 지파가 갓지파입니다. 우리가 이 지파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역전의 신앙입니다. 엉터리 횡재신앙에서 참된 축복의 신앙으로의 대역전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야곱의 자녀로서의 갓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야곱의 마지막 예언에서는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창49:19)고 하니, 역전의 용사와도 같은 인상을 갖게 합니다. 공격을 받았을 때 그것을 되받아 치면서 오히려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갓지파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신33:20-21): “갓을 광대하게 하시는 이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 갓이 암사자 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 갓이란 이름은 “횡재”, 혹은 “운수”인데, 그것들조차도 “광대하게 하시는 이”, 곧 참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우연이라는 것, 운명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역사하시는 역사의 한 형태입니다. 갓지파가 “암사자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어서” 반격하여, 대전환이 일어나는 모습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먼저 기업을 택하였다는 것”은 요단강 동편에 르우벤지파, 므낫세반지파와 함께 기업을 먼저 배정받는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와 연관해서, 여호수아서에 자세히 나옵니다. 가나안정복전쟁이 모두 끝나게 될 때까지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않겠노라 하였고(수22:1~4), 또한 전쟁 이후에도 자신들의 여호와신앙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엣”(증거)라는 제단(수22:34)을 쌓기도 한 것이 바로 이 갓지파인 것입니다.

 

4. 갓지파는 이 증거에 신실했습니다. 역대상5장18절~20절에 보면,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지파와 함께 갓지파의 용사들을 용맹한 모습을 기술하고 있는데, 20절에서는, “그들이 싸울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다고 합니다. 특별히 다윗왕 시대에는(대상12:8), “갓 사람 중에서 광야에 있는 요새에 이르러 다윗에게 돌아온 자가 있었으니 다 용사요 싸움에 익숙하여 방패와 창을 능히 쓰는 자라 그의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같다”고 하였고, 14-15절에서는, “이 갓 자손이 군대지휘관이 되어 그 작은 자는 백부장이요 그 큰 자는 천부장이더니 정월에 요단 강물이 모든 언덕에 넘칠 때에 이 무리가 강물을 건너서 골짜기에 있는 모든 장에게 동서로 도망하게 하였더라”고 합니다. 다윗의 건국역사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5. 하지만, 이러한 신앙의 용맹함은 쉬 쇠퇴해 버리게 되고, 자주 아람국에 침략을 당하기도 하고(아합왕 전후해서 벌어진 200년 동안의 길르앗라못쟁탈전), 결국 예레미야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무자하냐? 상속자가 없느냐? 말감이 갓을 점령하며 그 백성이 그 성읍에 거함은 어찜이뇨?”(렘49:1)고 탄식할 정도로, 괴롭힘을 먼저 당하기도 하였던 곳이 갓지파와 르우벤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지파의 요단강 동쪽지역이었습니다. 공격을 당하였을 때, 반격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모세의 예언에서 분명히 강조되어 있는 대로, 그들에게 주어진 분깃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다시금 돌아가서 확인하기를 바랍니다(신33:21): “...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

 

6. 우리는 이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교훈을 주는 것이 이 대목에서이기 때문입니다. “입법자의 분깃”을 받았다는 것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의 수호자로서의 분깃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용감해야 했고, 공격을 받아도 되받아치고 대반전을 일으키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입니다. 자신들의 분깃을 지키는 역할은, 바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역할을 잘 수행하였던 갓지파의 세 인물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사 입다인데(삿11:1~12:7), 그는 가나안정복시대의 역사지식이 분명하여 율법의 정신을 잘 알고 있음을 보여주고, 맹세에 철저하여, 딸을 맹세한 대로 처녀로 평생 살게 하는 것도, 율법에 철저함을 보여줌, ‘십볼렛/쉽볼렛’발음시험으로 에브라임지파를 구별해 내어 도륙한 것도 율법에 철저함을 보여주는 예시). 둘째는, 바르실래인데(삼하17:27~29), 그는 압살롬에게 다윗이 쫓길 때,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윗을 통하여 이뤄질 율법이 구현되는 세상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율법수호정신이 분명했던 것은, 바로 엘리야입니다(왕상17~왕하2장). 선지자를 대표하여 나중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에 변화산상에서 만났던 두 명 중의 한 명이 바로 엘리야였는데, 모세의 율법의 정신을 수호하는 역할을 엘리사가 잘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율법 그 자체였었고, 그것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오셨던 것을,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을 통하여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7.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입니다. 갓지파가 흥왕하였던 것은 바로 여호와의 공도와 율법을 실천하고 실행하였을 때입니다. 그렇지 못하였을 때는, 바로 멸망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공격을 당하더라도 반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가능했습니까? 바로 율법을 따라서 살고, 율법을 수호하는데 진력하였을 때에 그 역할이 가능했습니다. 자신들의 꾀와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사탄의 공격을 받았을 때 반격이 가능한 것은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모든 시험을 말씀으로 반격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갓지파처럼, 하나님의 율법인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묵상하고 또한 그 뜻을 좇아 순종할 때, 어떤 세력도 반격하여 물리치고 승리의 대전환을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10. 아셀(복)-진정한 복의 기쁨을 누리자

창30:12-13

 

1. 레아가 동생 라헬이 자신의 여종 빌하를 통해서 두 아이를 갖게 되자, 레아도 자신의 여종 실바를 통해서 첫 아이를 가졌는데, 횡재야! 라는 뜻의 “갓”이었습니다. 우연의 신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 것을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한글성경의 번역에 대해서 유감을 표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도 그러해야 하겠습니다. 이미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성경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서의 복(혹은 축복)을 말할 때, 바룩이라는 단어와 아세르라는 단어를 사용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편1편1절의 “복 있는 사람은...”할 때의 복이 “아세라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와 연관된 것이 바로 레아가 실바를 통해서 낳은 둘째 아들의 이름으로 붙인 “아셀”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한글로 번역할 때, “복되다”고 해야 하는데, 우리의 한글성경에서는 “기쁘다”는 식으로 번역했습니다. 제가 “기쁨”이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하지만, 이렇게 번역된 한글성경에 대해서는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2. 하여튼, “아셀”이나 아셀지파에 대해서 기록을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의 인구조사시에도(삼하24장) 사무엘하24장9절에는 130만명으로 계산하였다고 나옵니다만, 역대상27장을 보면, 인구조사를 끝내기도 전에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하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아셀지파의 지도자만은 그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이 지파는 참 드러나지 않는 것이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장군도, 정치가도, 예술인도, 사사도, 선지자도 없습니다. 구약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는 곳이 한 군데인데, 히스기야시대에 온 이스라엘지파에 보발군을 보내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자 하였는데, 코방귀를 끼고 대부분의 지파들이 사람들을 보내지 않았는데, 아셀지파, 므낫세지파, 스불론지파 “중에서 몇 사람이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정결례를 위하여 성전에 들렀을 때, 시므온과 함께 예수님을 맞이하였던 84세의 안나가 바로 아셀지파였는데, 흥미롭게도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눅2:36-37).

 

3. 아셀지파를 생각하면, 참 소박한 지파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기업의 몫도, 단지파처럼 북쪽이면서도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있지 않고, 나중에 두로와 같은 이방인들과 섞여 살게 되는 갈멜산 북쪽의 해안지대에 거주합니다.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별로 주목도 받지 못하고 있는 이 지파에 대한 야곱과 모세의 예언은 어떤 것들일까요? 야곱이 임종시 아셀에 대하여 한 축복은,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食物)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창49:20)는 것이었습니다. 왕을 잘 섬길 수 있는 품질좋은 진상품들이 산출되는 지역을 기업으로 갖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지역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모세가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그의 마지막 축복을 선포했을 때, “아셀은 다자(多子)한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 있으리로다”(신 33:24-25)라고 말했다. 여기서 “다자하고”, “그 발이 기름에 잠긴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하겠지만, “형제에게 기쁨이 되고”,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라”는 것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기원입니다. 그런 역할을 잘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자한 복은, 나중에 민수기를 보면, 출발할 때는(민1장), 4만천오백명이었는데, 도착할 때쯤에는(민26장), 5만삼천사백명으로 늘어났다는 점에서 이뤄졌습니다. “그 발이 기름에 잠긴다”는 것은, 해안지역의 풍부한 물산으로 역시 이뤄졌습니다. 그렇다면, “형제에게 기쁨이 되고,”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라”는 것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4. 그 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게 전에, 이 아셀지파의 복의 특징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평범한 복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에 대해서 좀더 상고해 봅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성경에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복을 나타내는 단어가 “아셀”과 함께 “바룩/바락”이라는 단어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 단어들로 나타내는 복들이 어떤 것들이며 그 복들의 관계는 어떤 것들일까요? 먼저, 바락은 수직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들에게 주시는 물질적이거나 영적인 복입니다. 아셀은, 수평적입니다. 바락이 우리들의 수평적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상태라고 할까요? 너무 지나친 단순화인지는 몰라도, 간단히 기억하기 좋도록 이렇게만 강조해 둡니다. 이런 기회에 우리나라에서는 복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동양에서는 성경의 다윗시대쯤에 해당되는 주나라의 글을 5백년뒤쯤에 공자가 수집해 둔 서경의 주서, 홍범편에 보면, “일왈수, 이왈부, 삼왈강녕, 사왈유호덕, 오왈고종명”이라고 해서, 오복을 강조해 왔습니다. 네 번째 것을 빼면, 모두 하늘이 내린 바락의 복입니다. 그런데, 유호덕이라는 것, 곧 덕을 좋아하는 성품의 문제는, 아쉘의 복입니다. 산상보훈에서 팔복을 말할 때의 복이 아쉘의 복, 곧 마카리오스라고 표명되는 복입니다.

 

5. 말이 나온 김에 동양인들, 특별히 중국인들이 추구해 왔던 복이, 아셀지파가 누렸던 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전에 한번 설교에서 언급하였던 임어당이란 분이 ‘생활의 발견’이란 책에서, 중국인들이 추구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간신히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어 인류를 위해서 대단한 공헌은 없었지만 사회에서 다소의 일은 하였고,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이름은 알려져 있지만 그다지 유명한 인물은 아니라는 그런 정도의 중산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지향했던 것입니다. 생활 걱정이 우선 없고, 그렇다고 전혀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닌 정도, 이름이 알려졌다면 알려졌고 알려지지 않았다고 않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 약간의 재정 능력을 가진 조촐한 환경의 사람들“을 바랬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전형으로, 도연명같은 시인의 삶을 대표적으로 제시합니다. 도연명은 AD 4세기쯤의 사람으로서, 40세까지 공무원생활을 하다가, 먹을 것 위하여 부정부패에 짝하여 산다는 것이 구차하여 모든 것을 정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귀거래사“라는 노래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지요.

 

돌아가자!(歸去來兮)/전원이 장차 황폐하려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田園將蕪故不歸)/마음이 몸의 부림을 당했으나(旣自以心爲形役)/어찌 상심하며 홀로 슬퍼하기만 하겠는가(奚惆悵而獨悲)/이미 지나간 날은 어쩔 수 없으나(悟已往之不諫)/지금부터는 바른길을 갈 수 있지 않느냐(知來者之可追)/실로 길을 잃었으나 다행히 멀리 가지 않았으니(實迷途其未遠)/지금이 옳고 어제가 잘못이었구나(覺今是而昨非).

 

물론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인으로서 지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사도가 보여주었던 삶의 모습이 더욱 도전적입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 있고 징계를 받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한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은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고후6:7-10절).

 

6. 우리가 자연과 전원을 벗삼아 안빈낙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런 삶을 추구한 것 같은 아셀지파는, 참 복된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없의 땅에 들어가서는, 그만 안빈낙도의 삶을 살다가, 두로와 시돈지역을 차지하지 못하고 나중엔 그곳에서 태어난 이사벨과 아달랴에 의해서 온갖 고통을 당합니다. 무엇을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아셀, 곧 형제의 기쁨, 이스라엘의 빗장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역(수로보니게)에 방문하셔서 그 지역을 회복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역할이 여기에 있음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들을 방어하여서 형제들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도 될 것입니다.

 

 

11. 잇사갈(값)과 스불론의 출생의 교훈

창세기30:14~21

 

1. 오늘은 야곱의 아홉 번째 아들이면서, 레아를 통해서 낳게 되는 다섯 번째 아들인 잇사갈과 그의 동생 스불론에 대해서 상고합니다. 자녀 생산이 단절되는 듯 했는데,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건의 계기로 다시금 야곱과 관계하게 된 레아가 잇사갈과 스불론, 그리고 디나까지 낳게 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그 출생의 계기를 살펴봅시다. 사건은 바로 야곱의 장남인 르우벤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정확한 나이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10세초반 사춘기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밀 거둘 때”라고 하는데, 팔레스타인의 계절상 5월초입니다. 요즘 같은 때라고 하겠습니다. 르우벤이 어디를 나갑니까? “들에서 합환채를 얻”습니다. 여기서 “합환채”란, 쉽게 말하자면, 최음효과, 곧 성적인 흥분을 돋구는 식물인데, 이것을 르우벤이 발견해서는 캐어온 것입니다. 르우벤이 이 “합환채”라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는지를 알기나 했을까요?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르우벤의 자랐던 환경을 고려하면, 르우벤은 성적 호기심이 일찍부터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장막에 작은 엄마도 들어가고, 작은 엄마 여종인 빌하도 들어가고, 또 자기 엄마 여종도 들락거리고는, 어느 날 갑자기 동생들이 생겨납니다. 신기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성적 관심과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환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호기심으로 배운 일종의 지식으로 “합환채”에 대한 지식도 알았을 것이고, 그것을 들에서 발견하고는 자기 동생들에게나 자기 엄마에게 은근히 으쓱대면서 자랑하고 싶은 생각으로 집으로 가져와서는 자기 엄마 레아에게 줍니다. 이런 생각이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그가 나중에 엄마의 여종인 빌하와 동침하게 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그의 앞날에 큰 그림자를 지우게 된 일을 기억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성에 대한 관심을 우리는 정당한 것으로 여기면서도 그것을 정상적으로 배출하도록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유교적 분위기에서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너무나도 잘못해 왔던 것을 반면교사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2. 르우벤이 “합환채”를 들고와서는 레아에게 주는 것을 라헬이 보았습니다. 라헬도 “합환채”가 무엇인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자녀를 가지기를 무척이나 사모해 왔던 라헬이기에 이런 방면에 대한 지식도 잡다하게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레아에게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한글번역으로는 명령투이지만, 영어번역으로는 please!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혹은 I pray thee!라고 까지 하니, 애걸복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레아가 흥정을 합니다.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라헬이,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고 합니다. 라헬이 야곱을 자신의 남편이라고 “내 남편”이라고 합니다. 사실, 먼저 언니가 결혼해서 첫부인은 레아인데, 그런 것을 싹 무시해 버리고 있습니다. 이런 대화와 그 뒤에 집에 들어오는 야곱을 향해서 레아가 하는 말, 곧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고 하는 것을 고려하면, 오랫동안 야곱이 아예 레아를 상대해 주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참 불쌍한 레아입니다. 야곱의 소행을 보자면, 참 어리석다고 여겨집니다. 어쩌면 르우벤이 라헬의 여종 빌하와 동침하게 되는 것도 이런 어리석은 소행이 뿌려놓은 씨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낳게 된 아이가 “잇사갈”, 곧 “값”으로 샀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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