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선의 시작(고전 10:23-33)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모든 선의 시작(고전 10:23-3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고백과 부름을 바탕으로, 이어지는 주기도문의 문구들은 여섯 가지의 간구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임한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는 문구이지요. 윌리엄 트위세는 이러한 주기도문에 대해 그의 교리문답 가운데서 분류하기를, 주기도문 안에는 여섯 가지의 간구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각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련된” 것들로서 세 개의 간구들이며, 두 번째 부분은 “우리들 자신의 선에 관련된” 것들로서 이 또한 세 개의 간구들로 분류됩니다. 한마디로 주기도문에서 가르치는 첫 번째 부류의 기도의 제목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관련된” 것들이며, 둘째로는 “우리들 자신의 선”을 구하는 기도의 제목들인 것이지요.

 

고전 10:23-33절 말씀은 바로 그러한 분류 가운데서도 첫 번째 부분인 “하나님의 영광에 관련된” 것들에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본문입니다. 고전 10:31절에 기록한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이야말로 그처럼 “하나님의 영광에 관련된” 간구를 드리는 우리의 기도 생활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 또한 하나님 스스로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는 출 3:14절에서 자신에 관하여 이르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영광 또한 하나님 스스로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의 그 어떤 간구나 행위로 말미암아 비로소 영광스럽게 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이미 영광스러운 분이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기도문 가운데서 첫 번째로 하는 간구 곧,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간구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 가운데 거룩한 것으로 알려지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얼마나 어둡고 타락해 있습니까?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고 한 딤후 3:2-5절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시대가 바로 이미 말세 가운데 있는 이 시대의 민낯이 아닌가 말입니다.

무엇보다 그러한 시대는 죄와 악에 대해서는 한 없이 너그럽고 관대하면서도, 정작 선과 진리에 관해서는 아주 작은 것 한 가지조차도 받아들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와 신앙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벋어나며 어긋난 채로 우리 스스로에게나 즐거움을 주는 것들에 대해서는 다수가 관심을 보이되, 정작 우리들의 욕구와 바라는 것들과 무관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며 심지어 배척하고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그 어느 타락하고 부패한 시대에 못지않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 주기도문의 간구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인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인 고전 10:32절에서 사도는 이르기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앞서 롬 12:18절에 기록한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한 말씀과 아주 유사한 맥락의 말씀입니다. 유대인이나 원래 이방인이었던 헬라인,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나 누구에게든지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니 말입니다.

과연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과연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그러한 사도의 권면과 같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할 수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그리스도인들끼리도 모두 화목하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인데, 과연 그처럼 이방인과 같은 불신자들이나 심지어 우리를 미워하며 핍박하는 자들에게까지 거치는 자가 되지 않을 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그토록 실천하기 곤란한 과제를 왜 사도는 로마서뿐 아니라 고린도전서에서도 다시 한 번 요구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요. 그러나 사실 그러한 사도의 권면은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와 긴밀하게 상관되는 것입니다. 트위세 교리문답 41문답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 곧,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지식이야말로 모든 선함과 화목의 원천이며 대지이기 때문이지요.

트위세는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구주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하는 첫 번째 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임을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서 이르기를 “그[곧 하나님]는 이것의 결핍이 모든 악의 원임임을 잘 아시기 때문”이라고도 했지요. 한마디로 호 4:6절에서 선지자가 일렀던바 “내 백성이 지식[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한 말씀과 같이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에도 그처럼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에 관한 지식이 없으므로 강퍅하여 악을 일삼는 자들이 도처에 가득한 것이지요. 그러니 어찌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서 화목할 수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같은 신앙의 방향을 바라보며, 같은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들끼리도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비판하며 시기하는 일이 횡횡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 노정에 가장 급선무로 요구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노정은 결코 우리들 자신을 수련하며 단련하는 고행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얼핏 자기부인과 극기가 요구되는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의 신앙 노정에 가장 급선무로 요구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들과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을 알게 될 때에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서 우리들은 비로소 선하며 화목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의 결여와 강퍅한 심령에 관하여 호 4:1-3절에서는 언급하기를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고 했으니, 바로 그러한 모습이 우리 시대의 일상들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 4:4절에서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르기를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음이니라.”고 말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얼핏 고전 10:32절에서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한 것과, 또한 롬 12:18절에 기록한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한 말씀과 아주 유사한 맥락의 말씀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 충고나 권면도 들으려 하지 않는 강퍅한 마음이 된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강퍅하고 완악한 자들과는 결코 화목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사실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유대를 형성하는 일이 쉬운 듯 보이지만, 결코 내 마음처럼 쉬이 묶여지지 않음을 긴 인생 가운데서 경험할 것입니다. 심지어 같은 신앙과 같은 사역을 수행하는 사람들끼리도 아주 사소한 오해와 불신으로 인해 관계가 깨어지고 척을 지는 일들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지요. 그리고 그런 경우에 대부분 그 수습은 우리 자신의 뜻과 의지로서 되는 것이 아님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을 뿐인 상황과 형편 가운데서는 결코 많은 사람과 화평하게 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즉 주기도문의 첫 간구와 같이, 우리들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화목하고 화평하려고 해도 오히려 밀어내며 배척하여 등을 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으니,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간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트위세가 가르치는 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모든 선의 시작”이기에,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서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될 때에라야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을 뿐인 시대가 비로소 돌이켜 온전히 선을 행함으로 돌아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메시지의 본문인 고전 10:31절에 기록한바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을 따른 실천으로서, 가장 먼저 행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거한다고 한다면, 그 때에 그러한 자들이 함께 모인 교회들 가운데서는 그야말로 화평과 화목이 넘칠 것이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남의 유익을 구”할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아울러 그러한 가운데 있는 교회 공동체에서야말로 몸을 위하여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을 비롯한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는 분이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심을 생생하게 체험하며 확신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이 땅에 있는 지상의 교회들이 그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서 그것의 결핍으로 말미암는 악이 아니라 그러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선을 행하게 될 때에, 우리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이 땅의 것들을 위해 구하며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더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행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간구와 더불어 “거룩을 기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가운데서, 더욱 “그것에 의해 우리의 모든 것을 그의 거룩하신 이름의 영광에 돌리도록 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라고 한 트위세 교리문답 42문답의 문구를 마음에 깊이 새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학은,

피상적인 사변의 체계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신학은 결코 영적인 것에만 국한하지 않으며, 결코 뜬구름 잡는 식의 피상적인 사변의 체계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어떤 보험 상품이나 그 어떤 사회보장제도에 포함되는 것보다도 탁월하며 확실한 보살핌이 이뤄지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는 바탕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개혁된 신학입니다. 바로 그러한 기초 가운데서 우리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염려하지 않으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굳게 믿고 신뢰함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데에 온 마음을 집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행할 일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는 굳은 신뢰 가운데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위하는 간구임을 유념하며 마음에 새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은 이미 말세에 이르러 있어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형편과 지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럴수록 더욱 우리들이 굳게 믿으며 신뢰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을 뿐인 것 같을지라도,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할 뿐만 아니라 더욱,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으로 인하여,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확신하며, 더욱더욱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 한 호 6:1-3절 말씀을 마음 가운데 깊이 새기는 우리 모든 심령이 되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서 먼저 그리 하셨던 것처럼 또한 우리들도 그렇게 될 것을 확신하며 축복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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