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심으신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근본원리를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두 그루의 나무로 표현하셨다면 그것은 두 나무 사이의 ‘상호관계’를 통해서만 그 원리를 말씀하시겠다는 뜻으로 새겨볼 수 있습니다. ‘상호관계’가 아니라면 굳이 두 그루의 나무가 아닌 한 그루만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두 그루의 나무의 이름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다스리시는 근본원리를 살짝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들 잘 알고 계시듯이, 두 그루의 나무의 이름은 하나는 선악과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나무입니다. 한 그루씩 따로 분리해서 이름이 나타내는 뜻을 직관적으로 이해한다면, 선악과나무는 피조세계를 선악으로 구분하여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공의성(심판 혹은 법)을 표현하는 것일 것 같고, 생명나무는 이름 그대로 피조세계에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창조성(사랑 혹은 은혜)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 드렸듯이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그루의 나무의 상호관계를 통하여 나타나는 통합된 원리일 것입니다. 두 개의 근본원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두 개처럼 보이는 원리의 상호관계가 지향하고 있는 ‘통합된 하나의 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그루의 나무의 상호관계는 어떻게 드러나게 될까요? 이에 관한 대답으로 아래의 성경구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생명나무가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시점은, 인간이 선악과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한 결과로 발생하게 되는 ‘죽음’의 등장과 일치합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도래했을 때, 생명나무는 드디어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 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죄인 되어 죽음의 지배를 받게되었을 때에 비로소 자신의 생명이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은혜)이라는 현실의 벽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관계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 11:32)
아담은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의 상호관계가 지향하는 통합된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소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사용하셔서 모든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은 흙(아담이라는 이름의 뜻)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조차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어 결국 자신의 본질이 흙이었음을 들통 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계명(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죄가 분명하게 죄로 드러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롬 7:13) 그러나 흙이 흙으로 드러나는 것 자체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죄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흙이 흙임을 알게 하심으로써 땅의 형상이 어떻게 하늘의 형상을 덧입게 되었는지를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고전 15:49). 죄를 죄로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심으로써 변명의 여지가 없는 그 죄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용서하셨는가를 온 우주에 선포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말한 복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 6-8)
그러나 불행하게도 죄인은 이미 다 노출된 자신의 속성을 감춤으로써 자신이 생명나무와 단절되어 있다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데(생명나무 콤플렉스), 이렇게 죄가 분명하게 죄로 드러나는 것을 막는 위장술을 윤리(倫理)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 속에, 그러니까 모든 죄인 속에 보편적으로 내장되어 있는 것 중 선한 것으로 분류되는 것들, 예컨대 거짓말 하지 않기, 차례대로 줄서기, 남에게 피해주지 않기,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도 시키지 않기 등등을 주섬주섬 모아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는 것입니다. 혹은 죽음이 자신을 잡아당기고 있는 현실이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고 웅변하는 것입니다.
윤리를 빙자하고 있는 죄인의 심리상태를 독백형식으로 처리하면 이렇습니다.
“내 안에 창조주의 선함이 담겨있고 이 선한 것을 쫓아 절제하고 훈련하고 용서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생명나무로부터의 추방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판단은 잘못된 것 아닙니까?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 되게 하옵소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생명나무 콤플렉스에 빠져있습니다. 즉,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왕 존재하고 있는 마당에 그 존재함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존재함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해보이려는 몸부림이 바로 윤리, 도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나무는 선악과나무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아담을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습니다. 즉, 죄인을 심히 죄인되게 하시는 것을, 죽은 자를 반드시 죽은 자로 처리하시는 것을 배경으로 삼아야 죄인을 의인되게 만드신 분, 죽은 자를 살아있는 자로 만드신 분의 영광만 드러날게 아닙니까?
이렇듯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이 두 그루의 관계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죽음 속에 숨겨진 생명’입니다. 피조물에게 살해당하는 창조주입니다. 즉,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우뚝 세워져서 피조세계를 다스리며 통일하고 있는 근본원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러한 감격스럽지만 비밀로 부쳐진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관하여 에베소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 3-10)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안에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두 그루의 나무가 모두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받아 마땅한 죄인도 분명이 존재하지만 결코 정죄함도 없는 것입니다. 주홍같이 붉은 죄가 너무도 또렷하게 있지만, 흰 양털보다도 더 희게 되는 것입니다. 윤리로 똘똘 뭉쳐져 있는 인간에게는 정말 이해할 수 없고,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기적이 날마다 영원히 만개(滿開)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말을 또 하겠습니까? 성령께서는 사도바울의 아래의 고백을 성도들의 입에서 입으로 두고두고 고백케 하실 것입니다. 왜나햐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통치하는 근본 원리로서 성도의 마음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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