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유다(1)-섬기는 지도자가 되라!
창세기29장36절
1. 유다는 레아의 네 번째 아들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야곱에게 사랑을 받는 라헬에게는 아들이 없는데, 레아는 자녀를 생산을 잘합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잊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바로 29장31절에 분명히 강조되는 대로,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사랑을 많이 받으면, 하나님께서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사랑을 적게 받으면, 하나님께는 사랑을 더 많이 받습니다. 그것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유다의 출생입니다. 유다의 출생과 그의 삶과 그의 후손인 메시야의 출생과 그 메시야를 통해서 이뤄진 인류구속의 놀라운 일들은, 바로 사람에게 사랑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는 것의 절정에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메시야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으로서만 아니고, ‘섬기는 지도자’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음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교훈입니다.
2. 먼저, 오늘 본문을 보면, 레아가 네 번째 아들을 낳고는,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36절)”하면서, “찬송”(유다)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제는”입니다. 곧, 남편의 사랑을 기대하면서 자녀들 세명까지 낳았는데, 여전히 그 남편 야곱이 자신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지 않고 있는 중에 “이제는” 여호와를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부터의 사랑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유다”의 출생과 그의 삶과 그의 후손인 메시야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어떠하여야 할 것인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메시야를 알고 믿는다는 것은,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모두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그것입니다. 바로 유다와 유다지파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이 관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 메시야의 본질이 “섬기는 지도자”, 곧 종으로서의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3. 그런 면에서, 유다에 대한 첫기록은 인상적입니다. 야곱의 아들 중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순간 죽이지 말고 “이스마엘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라고 한 사람이 바로 유다였습니다(창37:27). 그렇게 해서 요셉은 종으로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게 되고, 바로 그 직후에 기록된 것이 창세기38장의 유다가 다말을 통해서 쌍둥이 아들 곧 세라와 베레스를 낳게 되는 기록이 나옵니다. 요셉이 팔려가서 나중에 형들과 대면하기까지의 기간은, 10년간의 보디발의 집생활, 3년정도의 감옥생활, 그리고 총리가 된 뒤 7년의 풍년과 2년의 흉년을 지내게 되니, 모두 22년간인데, 다른 형제들의 일들이 굉장히 많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 동안 베냐민의 경우에는 자녀들을 10명이나 낳습니다(창46:21). 다른 형제들에게도 기억될 만한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들은 일언반구도 없고, 단 하나, 유다의 실족이랄까,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두 자녀를 낳는 사건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유다의 이 자녀생산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결말에 이르게 되는 것을 통해서, 요셉이 팔려간 사건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을 낳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속의 역사 전체가 이런 예상치 못한 결과, 곧 인간의 생각과 계획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따라서 진행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의 자녀생산과정을 통해서 강렬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사실, 그의 후손들 가운데서라도, 가나안 사람 수아를 통해서 낳은 엘과 오난, 그리고 셀라 중에서도 두 형은 죽고 남은 셀라조차도 유다의 정통 장자가 되지 낳고, 오히려 이상하게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낳은 두 형제 중에서도 막내가 오히려 적자가 되는 변화무쌍함 자체가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4. 유다는 다른 형제들에게 비해서 아버지 요셉에게 신뢰를 많이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장남 르우벤이, 시므온이 애굽에 잡혀 있는 중에 집으로 되돌아와서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시므온을 데려오지 못할 것이라면서, 르우벤 자신의 두 자녀까지를 죽이라는 말에도 야곱은 전혀 응하지 않았습니다(창42:37-38). 하지만, (양식이 모두 떨어진 가운데서이기도 하지만) 유다가 간곡히 간청하면서, 자신을 담보로 하겠다는 말을 듣고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라면서 다른 선물들도 바리바리 준비해서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허락을 합니다. 유다의 말을 야곱이 더 신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총리가 된 요셉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로 형들이 어떻게 하나 관망을 하고 있는 중에, 유다가 나서서 그간의 사정을 말하고 자신을 베냐민을 대신해서 볼모로 잡아두라고 부탁하는 말(창44장, 특별히 33~34절)에 요셉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주변에 애굽사람들을 물러나게 한 뒤에, 눈물을 터뜨리면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자신이 요셉인 것을 밝히는 것도, 유다의 역할을 잘 보여줍니다. 곧 대속하실 메시야의 모형이 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종이 되고 희생물이 됨으로서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5. 이러한 유다에 대해서 나중에 야곱이 축복할 때에, 이렇게 합니다(창49:8~12):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이것은, “찬양”이라는 뜻을 가진 유다의 이름을 갖고 말놀이(“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를 하는 것만 아니고, 그가 곧 메시야를 산출하는 지파가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실로가 오시기까지”라는 표현은 의미심장합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것이 속한 자”라는 뜻인데, 문맥을 보면, 그것은 “규” 혹은 “통치자의 지팡이”를 말합니다. 이것을 이스라엘백성들은 혼동해서 “실로”라는 지명으로 착각을 하고, 가나안땅을 정복하였을 때, 그곳에 성소를 두고 예배의 처소를 삼았습니다만(수18:1),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의 처소로는 예루살렘을 마음에 두고 있었더랬습니다(신12:11). 통치권을 가진 그 분, 곧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계속 통치권을 가진 자가 유다지파를 통해서 나올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유다가 왕권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왕권의 진정함은 “실로”, 곧 참된 왕권을 보여준 그분을 통해서 성취되고 완성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반복해서, “나귀”와 “포도나무”가 이 예언에 등장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한편으로는 유다지파가 받게 될 축복의 상태를 말하면서, 또한 피의 희생을 통해서 얻게 될 것을 다중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6. 유다지파에 대해서 그 양이 많아서 두 번으로 나눠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정리하고자 하는 것은, 유다의 지도권은 희생과 섬김을 통해서 오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이 지파를 통해서 오시게 될 메시야의 메시야되심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교훈이 이것입니다. 우리도 또한 그 종으로서 왕이신 메시야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도 또한 그와 더불어 세상을 통치할 왕으로서(벧후1:9) 세상과 이웃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요13:1~20,세족). 이것이 유다지파가 우리들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6. 유다(2) 그리스도지파 안의 적그리스도들
창49:8-12
1. 지난 주 수요일에는 유다지파의 종으로서의 리더쉽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유다지파 안에 있는 반유다의 세력들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우리들에게 주는 경고와 위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상고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보면, 분명히, 유다를 통해서 지도자가 나올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합니다. 야곱이 12자녀들에 대해서 예언하면서, 유다에 대해서는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10절)고 합니다. 그리고 나귀와 포도나무를 언급하는데, 12절에서는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포도주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중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두면들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포도주로 누리게 되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메시야의 희생을 상징합니다. 하나는 기쁨이고, 다른 하나는 슬픔입니다. 슬픔을 통해서 기쁨에 이르게 되는 메시야의 사역의 스타일을 암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영광에 이르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슬픔도 없이, 곧 십자가가 없이 영광만을 생각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길로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런 점에 집중하겠습니다. 유다지파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예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2. 먼저, 훌륭한 지도자들의 예를 그 지파의 역사 속에서 살펴봅시다. 제일 먼저, 출애굽을 해서 모세를 지근에서 섬기며 도와주었던 사람으로 훌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나안땅을 향한 여정 중에 가장 첫 번째 치루게 되는 전쟁(창17:8-16, 여호와 닛시)인 아말렉족속과의 전쟁을 치룰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여호수아장군이 승리하고 내리면 패배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론과 더불어서 모세의 손을 함께 들어주어서 결국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던 사람입니다. 이 훌의 손자가 브살렐인데(출31:1~5), 성막을 세우는 중,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금과 은과 놋에 관련된 일들을 감당하였습니다. 하지만, 더욱 유명한 인물은, 두 정탐꾼 중의 한 명인, 갈렙입니다(민13:6).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세에게 부탁하기를,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기도 하였습니다. 곧 헤브론지역을 자신에게 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곳에 아브라함부부, 이삭부부, 야곱부부의 묘지가 있었던 것을 보면, 이지역이 차지하는 영적 의미를 감안하면서 요청하였을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활약했던 유다지파의 인물로는, 갈렙의 딸 악사와 결혼하였고(수15:13~19), 사사시대의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을 들 수 있겠습니다(삿3:9-11). 사사들 중에는 베들레헴출신으로서, 아들을 30명, 딸 30명을 두고는 7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르셨던 입산이 있습니다(삿12:8-10). 그리고 우리는 다윗으로 이어지면서, 왕국의 역사가 전개되고, 그 왕국은 유다지파를 통해서 나타나게될 메시야왕국의 그림자, 혹은 예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3.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유다지파에는 항상 이렇게 훌륭하고 멋진 일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메시야)의 길을 닦아가는 중에, 그 길을 훼방하고 막아서고 부패시키고 오염시켰던 자들이 바로 유다지파 속에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제일 첫 번째 상고해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후손들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직접 죽이셨던 자들이 유다의 후손이었습니다. 창세기37장을 보면,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바로 뒤에 유다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유다가 아들 세 명을 낳게 되는데 결국 다말을 통해서 세라와 베레스를 낳게 된다는 그 핵심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의 길과 하나님의 길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삽입된 이야기입니다만, 그 이야기 자체 내에서도 교훈이 많습니다. 특별히 가나안여인 수아를 통해서 세 아들을 유다가 낳는데, 첫아들 엘과 둘째 아들 오난이 죽게 되는데, 둘 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다고 합니다(창38:7,9). 메시야지파의 선조인 유다의 첫아들, 둘째 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해서 하나님께 직접 죽임을 당하게 되는 비운이 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 합니다. 모세의 첫아들 나답과 둘째 아들 아비후도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는데(레10:1~7), 이것도 하나님의 방식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보여준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4. 유다지파를 통해서 준동하는 적그리스도의 활동들은, 특별히 다윗왕국이 형성된 이후에, 그 왕권을 이어가는 왕들의 역사를 통해서 분명해집니다. 그리스도의 예표로서의 모습들을 못보여주는 왕들이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모두 19명의 왕들이 이어지는데, 다윗과 솔로몬, 이후 아사왕, 여호사밧왕, 히스기야왕, 요시야왕을 제외하고는 악한 왕들이라고 분류될 수 있고, 선한 왕으로 분류되는 왕들조차도 거의 모두 다 약점들을 노출시킨 것들이 확연하게 대조가 됩니다. 이런 왕들의 후예로서 메시야가 올 것이라고는 예상되지 않는,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다윗의 왕조는, 인간이 세운 왕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세워 가시는 왕조였었고, 기어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었던 역사로 사용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5.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살다가 되돌아온 지파들은 거의 대부분이 유다지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의 역사를 보게 되면, 특별히 신약시대에 오면, “유대인”이란 호칭이 대두됩니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전체를 대표하는 식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쥬”(Jew)라는 호칭으로 하나의 인종으로 여겨지고 “이스라엘”은 국가이름으로 사용되어서 중첩이 되는 셈입니다.
6.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유다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의 또 다른 후손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메시야사역을 돕는 것처럼 보이다가 결국은 배신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를 죽인 자들은 에돔(이두매)족속인 헤롯왕이었고, 레위지파에 속했던 사두개파사람들이 주도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과 산헤드린이 협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체포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가룟인 유다였습니다. “가룟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 유다의 고향을 말하는데,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면 아주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지역 출신입니다. 그런데, 가룟, 곧 그리옷이 남쪽 유다 곧 헤브론지역에 있었던 곳임을 감안하면, 지리적으로도 차이가 나고, 그 지역이 학자출신들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알려진 점들을 감안하면, 유다지파였다는 점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도회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를 많이 보여주었던 자입니다. 이 점은, 마태가 세리출신이어서 돈계산이 밝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자공동체의 재정관리는 유다가 맡고 있었던 점도 감안하면, 수리와 계산이 밝았다고 할 수 있고, 다른 제자들과는 특이한 점들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했었을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밤을 새우고 기도하셔서 뽑으셨지만, 유다가 자원하는 심령도 없었던 것이 아닐 것입니다. 곧 자신이 생각하는 면에서, 자신의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해방전쟁을 주도하고, 이 인간적 정치적 해방의 지도자로서 예수를 생각했었다고 하겠습니다. 곧 자기 중심의 하나님 나라를 계획하고 추진하였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야말로 적그리스도의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곧, 자신이 중심이 되는 모든 계획과 활동은 바로 적그리스도의 유혹과 미혹에 넘어간 일입니다.
7. 그리스도의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찌니라”(마16:24). 이것이 섬김의 리더쉽, 종됨의 지도자의 길을 보여주는 유다와 유다지파가 보여주는 핵심 교훈인 것입니다.
7. 단(심판)-심판받은 시기심
창세기29장1~6절
1. 지금까지 레아의 네 자녀들의 출산과 그 역사에 대해서 상고하였습니다. 이제 라헬의 자녀를 살펴보게 될 것인데, 라헬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라헬의 시녀 빌하를 통해서입니다. 이 출생은 아주 특별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척 싫어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내를 두 명 가지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나 한 아내의 시녀를 통해서 자녀를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멉니다. 결국 이 자녀 곧 “단”은 “심판”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요한계시록의 14만4천이라는 구원받은 자들의 총수에 단 지파의 이름이 빠져버렸습니다. 새예루살렘의 12대문에 새겨진 12지파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참 두려운 일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첫째로 배워야 할 것은, 구원이란 혈통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도요한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한 것같이, 구원은, 혈통으로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이 점을 고려하면서, 그 출생의 과정을 살펴봅시다. 그 출생의 특징은 한 마디로 하자면, 시기심입니다. 1절,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였습니다. 이 점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단의 출생의 동기가 “시기심”이었습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면서 그 이름을 “심판”이란 뜻의 “단”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그의 불신앙을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언니를 시기하여 시녀 빌하를 빌려서 아들을 가지게 되는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은, 너무나도 악한 일에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라헬이라는 한 여인의 구속사적 의미를 평가할 때,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3. 라헬은 야곱에게 사랑받았으나, 야곱과 함께 매장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큰 교훈을 우리들에게 제공해 줍니다. 특별히 그가 “베노니”(슬픔의 아들)를 낳으면서, 벧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에브랏길에서 죽습니다. 아이를 더하여 갖기 원해서 “요셉”이라고 첫아들을 낳았는데, 그렇게나 원하였던 아이를 낳으면서 그녀는 죽고 맙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이것을 성경이 기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별히 이런 역설적인 모습을 성경은, “라헬의 울음”이란 이미지로 전승시킵니다. 특별히, 예레미야의 시대에 베냐민지파의 경계선상에 있었던 “라마”라는 곳은, 바벨론으로 잡혀갈 포로들을 집결시키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까지 예레미야도 잡혀왔다가 풀려납니다(롐4:1). 그런데 그곳에 있게 될 큰 슬픔의 이별을 예언하면서 예레미야는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롐31:15)고 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가까운 바벨론포로에 대한 예언일 뿐만 아니라, 먼 미래, 곧 메시야의 날이 도래하였음에도 그 메시야를 통해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시대를 향한 예언이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헤롯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베들레헴의 모친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마2:17~18). 예레미야선지자의 말(31:15)를 인용하면서,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함이 이루어졌느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우리가 이해하려고 할 때, 그저 자녀들이 학살당하는 것이 너무 비참해서 위로를 받기를 거절한다는 뜻으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참된 하나님의 위로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요구, 이기적인 욕심의 성취만을 기대하기 때문에, 참된 영적 위로는 거절하고 있는 불신앙의 모습이, 라헬에게서와 같이, 예레미야시대의 라마의 여인에서와 같이, 베들레헴의 여인들에게서도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는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위로로 우리는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
4. 단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다가 라헬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라헬의 불신앙을 알아야, 그리고 그 불신앙의 핵심인 시기심을 알아야, 그의 육신의 첫아들과 그 지파의 역사의 본질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5. 사실, 단지파의 역사는 참으로 미묘합니다. 창세기49장의 야곱의 예언을 보면, 단에 대해서는,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6-18절)고 아주 이상야릇한 예언합니다. 모세는 신명기33장22절에서는,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고 합니다. 나중 단이 제비뽑기를 통해서 얻게 되는 기업의 몫은 요단강 동쪽의 바산과는 무관합니다. 오히려 요단강 서쪽 지중해 해변가의 해양민족인 블레셋과 유다지파 사이에 있다가(이곳에서 삼손이 활동함), 그곳이 좁아서 북쪽지역(갈릴리윗지방)으로 올라가서 레센이란 곳을 차지하고는 단이라고 이름 붙이는데(수19:47), 나중, 북이스라엘의 최북단을 나타내는 지명이 됩니다. 곧 우상을 섬기는 지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삿18:30). 라헬이 밧단 아람에서 남편을 따라 가나안지역으로 올 때, 오빠 라반이 쫓아와서 자기 가족신상을 왜 훔쳐가느냐고 하였을 때, 라헬이 낙타에 올라앉아 엉덩이에 깔고 있으면서, 지금 월경중이라고 변명하면서, 결국 그 우상을 가지고 왔었는데, 그런 모습을 단지파가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결정적인 두 번째 교훈은 시기심에 대한 경계인 것입니다.
5. 라헬은 레아를 시기하였습니다. 이런 시기심은 사탄의 하나님에 대한 시기심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이 참 많았습니다. 야곱에게 사랑받았는데,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사탄도 천사장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위치에 있었는데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시기하였습니다. 단도 재주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성막을 짓는데, 유다지파 브사렐과 더불어서 단지파의 오홀리압을 세워서 성막을 세울 때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주셔서 성막의 온갖 기구들을 만들 수 있게 하셨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도 있게 해주셨습니다(출31:6). 이런 재주를 물려받은 단지파의 한 여인은 두로사람과 결혼하였다가 나중 솔로몬의 성전과 왕궁건축에 불려온 히람을 낳습니다(대하2장11-14), 흥미로운 것은, 왕상7장13-14절에서는 납달리지파 과부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납달리는 라헬의 시녀 빌하를 통해서 낳게 되는 둘째 아들로서 ‘경쟁’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축복을 많이 받았는데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재주로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하여서, 저주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6. 이런 모습은 삼손의 모습에서도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너무도 많은 축복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과신했습니다. 처음에는 겸손하였고, 자중하였으나, 나중에는 그만 스스로의 자중에 과신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여인 들릴라에게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어야 할 비밀을 누설해 버리고 맙니다. 한 백성을 심판하는 자리에서 그만 몰락해 버리고 마는 비참함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두 눈알이 빠지고 우상신전에 묶여서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결국 백성을 심판하던 위치에서, 길의 뱀노릇, 첩경의 독사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고통을 주는 역할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런 정신의 적그리스도가 바로 단지파를 통해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합니다.
7.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절망 속에서, 마지막은, 살았을 때보다 더 많은 원수들을 죽이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바로 십자가에서 그 모든 원수들을 음부에 몰아넣으신 우리 주님의 장엄한 죽음을 예표합니다. 그 죽으심 때문에 우리는 시기심의 죄악들이 용서를 받고, 이제는 참으로 겸손하게 주를 섬기는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8. 납달리(경쟁)-연약함 중에 강한 역사
30장7-8절, 49장21절
1. 오늘은 라헬이 빌하를 통해서 나은 단의 동생 납달리와 그 지파를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그를 낳았던 여종 빌하에 대해서 상고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레아와 라헬에 대해서는 집중하지만, 그 여종들인 빌하와 실바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빌하와 실바가 받았을 고통은 가히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레아가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한 점에 대해서 그 슬픔과 애환을 고려했지만, 그 레아의 아픔보다도 더 큰 아픔 가운데 살았을 여인들이 바로 빌하와 실바입니다. 여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식 아내로 여겨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낳은 자녀들의 이름을 자신들이 붙일 수도 없었습니다. 단이나 납달리, 그리고 실바를 통해서 낳은 자녀들, 갓(복되도다), 아셀(기쁜 자)의 이름도 실바가 붙이지를 않고, 레아가 붙이고 있습니다. 가족의 일원으로 여겨주었다고는 하더라도, 최말종으로 여겼다는 점은, 야곱이 나중 형 에서를 만나게 될 때, 총알받이같이 먼저 앞세우는 이들이 바로 이들 여종들과 이들에 의해서 낳아진 자녀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여종들의 아이들도 야곱이 자신의 아들로서 간주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래서 족장의 후손으로 등록되었다는 점은 우리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여인들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참 서러움을 많이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애정이나 사랑도 없이, 꼭 씨받이라고, 애 낳아주는 기계처럼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2. 이 중에 단은 나중 요한계시록의 기록을 보면, 구원받은 자들의 계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점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거시적인 시각에서 보게 되면, 빌하를 통해서 낳게 되는 이 두 번째 아들의 경우는, 참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곧, 메시야가 오셔서 복음의 빛을 제일 먼저 비춰주는 지역을 그 지파의 몫으로 분배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이사야9장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옜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레아의 여섯 번째 아들)과 납달리 땅(여종 빌하의 둘째 아들)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호수아 당시 정복하여 분배되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한 부분이었는데, 이방인에게 빼앗겨 버려서 “이방의 갈릴리”로 불렸던 곳인데, 이곳이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바로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된...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리실 메시야가 그곳에서 자라셨고 말씀사역을 시작하셔서,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왜 메시야가 이 지역을 택하셔서 자라셨고 활동을 시작하셨는가, 우리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 하심으로써 복음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잘 드러내어졌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3. 이런 면에서 생각하면,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구원을 받게 되는 스타일에는 그 사람의 성격이나 성품과 연관되어지는 것을 고려할 수 있게 됩니다(베드로와 바울). 그것이 납달리의 성품이 야곱과 모세의 예언들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창49:21),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쪽과 남쪽을 차지할지로다”(신33:23)입니다.
4. 먼저, “놓인 암사슴”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풀려난 암사슴”이란 뜻입니다. 원래 암사슴은 갇혀 지내지를 않고 풀려난 채로 자랍니다. 특별히 앙징맞은 발굽을 활용해서 산악지대의 높은 곳을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박국선지자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암)사슴(아얄라: 여성명사)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합니다. “나의 높은 곳”은 나의 이상적인 상태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선지자의 기대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 모든 크리스챤들이 기대하고 이루고 싶어 하는 그것일 것입니다. 둘째,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에서는 “아름다운 소리(소식)”을 복음과 연관시켜 말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이사야40절9절,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고 합니다. 납달리가 이런 역할을 잘 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 셈입니다. 셋째, “너는 서쪽과 남쪽을 차지하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갈릴리의 서편과 남쪽지역을 차지하게 될 것을 말하는데, 앞으로 메시야가 이곳에서 활동하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면서 예언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사역과 연관해서 복이 넘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5. 납달리는 뭔가 소심한 것 같습니다. “암사슴”으로 묘사된 것이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지파에서 유명한 단 한 사람인 바락도 무척 소심한 것 같습니다. 특별히 사사시대에 가나안왕 야빈의 압제하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드보라라는 여인을 사사로 세우셨는데, 군사를 일으켜 야빈왕의 군대장관인 시스라를 물리치고자 하였을 때, 납달리 게데스에 있었던 바락을 불러왔을 때에도 소심한 모습을 보입니다. 사사 드보라가 함께 가지 않으면 자신도 전투에 나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남자인 바락인데도, “암사슴”같은 모습입니다. 결국 시스라장군도 바락의 손에 죽지를 않고 야엘이라는 여인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승리를 이뤘던 것(삿5장의 노래)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락이 드보라에게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삿4:8)는 말을 하나님을 믿지 못한 불신의 모양을 나타낸다고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암사슴”과 같은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는 그 하나님과 함께 싶다는 담대한 믿음의 고백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의 대열에, “드보라”는 언급되지 않지만, 오히려 “바락”은, 인용되고 있습니다(히11:32). 연약한 중에 강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장 근본적인 성격입니다. 연약한 질그릇에 영광의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스불론지파와 더불어서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삿5:18)여 얻어내는 영광의 역사가 이 연약함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6. 요즘 우리가 하나님나라QT로 묵상하는 고린도후서4장7절~11절이 이 납달리적 성품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찾아서 함께 읽어봅시다). 예수의 생명이 환난 중에서도 그 몸에 넘쳐나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사람이지만,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말하기를(12절),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 말합니다.
7. 납달리가 이런 은혜를 증거할 수 있게 된 것은, 납달리의 태생이나 그 지파의 역사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연약하고 무시되었던 여종 빌하의 후손입니다.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은혜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지파를 들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메시야가 하필이면 이들이 지역에 오셔서 말씀의 빛을 비추신 것도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은혜의 복음을 받아서, 우리도 또한 연약한 중에, “암사슴의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여야 하겠습니다. 지옥불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소망이 되는 말을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계14:4) 12,000명의 납달리 지파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사람들이 바로 이렇습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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