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예수 안 믿으면 손해보는 47가지 이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1.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겸손해집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왕의 왕’ 이시기 때문에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특히 극존칭적 묘사어법이 사용되고,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도 ‘해라’ 로통일이 되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더욱이 성경이 이 땅에 처음 소개되던 때가 구한말 때였으므로 그런 번역은 예수의 거룩하심을 강조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또 한편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나타난 그의 말씀인즉 개인적인 일용어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율법을 대리 선포하는 선언적 의미가 크다는 점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입니다.그러나 실제 당대의 예수는 세상의 누구보다 겸손한 마음과 겸손한 어법을 구사하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성경 기록을 보면 그는 더럽고 미천한 자의 앞에 엎드려 그 발에 입맞추었고,몸소 제자의 발을 씻어 주기도 하였습니다.가능한 한 자신을 겸손히 낮추면서 자신의 힘으로 베풀 수 있는 것은 하나 남김 없이 모두 베푸신 인물이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그 짧은 서른 세 해의 생애를 몽땅 베푸는 데 쓰셨는데 나중에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우리 썩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셨습니다.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면 맨 처음 배우게 되는 게 바로 자기를 낮추는 겸손입니다.예수를 믿으면 제 가진 모든 것, 제 가진 모든 능력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애당초부터 교만이 들어설 여지가 없어지는 셈이지요. 세상의 모든 이웃 보기를 예수님 보듯 하라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이웃 섬기기를 예수님 섬기듯 하라는 게 기독정신의근본 교리입니다.실제로 예수를 잘 믿는 이들이나 큰 성직자들을 보면 머리가 절로 숙여질 만큼 겸손합니다.어느 경우에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가끔씩 자신을 신격화, 신성화하는 성직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만, 그것은 세속적 영광을 탐하여 교인들 머리 위에 제왕처럼 군림하려는 가짜 성직자이거나 사이비 종파의 지도자이기 쉽습니다. 진짜 성직자, 진짜 그리스도인은 어느 경우에도 자신의 위치를 남보다 높은 곳에 있게 하려 하지 않습니다.예수에 대한 믿음이 깊은 이들은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나서도 그것을 겉에 나타내거나 자랑하려 하지 않습니다.재물의 힘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가문을 내세우거나 지식과 학벌을 자랑하지 않습니다.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시댁이나 친정을 자랑하지 않습니다.남의 약점, 단점, 불행을 자신과 비교함으로 얻게 되는 자족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깊은 이들은 남을 보기에 앞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자기의 부족함을 늘 반성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 늘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절로 사람이 겸손해집니다. 인격 완성의 첫걸음이 겸손임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회를 위하여32. 예수를 믿으면 세상이 예뻐집니다.

예수를 믿어서 좋은 이유 가운데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항목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여 우리가 보는 하나하나의 인간과 동물과 식물과 자연들 모두가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 이라 여길 줄 아는 눈을 갖게 되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이 저마다 참 예쁘고 아름답기도하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예수로부터 사랑의 눈, 감사의 눈 그리고 섭리의 근원을 알아차리는 눈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그냥 대수롭지 않게만 보던 뭇 인간과 인간사 가운데서 문득문득 선한 마음의 연결고리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선한 심성이 고인 맑은 우물들을 수시로 만나게 되며, 동식물 생태계의 신비롭고 오묘한 생존구도를 보게 될 뿐만 아니라 하늘, 땅, 산, 강, 바다, 구름, 비, 눈, 태양 등 하나님께서 지어 놓으신 대자연으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고 사는가에 대한 감사의 눈을 뜨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어 주신 것들 가운데서 우리는 숨 쉴 공기를 얻고, 마실 물을 얻고, 여러 가지 필요한 먹거리와 입을 것, 땔 것을 얻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예수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그 모든 이치들을 참답게 볼 줄 아는 진리의 눈을 갖게 된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특히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좋은 머리의 지혜를 우리가 얼마만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쓰고 있는지를 스스로 반성할 줄 알게 됩니다. 그 반성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궂은 일들의 원인을 남의 탓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원래 아름답던 세상이 우리 인간의 잘못 쓰여진 지혜로 인해 아름답지 않게 된 것을 부끄러이 생각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더러 아름답지 못해 보이는 풍경이 있다 해도 자연히 그것을 크게 탓하지 않게 될 수밖에 없지요. 우리 모두가 세상을 아름답게 본다면 실제로 세상은 조금씩 더 아름다운 쪽으로 그 모양이 달라질 것입니다.기왕 한 세상 살면서 어차피 살아 내야 할 세상을 가급적 긍정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그 개인을 위해서도 축복에 해당하는 일이지요. 세상을 예쁘게 보아 버릇하는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그 개인의 삶도 결국 긍정적인 쪽으로 풀려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무엇보다도 중요한 이 얘기를 좀더 쉽게 풀어 볼까요? 예수의 으뜸 되는 가르침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이웃을 사랑하려면 우선 그 이웃을 예쁘게 볼 수 있어야 그것이 가능합니다. 세상을 예쁘게 보려면 우선 모든 사람들을 다 예쁘게 봐야 하겠지요? 눈에 띄는 모든 사람들 보기를 예수님 보듯 하면 틀림이 없다고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장 예쁘게 연출하는 일류 연출가입니다.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세상이 예뻐집니다.

33. 예수를 믿으면 성공적인 처세를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속담에 “숲속의 오얏나무는 그 향기로 십리 밖의 나그네 걸음을 멈추게 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향기는 오얏나무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인격과 인품의 향기를 지닌 사람 곁에는 늘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얘기지요. ‘성공적인 처세’ 라고 하니까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처세론 전문가 D. 카네기가 연상되어 다소 세속적인 뉘앙스가 느껴지긴 합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처세는 반드시 사업가나 정치가들이 즐겨 탐하는, 예비적 이용가치로서의 즉물처세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이웃과 더불어 일정 수준의 정신생활을 공유함에 따르는, 건전하고 생산적이며 우호적인 인간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나는 성공적인 처세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일이 가능해질 확률이 가장 높아집니다. 왜냐면 예수사상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어떤 자세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명료한 유일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쳐주는 불변의 교본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지향하는 바의 뜻이 끝내 옳을 수밖에 없습니다.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옳은 뜻을 가지고 옳은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의 편이었으며, 하나님의 그 뜻하심과 함께 하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니라 기분 좋은 수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예수를 믿음으로서만이 진정 성공적인 처세가 가능하다고 믿는 주장의 근거가 그것입니다.34. 예수를 믿으면 대인관계가 좋아집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고소한 참기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매끄러운 윤활유입니다. 특히 원만한 대인관계에 관한 한 예수님이상 가는 전문가가 유사이래 없었습니다. 대인관계가 좋으면 학교사회에서나 직장사회에서나 절대로 실패할 염려가 없지요. 많은 사람들이 출중한 잠재능력이나 뛰어난 기능에도 불구하고 사회생활 적응에 실패하는 것은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해서인 경우가 태반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특히 층층시하 위계질서와 상하좌우 조직체계를 기본 구도로 하고 있는 직장사회에서는이 대목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그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그런 모든 걱정이 일거에 해소될 뿐만 아니라 얼마 가지 않아 그 직장의 모범적인 일등사원, 인기사원으로 자타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예수사상의 기본은 자기를 낮춰 겸양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자기의 잇속 계산보다는이웃을 돕고 사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남의 말을 잘 경청하게 됩니다. 항상 양보하며 궂은 일은 스스로 나서서 맡아 하게 됩니다. 얼굴 표정은 늘 밝고 명랑하며 감사와 기쁨에 충만해 있게 됩니다. 잘난 체를 하지않게 됩니다. 누가 보거나 안 보거나 자기의 직무에 양심적으로 임하게 됩니다.그러니 잔꾀를 모르는 모범적인 사원이 될 밖에요.예수 믿음이란 곧 인간 믿음, 인간 이해, 인간 사랑이기 때문이기도 해서지만, 무엇보다도예수를 믿으면 신념이 생기고 자신감이 생긴답니다. 모든 자잘한 우려, 기우, 조바심까지도다 주님 앞에 다 내맡겨버림으로 혹여라도 잘못될 걱정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지요.참 신기한 사실입니다.35. 예수를 믿으면 성실한 사람이 됩니다.

“지식이 없는 성실성은 허약해서 그 자신의 손해에 그치지만, 성실성이 없는 지식은 독약처럼 위험해서 만인에게 손해를 끼친다.” 18세기 영국의 사전 편찬가이자 유명한 시인인 사무엘 존슨(1709~1784)의 말입니다. 그 어떤 지식보다도 인간 됨됨이의 성실성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뜻의 경구( ?일 것입니다. 지식은 많이 쌓았으되 성실성이 없는일부 정치가나 일부 변호사, 일부 어용학자 같은 이들을 볼 때마다 이 경구가 생각나곤 합니다.지식의 많고 적음을 건축물의 높낮이에 비유했을 때 성실성의 여부는 곧 그 건축물을 밑에서 받쳐 주는 지반 기초에 해당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실성의 지반 기초가 튼튼한 사람이 됩니다. 신앙이라는 믿음이 철근 심지의 역할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성실 가운데서도 신앙에 근거한성실이 특히 돋보이는 게 바로 그 까닭이지요. 성실한 사람은 누가 눈으로 자기를 보거나보지 않거나 언제나 일하는 모습이 한결같습니다. 특히 예수를 믿으면 남의 눈 대신 ‘양심이라는 이름의 하나님 눈’ 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언제나 성실한 자세를 잃지 않습니다. 작은 물건 하나를 만들더라도 양심적으로 만듭니다. 돈이 없어 뵈는 환자라도 양심껏 진료합니다.돈이 없어 뵈는 의뢰인이라도 양심껏 변론합니다.어긋짱나게 나가는 학생이라도 양심껏 가르칩니다. 힘이 없어 뵈는 민원인에게라도 양심껏 봉사합니다. 예수를 잘 믿는 이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다 예수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실한 사람이 됩니다.36. 예수를 믿으면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어인 까닭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일단 대통령 자리에 앉기만 하면 누구나 예외 없이 그 말로( I ?가 신통칠 않아 결국 퇴임과 동시에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 치욕의 법정에 서곤 하는 이상한 나라 하나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그런 사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대통령생활’ 을 하기가(잘 하기가) 참으로 만만한 일은 아닌모양이로구나 하는 짐작을 우리는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 경험이 많으신 어른들의 말씀을들어보면 대통령 생활하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바로 결혼생활이라고 합니다.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가(잘 하기가) 힘든 일이 결혼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결혼 경험이 없는 미혼의 젊은이들은 쉽사리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테지요. ‘누가 뭘 특별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기만 하면 그냥 저절로 술술 풀려나가는게 결혼생활이라는 것 아닐까? 결혼생활 하는 데도 무슨 각별한 노하우가과연 필요한 것일까?’ 하는 등등의 생각을 하기가 쉬울 터이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사실은 천만의 말씀입니다.정작 부닥쳐 보면 그 일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인생의 절반 이상에 걸쳐 지속되는 길고도 긴 결혼생활의 노정에는 그야말로 미혼시절에는 차마 예측하지 못했던, 너무나도 많은 미묘한 변수의 장애물과 함정과 지뢰와 같은 험로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게 마련입니다. 연애시절에 그처럼 절대의 유일 가치로 여겨졌던 소위 장미빛 사랑이라는 것은 결혼과 동시에 그 색깔이 칙칙한 현실로 퇴색 증발해 버리고, 대신 ‘장미’ 가 피어 있던 그 자리에는 양가( ?家)의 전통 차이나 그 가족 구성원들 간의 불화에서 불거지는 갖가지 갈등이라든지 날이 갈수록 새롭게 발견되는 생활방식의 상이점(흔히 성격차이로 지칭되는)으로 인한 갭이라든지 가정경제의 어려움이라든지 육아 교육 문제의 난제라든지 주거환경과 관련된 숙제라든지 하는 등등의어려움들이 끊임없이 제기됩니다.피차 성격이 원만하고 인내심이나 이해심이 깊어서 매 고비마다 그것들을 현명하게 극복하고 대처해 나간다면 다행이겠지만, 더러는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겪기로는 부잣집도 예외가 아니고, 학벌이 반반하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집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원만한 결혼생활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만한 결혼생활!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해내기가 어려우니 문제가 실로 큽니다. 해결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누구나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결혼생활을 잘 해낼 수 있습니다. 예물로 주고받는 다이아몬드보다 열 배 백 배나 더 빛나는 광채의 비결들이 성경책 안에는 예수의 말씀으로 전부 다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대로만 하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장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37. 예수를 믿으면 자녀를 훌륭하게 키울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부모님들의 공통된 소망 가운데 가장 첫번째는 바로 사랑하는 제 자녀를 훌륭한 인간으로 키워내는 일입니다. 가설이지만 이 소망을 첫번째 소망으로 치지 않는 부모가 만일하나라도 있다면 그는 그 자체로서 부모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무슨 희생이라도 감수하는 것이 모든 부모의 본성입니다.내 눈을 빼어 자식의 눈이 떠진다면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눈을 빼줄 수 있는 것이바로 부모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눈이 멀고 허리가 휘고 뼈가 녹아나는 일이라 할지라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부모들은 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한계와 끝이 없는 그 위대한 사랑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처음 만드실 때부터 불변의 이치로 가르쳐주신 본성이기도 합니다.자식을 잘 먹이기 위해, 자식을 잘 입히기 위해, 자식을 잘 교육시키기 위해 부모님들이 쏟는 그 무한한 사랑의 깊이는 그 자식들이 커서 결혼한 후, 제 자식을 낳아 보아야만 비로소 깨닫게 된다고 하죠? 그런데 사실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치르는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자식을 올바로 잘 키워내는 일’ 이라고 합니다. 나는 지금 물질적으로 잘 먹이고, 잘 입히고,돈 들여서 좋은 학교에 보내고 하는 따위의 도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물론 아닙니다.만일 물질만 갖고 그 ‘어려운 일’ 이 만족스럽게 해결된다면 부잣집 아이들은 전부가 다 잘 되어 있어야 옳습니다.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음을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보지요.아버지는 돈 많은 재벌이었는데 그 자식은 나이를 많이 먹은 후까지 끝내 구제불능의 성격파탄자로 낙오된 인물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훌륭한 교육자였는데그 자식은 못된 길로 빠져 수형생활을 하고 있는 인물도 알고 있습니다. 자식 잘 키우기의어려움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례들입니다. 보았듯이 물질이나 학식이나 사회적인 신분만 갖고는 안 되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자식을 셋 낳아 키워 보았습니다.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자식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았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이미 저들은 건강한 사회인으로 다 장성해서제 앞가림을 해나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부모된자의 욕심으로 보자면 너무나도 부족하고 미흡한 점들과 후회되는 부분들이 참 많습니다.그것은 비단 내 경우뿐만이 아닐 것입니다.38. 예수를 믿으면 가정이 화목해집니다.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이 주일 대예배 설교 중에 가정의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강조하시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만일 교회와 가정,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경우에 처하게 된다면 저는 주저 없이 가정 쪽을 택할 것입니다.” 목사가 교회 쪽을 포기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가정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서설정해 놓으신 공동체 사회의 뿌리로서 가장 기초가 되는 가족 단위이기 때문입니다.그러니까 가정이 없으면 교회도 설 자리가 없어지고, 교회가 없으면 신앙도 융성할 수 없다는이야기입니다.인간의 모든 행복과 모든 불행이 다 우리의 가정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의 모든 성취와 모든실패가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믿음생활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신앙이 없이도 가정의 형태는 대충 이룰 수 있을 터이지만, 행복한 가정이 없다면 진정한 믿음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금 더 의미에 깊이를 두어 말하자면 그러니까 신앙과 가정은 실과 바늘의 관계, 또는 안경렌즈와 안경테의 관계처럼 상호보완적 사이가 아닐까싶습니다. 가정은 그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귀한 가정의 의미나 고마움을우리는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살 때가 많지요.예수를 믿으면 말씀에 따라 누구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중 핵심이 바로 이해와 사랑과 감사이기 때문이며, 이해와 사랑과 감사라면 우리네 가정의 화목과 평화는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39. 예수를 믿으면 사업이 잘 됩니다.

사업가가 예수를 믿고 나면 사업이 훨씬 더 잘 됩니다. 언뜻 거짓말로 들릴 지 모르겠지만 사실에 있어서 너무나도 명명백백한 그 이치는 의외로 매우 간단합니다.첫째, 예수를 믿으면 제품을 정성 들여 좋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예수 믿음의 근본이 바로 남이나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되는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원료를 제대로 쓰고 정성을 다하여 양심적인 제품을 만드는 것이 사업성공 번창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부인할 이는 아마 없겠지요.둘째, 예수를 믿으면 자기가 정성껏 만든 제품에다 터무니없는 바가지 요금을 붙여 폭리를취하려 하지 않습니다.양심에 부합하는 적정한 가격을 매기게 마련입니다. 적정한 가격은 구매율을 높이는 지름길입니다. 좋은 품질의 제품에 가격마저 양심적이니 장사가 안 될 까닭이 없지요.셋째, 예수를 믿으면 판매방식이나 판매조건, 유통구조 등을 합리적으로 선택하여 결정하게됩니다.넷째, 예수를 믿는 사업가는 실제와 다른 과대광고나 허위광고로써 소비자를 속이거나현혹시키려 들지 않습니다.다섯째, 사업가가 예수를 믿으면 권위의식 대신 늘 인간적인 따뜻한 애정과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바탕으로 해서 조직관리를 한다든지 이익을 공정히 분배한다든지 하기 때문에 휘하 구성원들의 신망을 얻어 노사분규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섯째, 예수를 믿으면 고객에 대한 겸손한 친절 정신과 서비스 정신이 몸에 배어그것이 곧바로 회사의 기풍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물론 예수를 믿으면 십일조를 바치는 일이라든지 주일성수와 주일안식을 지켜야 하는 등 이전에 없던 새로운 관행을 따라야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를 받으면 그것을 열 곱으로 채워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걱정할 일이 못 됩니다. 걱정이라니요. 오히려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들만이 끊임없이 샘솟는 귀한 사업체가 될 것입니다.사업가가 예수를 믿어야 할 분명한 이유입니다.40. 예수를 믿으면 신뢰받는 사람이 됩니다.

땅 넓이에 비해 우리 나라만큼 사람이 많은 나라도 이 지구상에는 흔치 않습니다. 게다가 국토의 2/3는 산악지대입니다. 도시건 시골이건 어디를 가나 사람이 너무 많고 흔하다 보니까 사람들끼리 서로 사람 대접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왕조를 가릴 것 없이 갖가지 정변이 잦았던 데다가 지정학적 특수한입지 탓에 몽골 중국 일본 등 이웃나라들의 무력 외침마저 끊이질 않아서 민족정서의 기본이심히 불안정하였습니다.힘있는 집단, 힘있는 나라의 눈치를 끊임없이 살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생존 변수로서의 ‘기회주의’ 가 백성들의 심성 가운데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근대사 가운데서 36년간은 일본의 식민지로 짓눌려 민족적 자긍심은 물론, 고유한 민족언어와 함께 개개인의 이름까지 빼앗겨가며 눈칫밥을 먹어야 했는가 하면, 조국이 해방되자마자 이번에는또 국토가 양분되어 극도의 빈궁과 혼란 속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비참의 극을 다 한 약소국의 설움이었습니다.그런 연유로 해서 비롯된 민족정서의 불안정은 급기야 국민 개개인의 인간적인 신뢰감까지무너뜨리는 바람에 한때는 우리나라를 좀 안다는 외국인들 간에 ‘믿지 못할 코리안 타임’, ‘신용 없는 한국사람’ 등의 치욕적인 오명이 공공연히 회자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라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불량 자동차 부품과 마찬가지로 아예 애당초부터 없느니만 못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신뢰감이 다소 결여되었던사람도 신뢰할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예수님의 말씀을 좇는 자세와 행위 그 자체가 바로 믿음이요, 자기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예수를 믿으면 신뢰받는 인재가 됩니다.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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